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푸틴의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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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여적] 푸틴의 홍차

by 경향 신문 2022. 8. 8.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4차 브릭스(BRICS) 국가 비즈니스 포럼 개막식에 화상으로 참석하며 건배하고 있다. 모스크바/크렘린궁 제공·연합뉴스

 

러시아 경제개방을 설계한 아나톨리 추바이스 전 경제고문이 이탈리아 휴가 도중 중태에 빠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크렘린에서 사임한 최고위급 인사인 그는 뇌 신경 염증질환인 길랭-바레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현지 검찰은 독극물 중독 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배신자와 정적을 독살한다는 의혹으로 악명이 높아서다. 이른바 ‘푸틴의 홍차’다.

영국으로 망명한 전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리트비넨코가 2006년 호텔 레스토랑에서 옛 동료들과 차를 마신 지 3주 뒤 건강 악화로 숨진 게 대표적이다. 청산가리 독성의 200만배인 방사성물질 폴로늄-210 중독이었다. 그는 KGB 후신 연방보안국(FSB)이 독성물질 연구소를 비밀리에 운영 중이며, 우크라이나 대선 때 유셴코 후보 독살 기도의 배후라고 폭로한 바 있다. 러시아군의 체첸 주민 학살을 고발한 언론인 폴리트코프스카야도 2004년 차를 마신 뒤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결국 2년 뒤 자택 인근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들의 신원을 영국 비밀정보국(MI6)에 넘긴 이중간첩 스크리팔과 딸은 2018년 영국 쇼핑몰에서 러시아가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촉’ 테러로 죽다 살아났다. 피부와 호흡기로 흡수돼 2분 안에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노비촉은 2020년 러시아 반정부 지도자인 나발니 독살 시도 때도 사용됐다. 독일로 이송돼 치료받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나발니에게 FSB 요원이 “속옷에 노비촉을 충분히 묻혔지만 암살에 실패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푸틴은 2010년 미국과 러시아 스파이 맞교환 당시 인터뷰에서 “배신자들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만든 것이 분명한 독극물, 추적이 어려운 정교한 암살 작전은 크렘린의 강력한 위력을 전시하는 방법이다. 20년 넘는 푸틴의 장기독재에 대한 국내 불만을 침묵시키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공포통치는 ‘예스맨’으로만 채워진 정치를 만들고, 체제는 안에서부터 곪아 들어간다. 한때 강군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폭로된 러시아군의 무능과 부패는 일면에 불과할 것이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오피니언 |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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