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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이범준의 도쿄 레터4

미시마를 생각한다 도쿄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부과정 헌법 수업을 들었다. 수업시간표에 강의실이 900번 교실이라 적혀 있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서는데도 눈에 익었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가 토론을 벌인 50년 전 그 장소다. 이 토론회는 전공투가 제안하고 미시마가 수락했다. 극우와 극좌로 불리는 미시마와 전공투는 일본 사회를 변혁한다는 같은 목표가 있었다. 토론회를 앞두고 “미시마를 논파하여 연단에서 자결케 하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양측은 서로를 설득하지도, 일본 사회를 설득하지도 못했다. 이듬해 전공투는 사라졌고 미시마는 할복했다. 미시마가 죽은 1970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김윤식이 도쿄대학 외국인 연구원으로 있었다. 미시마 죽음에 관한 평론을 한 편 썼는데, 세월이 흘러 괜한 일을 했다고.. 2020. 9. 2.
대화를 위한 일본어 2000년대 초반 쓰이기 시작한 ‘꽃미남’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이 뜻을 묻는 단어다. 일본 만화 에서 왔지만 본래 뜻과는 무관한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뜻인 일본 속담 ‘꽃보다 경단’에서 경단과 남자의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점에 착안한 만화 제목을 줄였다. 우리식으로 하면 ‘금강산미남’과 비슷해 대부분 일본인들은 꽃미남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한다. 꽃미남이 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주면 한국어를 아는 일본인도 놀라워한다. 일본 영화 에는 가출한 딸을 찾는 부모가 나온다. 나이가 비슷하고 연고가 없는 시신이 발견되면 어디든 달려가 확인한다. 이번에도 딸이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전차를 기다린다.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한국어 자막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이다. 하지만 열차가 연착하지도, 사.. 2020. 8. 5.
신중함이라는 병 일본인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은 관광객 정도다. 이곳에 살면서는 오히려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항공권 발급시간이 10초 지났다고 예약한 비행기 대신 다음 항공편 구입을 허리 숙여 알려주고, 태풍으로 철로가 끊겨 숙소에 전화하니 상냥하게 위약금 청구서를 보내온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이 조금씩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주문 마감시간에서 1분이 지났다고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식당 주인이나, 곱빼기 회덮밥을 보통으로 잘못 만들었음을 알고는 그대로 버리는 주방장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일본인 마음에는 무엇보다 규칙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이 실패라는 근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연구 결과 코로나19를 옮기는 시기는 대체로 증상 발현 이틀 전부터 증상.. 2020. 6. 10.
개인의 죽음 도쿄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1969년 전공투가 점거했다는 야스다 강당이 보이고 양옆으로 법학부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배우고 가르쳤다. 그런데 내가 입학해서 배운 것은 이러한 법학부 역사가 아니라, 재난에 대비하는 방법이었다. 학습실 내 책상 서랍을 여니 헬멧이 들어 있었다. 전공투가 쓰던 것과 같은 모양인데 본래 지진 대비용이라고 한다. 교내 위험물 분포를 익혔고, 대피장소와 이동경로를 외웠다. 자전거보험 안내서를 받았고 공대생은 실험자보험에 가입했다. 이 나라가 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고 느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베 신조 총리는 “PCR 검사를 늘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2020.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