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합의 계승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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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싱가포르 합의 계승이 능사는 아니다

by 경향 신문 2020. 11. 20.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대북 접근법에 정부와 여당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기조가 이어질 것인지 여부 때문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2019년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합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트럼프 정부와 이뤄낸 소중한 성과가 차기 정부로 잘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합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3일 “한·미의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은 2019년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합의 재확인이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송영길 의원과 당내 한반도 태스크포스 소속 의원들은 발빠르게 미국을 방문해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의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이 과연 싱가포르 합의를 존중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한다 해도 북·미 대화가 순조롭게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싱가포르 합의는 첫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 합의는 실패작이다. 구체적인 행동 계획이 없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핵활동을 동결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요소도 갖추지 못했다. 특히 신뢰구축을 통한 새로운 관계수립-평화체제-비핵화의 순서로 정리된 싱가포르 합의는 2008년 12월 6자회담 결렬 이후 북한이 10년 넘게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선(先) 평화체제 후(後) 비핵화’가 관철된 북한의 승리다. 아무런 준비 없이 김정은과의 회담을 정치적 이벤트로 이용하려던 트럼프의 실수이자 외교적 패배다.

 

미국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싱가포르 합의에 후순위로 처져 있는 비핵화를 앞으로 끌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합의 한 달 뒤에 평양을 찾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비핵화 논의를 위한 실무그룹 구성’을 요구하자 북한은 “강도적 요구”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그 이후 북·미 대화는 접점 없이 겉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를 근거로 신뢰구축 조치와 평화체제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미국은 싱가포르 합의에서 약속한 비핵화를 이행하라고 북한에 요구 중이다.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을 비롯해 지난해 11월 스톡홀름 실무접촉 등 몇차례 북·미 대화 시도가 모두 실패한 것도 이처럼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인식과 요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합의는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돼버린 지 이미 오래다.

 

바이든은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김정은과의 회담을 통해 정권의 정통성 부여 등 북한에 원하는 모든 것을 줬다”고 트럼프를 비난했다. 싱가포르 합의를 실질적 진전이 없는 공허한 이벤트 외교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도 결국 북·미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트럼프 시대의 대화 플랫폼을 이용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이든이 싱가포르 합의를 기초로 삼겠다고 선언한다고 해도, 평화체제 구축을 비핵화보다 먼저 논의해야 한다는 ‘북한의 싱가포르 합의 인식’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이든이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할 경우에도 지금과 같은 교착 상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합의를 다시 북·미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바이든 행정부에 싱가포르 합의를 계승하라고 설득하기에 앞서 싱가포르 합의를 둘러싼 북·미의 인식 차이를 먼저 해소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싱가포르 합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일치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양쪽이 싱가포르 합의를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수백번 한다고 해도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정권 교체기는 외교적으로 민감한 시기다. 특히 미국은 지금 완전히 성격이 다른 정부로 바뀌는 과정에 있다. 과거 빌 클린턴 행정부와 조지 부시 행정부의 교체기에 한국 정부는 네오콘들이 장악한 부시 행정부에 클린턴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할 것을 조급하게 설득하려다 초반 한·미관계를 망친 적이 있다. 지금 ‘싱가포르 합의 계승’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로울 것이 없다. 먼저 바이든 팀 핵심 인사들의 의중을 신중하고 은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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