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일본 오사카의 최대 번화가인 도톤보리 일대가 토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사카 _ UPI연합뉴스


일본에서 도쿄 등 7개 지역에 ‘긴급사태’가 선언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새 일본 사회는 자숙(自肅)의 ‘공기’(분위기)가 자리 잡은 모습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난 7일 긴급사태를 선언하면서 “사람 간 접촉을 70~80% 줄이면 2주 후 감염자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서구 언론들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고 했다. 외출 자제나 휴업 요청이 법적 강제력이 없다는 이유다. 한 전문가는 ‘80% 접촉 감소’는 도시 봉쇄를 하지 않는 한 어렵다고도 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선 그런 비관론을 대놓고 얘기하는 이들은 소수다. 오히려 “일본인은 ‘우에사마(上樣·높은 분)’의 말을 잘 따르니까”라면서 달성 가능성을 내다보는 이들도 있다. 


결국 ‘1억 총자숙’으로 극복하자는 건데, 위화감을 지울 수 없다. ‘해야 할 것’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맞이한 긴급사태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그간 일본 정부는 소극적인 검사와 격리 정책을 취해왔다. 검사 수가 적기 때문에 감염 실태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지적에는 귀를 막았다. 감염자가 급증한 도쿄에선 감염 경로를 알 수 없는 사례가 80% 가까이 된다. 감염 집단을 찾아 박멸하는 방식은 한계에 달했다. 


위기감도 부족했다. 전문가 회의가 “1~2주가 확대냐 종식이냐의 갈림길”이라는 견해를 발표한 게 2월 하순이었지만, 감염자 수는 계속 늘었다. 3월20~22일 연휴엔 시민들이 대거 벚꽃놀이에 나왔다. 아베 총리가 도쿄 올림픽을 의식해 ‘일본은 괜찮다’는 점을 보이느라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게 느슨한 대응으로 이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긴급사태 선언에 대해서도 “너무 늦었다”는 여론이 80%대다. 일본 정부가 경제 타격 등을 우려해 주저하는 사이 감염자가 폭증했다. 그 와중에 정부와 도쿄도는 휴업 요청 대상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느라 사흘을 허비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일본 국민들이 떠안았다. 37.5도 이상의 발열이 나흘간 지속될 것 등 지나치게 엄격한 규정 때문에 검사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사례가 속출했다. 정확한 감염 정보가 없다보니 불안감이 사회를 좀먹었다. 마스크와 휴지가 매대에서 사라졌다. 아베 총리가 가구당 천마스크를 2장씩 배포하겠다고 밝히자 인터넷상에 “농담하냐” “아베마스크냐” 등 비난이 쇄도한 것은 불안한 민심의 임계점을 보여줬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는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정부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믿을 때 시민들은 ‘빅브러더’의 감시 없이도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무능과 혼란과 책임 회피로 얼룩졌던 코로나19 대응을 일본 국민들에게 ‘마루나게’(통째로 던짐)한 것처럼 보인다. 국민들은 불안감 속에 ‘각자도생’의 길을 강요받고 있다. 


한 평론가는 “아베 정권이 긴급사태”라고 했다. 아베 정권은 온갖 스캔들에도 생명을 연장해왔다. 일본 지도층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1억 총참회론’으로 책임을 피했다. ‘1억 총자숙’의 공기 속에 비판마저 ‘자숙’할 것인가. 코로나19 사태에서 일본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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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일본 올림픽위원회(JOC) 인사의 발언이 주목을 끌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유도 동메달리스트인 야마구치 가오리(山口香) JOC 이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영향으로) 선수들이 만족스럽게 준비할 수 없는 상황에선 도쿄 올림픽을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정상 개최’를 고수하는 가운데 선수단을 파견하는 JOC 인사가 대회 연기를 처음으로 공개 요구한 것이다. 그는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를 실현한다는 올림픽은 세계인이 즐길 수 없는 상황에서 열어선 안된다. 개최를 강행해 올림픽 그 자체에 의문의 시선이 향하는 게 가장 두렵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야마시타 야스히로(山下泰裕) JOC 회장의 반응은 예상대로라고 할지. “모두가 힘을 쏟고 있는 때에 JOC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한마디로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어 표현에 ‘구키(空氣) 요메나이’라는 게 있다. 공기, 즉 분위기를 읽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국에도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일본에서 ‘공기’가 주는 무게감은 훨씬 크다. ‘공기’를 읽고 맞혀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 상당하다. 야모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공기의 연구>에서 이런 일본 사회의 공기를 “저항하는 사람을 이단시하고 ‘공기 거역죄’로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정도의 힘을 가진 초능력”이라고 했다.


야마구치 이사가 “JOC나 선수들 사이에선 ‘연기하는 쪽이 낫지 않나’라고 말할 수 없는 공기가 있는 것 같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일본 지도층은 앞장서 도쿄 올림픽에 ‘부흥올림픽’ 등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에 따라 대회의 중지나 연기를 ‘아래’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코로나19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도 이런 ‘공기’의 위력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중증 환자 치료에 중점을 두고 가벼운 증상자에겐 자택 요양을 권고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검사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단’ 취급을 당한다. 검사 확대를 주장하는 전문가나 TV 방송은 전화 항의, 이른바 ‘덴토쓰(電凸·전화 돌격)’에 시달린다. 100만명에게 간이검사를 무상 지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던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도 “의료기관에 혼란이 야기된다”는 비난에 2시간 만에 철회했다. 한국의 대량 검사는 의료 붕괴로 이어질 뿐이며, 차를 탄 채 검사를 받는 ‘드라이브 스루’ 방식은 부정확하다는 사실 호도도 횡행한다.


문제는 이런 ‘공기’가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리게 하고, 책임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론(異論)을 용납하지 않다보니 순발력이나 유연성도 떨어진다. 이득을 보는 건 기득권 세력이다. 마침 일본 국립감염병연구소가 코로나19 정보를 독점하기 위해 민간연구소의 검사 참여를 배제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한 일본 언론인은 전후 경제성장을 이룬 ‘저팬 애즈 넘버원(1등 일본)’ 신화가 여전히 일본 사회에 횡행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일본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드러내고 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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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은 어떻게 될까요?” 지난주 만난 일본인 기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얘기다. 코로나19 여파로 해외에서 선수나 관객들이 오겠냐고 했다.


요즘 일본 정부나 언론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5개월 남은 도쿄 올림픽 개최 문제다. 지난달 30일 한 인터넷 사이트가 ‘도쿄 올림픽 중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자 ‘가짜 뉴스’ 취급하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지난 주말 ‘소동’을 봐도 그렇다. 영국 집권 보수당 소속 런던시장 후보가 트위터에 도쿄 대신 런던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 게 ‘불씨’가 됐다. 일본 언론들은 발언 내용을 보도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터넷 여론도 들끓었다.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해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이 영국 선적임을 들어 “너희 배나 가져가라”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코로나19 확산이 멈추지 않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 대응에 불신이 커진 때문이다. 24일 현재 크루즈선 감염자는 691명으로, 전체 승선자의 20%에 육박한다. 일본 열도 전역에서도 감염자가 계속 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많다. 코로나19의 국내 유입을 막는 ‘미즈기와(水際·물가) 대책’에만 집중하다 국내 유행 가능성을 소홀히 했고, 크루즈선의 해상 격리에만 신경 쓰다 선내 집단감염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음성 판정을 받고 하선한 승객의 감염이 잇따라 확인되는 등 검역에 구멍이 뚫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각료 3명이 코로나19 정부대책회의를 빠지고 지역구 행사를 챙긴 것도 비난을 샀다. 아베 총리가 ‘대책본부 8분 출석’ 이후 ‘언론사 간부들과 3시간 회식’을 한 것도 입방아에 올랐다. 정권 스캔들을 추궁하는 야당을 향해 “이 와중에”라고 역공하던 아베 정권도 결국 ‘보여주기식 쇼’를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도쿄 올림픽 취소’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는 ‘올림픽, 취소되나? 과학자들, 올림픽 개최 불가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아베 정권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다. 도쿄 올림픽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 소비세 인상 등으로 주춤하고 있는 경제를 부양하고, 각종 스캔들로 흔들리고 있는 정권 기반을 다지길 바라왔기 때문이다.


유념할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아베 정권이 도쿄 올림픽 성공에 집착하다가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정치적 판단이 개입하면서 사태를 키운 것이다.


아베 총리는 7년 전 도쿄 올림픽 유치 연설에서 2011년 원전 폭발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福島)에 대해 “언더 컨트롤”(통제하)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내달 26일 시작되는 올림픽 성화 봉송을 후쿠시마현에서 시작하는 등 도쿄 올림픽을 ‘부흥올림픽’으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피난지역은 아직도 안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주민들도 많다. 후쿠시마든 코로나19든 ‘언더 컨트롤’이라는 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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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폭넓게 모으고 있다는 인식으로, 모집하고 있다는 인식은 없었다.”


지난달 28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정부 주최 ‘벚꽃을 보는 모임’을 ‘사유화’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일본공산당 미야모토 도루(宮本徹) 의원이 “(총리 지역사무소의) 참가자 모집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원래 ‘공적·공로’가 있는 이들을 초대하는 모임 참가자를 사무소가 대거 모집해도 괜찮냐는 지적에 이런 기상천외한 답변을 한 것이다. 미야모토 의원은 “48년 일본어를 사용해왔지만, ‘모으다’와 ‘모집하다’는 같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0일 시작된 정기국회에서 벚꽃 모임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자료가 없다”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 “중대 또는 복잡·곤란한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지난 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모리 마사코(森雅子) 법무상은 지난달 31일 각의(국무회의)에서 이달 7일 정년퇴임 예정이던 구라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도쿄고검 검사장의 정년을 8월까지 연장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검사장의 정년 연장은 전례가 없는 일로, 검사 정년을 만 63세로 규정한 검찰청법 위반 의혹까지 제기된 터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결정이 오는 8월 물러나는 이나다 노부오(稻田伸夫) 검사총장(검찰총장) 후임으로 구로카와 검사장을 지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로카와 검사장은 아베 정권과 가까운 인물. 일본 검찰은 복합리조트(IR) 사업과 선거부정 의혹 등으로 자민당 의원들을 수사하고 있다. 결국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를 무디게 하려는 포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무리수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제가 다른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탓이다. 각종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던 아베 정권으로선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아베 총리는 야당의 추궁에 장기인 ‘밥 논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침밥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쌀밥’에 대해 질문받은 것처럼 ‘먹지 않았다’고 논점을 흐리는 식이다. 야당에 대해선 “이 시국에 ‘벚꽃’만 하고 있다”고 역공하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은 지난달 29일 질문에 나선 입헌민주당 렌호(蓮舫) 의원을 두고 “이 상황에서 감염증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 감각에 놀라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려 물의를 빚었다. 자민당은 심지어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재해 발생 시 내각 권한을 강화하는 ‘긴급사태 대응’ 신설 논의 등을 해야 한다며 ‘개헌론’ 군불을 땠다.


이런 안하무인식 태도는 신종 코로나 정국으로 각종 스캔들이 지지율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전례가 없는 ‘나쁜 사례’를 남발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아베 정권의 각종 스캔들에서 드러났듯 공사를 혼동하고, 공금을 유용하는 것은 국정의 사유화다. 입맛에 따라 검찰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검찰의 사유화다. 어쩌면 전염병만큼이나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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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 A, 을(乙) B….


2016년 7월 일본 사가미하라(相模原)시의 지적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입소자 19명이 살해되고 26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가미하라 장애인 살상 사건’. 요코하마지방법원에서 지난 8일부터 시작된 공판에서 피해 장애인들의 ‘존재’는 ‘기호’로 표시됐다. 사망자는 ‘갑’, 부상자는 ‘을’로 분류돼 알파벳이 붙었다. 법원 측은 “유족들이 익명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족과 피해자 가족들은 또 다른 방청객과 피고에게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로 차단된 방청석에 앉았다. 아무 죄 없는 피해자 측이 편견과 차별을 우려해 이런 조치를 요구한 것이 일본 사회의 실상을 보여준다. 


사가미하라 사건은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피고 우에마쓰 사토시(植松聖·30)는 2016년 7월26일 새벽 자신이 일하다 해고됐던 복지시설에 침입해 잠들어 있던 장애인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범행 후 “중증장애인은 살아 있어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구류 중에도 언론 취재에 적극 응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내가 하는 일은 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고, “의사소통이 안되는 장애인은 불행밖에 낳지 않는다”고 했다. 


피고는 지난 8일 첫 공판에서 “모든 분들에게 깊이 사죄한다”고 말했지만, 그 직후 손가락을 물어뜯는 등 소란을 피웠다. 변호인 측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왜 이런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규명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일과 16일 공판은 의미 있는 자리였다. 피고의 일방적인 주장에 묻힌 피해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 측은 피해 장애인들에 대한 추억을 담은 유족들의 공술 조서를 읽었다.  


갑B(당시 40세·여)의 어머니는 “소파에 있으면 뒤에서 껴안곤 했다”면서 “딸의 웃는 얼굴을 봐달라. 피고가 빼앗은 생명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갑C(26세·여)의 어머니는 “개성을 갖고 열심히 살았다. 둘도 없는 딸이었다”고 했다. 갑H(65세·여)의 어머니는 “전차나 버스에서 아이나 노인이 있으면 자리를 양보하는 다정한 성격”이라고 전했다. 장애인은 불행의 근원이라고 했던 피고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술이다.  


이번 재판에선 어머니의 요청으로 유일하게 실명이 공개된 ‘미호’(19세·여)의 이야기도 나왔다. 어머니는 미호가 아기 때 중증 지적장애를 동반하는 자폐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반자살이 머리를 스친 적도 있지만 육아에 열중하면서 미호로부터 살아가는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미호의 어머니는 “갑이나 을이 아니다. 미호라는 존재를 알았으면 했다”고 했다.


일본 사회는 이번 재판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존재와 이들이 놓여 있는 위치 등을 되짚어보고 있다. 장애인과의 공생을 강조하면서도 장애인 복지시설 건설에는 반대 깃발이 세워지는 사회. 장애인이 ‘갑A’가 아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기 힘든 사회. 비단 일본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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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어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한 해가 저물 때쯤 ‘올해의 유행어’나 ‘올해의 신조어’ 등을 선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엔 ‘신어(신조어)·유행어 대상’이 있다. 1984년부터 출판사인 자유국민사가 한 해 동안 벌어진 사건이나 유행 등을 포착한 표현 10개를 골라 이 가운데 대상을 정해왔다.


지난 2일 발표된 올해의 대상은 ‘원팀’(ONE TEAM)이다. 지난 9월20일~11월2일 일본에서 처음 개최된 럭비월드컵에서 사상 첫 8강에 진출한 일본 대표팀의 구호다.


일본 럭비대표팀 31명은 외국 출신 선수가 7개국 15명으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제이미 조셉 감독은 필요한 선수들이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대표로 선발했다. 자칫 오합지졸로 끝날 선수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낸 정신이 ‘원팀’이었다. 대표팀은 뉴질랜드 출신 리치 마이클 주장을 중심으로 결속했다. 개막전에서 러시아에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강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사모아를 차례로 꺾고 조별리그 전승으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일본 열도는 들썩였다. 레플리카(모조품) 유니폼이 동이 나는 등 곳곳에 럭비 열풍이 일어났다. ‘신조·유행어’ 후보 30개에도 갑자기 럭비 팬이 된 사람들인 ‘벼락 팬’, 대표팀 구호인 ‘4년에 한 번이 아니다. 일생에 한 번이다’ 등 럭비 관련 표현이 5개나 들어갔다.


이런 만큼 ‘원팀’은 ‘신어·유행어 대상’으로 일찌감치 점쳐졌다. 국적이나 출신지가 다른 이들이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면서 목표를 향해 굵은 땀을 흘리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이었을 터다.


하지만 이런 ‘원팀’의 정신은 일본 사회에선 아직은 ‘머나먼 얘기’다. 이는 ‘신어·유행어 대상’의 이례적인 심사평에서도 드러난다. 심사위원들은 “원팀은 세계에 퍼지고 있는 배외적 분위기에 대한 명확한 반대 메시지인 동시에 가까운 장래에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본의 존재 방식을 시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그러면서 “(원팀의 정신이) 아베 총리에게도 확실하게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지난 4월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해 5년간 34만명의 외국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일손 부족이 심각한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값싼 ‘단순노동력’으로 취급할 뿐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금융기업 HSBC가 매년 현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살고 싶고 일하고 싶은 나라’ 조사에서 올해 일본은 33개국 중 32위를 차지했다. 특히 ‘생활에 익숙해지는 용이성’ ‘커뮤니티 허용성’ ‘친구 만들기’ 항목에서 평가가 낮았다. ‘헤이트 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등 특정 민족에 대한 차별도 여전하다.


럭비대표팀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결국 ‘성과’가 있었기에 ‘원팀’ 정신을 주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난해 US오픈, 올해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테니스 선수 오사카 나오미에 대한 시각에서도 이런 이중잣대를 느낀다. 오사카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닛신식품은 한 애니메이션 광고에서 오사카의 갈색 피부를 하얀 피부로 바꿔 ‘화이트 워싱’ 논란을 빚었다. 일본의 한 개그맨 콤비는 “오사카에게 필요한 것은 표백제”라고 했다. ‘일본 스고이(대단해)론’이 횡행하는 일본 사회에선 타자에 대한 관용은 ‘조건부’다.


 지난 2월 96세로 타계한 도널드 킨 전 컬럼비아대 교수는 평생을 일본 문화 연구에 천착했다. 그는 일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말년에는 일본에 귀화했다. 그는 생전 지인에게 보낸 e메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내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은 내가 얼마나 일본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말할 때밖에만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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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공산당은 나다’, ‘#공산당은 동료다’.


지난주 일본 트위터에서 이런 해시태그(#)를 단 글들이 확산됐다.


일본공산당 지지자들이 올린 글들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은 공산당 지지자가 아니지만 “공산당과 주권자를 우롱하는 움직임에 반대한다” “이론(異論)을 말했다고 딱지를 붙이는 데 반발한다” 등의 글들이 잇따랐다. 계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유’ 때문이다. 


지난 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 입헌민주당 스기오 히데야(杉尾秀哉) 의원이 2016년 방송국에 전파 정지를 명령할 수 있다고 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상의 발언에 대해 질문할 때였다. 각료 좌석에 앉아 있던 아베 총리가 실실 웃는 얼굴로 스기오 의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공산당”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행위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靑木 理)는 “총리가 ‘공산당’을 비판의 단어로 삼는 것은 넷우익같이 저열하다. 삼권분립의 근저가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아베 총리가 야유로 주의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비슷한 식의 야유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자신이 연루된 의혹을 받는 가케학원 스캔들과 관련한 문서 작성의 경위를 따지는 무소속 이마이 마사토(今井雅人) 의원을 향해 각료석에서 “네가 만든 것 아니냐”고 야유했다. 아베 총리는 “좌석에서 발언을 한 것은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발언 내용은 철회하지 않았다.


사실 아베 총리는 초·재선 의원 시절 국회 상임위원회 등에서 질문 중인 야당 의원에게 자주 야유를 하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야유 쇼군(將軍·장군)’이라고 불렸을까.


이런 태도는 한 나라의 지도자인 총리가 돼서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2012년 12월 2차 집권 이후 “빨리 질문해” “당신에게 주의하고 싶다” “없어, 그런 건” 등 문제가 된 야유가 한둘이 아니다. 마이니치신문이 국회의사록을 조사한 결과 올해에만 26차례의 야유 등 돌출적인 발언이 있었다.


50년 가까이 일본 정계를 지켜봐온 정치평론가 모리타 미노루(森田實)는 마이니치에 “전후 많은 총리를 봐왔지만 이처럼 품격을 결여하고, 민주주의를 흔드는 듯한 발언이 잇따른 적은 없었다”고 했다. 정부의 대표인 총리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에게 야유를 하는 것은 삼권 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는 20일 가쓰라 다로(桂太郞) 전 총리(2886일)를 제치고 역대 최장 재임 총리에 등극한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최근 잇따른 스캔들에 휘말리고 있다. 스가와라 잇슈(菅原一秀) 경제산업상과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 법무상이 선거법 위반 의혹 등으로 잇따라 낙마했고,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상은 “(수험생들은) 자기 분수에 맞춰서 하면 된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아베 총리 자신도 정부 주최의 ‘벚꽃을 보는 모임’에 지역구 지지자를 대거 초대해 ‘국고의 사유화’ 비판을 받고 있다. 장기 집권에 따른 해이가 역력하다.


일련의 스캔들이 아베 정권에 결정타가 될지는 미지수다. 아베 총리를 대신할 당내 차기 후보나 대안 야당이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선 아베 내각을 지지하는 이유로 ‘다른 내각보다 낫다’가 많다. 반면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다’가 가장 높다. 아베 총리는 잇따른 스캔들에 문제가 된 인물을 경질하거나 제도를 중지시키는 등 ‘꼬리자르기식’ 대응을 하고 있다. 대안 부재와 국민의 무딘 반응은 이런 대응을 반복하는 이유다. ‘달리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는’ 정권이 줄곧 이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걸로 일본의 무엇이 바뀔지 궁금하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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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를 대내외에 선포한 ‘즉위례 정전의식’은 ‘레이와(令和·현 일왕 연호)’ 왕실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의식이었지만, 일본 왕실이 껴안은 문제를 새삼 부각시켰다. 이른바 ‘안정적인 왕위 계승’ 문제다. 


의식이 치러진 왕궁 내 풍경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일왕의 옥좌인 ‘다카미쿠라(高御座)’ 왼쪽에 동생 후미히토(文仁·53)를 비롯한 아키시노미야(秋篠宮) 일가 4명이, 오른쪽엔 휠체어를 탄 작은 아버지 마사히토(正仁·83) 등 히타치노미야(常陸宮), 미카사노미야(三笠宮),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일가 7명이 섰다.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왕 때 남성 왕족 6명, 여성 왕족 7명이 좌우로 선 것과 대비된다. 의식에 참가할 수 있는 성인 남성 왕족이 2명밖에 없는 데 따른 궁여지책이다. 일본 왕실전범은 부계 혈통인 남성만 왕위 계승 자격을 인정한다. 현재 계승 자격자는 후미히토와 그 아들 히사히토(悠仁), 마사히토 등 3명뿐이다. 고령인 마사히토를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2명밖에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2일 도쿄 왕궁에서 열린 ‘즉위례 정전의식’에서 나루히토 일왕을 향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도쿄_AP연합뉴스


남성 왕족 부족은 일본 왕실 최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1965년 후미히토 이후 9명 연속으로 여성이 태어났다. 2006년 41년 만에 남성 왕족인 히사히토가 탄생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로 평가된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郞) 정부는 여성여계(女性女系) 일왕을 인정하는 왕실전범 개정안을 제출할 방침이었지만 히사히토의 탄생으로 없었던 일이 됐다. 


현재 일본 왕실에서 30대 이하 왕족 7명은 히사히토를 빼면 전부 미혼 여성이다. 여성은 결혼하면 왕족 신분을 잃는다. 히사히토가 즉위할 쯤에 왕족이 없어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히사히토가 즉위한 뒤도 문제다. ‘다음 왕위’는 히사히토의 부인이 남자아이를 낳아야 이어진다. 현재 13살인 히사히토에게 일본 왕실의 ‘존속’이 걸려 있는 셈이다. 


지난 8월 히사히토가 양친과 함께 처음 해외 방문을 했을 때도 이런 사정이 드러났다. 히사히토와 어머니 기코가 탄 비행기가 부탄 공항에 도착하고 20분 뒤 아버지 후미히토가 다른 비행기편으로 왔다. 비행기 사고로 1·2위 왕위 계승자가 동시에 사망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데도 왕위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대책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2017년 6월 국회는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확보하기 위한 모든 과제, 여성 궁가 창설 등”을 신속하게 검토하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즉위 의식이 일단락되는 올 가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내년 봄으로 또 미룰 것이란 관측이 많다. 


논의의 공전(空轉) 배경에는 남계 남성에 의한 왕위 계승을 고집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보수·우익 세력들이 있다. 최근 자민당 내 의원 모임이 2차 대전 패전 뒤 일반인이  된 ‘구 왕족’의 남성 일부를 왕족으로 복귀시키는 제언을 내놓은 데서도 이런 집착이 읽힌다. 이들은 “남계 왕위 계승을 126대 관철해온 것이 일본의 전통”이라며 “모계 천황(일왕)을 인정하면 이질적인 왕조, 천황답지 않은 천황을 낳게 된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는 일왕이 초대 진무(神武) 이래 126대에 걸쳐 계보가 끊이지 않고 존재해왔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신화’가 깔려 있다. 일왕이 ‘절대군주’였던 전전(戰前) 천황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일본 우익들의 바람도 있다.  


유럽의 왕실에선 남녀평등 등의 영향으로 ‘장자 우선’ 제도가 확산되고 있다. 교도통신의 지난 26~27일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의 81.9%가 여성 일왕에 찬성했다. 일본 사회 최고의 ‘금기’로, 일본인에 내면화돼 있다는 ‘천황제’의 향방과 관련해 향후 왕위 계승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 지 주목된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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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달라서, 모두 좋아.”


일본 동요시인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과 역할이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90년 전쯤 지어진 이 시를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지난 4일 임시국회 소신표명 연설을 통해서였다. 


아베 총리는 “모두 달라서, 모두 좋아”라는 구절을 언급한 뒤 “새로운 시대의 일본에 요구되는 것은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 모든 사람이 그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듦으로써 저출산·고령화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가 지역구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인 가네코의 시구를 인용했다고 전했다. 


가네코의 시구를 인용해 다양성을 강조한 연설 내용 자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위화감을 느낀 건 아베 총리의 ‘말 따로, 행동 따로’ 때문이다. 그는 연설에서 성적 소수자나 일본에서 생활하는 외국인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 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 일본은 외국인 노동자 수용 확대에 나서고 있다. 지난 4월부터 새 재류 자격을 신설해 5년간 최대 35만명의 외국인을 받아들일 계획이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의식과 열악한 근무환경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를 ‘공생’의 대상이 아니라,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은 일제 식민지 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3~4대째 살고 있는 재일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도 앞뒤가 맞지 않다. 아베 총리는 ‘선택적 부부 별성제도’에 대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선 결혼을 하면 부부가 성씨를 똑같이 해야 하는데, 여성의 사회 참여를 위해서도 법을 고쳐 개인이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목소리가 크다.  


기실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 차별을 부추기는 쪽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문제” “ ‘성희롱죄’라는 죄는 없다” 등 문제 발언을 연거푸 했다. 스기타 미오(杉田水脈) 중의원 의원은 “LGBT(성적 소수자) 커플은 생산성이 없다”고 했다. 아베 정부가 최근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출품된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대한 보조금을 취소한 것도 “다양성 인정” 발언을 뒤집는 것이다. 현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표현에 대해선 ‘배제’하겠단 의도로,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위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설에서 두드러진 것은 아베 총리의 왜곡된 역사인식이다. 그는 1919년 국제연맹에 파견됐던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 전권대사의 ‘인종평등’ 제안을 거론하면서 “일본이 내건 큰 이상은 지금 국제인권조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고 상찬했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중국 동북부에 진출하는 등 식민지배의 당사자였음을 외면한 것이다. 이를 두고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은 “이 정도의 후안무치한 세계사 왜곡은 없었다”며 “역사에 대한 무반성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인종평등’이 지금 일본 사회에 실현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베 정권 들어 혐한(嫌韓) 등에 의한 차별이나 헤이트스피치(특정 민족에 대한 차별·혐오 발언)가 횡행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가 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배제, 헤이트스피치에 대한 개선을 권고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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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이 지난 6월 도쿄 2020 올림픽과 패럴림픽 로고가 새겨진 건물을 지나가고 있다. 도쿄_AP연합뉴스


“오. 모. 테. 나. 시.”


2013년 9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총회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위원인 아나운서 다키가와 크리스텔이 손동작에 맞춰 한 음절씩 끊어 말한 ‘오모테나시’ 연설이 화제를 모았다. 


‘오모테나시’는 특별한 대접을 뜻한다. 다키가와는 “오모테나시는 손님을 마음으로부터 맞이한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 연설은 올림픽 유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모테나시’는 그 해 일본 유행어 대상에 올랐다. 다키가와는 지난달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과 결혼을 발표했다. 


그렇게 유치한 도쿄올림픽 개최까지 1년이 채 안 남았지만, ‘오모테나시’ 전선에 먹구름이 가시지 않고 있다. 줄곧 지적돼온 폭염 등 날씨 대책을 좀체 찾지 못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7월24일부터 8월9일까지 도쿄의 날씨조건은 최악이다. 그나마 작년보다 나았다는 올해 도쿄 도심의 최고기온은 모두 30도를 넘었다. 그 중 6일은 35도 이상이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 평균기온이 27도,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24도였다. 


도쿄올림픽 조직위는 골머리를 싸고 있다. 이미 마라톤, 경보 등의 시작시간을 새벽으로 앞당겼다. 일부 도로에 열 차단제를 입히고 있지만, 사람 키 높이에선 오히려 기온과 자외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13일 조정 시범경기가 열린 경기장 관중석에 인공 눈을 뿌리는 실험을 했지만, 관중석 온도는 별반 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이 이뤄진 수상경기장은 예산 문제로 관중석 절반만 지붕을 설치했다. 지난달 도쿄 오다이바 해상공원에서 열린 오픈워터 시범경기에선 화장실 같은 악취가 났고, 파라트라이애슬론 시범경기에선 상한의 2배를 넘는 대장균이 검출됐다.


방송중계권 수입 때문에 7~8월 개최를 요구한 IOC에도 문제가 있지만, 일본 측 대응에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많다. 일본은 도쿄올림픽 유치신청서에 “이 시기는 맑은 날이 많고 따뜻해 선수에게 이상적인 기후”라고 했다. 


한 일본 언론인은 도쿄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일본의 ‘열화(劣化·열등화)’를 본다고 했다. 철두철미와 세심함은 옛말. 근본적인 대책보다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폭염 대책으로 우치미즈(국자로 물을 떠서 거리에 뿌리는 풍습)를 제안하면서 “오모테나시 문화를 알리자”라고 우기는 데선 ‘정신 승리’를 보는 것 같다.


‘오. 모. 테. 나. 시.’ 


도쿄올림픽의 ‘오모테나시’는 무엇을 지향하는 걸까. 아베 신조 정권은 도쿄올림픽을 ‘부흥 올림픽’으로 삼을 뜻을 노골화하고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원전 사고를 복구했다는 점을 전 세계에 과시하겠다는 것이다. 2013년 도쿄올림픽 유치 연설에서 후쿠시마 원전이 “언더 컨트롤”(관리하에 있다)이라고 한 ‘정치쇼’가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오모테나시’는 누구를 위한 걸까.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때 욱일기를 경기장에 들고 오는 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과거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일본 우익들의 ‘헤이트(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데모’에 등장하는 욱일기가 ‘평화의 제전’에 펄럭이는 장면을 기어코 보겠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현재 일본에선 혐한 감정이 고삐 풀린 채 분출하고 있고, 아베 정권은 이런 분위기를 정권 부양에 활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후쿠시마 원전 문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철저한 반성과 책임, 자기혁신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도쿄올림픽에선 이 둘을 대충 덮고 넘어가려 하고 있다. ‘부흥(復興)’ 올림픽의 미명하에 ‘부인(否認)’ 올림픽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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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가 잘 팔리나?”


“당연히 ‘한국 때리기’지.”


이달 초 도쿄 중심가에서 우연히 듣게 된 대화 내용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기로 각의(국무회의) 결정하면서 한·일 간 갈등이 악화일로를 걷던 때였다. 대화 내용으로 미뤄볼 때 언론·출판계에서 일하는 이들인 듯했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이런 대화를 하는 데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요즘 일본 매체들의 ‘한국 때리기’는 도를 더하면 더했지, 전혀 수그러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여론에 영향이 큰 방송의 행태가 가관이다. 최근 한국에서 공분을 산 화장품기업 DHC의 자회사 ‘DHC TV’의 역사 왜곡과 한국 비하가 공중파 방송에까지 번진 모양새다.


뉴스나 연예 정보 등을 가볍게 다루는 ‘와이드쇼’들은 “한국 괘씸하다” 일색이다. 해설자로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야유 섞인 말을 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한국 정부나 국민에 대해 “반일이다” “유치하다” 등으로 비난한다. “한국인은 감정적이어서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등 헤이트스피치(특정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도 서슴없이 등장한다. 반면 아베 신조 정권의 경제 보복조치의 문제를 짚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일본 방송은 한국 없이는 먹고살지 못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실제 그런 모양이다. 일본의 한 민간방송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청률 때문이죠. 매번 시청률 그래프를 봐요. 시청률이 뚜렷하게 떨어지기 전까지는 계속하는 거죠.”


결국 ‘시청률 지상주의’가 문제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한국 때리기’를 하면 기꺼이 TV를 보는 일본인들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왼쪽)이 19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오른쪽)를 외무성으로 불러 일본이 요청한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에 한국이 응하지 않는 데 대해 항의하고 있다. 도쿄 _ 김진우 특파원


이런 흐름에는 아베 정권 들어 뚜렷해진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 움직임이 작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역사와 책임을 부인하려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이 일본 국민의 ‘반한(反韓)’ ‘혐한(嫌韓)’ 감정을 부채질하고, TV도 거리낌 없이 ‘한국 때리기’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술은 대부분 사라졌다. 지난 3일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지가 된 것은 과거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을 부인하는 역사수정주의에 기반한 정치가들의 궤변과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의 협박에 따른 것이었다. 아베 정권은 인권 문제인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측의 대응을 압박하고, 사실상의 경제 보복조치를 취했다.


끊이지 않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적인 언동의 근저에는 결국 과거 식민지였던 한국·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감히’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한번 손을 봐줘야 한다’는 식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이런 태도는 고노 다로 외무상이 지난달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에게 “무례하다”라고 한 것에서도 엿보인다. 전 외무성 관료는 이 발언이 과거 사무라이가 일반 서민이 ‘무례’를 범했을 경우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던 ‘기리스테고멘’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한 재일동포는 “일본은 적대시할 상대방이 있어야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나라”라고 했다.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으로 한·일관계는 더욱 들썩이게 됐다. 일본에서 ‘혐한’이 더욱 기승을 부릴 건 자명하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일본 측에서 ‘위에서 보는 시선’으로 자주 사용하는 ‘숙숙(肅肅)하게(담담하게)’ 맞서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혐한’에 ‘혐일’로 대응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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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가 ‘멜팅폿(melting pot)’이다. 인종의 용광로, 즉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란 의미다. 강대국 미국에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스타벅스를 가도, 동네 마트를 가도, 영화관을 가도 뜻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가 들린다. 나의 두 아들은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립학교를 공짜로 다녔다. 초등학생 둘째 아들은 같은 피부색의 일본, 베트남 친구와 자주 어울렸지만 프랑스 여자 친구도 있었다. 큰아들은 공립학교이지만 인도, 중국 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인 고등학교에 다녔고 점심시간 식당에는 카레 냄새가 가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와의 회담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인종적 다양화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가 2018년 미국 인구통계를 인종별로 분류한 데 따르면 백인은 전체의 60.5%였다. 유권자 중 백인 비율은 아직 절대 다수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전체 투표자 중 백인 비율은 72.8%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젊은층에서 비백인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2045년이면 백인 인구는 49.7%로 과반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백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절대적 우위를 상실하고, 미국이 그야말로 소수민족의 나라가 되는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백인들 사이에는 이 같은 미국 사회의 변화가 싫은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백인들의 지위, 미국 사회의 구조와 주류 문화가 달라지는 게 두려운 이들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은 버지니아 북부 지역에서도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향해 별 이유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백인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 불만의 백인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란 굴레를 벗어던지고 노골적인 백인 중심주의를 외칠 수 있게 해준 이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역대 공화당 정치인들도 백인 유권자들을 선동했지만 특정 그룹만 속내를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도그 휘슬(dog whistle)’ 정도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이제 이민자 출신 비백인 여성 하원의원까지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대놓고 공격한다. 그는 지지자들이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외치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본다. 트럼프 자신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이고, 세 부인 중 두 명이 이민자다. 그가 공격한 여성 하원의원들이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와 다른 점은 피부색 하나뿐이다. 결국 트럼프는 미국은 백인 중심 나라이니 불만이 있는 비백인 이민자들은 본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정말이지 뼛속까지 인종주의자다.


잇따른 인종주의 선동은 ‘정체성 정치’의 변종이다. 정체성 정치는 성, 종교, 인종, 성적지향 등 공유되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를 말한다. 여성운동, 민권운동, LGBT운동 등으로 표출됐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 사회의 인구통계학적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백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는 현실을 활용한 백인 정체성 정치를 재선 전략으로 공식화했다. 트럼프와 참모들은 여기에 더해 민주당 여성 의원 등 비백인 이민자들을 향해 미국을 사랑하지 않는 급진좌파, 사회주의자라고 공격을 퍼붓는다. 자신의 정적에 빨간 딱지를 붙이는 색깔론이자 매카시즘이다.


트럼프의 백인 정체성 정치가 시대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누구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미국은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국 포크 음악의 아이콘 우디 거스리의 노래처럼 “이 나라는 너와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종주의와 색깔론에 기대는 트럼프의 재선 전략은 위험하다. 멜팅폿 미국 사회에서 인종적 조화를 어렵게 하고 사회의 건전성을 망가뜨릴 수 있다.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 조 바이든의 비판처럼 트럼프는 재선을 위해 미국의 사회 조직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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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일본 신문이나 TV를 보는 게 심란했던 적이 없다. 일본의 경제 보복조치를 두둔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억측과 중상, 불만과 조롱이 넘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북 정책이나 ‘촛불혁명’ 등을 두고 일본의 ‘한국 깎아내리기’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도가 지나치다.


한국의 전략물자 수출관리가 의구심이 간다는 억지뉴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보복조치의 이유로 ‘부적절한 사안’을 들면서 확인되지 않는 얘기를 흘리고 북한과의 연관 의혹까지 제기한다.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일본 정부·여당 관계자발로 전략물자의 ‘북한 유출설’을 흘린다. 아베 신조 정권과 가까운 신문·TV가 근거 없이 한국의 수출관리가 엉망이라는 보도를 내보낸다. 사린가스나 VX 같은 생화학무기 제조에 전용 가능한 물자 유출설도 곁들인다. 정부·여당과 일부 언론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국을 ‘안보 문제국’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뉴스나 연예 정보 등을 가볍게 다루는 TV <와이드쇼> 프로그램들이 이런 내용을 반복해서 다룬다. VX가 북한이 김정남(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을 암살할 때 사용됐다고 설명하면서 사건 당시의 자극적인 화면을 내보낸다.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도 등장해 이번 조치를 정당화한다. 생각해볼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은 불신과 냉소다.


이번 조치가 “안보상 우려에 따른 무역관리 재검토”라는 일본 정부 주장을 답습한다. 일본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데 한국은 왜 감정적으로 반응하냐는 것이다. 한국의 수출관리 문제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제대로 수출관리를 하고 나서 국제사회에 호소하라”고 비아냥댄다. 한국에서 일본 맥주가 인기가 많으니 맥주수출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엔 실소만 나온다.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다.


지난 12일 한·일 당국 간 첫 실무회의에서 일본 측은 ‘부적절한 사례’가 북한 밀반출은 아니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야말로 ‘치고 빠지기’ 식이다. 이미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의 안보 문제를 건드려 ‘코리아 리스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런 억지주장은 ‘신문·방송 → 와이드쇼 → 주간지 등 잡지’ 순서로 확대되면서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보수 매체와 우익 댓글러들의 합작으로 ‘한국 때리기’ 기사는 야후저팬 같은 인터넷포털 뉴스의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정부의 조치가 ‘타당하다’는 응답이 50%를 넘었다. 한국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여론에 불신과 혐오의 연료를 대고 불을 붙이면서 ‘한국 때리기’의 구조를 짠 게 누구인지 곱씹어봐야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 있는 일본과 마주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데 이번 전개 과정을 보면 “한국을 손봐줘야 한다”는 것을 빼곤 무슨 명분과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 조치가 일본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일본 기업에도 피해가 되돌아오는 “극약 같은 조치”라는 지적은 이미 수차례 나왔다. 일본의 한 전문가는 “한국이 두 손을 들 거라고 보는 건 판단 미스”라고 했다. 오히려 한국 여론을 강경하게 만들어 정부의 운신 폭을 좁힐 수 있다. 일본 측이 20년 전 외환위기 때 일본에 손을 벌리던 한국을 상정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서 “한국을 괴롭히고,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는 냉소도 나온다. 


그게 아니라면 일본은 무얼 노리는 걸까. “한국에 일본의 불신을 명확하게 전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나갔다. 일본을 추월할 한국의 산업성장을 막고, 나아가 동북아 질서에서 한국을 제치고 주도권을 유지하겠다는 걸까. 자꾸 기어오르는 한국을 밟아주고 쥐락펴락하겠다는 걸까. 이런 생각이 맞다면 일본은 위험한 도박에 손을 대는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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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한 비핵화 외교가 리얼리티 쇼처럼 이어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6·30 판문점 회동은 반전과 감동이 있는 최고의 한 편이었다. 방한 직전 비무장지대를 방문할 것이며 김 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싶다는 트윗을 올렸을 때만 해도 설마 진짜 만날까 생각했다. 하지만 31시간여 만에 즉흥 제안은 현실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6년 만에 상호 적대국인 북·미의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웃으며 손을 마주잡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땅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은 대통령이 됐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에서 두번째)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세번째)이 지난달 30일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진행된 북·미 정상회동에 앞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왼쪽),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시간을 조금만 확장하고 주인공들의 면면을 뜯어보면 쇼는 더욱 흥미롭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북·미관계는 최악이었다. 북한은 연일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했고 미국 내에서는 북한의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경고가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경고했고 일부 미국 언론은 대북 군사적 대응 가능성의 확률을 계산했다. 그랬던 북·미관계가 드라마처럼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북·미 정상은 이미 두 번의 정상회담을 했고, 이제는 손을 맞잡고 북한 땅까지 밟았다. 


반전 드라마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은 워싱턴의 아웃사이더 트럼프 대통령이다. 집권 초기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은 그의 변덕이 전쟁을 불러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6월12일 역사상 첫번째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노벨 평화상이란 연관 검색어까지 등장했다. 또 다른 주인공은 핵개발을 완료했다며 미국에 맞대응할 수 있다고 위협하던 김 위원장이다. 그는 미국이 지정한 대표적 인권침해국가 북한을 삼대에 이어 통치하고 있는 30대 젊은 독재자다. 그가 인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며 미국과 운명을 건 외교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물론 역사상 처음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이란 목적지는 제시됐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한 구체적 방법은 합의된 게 아직 없다. 친서와 악수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맞다. 하지만 전에 없던 북·미 정상의 관여 행보를 사진촬영용, TV용이라고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한국전쟁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상징하는 판문점을 북·미 정상이 함께 밟은 것 자체가 역사적 사건이다. 70년 적대를 이어온 북·미가 한 번에 불신을 씻어낼 수는 없다.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 두 나라는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키워야 한다. 북·미 정상의 계속되는 만남은 그 동력이 될 것이다. 전략적 인내로는 북한을 변화시킬 수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북한 정상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자신은 행동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평은 정당하다. 안타깝게도 “사진 촬영 기회에 미국의 영향력을 낭비하지 말고 독재자와 러브레터를 주고받지 말라”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주장은 틀렸다.


아직까지 북·미 정상 주연 리얼리티 쇼의 결말을 맞히기는 어렵지만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결정적 시점은 예측 가능하다.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대통령으로 남을지, 재선 성공 후 어떤 대북 정책을 펼지 불확실하다. 북·미관계는 그전에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달려가야 한다. 아직 계절이 여섯 번 바뀔 시간이 남았다. 곧 실무협상이 시작될 것이고 연내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길도 열렸다. 남·북·미·중 정상의 종전선언도 가능하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의 휴전선 회동까지 이뤄졌으니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나 김 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이 성사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리얼리티 쇼 속편이 기대된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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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예 ‘손타쿠’를 넘어서네요.”


최근 ‘노후자금 2000만엔’ 문제에 대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대응을 두고 도쿄의 외교 소식통이 혀를 내두르며 한 말이다.


‘손타쿠’는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촌탁(忖度)’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 말은 아베 정권 들어선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긴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정부 관료나 공무원들이 알아서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점을 비꼰 것이다. 이런 ‘손타쿠’를 넘어선다고 평가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발단은 지난 3일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다. “연금 생활을 하는 고령부부는 30년간 약 2000만엔(약 2억1900만원)의 여분 저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에 ‘정부가 연금정책의 실패를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금융담당상은 11일 “정부의 입장과 다르다”면서 “공식 보고서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한술 더 떠 “(재무성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아) 보고서 자체가 없어졌다”며 야당이 요구하는 예산위원회 개최를 거부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금융청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 있는 보고서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보고서를 작성한 워킹그룹은 대학교수, 변호사, 민간싱크탱크 대표 등으로 구성됐다. 재무성과 후생노동성 등 관계부처도 옵서버로 참가하고 있다. 이 워킹그룹은 아소 부총리의 자문을 받아 설치됐다.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면서 정작 답은 듣지 않겠다고 하는 셈이다. “전대미문의 부조리극”(마이니치신문)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아베 정권은 그간 ‘은폐 본질’을 누누이 비판받아 왔다. 남수단 평화유지활동(PKO) 육상자위대의 일일보고 은폐, 모리토모(森友)학원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과 관련한 재무성 문서조작 등 불리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숨기거나 발뺌해 왔다.


‘아베 1강’ 체제의 장기화로 정권 내 ‘손타쿠’ 구조가 확산된 데 따른 것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노후자금 2000만엔’ 논란도 아베 정권의 ‘은폐 본질’이나 ‘손타쿠’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정권의 중추들이 아예 대놓고 은폐나 손타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사실 이번 보고서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게 아니다. ‘30년간 2000만엔이 필요하다’는 추계의 근거자료는 후생노동성이 제공했다. 금융청이 독자적으로 ‘30년간 1500만~3000만엔 필요’라는 추계를 내 워킹그룹에 제시한 것도 드러났다. 정부로선 보고서의 문제 제기를 냉정하게 짚어보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다음달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에 불리한 사실이 나오면 곤란하니까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정권 눈치를 보는 보고서만 내라는 격이다.


이런 아베 정권의 막무가내식 태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이다. 문제가 생겨도 발뺌을 하거나 거짓말로 강변하면 넘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아베 정권에 심어준 것이다. 정치평론가 이토 아쓰오(伊藤惇夫)는 최근 도쿄신문에 “관료의 손타쿠나 불상사, 정치가의 폭언·실언이 빈발해도 내각 지지율은 잠깐 내려갈 뿐 곧 회복된다. 국민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고, 지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흔히들 아베 정권의 장기화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느끼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7월 참의원 선거가 그 잣대가 될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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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트럼프였기에 회담이 가능했고 트럼프이기에 뜻밖의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북핵 협상 역시 트럼프식 협상 전략의 한계에 묶여있다는 지적이 다수다. 


뉴욕타임스는 협박을 기반으로 하는 트럼프의 협상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가혹한 조치로 상대방을 위협하고, 마감 시한을 설정하고, 양보를 압박하다가, 불완전한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파국을 피하고, 자체적으로 승리를 선언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트럼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_AP연합뉴스


북·미 비핵화 협상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북한은 2017년 11월까지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 발사를 이어갔고,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 ‘완전한 파괴’라는 말로 위협했다.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특사외교로 국면이 급변했고 친서외교를 통해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양측은 회담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송환 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합의 이행을 위한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고, 그럼에도 트럼프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성과로 내세우며 성공론을 펴고 있다. 


트럼프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본다면 북핵 협상은 아직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북·미는 한반도 비핵화의 최종 상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비핵화 달성을 위한 로드맵도 그리지 못했다. 트럼프는 선 비핵화 대 선 제재완화로 맞붙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빈손으로 걸어나오면서 북한 비핵화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대북 관여 정책이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다. 일각에서는 비핵화 협상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서 전략적 인내 전략을 택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집권 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핵 문제가 곪아 터지게 만들었다”며 폐기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병행하는 정책 기조를 제시했다. 하지만 1년 간의 관여 정책이 한계에 봉착하자 결국 한층 강화된 대북 제재에 기반한 수정된 전략적 인내로 기울고 있다. 2020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입장에서 미국민을 향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막았다는 선전만으로 정치적 효과는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기존 정부의 실패한 정책들과 차별점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지금이다. 버락 오바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이란 원론적 합의를 구체적 실행으로 옮기는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이 돼야 한다. 트럼프가 진정한 협상의 기술을 보여줄 때다. 때문에 트럼프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1년만에 대북 제재만 믿고 전략적 인내로 돌아설 것이 아니라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여에 나서야 한다. 협박에 기반한 트럼프식 협상 공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협박이 아닌 상호 존중에 기반한 협상이 필요하다. 지지층만 보는 정치적 과시가 아닌 실질적 성과가 중요하다. 


북한은 올해 연말을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상태다. 트럼프가 전략적 인내로 돌아서고 북·미 대화가 결국 단절된다면 내년부터 다시 2017년 때와 같은 위기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 대선에 가까이 갈 수록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은 더 큰 정치적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북한 역시 비핵화 로드맵 조차 내놓지 않으면서 제재 해제만 요구할 때가 아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항공모함과 같다는 말이 있다. 방향을 선회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돌면 다시 방향을 틀기 어렵다는 의미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후에도 대북 관여 정책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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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일본 가와사키(川崎)시에서 51세 남성이 학교 버스를 타려던 초등학생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2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났지만 일본 사회의 충격은 가시지 않는 모습이다. 일본 사회가 껴안고 있는 고민거리들이 드러난 까닭이다. 


이 남성이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정확한 동기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상 일본 사회에 수차례 충격을 안긴 ‘도리마 사건’으로 규정짓는 분위기다. 일본에선 특별한 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위해를 가하는 것을 ‘도리마(거리의 살인마) 사건’이라고 한다. ‘묻지마 살인’인 셈이다. 


도리마 사건은 2008년 아키하바라(秋葉原) 사건을 통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도쿄 번화가인 아키하바라의 ‘보행자 천국’(차 없는 도로)에서 한 남성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 행인들을 친 뒤 차에서 내려 흉기를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범인은 여러 회사를 전전하던 비정규직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대상은) 누구라도 좋았다”고 했다. 일본 경찰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6년까지 도리마 사건이 해마다 4~14건 발생했다고 도쿄신문은 전했다.


이번 사건이 18년 전 이케다(池田) 사건을 상기시킨다는 지적들도 많다. 2001년 6월 한 남성이 오사카교육대 부속 이케다초등학교에 흉기를 들고 침입해 초등학생 8명을 숨지게 하고 15명을 다치게 했다. 이케다 사건과 이번 사건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약자인 어린아이들이 습격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교 버스는 일본 정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등·하교 방범 계획’에서 통학 안전 대책으로 꼽혔다. 학생들이 학교 버스를 타려고 할 때 갑자기 공격을 당한 이번 사건은 일본의 안전 대책에도 과제를 던졌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또 하나 입에 오르내리는 용어가 ‘확대 자살’이다. 자살을 바라는 사람이 아무 관계가 없는 이들까지 끌어들여 사회에 대한 울분을 풀려고 한다는 것이다. 앞서 이케다 사건의 범인도 “인생의 막을 내릴 때는 많은 사람들을 길동무로 삼으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범죄심리학자인 하라다 다카유키(原田隆之) 쓰쿠바대 교수는 NHK에 “자살이 목적이지만, 사회의 주목을 더 모아서 더 큰 것을 저지르겠다는 왜곡된 심리”라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범인의 연령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확대 자살은 공격성이 가장 높은 연령대인 20~30대가 많은데 범인은 50대다. 왜 지금까지 이런 ‘마이너스 에너지’를 쌓아온 걸까. 그는 오랫동안 취직을 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던 고령의 삼촌 부부와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장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데 방점이 찍히고 있지만, 히키코모리를 ‘범죄예비군’으로 보는 편견을 조장한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일어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가와사키시에 적지 않은 재일한국인(조선인)이 산다는 점 등을 근거로 “범인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흉악 범죄나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 혐오 발언)’가 반복된 것이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2016년 4월 구마모토 지진 이후에도 이런 악성 루머가 퍼졌다. 일본 사회에 잠복해 있는 ‘민족 차별’이 또 얼굴을 내민 셈이다.


지난 3일은 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 억제법을 실시한 지 3년째를 맞은 날이다. 이 법은 시행 이후 헤이트 집회가 감소하는 등 일부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념법의 한계가 지적돼 왔다. 지난달 29일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열린 집회에서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는 “법 시행 이후에도 헤이트스피치는 방임 상태다. 실효성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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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3년차에 접어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혼란 상태다. 북핵 협상은 위기 상태이고, 미·중 무역협상은 보복관세를 주고받는 악순환에 빠졌고, 이란과는 전쟁 위기다. 트럼프의 협상 스타일이 혼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트럼프의 협상 스타일은 최근 미국 조야의 최대 관심사인 이란 문제에서 확인된다. 그는 20일(현지시간) 트위터에서 “이란과의 협상준비 보도는 가짜뉴스”라며 협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전날에는 “이란이 싸우길 원한다면 그것은 이란의 공식적인 종말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 근처에 로켓 포탄이 날아든 데 대한 반응이었다. 트럼프는 멀쩡하게 지켜지던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고, 이란의 원유수출 금지 제재를 부활하고, 이란 정부가 운영하는 군대를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이란이 반발하자 항공모함과 B-52 폭격기를 급파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대화를 모색 중이다. 백악관은 이란에서 미국 대표부 역할을 하고 있는 스위스 정부에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트럼프가 전화를 기다린다고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CNN은 보도했다.


대북 정책에도 같은 협상 패턴이 적용됐다. 그는 2017년 여름 북한에 대해 “완전한 파괴”와 “화염과 분노”를 위협했다. 하지만 정상회담이 시작된 후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며 180도 달라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좋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편에선 관세폭탄을 퍼붓고 있는 미·중 무역협상에서도 전형적인 스타일을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4일 루이지애나주 방문을 마치고 백악관에 귀환하고 있다. 워싱턴/AP연합뉴스


트럼프의 협상법은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에 비유된다. 미국 대통령이 핵전쟁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상대국들에 믿게 해서 쉽게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리처드 닉슨 정부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고안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스콧 케네디 선임고문은 트럼프의 미·중 무역협상을 ‘미친 삼촌 전략(crazy uncle strategy)’으로 평가했다. 테리 매컬리프 버지니아 주지사는 하루 종일 폭탄 트위터를 날리는 트럼프를 향해 “다락방에 사는 미친 삼촌 같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대결로 치닫는 치킨게임에서 미치광이 전략은 통할 수 있다. 진심을 알 수 없는 트럼프의 발언들은 예측 불가능성을 키워서 협상력을 높인다. 트럼프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상당하다. 실제 트럼프의 전격적인 1차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에 김정은은 공손한 표현의 친서를 보낸 바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에서 두번째)이 20일 장시성 간저우시에 있는 희토류 생산업체 진리영구자석과기유한공사에서 희토류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간저우_신화연합뉴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이 전략은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통하지는 않는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은 이제 예측 가능한 스타일이 됐다. 실제 중국, 북한, 이란 어느 나라도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다. 케네디는 “트럼프의 미친 삼촌 전략은 피로감뿐 아니라 듣는 이들이 그의 폭발에 익숙해지고, 그 폭발이 순간적 불만인지 실질적 위협인지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무색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서 트럼프의 전략은 완전히 노출됐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시우스는 “트럼프 대외정책의 문제는 집권 2년이 넘으면서 해외 국가들이 그를 간파했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파괴적인 스타일은 중국과 북한 정책에서 수익률을 떨어트렸다”고 지적했다. 또 강경책과 외교 사이를 오가는 그의 언급이 “한때 협상력을 만들어 줬지만 이제는 혼란만 야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식 협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예측 불가능성은 미국의 신뢰 추락으로, 특히 불확실성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치킨게임 당사자들이 모두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한다면 상황은 더욱 위험해진다. 트럼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백악관에는 ‘전쟁을 속삭이는 자’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도 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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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에 비해 ‘사건·사고’나 ‘격변’이 많지 않은 나라라고들 말한다. 사회가 안정돼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반면 한 일본 시민운동가는 변화의 열망이 시들한 일본 사회를 한국과 비교하면서 한숨 쉬기도 했다.  


이런 일본에서 일왕 교체로 인한 ‘개원(改元·연호가 바뀜)’은 수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임에 틀림없다.(앞선 개원은 30년 전인 1989년 1월에 있었다.) 지난 4월1일 새 연호 ‘레이와(令和)’ 발표부터 4월30일 아키히토 일왕 퇴위, 5월1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 4일 일반 국민 참하(參賀·궁에 들어가 축하함)까지 눈길을 끌어모으는 이벤트들이 줄줄이 있었다.  


TV에는 “좋은 시대가 오면 좋겠다”는 식의 시민 인터뷰가 반복해서 나왔고, ‘새 시대’라는 단어가 흔하게 사용됐다. 전·후임 일왕의 일대기, 일왕가 역사 등 왕실 관련 보도도 쏟아졌다. 


공영방송 NHK가 아키히토 전 일왕이 참배한 이세신궁을 소개하면서 “왕실 선조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곳”이라고 보도한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신화와 역사를 섞어 일왕을 신격화한 보도 사례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1일 총리 관저에서 새 연호 ‘레이와’ 선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도쿄_EPA연합뉴스


개원 휴일이 포함된 사상 최장의 ‘골든 위크(4월27~5월6일)’가 끝났지만, 들뜬 분위기는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70대 여성은 “연호가 바뀐다고 내 생활이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 연호가 바뀌었을 뿐이다. 연호가 바뀌었다고 ‘새 시대’가 오는 것도 아니다. 2019년이 2020년이 된다고 ‘새 시대’가 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길 바라거나, 그렇게 여기도록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개원 열기의 이면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 언론들은 고전에서 유래한 새 연호 결정에 아베 총리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1989년 ‘헤이세이(平成)’ 연호 발표 때와 달리 총리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새 시대, 새 일본’을 강조한 것은 정치적 이용에 다름 아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는 최근 아사히신문에 “연호 발표부터 개원까지 전개된 것은 이 나라의 폐색감(꽉 막힌 느낌)을 속이기 위한 정치쇼”라고 말했다.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미디어를 이용한 ‘극장형 정치’ 수법이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정치적 제자인 아베 총리도 못지 않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잡아두는 데는 일본 왕실만한 무대장치는 없다. 


개원 열기와 함께 아베 정권의 발목을 잡던 통계부정 문제는 쏙 들어갔다. 모리토모·가케학원 스캔들 등 아베 정권의 각종 의혹들이 뚜렷한 진상 규명 없이 덮인 것과 마찬가지 패턴이다. 


공교롭게도 개원과 함께 아베 총리는 ‘전제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공언하고 나섰다. 지난해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던 모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실제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기보다 북한과의 대화 국면에서 일본만 빠져있다는 비판을 의식해 ‘뭔가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쇼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개원에 이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잡아끄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이런 정치쇼를 계속 연출하는 게 장수 정권의 비결일 지도 모르겠다.


아마 아베 정권은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감바로(힘내자)” 분위기를 끌어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쇼에 국가와 시민사회의 근간들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들은 새겨들을 만하다. 극장형 정치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진지한 토론을 사라지게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1일자 사설에서 “(아베 총리가) 정중한 설명도 없이 태도를 뒤집는 것은 지금까지도 봐온 광경”이라면서 “설명 없는 방침 전환은 위험하다”고 밝혔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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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치의 화두만이 아니라 주인공들도 과거로 돌아간 모습이다. 트럼프가 백인 전성시대의 향수를 앞세워 70대 대통령 시대를 열더니 이제는 민주당에서도 70대 후보들이 선두로 나섰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민주당 대권 도전을 선언하면서 워싱턴에서 노인정치(gerontocracy) 논란이 일고 있다. 올해 72세인 트럼프는 76세인 바이든이 출마를 선언한 지난 25일 트위터에 “졸린(sleepy) 조, 레이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적었다. 바이든이 기운 없고 졸린 노인처럼 보인다며 놀린 것이다. 그는 다음날에도 백악관 기자들을 만나 바이든에 비해 자신은 “젊고 활기찬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바이든도 응수했다. 그는 ABC에서 ‘졸린 조’라는 호칭은 처음 들었다며 자신은 ‘하이퍼(hyper) 조’로 불린다고 말했다. 자신은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란 것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여야의 선두 주자들이 모두 70대다. 트럼프는 취임 기준 70세로 역대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세웠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69세 기록을 갈아치웠다. 재선에 성공한다면 2021년 재임식 때는 74세로 본인 기록을 다시 깨게 된다. 민주당 대선후보 선호도 1위인 바이든은 당선되면 78세다. 취임 기준으로 이미 레이건이 재임 후 퇴임할 때보다 한 살 더 많다. 젊은층의 지지 열기 덕에 나이가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친(crazy) 버니’라는 별명을 지어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현재 77세로 여야 후보들을 통틀어 최고령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선호도 1, 2위가 모두 70대 후반으로 80대 대통령 시대를 열 수 있는 사람인 셈이다. 


이 정도면 고령 문제를 지적할 만하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리처드 코언은 대놓고 “샌더스와 바이든은 대통령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반대한다. 그는 “시대정신은 항상 움직인다. 당신이 70세가 넘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을 지나갔다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바이든이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을 아침 시리얼 정도로 알고, 샌더스가 인기 래퍼 드레이크를 영국 해적으로 알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중간선거로 하원의원의 평균 나이가 10세 낮아진 것을 보면 대선후보 고령화는 시대적 요구에도 맞지 않다. 


물론 건강하고 지적 능력이 유지된다면 생물학적 나이는 문제될 게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73세로 재선에 도전하던 레이건이 56세의 월터 먼데일 후보가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며 먼데일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어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멋있게 되돌려준 사례도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는 ‘노인정치를 변호하며’라는 칼럼에서 올해 78세인 민주당 1인자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모범 사례로 들며 “나이 많은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70대 대통령 시대의 진짜 문제는 물리적 나이만이 아니라 미국 정치의 방향성에 있다. 버락 오바마라는 40대 흑인 대통령의 집권으로 미래를 말하던 미국 정치가 불과 몇 년 만에 백인들의 추억 되살리기 경쟁으로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 사회가 미래에 대한 개척과 모험을 원하는 역동의 시대를 지나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사실 백인들의 풍요로운 과거를 되돌려주겠다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의 역주행은 이미 예고됐다. 그 역주행을 멈추겠다고 나선 바이든 역시 미래를 말하기보다는 트럼프식이 아닌 민주당 버전의 옛날 미국을 되살리겠다고 강조할 뿐이다. 미국의 대선전이 비전 경쟁이 아니라 과거 해석 경쟁이 된 듯하다. 어쩌면 황혼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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