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대화와 협상이 아닌 대안적 경로를 추진하겠다는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신년사의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하면 미국에 대한 단순 경고 성격이 짙다. 비핵화 의지를 거듭 밝히고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한 것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이라는 전제를 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부영화에서 주인공이 외투 자락을 슬쩍 열어 허리춤의 권총을 보여주는 것은 쏘지 않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까지 보냈다. 혹시라도 자신의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경고는 경고다. 특히 대안을 담은 경고는 새겨봐야 한다. 북한은 지난해 ‘새로운 길’과 연결지을 수 있는 입장을 제시한 바 있다. “미국이 변화가 없다면 (핵·경제) 병진노선을 다시 추진할 수 있다”는 노동신문의 개인 논평이 그것이다. 그 직후 북한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미국이 공동성명 이행 아닌 현상유지를 선호한다면 구태여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병진노선 부활 가능성을 언급한 논평이 개인이 써낼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새로운 길’ 발언이 잘 짜여진 일련의 전략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오해’가 가능하다.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7일 중국 베이징행 전용열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기 전 환송 나온 인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 위원장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김 위원장 오른쪽 뒤)도 방중에 동행했다. 연합뉴스

 

미국 언론들은 불에 덴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핵 대결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는 위협” “가시가 잔뜩 박힌 올리브 가지를 내민 김 위원장” 등의 해석은 과도하지만 왜곡으로 볼 수는 없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 북한의 ‘다음 수순’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단순경고였다면 의도치 않은 파장을 낳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응이었다. 트럼프는 신년사 직후 “나도 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는 “논평할 기회를 사양한다”고 밝혔다. 해석 불가다. 미국이 북한 신년사에 대한 논평을 거부한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의 이런 반응은 얼핏 이해가 간다. 미국은 지난해 6월 북·미 정상회담 직후 북한에 선 비핵화를 요구했다. 관계개선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합의를 정면으로 뒤집는 처사였다. 북한은 비핵화-상응조치의 단계적 교환을 제안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인권문제까지 거론했다. 대화하면서 제재도 하는 이상한 협상이 6개월 넘게 계속됐다. 핵이라는 전 자산을 건 북한에 언제까지고 “김 위원장과 곧 만날 것”이라는 트럼프의 계속되는, 그러나 실현되지 않는 ‘희망고문’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북한의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북한은 트럼프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에게 지난 1년여간은 워싱턴의 강고한 반북 및 반트럼프 연합 세력과 싸운 ‘투쟁의 기간’이었다. 북한은 미국을 위협하는 불량국가로 붕괴의 대상은 될지언정 대화와 협상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북·미대화와 합의를 흔들었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북·미대화 모멘텀을 유지한 것은 트럼프의 분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 트럼프가 새 길을 찾지 않도록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정한 효능을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체육관 연설에서 확인한 바 있다. 15만 평양시민은 문 대통령이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핵위협 없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열렬히 환호했다. 북한 주민도 남한 주민 못지않게 평화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김 위원장도 깨달았을 것이다. 평화는 이제 남북 모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북한은 새로운 길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김 위원장 말대로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과 관련해 중국·러시아와 공조해 미국에 적대하는 방안을 시사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길일 수는 있어도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그 같은 냉전구도 속에서 과거 70년 동안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는지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북한에 ‘새로운 길’은 없다. 지금 진행 중인 북·미 협상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지난 7일부터 시작된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도 그 일환이기를 기대한다.

 

<조호연 논설주간>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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