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정책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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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정책의 전환

by 경향 신문 2013. 12. 2.

일본에서 출생해 재일 한국인 2세로 살아온 60여년간 요즘처럼 일본의 변화에 형언하기 어려운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평화롭고, 풍요롭고, 온화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마음이 넘치는 일본인들과 아름다운 자연. 그런 일본의 표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섬뜩한 표정의 일본이 기분 나쁘게 그 민낯을 드러낸 듯한 인상이 불식되지 않는다.

과거에 지금과 비슷한 표정을 드러낸 순간이 있었다. 1989년 초, 돌연 백주 도쿄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희미한 빛속으로 사라진 채, 주변 일대가 (쇼와) 천황의 상(喪)을 치르는 광경을 봤을 때다.

그것은 괴이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내가 수십년간 알지 못했던 일본의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전전(戰前)의 일본, 식민지의 한반도를 유린했던 제국 일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평화헌법하에서 최소한의 자위권에 한정된 ‘자위대’를 보유하면서도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 등 불길한 과거의 유산과 절연한, 자유롭고 풍요한 일본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또 다른 일본의 모습에 섬칫 놀라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급격한 변화에 1980년대와 흡사한,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한 불안과 두려움이 더해가고 있다. 아베 정권의 발족 이래 일본은 확실히 국가주의적인 레짐(체제)으로 급변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 인권, 언론·출판·집회의 자유와 평화주의 등 전후 일본의 레짐을 지탱해온 근본적인 지주가 지금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다.

국가가 시민생활의 모세혈관에까지 눈을 번뜩이고, 국가의 감시와 개입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까지 미칠 수 있는 통제사회로 일본이 변화하려는 것이다. 그 수단이 되는 것이 ‘특정비밀보호법’이다.

외교·안보뿐 아니라 치안과 테러 등 사회의 구석구석에 걸친 정보를 광범위하게 비밀로 지정해 누설과 취득, 실행되지 않은 모의와 교사도 포함해 엄벌을 부과하는 ‘보호법’은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고압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보호법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전쟁 발동의 결정과 지휘권을 한손에 장악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설치법과 집단적 자위권의 발동 용인을 인정한 국가안전보장기본법이다. 이들 법안이 제정되면 사실상 헌법 개정에 맞먹는 레짐 체인지가 실현되고, 평화헌법의 전문 및 전력의 불보유 등을 정한 제9조는 거죽만 남게 된다. 게다가 일본의 무력부대가 국경을 넘어 전투행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일본의 이른바 ‘포스트 전후국가’를 향한 중대한 변화의 타이밍에 있다. 중국의 대두에 따른 세계적 규모의 ‘파워 시프트’, 미국의 패권적 위력의 후퇴, 역사·영토를 둘러싼 대립, 북한에 의한 핵·미사일 위협 등이 보다 심각해지는 가운데 일본이 무력행사가 가능한 ‘보통국가’로의 변모를 완수하려는 것이다.

 

어색 한. 일 정상 (경향DB)

이런 일본의 변모를 미국은 환영하는 한편, 한국과 중국엔 위기감이 심화되고 있다. 안전보장 면에서 미국에 의존하되, 다른 한편으로 무역과 북한 견제 면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은 대일관계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박근혜 대통령은 식민지배 희생자에 대한 아베 총리의 언동, 각료·여당 간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이유로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기피해왔으나 그 배경에는 역사문제와 영토문제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일본의 변화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한·일관계의 불화와 갈등에 미국은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서방매체들도 그 추이에 전례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는 우익적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대해 ‘역사수정주의’적인 견해를 취하는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도 많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박 대통령이 완고한 태도에서 벗어나 한·일 정상회담에 응하는 것이 한·일 양국에 이익이 된다는 논조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의 한·일관계 악화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물론 호주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까지 우려 사항이 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전후체제 탈피’에 이의를 제기하는 야당과 시민세력, 일반 국민의 눈에도 한·일 정상회담을 계속 회피하는 박 대통령의 자세가 ‘반일’적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박 대통령에 대한 위화감과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국제여론과 일본 국내의 변화를 감안하면 박 대통령의 방일 및 정상회담 개최의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 대통령이 직접 일본에 와서 아베 총리에게 해야 할 주장을 하고, 일본의 보통 시민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일본 국내의 변화에도, 한국에도 보다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이 주도하는 일본의 변화에 한국은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일본 정상과의 관계를 그저 차단하고만 있어서는 사태의 타개를 바랄 수 없다.

대일정책을 전환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 박 대통령이 직접 일본의 양식있는 국민과 시민과 대화하고 호소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보다 바람직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강상중 | 일본 세이가쿠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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