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회담 결렬(2월28일) 이후 미국과 남북한 간 주고받은 조치들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단어는 다름 아닌 자석, 책받침, 그리고 쇳가루였다. 책받침(한국)을 가운데 두고 그 아래 자석(미국)의 움직임에 따라 책받침 위에서 대오이탈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쇳가루(북한) 말이다.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복기하다 남북이 당면한 처지에 깊이 비감했다. 


#1. 북한은 하노이 회담 결렬 1개월 즈음 상부의 지시라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 상주해온 인원들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3월22일). 미국이 협상 조건과 제재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별다른 역할을 못하자 불만의 표시로 감행한 북한식 성동격서(聲東擊西)였다. 정부는 곧바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를 열어 북측의 철수 조치에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복귀를 촉구했다. 


#2. 하노이 회담 결렬의 유력한 용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월22일(현지시간) 대북 ‘추가 제재’ 철회를 지시했다는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부정확한)트윗을 날리자 미국 행정부와 워싱턴 외교안보 주류 엘리트들은 아연실색했다. 앞서 3월21일 미국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에서 북한의 제재 회피를 도운 중국 해운회사 2곳을 독자 제재 명단에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터다. 


#3. 북한이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철수 사흘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3월25일). 북측은 이날 아침 공동연락사무소에 출근하면서 “오늘 평소대로 교대 근무차 내려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인력 철수와 복귀 조치 시점으로 보아 트럼프의 트윗이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4.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가 트윗을 통해 밝힌 ‘철회’ 대상 제재는 미국 재무부가 3월21일 발표한 2개 중국 해운회사에 대한 제재였다고 보도했다(3월26일, 현지시간). 미 국무부는 정례브리핑(3월26일)에서 철회 논란이 빚어졌던 재무부 제재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트럼프가 제재 철회를 거론했을 당시 검토되던 추가 제재는 없었던 셈이다. 


#5. 스페인 고등법원은 자국 북한대사관에 침입(2월22일)한 반(反) 북한단체 ‘자유조선’ 일행이 빼낸 정보를 넘기기 위해 미 연방수사국(FBI)과 접촉했다고 밝혔다(3월26일, 현지시간). 북한은 사건 발생 후 37일 만에 처음으로 공식반응(3월31일)을 내면서 대사관 침입 사건을 ‘엄중한 테러행위’라고 규정, 미국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했다. 


#6. 북한 선전매체 ‘메아리’는 문재인 정부의 신중론을 비판하고 나섰다(4월3일). 그러면서 신중론을 “책임회피이자 미국과 보수세력의 압력에 대한 공공연한 굴복”으로 간주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과 워싱턴 간 공조가 강화될 것을 우려, ‘우리민족끼리’를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무기력한 ‘쇳가루’ 신세를 자책하기보다는 ‘책받침’만 탓하는 모양새로 비쳤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워싱턴을 방문,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문 대통령 취임 후 7번째 정상회담이자, 하노이 회담 결렬 후 꼬일 대로 꼬인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다시 트려는 절박한 심정에서 결정한 방미(訪美)다. 때마침 북한 최고인민회의도 11일에 개최된다. 남북 지도자 모두 심사가 복잡하다. 특히 김정은은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핵화 협상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인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비핵화 전까지 제재 유지를 고수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기에 중국과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는 한 김정은이 직접 느낄 비핵화 역치는 낮아지게 마련이다. 


자석이 끄는 힘을 책받침이 영리하게, 선택적으로 투과시켰어야 옳았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역시 현재 북핵 교착상태에서 책임을 완전히 면하기는 어렵다. 한국산 책받침이 중국·러시아 합작산으로 교체될 수도 있다. 이는 한반도가 다시 냉전시대의 정글로 회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불길한 징후다.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의 고민이 점차 깊어져가는 순간이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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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17일 북·미 협상과 관련해 “포괄적 비핵화 목표 달성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하도록 견인해내고, 그 바탕 위에서 ‘스몰딜’을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한 수준의 거래)’로 만들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비핵화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 한두번의 연속적인 ‘조기수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시에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올 오어 낫싱(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중단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하노이 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진 시점에서 청와대가 북·미 절충에 나설 의지를 밝힌 것은 시의적절하다.

 

청와대의 ‘조기수확론’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고 있는 ‘빅딜식 일괄타결론’이 북·미 간 ‘강 대 강’ 대치만을 초래할 뿐 현실적인 접근법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른 절충안이다. 미국의 ‘빅딜식 일괄타결론’은 ‘나쁜 거래보다는 거래하지 않는 게 좋다’는 식으로 변주되면서 대북 협상 회의론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이런 태도로는 북·미 협상이 장기 교착을 벗어날 수 없고, 협상 동력마저 소진시키며 한반도 위기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한반도 상황을 위해서는 조그마한 거래라도 성사시키려는 능동적 태도가 필요하다. 합의된 거래를 성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양측이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이 쌓여 더 큰 거래를 해나갈 수 있다. 청와대가 ‘한·미 공조 균열’로 비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은 미국의 ‘빅딜식 일괄타결론’이 국제사회의 대북 접근법으로 굳어져가는 상황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고민이 반영돼 있다. ‘조기수확론’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상황을 다각도로 검토해 가다듬은 현실성 높은 방안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북의 입장에 기울어 있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단계적인 스몰딜에 앞서 ‘포괄적 비핵화 로드맵’ 마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북·미 양측의 입장을 균형있게 절충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 시일 내 북·미 양측을 만나 이번 절충안을 설명하고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야당과 보수세력들은 ‘북한이 비핵화를 할 뜻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며 대북협상 회의론을 퍼뜨리는가 하면 시대착오적인 ‘핵무장론’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분별한 정치공세는 자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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