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라이언은 친이슬람”…대선판 망치는 ‘미국판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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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폴 라이언은 친이슬람”…대선판 망치는 ‘미국판 색깔론’

by 경향 신문 2016. 10. 24.

“그녀(클린턴)보다는 천치(트럼프)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우편투표로 미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찍었다는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스티브 윌리엄스(70)는 “30년 동안 미국은 여러 측면에서 나빠졌고, 거기에 책임질 사람들이 표를 달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 세대로 갈수록 삶이 어려워지고 있다면서 그 이유로 ‘이민자의 권리를 내국인들과 동일시하는 엘리트 정치인들’을 들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지만 40%에 가까운 ‘콘크리트 지지층’이 존재한다. 트럼프를 위해 발 벗고 뛰는 온라인 매체 브라이트바트는 22일(현지시간)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친이슬람적인 이민 정책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이 매체는 공화당 소속 라이언 의장이 사실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이언 의장이 트럼프의 여성·무슬림 비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친이슬람적이라거나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3차 TV토론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라이언에게 ‘친이슬람’ 딱지를 붙인 브라이트바트는 기업가 출신의 보수 우파 앤드루 브라이트바트가 2007년 만들었다. 2012년 그가 사망한 뒤에는 해군 장교 출신의 기업가 스티븐 배넌이 경영을 물려받았고, 30세의 알렉산더 맬런이 편집장을 맡고 있다.

 

온라인 매체와 라디오방송 등을 운영하는 브라이트바트는 주류 언론과 다른 ‘대안 우파(알트라이트)’를 자처한다. 배넌은 지난달 트럼프 캠프의 선거본부장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매체를 “우파 변두리의 신기한 구경거리”라 칭했고, 내셔널리뷰는 “파시스트 지망자들의 모임”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변두리’에 머물지 않았다. 여성·이슬람·이민자·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논조는 트럼프의 입을 통해 대선의 이슈가 됐다.

 

브라이트바트 식의 음모론은 트럼프 캠페인의 뼈대를 이루고 있고, 그런 얘기에 솔깃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2일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자들 중 70%가 클린턴이 승리한다면 투표 조작 덕일 것이라고 했고 50%가 클린턴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의 선동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 불신, 정치 불신의 뿌리는 깊다. 폭스뉴스를 비롯한 우파 언론과 러시 림보, 글렌 벡 같은 우익 논객들은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죽은 사람이 투표했다거나, 미등록 이민자가 투표했다는 낭설을 유포했다. ‘오바마는 케냐 태생’이라는 ‘버서(birther)’ 논란을 부추긴 것도 그들이었다.

 

턱없는 음모론을 미국인 30% 이상이 믿는 것은 이들이 꾸준히 유포한 음모론 탓이 크다. 백인 우월주의, 반(反)페미니즘, 인종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우익 매체와 논객들은 2008년 공화당 경선 때 론 폴 주위에 모였으나 힘을 받지 못했다가 이번에 트럼프를 밀어주며 존재를 과시했다.

 

오바마는 21일 마이애미의 클린턴 지지 행사에 참석해 “트럼프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라며 “수년간 공화당 정치인들과 우파 매체들이 온갖 종류의 해롭고 미친 얘기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에 따르면 나는 허리케인도 만들어낼 만큼 권력이 강하고,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의 총을 수거한 뒤 계엄령을 선포하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그런 음모론이 나쁘지 않다고 보고 방조해왔다고 오바마는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과 진보진영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정치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시민의 정서와 괴리될수록 음모론의 토양이 두터워지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가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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