정부 내에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5일 국회에서 “정부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GSOMIA를 연장하는 것으로 검토해 왔지만, 최근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안보 문제와 연계했기 때문에 (파기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지난 2일 한국을 수출절차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한 뒤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이 ‘GSOMIA 폐기’를 언급한 이후 정부 내에서 파기론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에서도 GSOMIA 파기를 선언하라는 목소리가 연일 터져나오고 있다. 오는 24일이 재연장 시한이어서 협정 파기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무리스럽지는 않다. 



한국 측에서 협정 파기를 거론할 이유와 논리는 충분하다. 일본이 안보와 관련한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를 믿지 못하겠다며 경제 제재를 시작한 만큼 안보에 가장 민감한 군사정보 교류를 계속하는 게 어려워졌다. 게다가 이 협정을 체결한 뒤 한·일 양국 간 26건의 정보교류가 있었지만 계속 줄어 올 들어서는 단 3건의 정보 교환이 있었다. 정보 교류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지면서 폐기에 대한 부담이 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7일 이후 고시 결과를 통해 또다시 한국에 추가 보복조치를 내리면 국내 여론과 정부의 판단은 GSOMIA 파기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GSOMIA를 파기하는 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협정이 아니라 미국 등 동맹국 간 핵심적 이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민감한 연결고리이다. 미국의 중재노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압박 카드로서는 유용하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위험하다. 


이렇게 한·일 갈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의 방관자적 태도이다. 미국 당국자들은 “미국은 한·일 양국 갈등의 중재나 조정에는 관심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미국이 개입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일본의 조치로 전 세계의 반도체 공급에도 문제가 생겨 미국 역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 GSOMIA를 유지할 책임의 상당 부분도 미국에 있다. 이 협정을 주도한 것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해도 미국이 추구하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본의 공격을 방관하는 처사는 실망스럽다. 미국은 한국의 GSOMIA 폐기를 만류하기에 앞서 일본을 향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 미국이 이 상황을 계속 방치한다면 그 피해는 미국에도 돌아가게 돼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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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원 외교위원회가 지난 17일(현지시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원 외교위는 ‘공동의 이익 추구를 위한 한미·미일 간, 그리고 3국 간 협력의 중요성과 활력에 관한 하원의 인식’에 대한 결의를 전체회의에서 가결했다. 엘리엇 엥걸 위원장이 지난 2월 대표 발의한 이 결의안이 이 시점에서 통과된 것은 한·일 간 갈등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최근 상황을 우려하는 미 의회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KPF) 주최로 18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일관계’포럼에 참석한 패널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남 교수, 유의상 식민과냉전연구회 이사(전 주영 한국대사관 총영사). 김정근 기자


한·일 갈등에 대해 미국은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갈등이 수위를 넘어설 경우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의 17일 발언에서도 이런 인식이 엿보인다. 그는 “미국은 가까운 동맹인 한국·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며 “미국은 가까운 친구이자 동맹으로서 ‘해결 노력’을 지원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미국 행정부와 의회의 우려 표명을 가벼이 넘겨서는 안된다.


18일은 일본이 제안한 ‘제3국을 통한 중재위원회 구성’의 답변 시한이다. 청와대가 이미 수용거부 입장을 밝혔는데도 일본은 아랑곳없이 답변을 채근하고 있다.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시한을 그어놓고 이를 도발의 빌미로 삼으려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 중재위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쌍방 간에 분노만 키울 뿐임을 일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중재위 대신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외교협상에 나서야 한다.


일본이 협상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한국도 협상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본은 한국 정부 관계자가 17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한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건설적 제안에 열려 있고 융통성을 발휘하려 한다.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일본과 물밑에서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할 의향이 있음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일본은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한국과의 외교협의에 나서야 한다.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 등 추가도발은 삼가야 한다. 한국 정부도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폭넓은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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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가 악화일로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 손해배상 판결, 11월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발표, 12월 일본 초계기와 한국 군함 간 ‘위협비행-레이더’ 논란 등으로 갈등이 커지고만 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본질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라면서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라고 한 것도 일본의 반발을 샀다. 지난 15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 당시 문 의장 발언에 대해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의 항의가 있었는지를 두고도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한·일관계가 사실관계조차 엇갈리는 인식을 보이는 심각한 상태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이 냉정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현안 인식이 다를지라도, 상호 불신을 부채질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일본 정계의 움직임은 우려스럽다. 일본 언론은 여당인 자민당에서 한국에 대한 대응조치로 반도체 제조에 불가결한 불화수소 등 소재·부품이나 방위 물품의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국제질서와 규범을 준수한다는 일본이 초법적인 조치를 거론하는 것은 긴장만 높일 뿐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4일 미에현 이세신궁을 참배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세 _ 교도연합뉴스

 

일본 내 ‘혐한(嫌韓) 기류’에 편승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야마모토 도모히로 의원은 지난달 31일 레이더 문제와 관련해 “거짓말쟁이는 도둑의 시작이 아니라 도둑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원래 도둑이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나카야마 야스히데 의원은 지난 13일 “만약 한국에서 태어나 대통령이라도 됐다면 그 마지막은 사형 아니면 체포 아니면 자살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들이 국회 질의나 당 회의에서 버젓이 나오고 있다. 자민당 소속인 두 의원은 모두 일본 최대 극우단체 ‘일본회의’ 산하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와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원이다. 양국 정치인들이 비난전을 되풀이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

 

신경 쓰이는 대목은 또 있다. 일본에선 한·일 갈등과 관련해 한국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는 점을 빼놓지 않는다. 반일 감정이 높아져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에 역행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고노 외무상은 지난 15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3·1운동 100주년으로 반일 감정이 부추겨져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고 일본 언론은 보도했다.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일본에선 ‘3·1운동’을 쉽게 말하지만, 3·1운동의 배경과 진행 과정, 당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는 움직임은 드물다. 최근 남북 화해 움직임이나 재일한국·조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헤이트 스피치’(혐오·차별 발언)가 넘쳐날 뿐 한반도의 질곡과 고통의 뿌리가 일제 식민 지배에 있음을 직시하는 이들은 소수다.

 

일본이 말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은 과거에 집착한다”는 언설에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라는 원칙은 묻혀버린다.

 

“기억이 사라지면 없었던 일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비관해선 안된다. 새롭게 기억해 젊은 세대에게 계승해야 한다.”

 

지난 17일 도쿄 릿쿄대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74주기 행사에서 야나기하라 야스코는 12년째 행사를 주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쿄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의 다즈케 가즈히사 실장은 “미래를 지향한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 100주년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극복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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