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당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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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기자메모, 기자칼럼

우리는 감당할 수 있나

by 경향 신문 2018. 12. 11.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은 오랜 세월 유럽의 죄인이었다. 국가·민족·애국 등 나치를 연상시키는 이념이나 상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일은 금기시됐다. 이런 연유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수많은 독일인이 거리에서 국기를 흔들던 모습은 이웃 유럽인들에게 역사의 페이지 한 장이 넘어갔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독일은 어깨를 활짝 펴고 국가적 자부심을 광장에서 만끽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있다.

 

메르켈은 2005년 11월 독일 총리로 취임해 무려 13년을 집권했다. 이 긴 세월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그렉시트) 위기 및 시리아 난민 위기에 개입했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지켜봤다. 미국과 러시아의 일방주의 외교가 가속화될 때 이에 맞서 대화와 타협, 다자주의의 가치를 지키려 애쓴 정치인도 메르켈이었다. 이런 행보는 메르켈에게 ‘유럽의 리더’를 넘어 ‘자유세계의 리더’라는 수식어를 안겼고 독일의 위상은 유럽의 대표 국가로 격상됐다.

 

각국 정상들이 11월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개선문 광장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파리 _ AP연합뉴스

 

메르켈은 신중하고 온건한 실용주의자였다. 보수정당의 총리이지만 필요하다면 대연정 파트너인 사회민주당의 정책 노선도 기꺼이 채택했다. 원자력발전 전면 폐지를 결정했고, 동성혼을 법으로 인정했다. 그는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했으나 의회가 법제화 여부를 표결에 부치도록 길을 터줬고 여당 의원들이 자유롭게 투표하도록 했다. 독일 언론은 이런 자국 총리에게서 흠잡을 구석을 찾지 못했다. 독일 주간 디차이트의 정치 에디터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주요 언론의 대다수가 메르켈에게 환호했다”고 말했다. 이런 인기가 메르켈의 13년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메르켈이 내렸던 결정이 부메랑이 돼 그에게 돌아오고 있다. 메르켈은 2012년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실시해 그렉시트를 막았고 2015년 난민 100만여명을 독일에 받아줘 국제사회의 박수를 받았다. 난민들에게 국경을 열던 당시 메르켈은 “우리는 감당할 수 있다”는 말로 여론을 설득했다.

 

그러나 메르켈이 그 후폭풍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메르켈이 그렉시트 위기를 계기로 유로존 재정건전성 관리감독을 강화한 것은 유로존 회원국의 정부지출 축소로 이어졌고 이는 빈부 양극화를 부채질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100만 난민의 사회통합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실업과 빈곤, 반난민 정서는 극우정당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반이민 여론이 고조되며 리더십 위기에 직면한 메르켈은 결국 2021년 임기까지만 총리 직무를 수행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지난 8일 메르켈의 기독민주연합은 메르켈 후계자인 안네그라트 크람프-카렌바우어를 신임 당 대표로 선출했다.

 

기독민주연합의 리더십이 교체된 이때, 공교롭게도 지중해의 마지막 민간 난민구조선 아쿠아리우스 측이 파나마 선적 유효기간이 만료돼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면서 어떤 국가도 아쿠아리우스에 선적 등록을 허용하지 않은 탓이다. 지난해까지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민간 난민구조선은 10척이었으나 이제 한 척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올해 유럽 이민을 시도하다 지중해에 빠져 사망한 난민은 2000여명이다.

 

‘자유세계의 리더’이자 난민에게 가장 포용적이었던 메르켈이 힘을 잃고, 난민구조선마저 타의로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는 소식은 어떤 징후처럼 들린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며 국제사회 리더 역할을 스스로 내려놨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정상들은 자국 문제에 골몰하느라 바쁘다. 빈곤과 난민, 기후변화 등 세계가 공동대응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선장과 선박이 부재한 세계는 어디로 표류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최희진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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