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역할 커지는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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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역할 커지는 조선족

by 경향 신문 2012. 9. 5.

오관철 베이징 특파원


 

지난 3일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延吉)에서 자치주 창립 6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환갑을 맞은 해인 만큼 중앙에서 상무위원급, 나아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참석할 것이란 설이 파다했다. 하지만 쑨정차이(孫政才) 지린성 당서기 등 상무위원보다 낮은 급의 인사가 기념식에 참석하는 데 그쳤다.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의 잔치를 떠들썩하게 치르기에는 역시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한글과 중국어가 뒤섞인 간판이 이채로운 옌지 남새도매시장의 모습. (경향신문DB)


 냉전 당시 우리와 교류가 막혀 있던 조선족들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비로소 한국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옌볜 경제의 젖줄은 한국이다. 하지만 부모가 한국으로 들어가 조부모와 함께 사는 청소년들이 상당수이고, 일자리를 찾아 부부 중 한쪽이 한국으로 나가면서 이혼도 늘고 있다. 가족 해체는 조선족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현재 자치주 내 조선족 인구는 80만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전체 자치주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37%로, 1953년 70.5%와 비교하면 절반 가까이 낮아졌다. 한족으로의 동화 현상도 심상찮다. 옌지에 사는 조선족 부부는 “한국말을 모르는 아이에게 매일 한국 TV를 열심히 보라고 권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업으로, 부동산 투자로 베이징에서 부를 일군 조선족들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 때문에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고단수다. 강제이주 방식으로 소수민족을 해체하려 한 옛 소련과 달리 중국은 소수민족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인구 억제정책도 소수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족을 소수민족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 고위직에 진출한 소수민족은 극히 제한적이며, 조선족자치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당 서기 역시 한족이다. 소수민족의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분리 요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이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핵심이다. 우리로서는 한·중 수교 후 조선족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안타깝다. 옌볜 일대는 항일 독립투쟁지였고, 윤동주 생가 등 우국선열들의 숨결이 흐르는 곳이다. 조선족들은 민족적 정체성도 자존심도 높다. 10년 전 조선족자치주 성립 50주년 당시에도 지금 제기되는 비슷한 우려들이 팽배했지만 아직까지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들어가고, 베이징 같은 대도시로 나가는 조선족들을 탓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조선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옌볜을 포함한 지린성에 한국이 투자한 금액은 전체 투자금액의 2%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족자치주가 와해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괜한 우려는 아니지만 쉽사리 해체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인구 감소로 자치주가 해체된 사례는 없기 때문이다. 소수민족 비율이 30%에 훨씬 못 미치지만 자치를 유지하는 곳도 많다. 오히려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을 중국 탓으로만 돌리고 편애한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접근할 경우 조선족 사회에 되레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티베트의 사례에서 보듯 중국은 주로 변방에 포진하고 있는 소수민족의 동향에 무척 민감하다. 앞으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고,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시화할수록 조선족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 있다. 한·중 수교 20주년과 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을 맞아 한민족 네트워크의 강화를 위한 장기적이고 치밀한 전략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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