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최종 판결에 아직까지 공식 입장도 정하지 못한 채 안팎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무능해서만은 아니다. 판결이 나온 이상 이 문제는 ‘노답’이다. 정부가 대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한·일관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한마디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한·일관계를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적시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체제가 비록 지금 한계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이미 한·일관계와 근대 한국을 형성하는 뿌리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금에 와서 역사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정부를 ‘완벽한 딜레마’에 빠뜨렸다.


이 판결은 수십만의 강제징용·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승소가 보장되는’ 소송의 문을 열어줬다. 일본 기업들이 배상해야 할 액수는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며 한·일관계는 단절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2012년 5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가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을 때 이미 예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의 국제법적 문제나 외교적 파장 등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과 논쟁은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파기환송이 된 이상 결과가 다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종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수년이 걸리는 동안 국내적으로 이 문제가 공론화되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다면 정부의 대책 마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의 심지가 점차 타들어가고 결국 예상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기까지 6년 동안 정치인·관료·전문가·언론·시민단체 등 어디에서도 공개적이고 진지한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수습을 해야 한다. 일단 길은 두 가지다. 법대로 끝장을 보는 것과 외교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논란 종식을 위해서는 ‘법대로’가 쉽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도 그게 부합한다. 청구권협정의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맞는지 일본의 주장이 맞는지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결판내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승소 가능성은 둘째 치고 한·일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ICJ가 국제분쟁 해결에 기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ICJ 제소는 결과와 무관하게 양국관계를 파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만일 한·일 모두 파탄을 원치 않는다면 외교적 타협이 순리다. 지금 가장 먼저 할 일은 한·일 모두 ‘파탄을 피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입장을 밝힌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난 19일 정부가 제안한 ‘한·일 기업의 자발적 위자료 지급’은 대법원의 배상 명령과 별개여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정부의 설명과 맞지 않는다.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구조적으로 극복하려는 자세도 아니다. 하지만 파국을 피해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신호를 처음으로 보낸 것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제안대로 실행하자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 제안을 논의의 기초로 삼아 외교적 타협을 해보자는 의사타진이다. 


일본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것이 외교적 타협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일본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뜻이 있다면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외교적 해결을 시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는 한국 정부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본의 협조 없이 한국 혼자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된다. 이 문제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한·일 간의 불행했던 과거’가 그 근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한·일관계를 법으로만 규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법으로 대치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자기기만이다. 한·일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사실, 일본이 처음부터 이 문제를 법적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보였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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