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넘자 나도 모르게 환호… ‘종군기자 제1수칙’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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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리비아 서바이벌

국경 넘자 나도 모르게 환호… ‘종군기자 제1수칙’은 지켰다

by 경향 신문 2011. 9. 5.

‘띠링, 띠링.’


지난 1일 오후 1시50분 리비아와 튀니지의 국경 부근에 다다르자 자동 로밍된 휴대전화에 문자 메시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리운전이나 세일정보를 알려주는 스팸 문자가 그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국경을 건너자마자 ‘아, 이제 전화가 되는 곳으로 나왔구나’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고 환호성이 터졌다. 그동안 좋은 친구가 된 리비아인 운전기사 유세프 파토리(34)가 우리 앞에서 뻔히 운전하고 있는데도, 그는 리비아로 돌아가야 하는데도 리비아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벗어나 마침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던 그곳이 파토리에게는 사랑하는 임신한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이 있는 가정이자 고향일 텐데 말이다.




■ ‘왜 리비아로 가는가’ 다시 물었다


이날 오전 11시. 그동안 숙소로 썼던 트리폴리 알 와단 호텔을 출발해 튀니지로 향했다. 동료 기자들 중 한 명은 트리폴리에 더 남기로 했다. 그를 두고 나오는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지만 ‘얼른 튀니지로 들어가면 씻을 수 있겠지’ ‘맘껏 먹을 수 있겠지’ 하는 원시적인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리비아에서 취재를 마치고 튀니지로 나오는 길은 지난달 27일 들어갈 때 이용했던 남부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다하브-와진’ 국경 대신 북부의 ‘빈 가르데인-라스 아즈다이르’를 통하는 루트를 택했다. 튀니지 제르바에서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까지 북부 국경을 통하면 쭉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약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이어진 거점 도시에서 벌어졌던 반군과 정부군 간의 교전으로 이 국경은 한동안 가로막혀 있었다.


리비아 취재 기간 중 트리폴리에서는 ‘반군이 해안도로 중간중간의 도시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교전도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국경도 열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식’일 뿐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그 도로를 이용해도 괜찮다’는 증거를 자꾸 모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트리폴리 코린시아 호텔 로비에서 만난 외국 기자들에게 “해안도로가 안전하다는데 정말이냐?”라는 질문을 계속해댔다. 한 호주 기자가 “회사 동료 일부가 그 길을 타고 하루 전 나갔다”고 말해줬다. 그의 얘기만으로 도로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안심이 됐다.


■ 형용 못할, 불태워진 학살 현장


지중해 왼편을 따라 뻗어 있는 해안도로를 타면 푸른 지중해를 내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차창으로는 황량한 사막만이 펼쳐졌다. 우리 일행이 탄 차는 트리폴리를 지나 자위야, 사브라타, 주아라 등을 거쳐 쌩쌩 내달렸다. 반군들의 검문소도 남부 국경을 통과할 때보다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계속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교전이 벌어졌던 도시 주아라를 통과할 때는 혹시나 저격수가 있을지 몰라 건물 옥상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주아라 지역 일부 도로에서는 반군들이 길을 가로막고 “위험하니 우회하라”며 다른 길을 안내해주기도 했다. 쿵쾅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황량한 사막을 보며 트리폴리에서의 여정 가운데 한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트리폴리를 떠나기 전날 들른 트리폴리 남쪽 카미스 여단 옆 임시 수감시설이다. 수감시설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누추한 창고는 50여명이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진 학살의 현장이었다. 이미 시신은 처리되고 없었지만 수십구의 시신을 불태운 뒤 남은 악취는 코를 찔렀다. 난생 처음 맡아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냄새였다. 쥐고 있던 손수건을 저절로 코에 갖다댔다. 현장을 목격한 인근 주민들이 다가와 설명해줬다. 엄마를 따라 나온 세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학살의 참혹함을 모르고 누비는 어린아이라니. 미래 리비아에 남은 과제는 바로 저런 꼬마 아이에게 왜 이런 학살이 일어났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라에딘 병원에서 만난 여의사 모하메드 이남에 대한 인상도 강하게 남았다. 트리폴리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 동안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한 뒤 5년간 병원에서 근무했다. 35세 미혼 여성으로 히잡을 쓰고도 전혀 거리낌 없이 일하는 이남은 외신에서 묘사되는 억압된 무슬림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외국 기자들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영어는 금지하고 오직 아랍어만을 배우게 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익혔다고 했다. 가끔씩 자신이 얘기하고 싶은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윽, 이게 다 카다피 때문”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어린아이들과 젊은 세대를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없이 죽어간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남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불쑥 올라왔다. 그 울컥함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동지애이자 힘든 시간을 겪어온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튀니지로 돌아와 곧바로 그에게 e메일을 보냈다. 쉬운 영어로 또박또박. “당신의 열정에 감동받았습니다. 리비아와 당신의 미래에 행운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처음 한국을 떠나 리비아로 향할 때 떠올렸던 “왜 위험한 리비아로 가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리비아에서 받은 타 신문사 기자로부터의 e메일 한 통이 생각났다. 일면식도 없는 그 기자는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고 극심한 스트레스,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겠지만 몸조심하라”고 응원했다. 그는 또 한 기고문을 읽다가 ‘왜 리비아로 가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떠올랐다며 그 글을 링크해서 보내줬다. 리비아 현장을 누비며 속보를 전하고 있는 영국 스카이뉴스 채널의 알렉스 크로퍼드의 남편 리처드 에드몬슨이 쓴 것이었다. 크로퍼드는 2008년 인도 뭄바이 테러 현장 등 수많은 분쟁지역을 취재한 대표적인 여성 기자다. 인디펜던트 기자로 일하다 ‘전업주부’가 된 남편 에드몬슨은 크로퍼드가 보육에 소홀하다는 일부 비판에 대해 지난달 29일 인디펜던트에 반박하는 글을 썼다.


“내 아내 알렉스를 화나게 하고 싶다면 그를 여기자라고 부르거나 또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됩니다. 알렉스에게 여기자는 전쟁터로 가서는 안된다고, 특히 어린아이들이 집에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말해보세요. 그렇다면 그건 매우 치명적인 말이 될 겁니다. 알렉스는 지난주 참석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남성 기자들은 ‘남기자’로 불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알렉스는 다시 리비아로 갈 것입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싶은 사실을 위해 싸워왔고, ‘여성·아내·엄마’라는 작은 구멍으로 그를 보려 하는 사람들과도 싸워왔습니다.”


■ 해안도로 타고 튀니지로 귀환


나 역시 ‘왜 리비아를 다녀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기자’가 아니라 ‘기자’로서 대답해야 할 것 같다. 기자는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력에 기초해 현장과 사건을 보고 기사를 작성한다. 그곳이 전장이든 휴양지든 상관없다. ‘여기자’이기 때문에 ‘남자’ 기자와는 다른 감수성과 접근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그것을 기사로 소화했더라도 그것은 여성이 아니라 ‘기자’로서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수가 적고, 과거에 그래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분쟁 현장으로 달려간 ‘여기자’가 관심 내지는 차별을 받고 있지만, 현장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보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리비아 현장에는 ‘기자’가 있다.


‘살아서’ 기사를 보냈으니 선배가 말해줬던 종군기자 제1수칙은 잘 지킨 셈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멀리서 큰 소리가 나면 혹시 총소리가 아닐까 깜짝깜짝 놀란다. 이제 그런 일도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일상은 다 잊으라’는 여행자의 제1수칙을 마음에 담고 여행금지국가가 아닌 리비아를 다시 찾을 날을 기대해본다. 그때에는 반군 기숙사로 쓰였던 알 와단 호텔 야외 수영장에 몸을 담가볼 수 있을 것이다. 호텔 엔지니어 타레크와 약속한 대로. 


<제르바에서> 끝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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