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바이든 시대의 트럼피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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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경향의 눈]바이든 시대의 트럼피즘

by 경향 신문 2020. 11. 12.

미국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일부 주의 개표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11일(현지시간) 이미 선거인단의 절반이 넘는 279명을 확보했다. 트럼프는 민주당이 선거를 도둑질했다며 불복하고 있지만 결과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바이든은 이미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가 설치한 황금색 커튼을 걷어낼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승리 연설에서 “나는 분열이 아니라 단합을 추구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며 미국을 치유할 시간이 왔다고 선언했다.

 

트럼프를 축출했다는 점에서 이번 대선 결과는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분명히 희망적이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미국 사회의 통합과 치유가 쉽지 않은 이유도 동시에 보여준다. 바이든은 역대 최다인 7600여만표(50.7%)로 승리했지만 트럼프 또한 역대 두번째로 많은 7100여만표(47.5%)를 얻었다. 음모론, 습관적인 거짓말과 사실 왜곡, 비판 언론 공격, 관료 사회 중립성 파괴, 폭력 선동, 인종주의 조장, 권력 남용, 네포티즘, 이해 충돌, 적대국과의 공모, 자유무역 후퇴 등등. 트럼프가 4년간 미국에 끼친 해악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4년 전보다 거의 600만표를 더 받았다. 바이든 정권에서도 트럼피즘(Trumpism·트럼프식 정치)의 유령은 미국을 떠돌 것이다.

 

트럼피즘은 단순한 정치적 선동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병폐에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트럼프만 쫓아내면 미국이 정상화될 것이란 기대가 너무 성급하고 순진한 이유다.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미국은 이미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다. 진보적인 도심의 지식 노동자들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번창했지만, 보수적이고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주민들과 러스트벨트 제조업 노동자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실업, 마약, 알코올중독, 가족해체는 ‘힐빌리’들을 따라다닌다. 민주당은 실리콘밸리 기업과 할리우드 연예인의 후원을 받으며 차별없는 세상을 외쳤지만 정작 세계화의 삭풍에 대책 없이 노출된 이들의 아픔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때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게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구호로 소외된 백인들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문화적·인종적 분노를 자극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도시 대 시골, 백인 대 비백인의 지지 정당은 선명하게 갈렸다.

 

트럼피즘 청산은 그것이 미국 사회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인종차별, 성차별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에 열광하는 ‘디플로러블’들은 이제 미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들을 트럼피즘의 늪에서 건져내려면 사회안전망 강화 같은 근본적 처방으로 인종주의와 포퓰리즘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의료보험 확대 같은 낡은 제도의 개혁과 일자리 창출, 중산층 복원을 위한 과감한 경제 정책이 필수다. 집 안에 쥐가 득시글거리는 게 싫다면 그들이 살 수 없도록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바이든은 “미국이 돌아왔다”며 트럼프 지우기에 나섰지만 앞길은 평탄하지 않다. 공화당은 상원 과반을 유지하며 사사건건 바이든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민주당이 간신히 과반을 지킬 것으로 보이는 하원에서는 벌써부터 진보파와 중도파 간의 내부 노선투쟁이 시작됐다. 7100만표를 등에 업은 트럼프는 퇴임 후에도 공화당의 최대주주로 남아 바이든 정권 흔들기의 구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벌써 2024년 대선 재도전설이 나온다. 다만 면책특권이 사라지면 탈세, 성폭행 등의 혐의로 줄줄이 기소될 수 있다는 점은 변수다.

 

결국 트럼피즘의 운명은 바이든 정부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 바이든이 “나를 찍은 사람들만큼 찍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면 4년 후 미국 사회는 포퓰리즘의 유혹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체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말만 앞세우며 잊혀진 그들을 보듬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똑똑하고 더 선동적인 제2, 제3의 트럼프를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한·미관계에서도 트럼피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이든이 동맹을 존중하며 자유주의 국제질서 회복에 나서겠지만 미국 우선주의와 중국 압박 기조는 후퇴하기 어렵다. 미국 경제 회복을 위해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국가안보와 경제통상 문제를 연계시킬 가능성도 크다. 바이든 정부가 ‘미션 임파서블’ 수준의 국내 문제 해결에 몰두하다 보면 북핵 협상 등 한반도 현안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영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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