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국내정치와 외교정책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다.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갖고 선순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은 외교를 국내정치에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항상 느끼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이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의 작성 배경과 과정을 검증한 것은 정권이 국내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외교를 희생시킨 전형적 사례다. 고노담화 검증은 그 자체로 일본 외교에 커다란 손실이다. 위안부 문제는 증거가 너무도 뚜렷해 뒤집을 수 없고 이 문제가 다시 국제적으로 이슈화되는 것은 일본에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검증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아베 내각은 고노담화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작성 과정에서의 공정성에 흠집을 내는 방식으로 고노담화의 의미를 한껏 퇴색시켰다. 특히 일본은 고노담화 작성 당시 한·일 정부 간 외교협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해 파장을 일으켰다. 그것도 자신들의 편의대로 짜깁기하고 유리한 부분만 부각시켜 고노담화가 마치 양국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인 것처럼 포장했다.

고노담화를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아베가 외교적 부담을 감수하고 고노담화를 검증한 이유는 자국 내 극우파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베는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는 대신 고노담화의 취지와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극우세력과 타협했다.


아베의 진짜 목적은 고노담화를 훼손하는 것에 있지 않다. 아베는 전후체제를 탈피하고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 과거의 영화를 재현해보려는 ‘그랜드 디자인’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집권이 반드시 필요하고,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다져놓아야 한다. 북·일 스톡홀름 합의의 목적이 북한과의 진정한 관계개선이 아닌 납치문제 진전을 통한 정치적 기반 확대에 있는 것처럼, 고노담화 검증 역시 아베의 꿈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디딤돌 만들기가 목적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의 외교가 어느 정도 희생돼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베의 판단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고노담화 검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을 야기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사건과 ‘판박이’다.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으며 이를 기록한 대화록을 봤다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이 지난 대선을 뒤흔들었다. 여권은 대선 기간 내내 이 문제를 갖고 야당을 공격하면서 선거에 활용했다. 선거가 끝난 뒤 결국 대화록 전문을 공개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대화록 어디에도 NLL 포기를 의미하는 발언은 없었다.

NLL 대화록 유출은 외교문서를 무단히 공개해 정치적으로 악용한 아베의 고노담화 검증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실제 내용 중 일부만 자의적으로 편집, 공개함으로써 사실관계를 비틀고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것도 똑같다. 아베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일 외교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처럼 여권도 대선 승리를 위해 남북관계를 희생시켰다. 고노담화 검증 보고서가 나온 뒤 정부는 “이런 식이라면 일본과 어떻게 외교를 하겠느냐”며 질타했다. 그렇다면 NLL 대화록 유출 때도 “앞으로 남북협의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왔어야 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9일 동아시아연구원 주재 국제회의 기조연설에서 일본을 겨냥해 “어느 국가라도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평화를 위한 공동의 명분을 훼손코자 한다면, 그간 힘겨운 노력 끝에 이룩한 더 중요한 성과를 잃어버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고는 박근혜 정부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남북관계와 외교를 온전히 국내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삼아온 것은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정부의 비난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자신들도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유신모 정치부 차장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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