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제민의 워싱턴 리포트]유령계좌와 깡통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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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민의 워싱턴 리포트]유령계좌와 깡통계좌

by 경향 신문 2016. 9. 22.

미국 은행에서 볼일을 보다보면 마지막 순간에 창구 직원들이 꺼내는 얘기가 있다. 새 계좌를 만들면 100달러를 넣어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의무는 없고 일정 금액 이상만 유지하면 수수료를 물지 않는다고 했다. 100달러를 거저 준다는 말에 잠시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판촉하는 것이 미심쩍기도 했고, 많지도 않은 돈을 이곳저곳 나눠 담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정중히 사양하고 나온다.

 

최근에 은행 직원들이 왜 그렇게 절실하게 판촉을 했는지 궁금증이 풀렸다. 미국의 3대 은행 웰스파고 은행의 ‘유령계좌’ 파문 때문이다. 이 사건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금융 노동자들을 닦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20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에서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이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웰스파고는 최근 몇년 동안 직원들에게 공격적인 판촉 실적 경쟁을 강요했고, 기준에 미달한 직원은 해고했다. 결국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직원들은 기존 고객정보를 활용해 약 200만건의 유령계좌를 만들어냈다. 고객들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진 계좌에 수수료를 낸 경우도 있었다.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등 금융감독당국은 이달 초 이러한 사실을 공개하며 웰스파고에 1억8500만달러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웰스파고는 이 일로 해고한 노동자가 530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존 스텀프 웰스파고 회장은 20일(현지시간) 상원 은행위원회에 출석해 “우리 고객들과 직원들, 미국 국민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매우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날 의원들은 스텀프 회장을 비롯해 고위 임원진 중 단 한 명도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성과에 기대 수백억원대 연봉을 받아갔다는 점을 질타했다. 스텀프 회장은 지난해 연봉으로 1900만달러(약 210억원)를 받았다.

 

민주당 소속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당신이 정의하는 ‘책임진다’는 말은 곧 잘못을 아래 직원에게 미루는 것이냐”며 “회사로부터 받은 급여를 반납하고 당장 사임하라”고 했다. CFPB 같은 규제기관의 폐지를 주장해온 공화당 소속 리처드 셸비 상원 은행위원장조차 “은행업은 신뢰에 기초하는데 그 신뢰가 웰스파고에서는 무너졌다”고 말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이번 파문이 웰스파고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웰스파고의 성과주의 경영은 한국 금융지주회사들이 본보기로 삼는 사례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한국은 최근 정부가 정책적으로 소액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설을 장려했는데 그것이 은행의 실적 경쟁과 맞물리며 1만원 이하의 ‘깡통계좌’가 급증했다.

금융노조는 잘못된 정책과 실적 경쟁으로 인한 폐해라고 지적했지만 금융감독당국은 노조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것 같다. 금융당국의 조사가 이뤄지고 의회에서 은행 경영진을 불러 책임을 추궁하는 미국이 그나마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운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워싱턴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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