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의 시대, 절도(竊盜)의 ‘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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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김민정의 '삶과 상상력'

관광의 시대, 절도(竊盜)의 ‘죄’를 묻다.

by 경향 신문 2011. 6. 22.


세계화의 시대
, 국경을 넘나드는 관광객이 늘수록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절도도 함께 느는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특히 유명 관광지를 다녀온 주변 사람에게서는 놀라운 수법으로 지갑이나 가방을 채인 경험담을 듣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다. 그동안 내가 접한 사례만 해도, 앙코르 와트 숙소에서 열린 창문으로 긴 작대기를 넣어 지갑 든 옷을 빼낸 경우, 프라하 행 밤기차에서 끌어 앉고 잠든 대형배낭 아랫부분을 열고 귀중품을 가져간 경우, 파리에서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 앞사람이 물건을 떨어뜨린 척 바람 잡으며 뒷사람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날치기한 경우 등이 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마닐라 도심지의 멀쩡한 커피숍 안에서 바닥에 놔 둔 가방을 채간 줄도 모르고 한참 앉아서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던 나의 사례가 있다.
 
                                                               필리핀 마닐라 시내 전경|경향신문 DB

관광지에서 절도가 많이 발생한다는 건 그만큼 절도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걸 의미한다. 보통 그룹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바람을 잡거나 망보는 사람, 훔치는 사람, 훔친 물건을 넘겨주는 사람, 이를 받아 파는 사람 등의 역할을 분담한다. 한편 피해자 관광객들은 여행자 보험 청구나 새 여권 신청을 위해 경찰 신고서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한 담당 경찰이나 공증인 인력 수요도 증가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의 서류 작성을 돕는 외국어 통역 봉사자 고용이 늘기도 한다. 일을 치는사람이 늘수록 일을 처리하는사람들도 더욱 필요해지고, 관광객 절도를 처리하는 하나의 시스템이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목적은 범인을 잡고 범죄를 근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피해자 관광객이 더 이상의 피해를 보지 않고 가능한 빨리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여행지 국경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조처하는 것이다. 관광객의 체류는 모든 나라에서 단기간만 허용되며, 관광객이 지갑이나 가방 도난으로 범인을 잡겠다고 머무르는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이렇게 볼 때 어쩌면 절도는 (싱가포르나 스위스 같은 국가를 예외로 한다면?) 관광산업이 확대될수록 부산물로 따르는 비공식 경제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상 이러한 범죄는 자국 국민을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더 관대히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관광지가 관광객의 출신국가보다 더 가난한 나라일 경우, 그렇지 않더라도 관광객이 절도범보다 더 부유한 개인일 것이라는 전제하에, 심각한 범죄로 인식되지 않는 편이다. 어찌되었든 관광은 남의 터전으로 놀러 나온여가활동이고, 절도는 자기 터전에서 먹고 살기 위한생계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와 같은 생각을 해보게 된 계기가 있다. 얼마 전 나는 지난 20년 간 15회 이상 방문했던 필리핀에서 처음으로일생 최대의 도난사건을 겪었다. 마닐라 대도시 커피숍에서, 주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도 (단지 노트북으로 일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을 뿐이고), 새빨간 색의 눈에 띠는 배낭을, 그것도 출국 하루 전날 밤에, ‘그들이 집어 들고 나간 것이다, 거의 모든 귀중품을 잃어버렸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여권속의 미국비자였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한국대사관에서 하루 만에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나갈 수 있으나, 나는 미국서 받은 학술교류비자를 가지고 호놀룰루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인인 남자 두 명 중 한 명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고 가는 바람에 사태는 다소 복잡해졌다

커피숍 직원이 범인 핸드폰으로, 나가기 직전까지 서로 문자를 교환한 공범에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넣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범인의 별칭과 사건 이후 전화했다 끊은 친구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 놓은 다음, 핸드폰은 경찰서로 넘겼다. 필리핀에서는 (신분을 등록하고 은행계좌로 요금을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불카드로 요금을 찍어 넣는 프리페이드핸드폰을 많이 쓰는데 이 경우는 신분확인이 안 된다. 배낭 속 핸드폰도 함께 분실한 나 역시 다시 프리페이드핸드폰을 사서 범인 친구와 문자질을 시작했다. 처음엔 무조건 절절한호소를 날렸다. 여기에 동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고 외국인 피해자가 직접 나섰기 때문이지, 이 친구가 답변을 해오는 것이었다. 내용상으로는 난 모르는 일이다. 누가 그런 것인지 알아보겠다는 식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말을 주고받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호소에는
미국비자를 다시 받아야 해서 범인인 너의 친구 O 주변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는 식의 압력도 들어가기 시작했다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상당한 우여곡절 끝에, 미국비자가 든 한국여권과 조사인터뷰 메모가 담긴 수첩, 신분증, 아파트 열쇠를 돌려받게 되었다. 쇼핑몰 쓰레기통에서 주웠다는 전달품은 새 비닐 봉투에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었고, 중년 남성의 전달자는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신분증을 보여주려 하였다. 게다가 이 전달자는 이틀 후에 안부 문자를 보내어 내가 떠났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여러 가지로 손실이 컸지만 필리핀 영토에서 한국 국민이 미국 비자를 재발급 받는 수고로움과 비용만은 줄이게 되었다.

이번 사건에서 범인 측근이 어떤 식으로든 나와 대화를 이어나간 것은 내가 스스로를 피해자보다 더 넓은 범위의 불쌍한사람으로 위치지우고, ‘너희를 이해하니 나도 이해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범인의 핸드폰이 경찰서에 있기 때문에 내가 오래 머물수록 특별 수사를 부탁하여 핸드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추적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는 매우 낮지만) 생기는 것이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한국이었다면 범인측은 아마 확실하게 연락을 끊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국과 달리 필리핀에서는 절대로 넘지 못할 경계나 선()’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이번 경험도 절도범과 피해자라는 명백히 척진 관계에서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의중을 떠보고 절충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필리핀식 사고를 보여준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스스로와 필리핀 사회 양편 모두에게
, 관광객 절도의 죄를 묻게 되었다. 국민소득이 자기네의 1/8.5 인 나라에 와서 남들이 뺏고 싶은 물건을 들고 다니고 부러움을 사는 소비를 하는 것은 절대 자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록] 필리핀과 한국 주요 지표 비교

국가

면적()

인구()

인구밀도

(/)

일인당
 
GDP($)

HDI지수/순위1)
 
(192개국 중, 2010)

GEM 지수/순위2)
 
(93개국 중
, 2007-8

필리핀

299.764

91,983,000

(2009)

306.6
(43
번째)

3,520

(2009)

0.638/ 97

0.590/ 45

한국

100.210

48,875,000

(2010)

491
(21
번째)

29,835

(2010)

0.877/ 12

0.510/ 64

1) HDI는 인간개발지수로 기대수명문자해득률교육수준경제수준으로 산출된 지수이다.

2) GEM은 여성권한척도로 의회고위직전문직 내 여성비율과 여성임금비로 산출된 지수인데필리핀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이다.

[후기]
매사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 열흘 일정이 스무날로 늘어난 덕에, 오래 못 본 현지 거주 후배의 사는 이야기도 듣고, 가볼 일 없던 각종 관공서와 새로 조성되고 있는 대규모 도심개발지역도 둘러보게 되었다. 일처리 후에는 비행기 일정까지 날짜가 남아 평소 가보고 싶던 팔라완의 코론 섬도 다녀올 수 있었다. 택시 탈 일이 많아지니 기사분들로부터 엘리트정치에 대한 대중적 반감도 생생히 전해 듣고, 죽치고 있던 호스텔이 필리핀 관광문화를 바꿔보려는 젊은 직장인들의 집단 기획인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카메라(<-도난품목!) 없이 현장을 다니는 허탈과 불안이 진하게 섞인 묘한 해방감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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