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반도체 소재 등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 진짜 이유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인지 의문이 든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한국 수출을 견인해 온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소재를 대상으로 한다. ICT 산업은 한국을 포함해 과거 개발도상국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세계화 제조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발전하는 발판이었다. 1997년 세계무역기구(WTO) 정보기술협정에 따라 2000년 대다수 ICT 품목에 대한 관세를 철폐해 개발도상국의 성장을 가속화했고, 놀라운 판세 변화가 일어났다. 40개 주요국에 대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ICT 수출 통계를 보면, 2000년 당시 미국은 전체의 22%로 1위, 일본은 15%로 2위, 한국은 8%로 3위, 중국이 6%로 4위였는데, 가장 최근 자료인 2012년 자료에서는 중국이 전체의 44%로 1위, 미국이 2위(11%), 한국이 3위(7%), 일본이 4위(6%)다. 1~2% 정도의 근소한 차이지만 우리가 일본을 앞서간 것은 2009년부터다. ICT 산업에서 미·중 무역전쟁이 1·2위전이라면, 일본의 이번 조치는 3·4위전의 시작이 아닐까?


장기침체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2019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출시장이 확대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크다. ICT 산업은 수출 확대에 핵심 역할을 하는데 2012년 일본의 ICT 산업 수출액은 727억달러로 2000년의 67% 정도로 축소됐다. 수출에서 ICT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5년 16.95%에서 2017년 8.35%로 지속해 줄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ICT 수출은 2000년에 비해 157% 확대됐고, 수출 비중도 2017년 24.74%로 건실하게 수출에 기여하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일본이 확실한 서열 정리를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왜 자국의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출 규제를 선택하고, 왜 ‘국가안보’를 이유로 내걸고 있을까?


보통의 무역전쟁에서는 미·중 무역전쟁과 같이 상대국으로부터 수입되는 품목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데, 오랜 대일 무역적자에서 보듯 일본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액수가 적기 때문에 수입 관세로 우리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이 판매자인 분야의 수출 규제를 택했고, 세계적으로 드문 수출 규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협약을 바탕으로 ‘국가안보’를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강제징용 판결과 같은 한·일 간 해묵은 문제들이 진짜 이유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내는 다르며, 이번 기회에 기술 패권 다툼에서 한국에 자신들의 우위를 확실히 해놓고 싶은 게 그 이유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해외 저널에서는 종종 세계 경제대국, 기술대국 일본이 FDI와 합작회사를 통해 자국의 기술을 이전한 덕분에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기술 발전과 수출 성장을 이뤘다는 불편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일본은 그 과정에서 핵심 기술을 쏙 빼고 저렴한 인건비로 부려먹을 수 있을 만큼만 기술을 이전했고 일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홀로 설 수 없는 기술무역구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외교적인 협상이나 단기적인 해법으로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경직된 구조를 깨고 기술 독립과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까?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에둘러 가는 길은 없다. 아베 내각의 저의를 꿰뚫고 기술 발전과 산업에 대한 이해, 장기적인 기업의 경쟁력과 역량을 먼저 챙기라는 세간의 말들이 단지 ‘원론적’이라고 치부돼선 안된다.


<이지수 호서대 교수 글로벌통상학과>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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