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매체들이 연일 대남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외 선전매체 메아리는 13일 ‘북남선언들을 이행하려는 의지가 있는가’라는 글에서 개성공단 재가동 문제를 포함한 남북 간 협력사업을 대북 제재의 틀 안에서 논의한다는 남측의 입장을 거론하며 “남조선당국이 자체의 정책 결단만 남아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재가동을 미국과 보수세력의 눈치나 보며 계속 늦잡고 있으니 이를 북남선언들을 이행하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북한은 12일에도 ‘조선의 오늘’을 통해 개성공단 재가동은 미국의 승인을 받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남측이) 승인이니, 제재의 틀이니 하면서 외세에게 협력사업에 대한 간섭의 명분을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메아리는 같은 날 “근본적인 문제들을 뒷전에 밀어놓고 그 무슨 ‘계획’이니,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나 하는 것은 북남관계의 새 역사를 써나가려는 겨레의 지향과 염원에 대한 우롱”이라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지난 4일 강원도 원산 인근 호도반도에서 단거리 발사체의 발사 장면을 참관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발사훈련에 대해 대구경 장거리 방사포와 전술유도무기가 동원된 화력타격훈련이었다고 보도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남북관계 복원 이후 한동안 자제해왔던 북한의 대남비판이 최근 들어 빈발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개성공단 재가동이 남측의 결단만으로 가능하다는 온당치 않은 논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남북경제협력은 문재인 정부로서도 오매불망의 숙원이다. 하지만 개성공단 재가동은 유엔의 대북 제재를 피해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게다가 미국은 단독제재를 통해 북한과의 모든 무역과 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을 북한이 짐짓 모르는 체하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다고 무슨 득이 있을지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의 대남비판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좀 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하려는 취지로 보인다. 정부가 개성공단 기업인들의 방북신청을 8차례나 불허한 것도 빌미를 제공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도적 지원에 대한 비판은 대북 식량지원 추진을 겨냥했다기보다 정부가 방침만 내놓은 채 좌고우면하며 시기를 놓치거나 지연해온 과거 사례를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한반도 정세를 고려할 때 이런 대남비판은 대북여론만 악화시킬 뿐이다. 아쉽고 서운한 점은 직접 만나 풀어야 한다. 대화에는 응하지 않은 채 대남비판에 열을 올리는 것은 남북관계를 판문점선언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행위라는 점을 북한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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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 한반도에는 북한이 지난 4일 쏜 발사체가 날린 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미사일 도발”이라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을 비판하며 무력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국방부는 9·19 군사합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우려했다. 한반도 정세의 시계가 2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형국이다.


2017년 5월 북한은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했고 9월에는 6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대북 군사행동을 시사하며 한반도 정세를 일촉즉발의 위기로 몰아갔다. 이런 와중에 임기를 시작한 문 대통령은 남북 화해 협력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구상을 견지했다. 문 대통령의 뜻은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참가와 남북대화 복원을 거쳐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과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으로 펼쳐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육성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천명하는 괄목할 만한 진전도 있었다. 하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문 대통령의 구상은 암초에 부딪힌 상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5월9일 (경향신문DB)


그간의 정책을 돌아보면 안타까운 점이 적지 않다. 정부는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확보한 ‘대북 지렛대’로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이 초기에는 제대로 작동했다. 북한도 남북대화에서 핵문제를 논의하지 않던 관행을 깨고 한국의 중재역할에 기대를 실었다. 하지만 하노이 담판 결렬 이후 미국은 한국을 메신저 정도로 여기는 태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북한은 북한대로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그만두라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런 정세 조성의 가장 큰 이유는 일괄타결식 비핵화를 고수하는 미국,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는 북한이 접점 찾기에 실패한 데 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을 때 정부가 구체적인 비핵화 설계도를 만들어 북·미를 설득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비핵화의 최종단계와 로드맵을 원하는 미국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대북 제재 완화 등 상응조치에만 신경 쓴 것 아니냐는 지적도 피할 수 없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은 북·미 협상 교착이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악순환으로 뒤바뀌었다. 미국이 남북관계의 독자적 진전에 제동을 걸었던 탓도 있지만, 정부가 미국에 너무 순응하면서 스스로 자율성을 잃어버린 측면이 크다. 대북 제재하에서도 가능한 남북관계 사업들조차 미국을 의식하는 바람에 판문점선언 합의 이행이 상당부분 지체됐다. 이는 정부에 대한 북한의 신뢰저하로 이어지며 한국의 중재역량을 약화시켰다.   


북핵외교 과정에서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 소홀했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중국, 일본, 러시아에도 이해관계가 지대한 사안이다. 주변국의 탄탄한 지지가 필수적인데도 정부가 북·미 외교 외길만 걸어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김정은은 연말까지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겠다고 했고, 미국이 대화의지를 보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하반기에 본격화될 북·미 협상에 대비해 외교의 폭을 넓히고 주변환경을 다져야 한다.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신뢰를 구축하는 한편 한·중 및 한·일 관계 진전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능동적인 외교를 위한 인적쇄신도 검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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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과 관련해 “우리는 북·미 회담이 종국적으로 타결될 것으로 믿지만 오랜 대화교착을 바라지 않는다”며 “양 정상이 빠른 시일 내 만나 타결을 이뤄내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역할도 다시 중요해졌다”고 밝혔다. 북·미가 협상동력 유지를 위해 조속히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한국 정부가 중재 역할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합의 무산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중단돼서는 안되며 중재자이자 당사자인 한국 정부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점을 평가한다. 이는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가 암초를 만난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유일하고도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양측의 입장 차를 정확히 확인하고 좁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달라”면서 “북·미 실무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서도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양측의 입장 차가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더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케 하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은 3일(현지시간) 방송들과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외에 생화학무기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비핵화’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WMD) 전체를 비핵화 대상에 포함시키며 북한을 사실상 압박했다는 뜻이다. 볼턴의 말대로라면 실무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주장해온 ‘단계적 비핵화’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던 미국이 정작 정상회담 테이블에서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식 태도로 돌변한 셈이다. 단계적 비핵화 해법은 70년간 적대하며 신뢰가 부족한 북·미 사이를 감안한 현실적인 방식으로, 한국 정부도 동의해왔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배경에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의 언급대로 현 국면에서는 가급적 이른 시일 내 남북, 한·미 간 접촉을 통해 ‘하노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대북특사를 조기에 보내는 방안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충격이 큰 북한이 당분간 ‘장고’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지만, 그럴수록 대화의 모멘텀이 사라질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북·미 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길 바란다”며 남북협력 사업의 속도감 있는 추진을 당부한 점도 바람직하다. 북한도 남북관계가 정세에 구애받지 않고 정상 가동되는 것이 북·미 협상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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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무산됐다. 북측이 연락채널 등을 통해 답방이 어렵다는 뜻을 전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도 ‘연내 답방이 어렵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무산된 것은 최고지도자의 사상 첫 방남에 따른 경호·안전 문제도 있을 수 있고, 남측 일각의 ‘답방 반대’ 목소리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북·미 협상의 교착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김 위원장이 서울 방문 의사를 밝힌 9월 평양 정상회담 때만 해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조기 개최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 이후 북·미 협상은 ‘개점휴업’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비핵화와 상응조치에 대한 큰 그림에 합의한 뒤 방남에 나서려던 김 위원장의 구상에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회의 때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 전에 김 위원장이 답방하는 것이 북·미 협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연내 답방을 추진했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태도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래도 여의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동해지구 수산사업소를 시찰했다고 지난 1일 조선중앙통신 등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공개 활동 보도는 지난달 18일 평안북도 대관유리공장 시찰 이후 13일 만이다. 연합뉴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남북관계보다는 북·미 협상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사안이다.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의 방식과 상응조치를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답방은 성사되기 어려웠다. 연내 답방 무산이 아쉽지만 이를 평화 프로세스에 적신호가 켜진 것으로 볼 이유는 없다. 지난 12일만 해도 남북이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파괴·철수 작업에 대한 상호검증을 순조롭게 완료한 것에서 보듯 남북관계는 뚜벅뚜벅 전진하고 있다. 북·미 협상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약화됐다고 판단할 징후는 없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답방은 새해 적절한 시기에 재추진하면 된다.

 

연내 답방 무산으로 시간을 번 만큼 지금은 대북정책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먼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상호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올해 2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은 모두 북·미 협상 진전으로 이어졌지만 9월 평양 정상회담은 그러지 못했다. 북·미 협상은 비핵화와 상응조치의 교환이라는 본질적 국면에서 겉돌고 있다. 대북 제재 등을 놓고 한·미 간 이견도 노출됐다. 북·미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기울인 노고는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선순환하도록 남측의 역할을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는 시선도 더 진지해야 한다. 시중에는 정부정책의 큰 방향은 옳지만 설명과 설득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남북화해와 평화에 기본적으론 찬동하면서도 대전환의 속도에 버거움을 느낀 이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올해 남북 및 북·미 관계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은 장면들이 여러번 연출됐다. 이에 시민 다수는 환영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북관계도 외교행위다. 외교는 대외협상과 대내설득이 조화롭게 병행돼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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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20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될 때 전 세계 언론은 온통 비핵화 문제에 관심을 쏟았지만, 사실 이번 평양공동선언은 비핵화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공동번영을 남북이 주도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는 것에 더 많은 역사적 의미를 둬야 할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임을 선언하고 실천 방안을 명시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했다. 사실상 ‘남북 간의 종전선언’이다. 특히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이 15만 평양 군중에게 “나와 김 위원장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고 확약했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70년 분단 역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반도 안보 환경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알리는 자주적 선언이라고 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평양 시민들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평양공동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진짜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낸 회심의 카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서 확실한 어젠다를 갖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주변정세와 북한의 태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확고한 한·미 군사동맹’은 지금까지의 한반도 안보환경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상수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 안위를 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이 같은 안보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보 지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지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북·미 비핵화 대화가 정체된 상황에서 이 같은 공동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 ‘굴욕을 감내하면서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긴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미국을 의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싱가포르 북·미 정상선언 이후 북·미 대화가 뒤처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국을 기다려주기보다 남북관계를 가속화하여 북·미 비핵화 대화를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진 것이다.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진전으로 비핵화를 견인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북·미 대화 정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3차 남북정상회담과 미국이 그토록 불편해 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을 강행했다.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로 비핵화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 자신감은 올해 초 대화에 나서기 시작한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경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또한 북·미 모두 되돌아갈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는 판단도 과감한 행보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마이 웨이’를 선언하기에 가장 부담 없는 타이밍은 북·미 비핵화 논의가 확실한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가 순항하기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 시점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앞으로가 문제다. 남북의 구상이 순항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김 위원장의 표현대로 ‘탄탄대로도 아니고 역풍도 각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평양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탓이다.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은 남북의 의지 외에 국제적 지지도 필요하다. 미국은 평양선언의 비핵화 방안과 북·미 대화 접점 마련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지만, 평양선언 전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미국은 앞으로도 ‘한·미가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이 남북관계 진전을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히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한국 정부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할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한·미 군사동맹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성격 변화를 해야 하는지, 한반도 평화체제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에 즉각 답할 수 있는 확실한 원칙을 지금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는지 여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김정은과 트럼프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퇴로가 없는 3자가 벌일 치열한 외교전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스러지고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아지고 있다. 시간은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지만 지금 한반도는 운명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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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이 평양 선언문을 통하여 미국에 던진 메시지는 이것이다.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든다는 의미는 남북 간에 종전을 선언한 것이다. 전쟁이 없는 한반도에서의 주한미군은 재래식 위협뿐만 아니라 핵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리고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한다는 의미는 미국에 직접 위협을 가할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을 우선적으로 포기하고, 사찰, 검증을 받겠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와 미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에 대한 위협은 우선적으로 사라진다. 미국에 대한 위협을 이러한 방식으로 검증 가능하게 폐기할 터이니 이제 미국이 종전선언을 할 차례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면 그다음 단계인 영변의 미래 핵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하겠다. 그리고 계속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면서 현재 핵과 과거 핵까지 폐기하여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오전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한반도 전역의 전쟁 위험 해소 등을 담은 ‘9월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합의서를 들어보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이번 평양 선언문은 1조에서 4조에 걸쳐 남북관계, 특히 남북 간의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방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비핵화와 관련된 5조는 행간을 읽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간접적으로 기술되었다.

 

그동안 미국과 북한 간에 집요하게 줄다리기를 했던 북한의 핵신고와 미국의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고, 그 의미가 포함될 수 있는 다른 말들로 문장이 처리되었다.

 

그래서 행간을 읽어보니 북한은 우선 미국과 미국민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주는 것들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읽힌다. 아직 미완성 단계인 ICBM 개발과 관련된 시설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하겠다는 내용이 그것이고, 남북 간에는 종전이 되었으니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위협이 사라질 것이라는 메시지도 보냈다.

 

이 메시지는 다분히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왜냐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미국을 향한 북한의 도발을 멈춘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왔는데 이제 단순히 도발을 멈춘 것을 넘어서 위협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하겠다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선언을 하였으니 말이다. 트럼프가 본인의 치적으로 충분히 내세울 수 있을 만한 북한의 선물인 셈이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상응하는 조치인 종전선언을 연내에 해준다면, 그다음에는 김 위원장도 다음 단계의 핵폐기를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고,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의 속도가 빨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이 트럼프 대통령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추가적인 어떤 제안을 할 수 있다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했을 수도 있다.

 

평양 선언문의 이러한 문장과 구조는 절묘한 한 수다.

첫째, 완벽한 핵신고는 부담스러워서 못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가려운 곳을 확실하게 긁어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성과로 자랑해 온 미국에의 직접 위협 중단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남북 간의 실질적인 종전선언을 하여 남북관계 때문에 미국민에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한반도에 주한미군을 보낸 미국 부모, 형제, 부부, 자식들에게 보냈다. 셋째, 일본에 대한 위협과 주일미군에 대한 위협 제거 내용이 빠져있다. 왜냐하면 일본과의 적대관계 청산을 언급하지 않았고, 일본을 향한 중거리 미사일에 대한 언급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은 이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남겨두고 있는데, 주일미군에 대한 위협 때문이라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 매우 빠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하여 북·미관계와 보조를 맞추어 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빠졌다. 조만간 북·일 정상회담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이 이를 받아서 종전선언을 할 수 있는가이다. 핵심은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미국의 핵 비확산론자들과 강성 매파들의 견제를 넘어설 결심을 할 수 있을까이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직접 위협 제거와 핵비확산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북한과 미국의 양자관계이지만 후자는 미국의 글로벌 전략이 걸린 문제다. 강경파와 비확산론자들은 확실한 비핵화의 증거가 있어야만 종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터이고, 정치인 트럼프는 미국과 동맹국에의 직접 위협을 검증 가능하게 폐기한다면 종전선언도 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무게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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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김양건 조선노동당 비서의 남한 방문은 남북관계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외였고 놀라운 일이었다. 3인의 방문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남북이 상대를 자극하는 언사를 동원해 공방전을 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는 3인이 방문하고 이를 환영할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로 넘어와서도 남북관계 단절이 계속되었을 만큼 남북은 불신을 쌓는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남북관계의 토대도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바로 그 때문에 3인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장담하는 일이 쉽지 않다. 3인의 방문 한번에 불신이 해소되고 관계가 급진전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주말의 갑작스러운 전환만큼 언제라도 다시 대결 국면으로 복원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남북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돌발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전히 남북관계를 지배하는 이명박 정부 초기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이 좋은 예이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런 우발적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그건 변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발적 사건 하나로 파탄 나는 남북관계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왼쪽)과 김양건 북한 대남담당 비서가 4일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10월 말 혹은 11월 초로 예정된 2차 남북고위급 접촉에서 성과를 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지속성 있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대화 통로는 고위급 접촉으로 할 수도 있고 남북 장관급회담 복원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마침 북한이 3인 방문 이후 대남 비방을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3인의 방문 전까지만 해도 북한 인권 문제로 대북 공세를 취할 듯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대북비판 없이 3인의 방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고위급 접촉이 단발성 대화에 그치지 않고 남북대화의 정례화”로 발전하기를 희망했다. 정부가 이번 불씨를 살려 일상적 대화가 가능한 관계로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과 북 모두 상대를 배려하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