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비핵화 대화가 본격화되면서 20년 전의 ‘페리 프로세스’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98년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도록 했다. 페리 전 장관은 1999년 10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보고서는 북한이 핵과 장거리미사일을 제거하면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등 “북한에 기회를 제공하는 긍정적인 단계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최근 북·미 관계는 마치 페리 프로세스가 추진되던 20년 전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2000년 10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조명록 국방위 부위원장이 사상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과 면담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그 18년 후인 지난해 5월에 이어 지난 17~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찾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미국 각료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다. 지난해 4월에는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 겸 국무장관 내정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을 찾았고 정상회담 준비가 본격화됐다.

 

페리 보고서는 현시점에서도 참고할 부분이 많다. 보고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미사일 개발 중단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으로 단계적이고 상호적인 접근법을 제안한다. 북·미가 역사적 정상회담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에 합의하고도 이행에선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이 충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선핵폐기론은 북·미 불신의 역사를 고려할 때 현실성 없는 항복 요구에 가깝다. 트럼프 정부가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와 상응조치의 단계적 이행을 수용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다.

 

물론 시간이 흘렀고 상황도 달라졌다. 북한은 2017년 말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과거 핵개발 권리를 주장하는 북한과 협상했다면 이제는 핵 프로그램을 보유한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 그만큼 협상은 더 어려워졌다. 회의론이 커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상론만 설파하며 상황 악화를 방치해서도 안된다. 미국인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는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핵탄두를 미국 본토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중단시키는 게 급선무다. 북한이 가진 핵무기를 봉쇄하고 억지하는 게 우선이다. 비현실적 기대는 협상을 망칠 뿐이다.

 

페리 프로세스는 제대로 시행도 못해보고 폐기됐다. 대선 패배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무산됐다. 후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3월 미국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대화 중단을 통보했다. 그는 다음해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페리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부시 대통령의 선택과 이어진 북한의 핵개발을 두고 “미국 역사상 가장 실패한 외교”라고 지적했다.

 

20년 만에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외교전이 다시 시작됐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옵션까지 경고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열고 ‘트럼프 프로세스’의 본격화를 알렸다. 정상국가를 바라는 북한이나 핵위협을 제거하려는 미국이나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기회의 창을 계속 열어두기 위해서는 2월 말~3월 초로 예상되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프로세스를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시켜야 한다.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하다. 다행히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평화 프로세스는 민주당에서도 부정하기 어려운 만큼 생명력이 더 강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트럼프 프로세스는 페리 프로세스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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