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1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표명하면서 예기치 않게 시동이 걸렸던 한반도 평화정착프로세스가 2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다.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던 김 위원장은 이제 더 이상 핵·미사일 실험 유예 약속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대화 복원이나 진전은 고사하고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세계적 관심과 기대 속에 시작됐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각양의 진단과 분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북한은 물론 미국·한국 등 대화 과정에 참여했던 모든 플레이어들이 한반도 평화정착에 가장 핵심적이고 기초적인 요소인 ‘비핵화’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원한 것은 정치적 성과였다. 전임자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한 방에, 그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해냈음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정상회담 요청을 즉각 수락하고 곧바로 아무런 준비 없이 정상회담에 뛰어들었다.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비핵화 전략이 아닌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친분관계였다. 이처럼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시도의 결과가 싱가포르 합의다. 비핵화는 후순위로 밀리고 ‘새로운 북·미관계’와 ‘신뢰구축’을 앞세운 북한의 단계적 접근법을 받아들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게 싱가포르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동시·병행적 이행’을 내세워 비핵화를 강조하기 시작했지만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합의문을 이미 받아든 북한이 이에 응할 리 없었다. 북·미 대화가 꼬이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문제에 흥미를 잃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은 비핵화 진전이 아니라 북한 문제를 어떻게 재선에 유리하도록 활용할 수 있는지에 쏠려 있다.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관심사는 남북관계 진전이었다. 북·미 대화 성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긴 했지만 정작 북·미 대화에서 비핵화가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는지에는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실질적인 비핵화 진전보다 남북관계에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북·미 간 대화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에 집중했다.


9·19 남북공동선언과 군사분야 합의는 문재인 정부의 의미 있는 성과다. 하지만 이 합의는 북·미 대화와 비핵화가 진전될 것이라는 미래 전망을 가불받아서 만든 것이었다.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 대화가 사라지면서 이 합의는 빛을 잃었다. 해양과 대륙을 잇는 교량 국가로서 정체성을 세우고 국가 번영의 새로운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은 미래지향적 방향성을 갖고 있지만 선후관계에 문제가 있다. 신북방정책은 대북제재 해제를 필요로 하고 제재 해제를 위해서는 북핵문제가 풀려야 한다.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교한 비핵화 전략이다.


북·미 대화와 비핵화 협상이 중단되자 문재인 정부는 과감한 남북협력 사업 추진을 올해 신년구상으로 꺼냈다.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않고 남북의 독자적 영역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미 대화가 정체됐다고 남북관계까지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인식과 함께 남북관계를 통해 북·미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하는 부수적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비핵화는 빠져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신년사를 통해 제시한 한반도평화 3원칙은 전쟁불용·상호안전보장·공동번영이다. 핵문제는 신년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어려운 작업인 이유는 비핵화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를 그대로 두기로 마음먹는다면 남북협력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하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없다. 물론 북한이 정말로 비핵화를 할 뜻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보다 한·미가 비핵화 목표를 이루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정교한 전략을 갖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협상을 잘못하면 핵을 내놓을 생각이 있다가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또 협상을 잘하면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바꾸게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외교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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