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반성한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소개했을 뿐 자신의 반성은 담지 않았다. 오히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당당히 밝혀서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케 했다. 단언컨대, 아베 담화는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내놓은 과거사 관련 문건 중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박근혜 정부는 아베 담화의 수많은 내용 중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한 문장만을 갖고 담화 전체에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일본과 외교를 못한다고 못 박았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 갈등이 깊어지고 이로 인해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차질이 생기자 미국은 화해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관계 개선에 나서야 했다. 그러자니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노선 변경’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흉물스러운 아베 담화를 긍정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개월 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다. 박근혜 정부는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키려다 ‘외교 참사’를 일으키고 국정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일 태국 방콕 임팩트포럼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방콕 _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강제징용 판결 문제 처리 과정은 박근혜 정부와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강제징용 문제가 대법원의 최종확정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한 위기의식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도 없었다. 판결 이후에는 일본의 협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사법부 결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며 스스로 퇴로를 끊는 강경 자세를 취했다.


대일 외교에서 감정이 앞서면 안된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 외교는 일본 문제를 잘못 다루면 외교의 축이 흔들리게 되는 구조적 취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역사의식이 끔찍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상대가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서 외교를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긴 숟가락을 갖고 가서라도 악마와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무리수였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중단시켜 미국을 판에 끌어들이는 잘못된 대응 카드를 꺼냈다. 이 때문에 한국은 GSOMIA 중단 효력이 발생하기 전인 22일까지 원상복구를 해달라는 미국의 압박을 받게 됐다. 정부는 일왕 즉위식에 특사를 보내고 다자회의장에서 환담 기회를 만드는 등 대화를 적극 시도하고 있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앞으로 2주 내에 일본과 문제 해결에 합의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면 ‘매우 험난한 한·미관계’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시간에 쫓겨 강제징용 문제를 대충 마무리하면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같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 갈등에 미국이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바로 직전 정부에서 목도하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공자는 사람의 수준을 넷으로 분류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은 성인에 가깝고,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은 그다음이다. 곤란을 겪으면서 배우는 사람(困而學之)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이며, 최하의 부류는 곤란을 당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困而不學)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지금이라도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한·일관계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이다. 한국 헌법은 식민지배가 불법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구조적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충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한다 해도 유사한 분쟁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강제징용에 버금가는 난제가 지금 또 닥쳐오고 있다. 이번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3일부터 시작된다.


거듭된 정부의 대일외교 실패가 낳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한국이 도덕적으로 절대 우위를 가져야 마땅한 역사 문제에서 일본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초현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일 접근법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정부의 용기가 필요하다. 외교안보라인을 전면 개편하고 심기일전하기를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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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이 4일부터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무협상을 갖는다.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중단된 대화가 다시 이어지는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출발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실무협상은 서로 인식 차이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확인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진짜 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년이 넘도록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다. 실무협상이 조속히 3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져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임기 내에 의미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에 북한 문제에서 어떤 것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는 이번 실무협상이 결정하게 된다. 국가전략노선의 대전환과 함께 모험을 시작한 북한의 운명도 여기에 걸려 있다.


예를 들면 북·미는 이번 실무협상에서 한반도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단초를 만들 수도 있고 현실적 성과를 얻기 위해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다. 또는 파국적 결별을 맞아 군사적 대치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며, 친구도 적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내년 미국 대선이 끝날 때까지 북·미관계와 북핵 문제가 동면에 들어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번 실무협상은 대화국면이 시작된 이래 가장 중요한 승부처다.


지금까지 남·북·미는 모두 전략적으로 면밀하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정치적 성과에 집착해 협상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리고 미국이 실수를 만회하려는 과정에서 대화가 꼬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화의 기초가 부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북·미 모두 원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서두르다가 남북과 북·미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북한은 ‘트럼프=미국’으로 인식한 것이 문제였다. 북한은 지금도 트럼프만을 상대해 대미관계를 풀어가려는 전략을 고집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야구 경기에 비교하면,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상황이 펼쳐졌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는 실책과 본헤드 플레이가 속출한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부터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무협상을 앞두고 미국과 북한이 모두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번 실무협상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고 성공적인 3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북한 문제를 최대 국정과제로 삼고 ‘올인’하다시피 공을 들인 문재인 정부에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시작된 북·미 대화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큰 탓인지 몰라도 정부의 현재 상황 인식은 너무 낙관적이다.


북·미 실무협상 재개가 확정된 직후 급히 만들어낸 뉴욕 한·미 정상회담과 대통령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조급함이 묻어난다. 미국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국은 약간 흥분 상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에서는 북·미 대화 전망을 낙관할 만한 요소보다는 우려스러운 부분이 더 많다. 그럼에도 정부는 북·미관계에 커다란 대전환이 일어날 것처럼 말하고 있다. 상황을 과장하고 있는 것인지, 실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실제로 이번 실무접촉은 쉽지 않은 협상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퇴진과 “리비아 방식은 틀렸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정책 변화와는 무관하다. 


볼턴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주도한 적이 없고 미국이 지금까지 북한에 요구해온 것도 리비아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말한 ‘새로운 방법’은 그 실체가 있는지조차 아직 불분명하다. 북한이 이런 낌새를 모를 리 없다. 최근 북한의 대미 메시지에는 실무협상이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을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지 못한 미국에 돌리겠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한반도 상황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전쟁 위기의 한반도 상황을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업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반도 평화의 결실을 자신의 임기 내에 거둬야 한다는 조급함은 덜어내는 것이 좋다. 은행나무는 손자가 덕을 볼 것을 염두에 두고 심는다는 의미에서 공손수(公孫樹)라고 한다. 한반도 평화정착 프로세스는 공손수를 심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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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로 한·일이 충돌하면서 생긴 불똥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태웠다.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GSOMIA 연장 시한을 이틀 앞두고 이 협정 종료를 결정했다. 결정 배경은 한·일 갈등과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대응이지만 GSOMIA 종료 결정은 한·일 갈등과는 또 다른 차원의, 그리고 한·일 갈등 못지않은 중대한 파장을 낳을 새로운 문제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GSOMIA는 사실 한·일 간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협정이 아니다. 한국은 30여개국과 GSOMIA를 체결하고 있다. GSOMIA는 국가 간에 오가는 군사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정보를 공유하도록 의무화하지 않는다. 다만 정보를 주고받을 때 GSOMIA에서 규정하고 있는 보안원칙·제공경로·관리방법·보호의무 등을 따르라는 것이다. 음식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나 자동차가 빠르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고속도로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NHK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도쿄 _ 연합뉴스


일본과의 GSOMIA가 국민정서에 안 맞는 것도 사실이다. GSOMIA가 체결되기까지 국내에서 벌어진 갖은 우여곡절이 이를 상징한다. GSOMIA로 인해 일본이 더 큰 정보상의 이득을 본다는 주장도 있고 GSOMIA가 한·미·일을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로 묶기 위한 기제이므로 한국이 아닌 미·일의 안보를 위한 거라는 주장도 있다. 2016년 GSOMIA 체결 이후 지금까지 파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는 종료 배경에 대해 일본이 ‘안보상의 신뢰’를 문제 삼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함으로써 양국 간 안보협력환경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고, 이런 상황에서 민감한 군사정보를 다루는 협정을 일본과 지속하는 것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또 GSOMIA가 없어도 한·미 연합자산과 다른 한·미·일 정보공유 기제를 통해 일본과 협력이 진행될 수 있기에 정보·감시 공백은 없다고 했다. 일본을 제외한 주변국과 공조가 훌륭하고 남북군사합의로 군사적 긴장도가 낮아진 점, 북·미가 대화 국면에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안보상황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이 말대로 되려면 앞으로 한·미 공조가 더욱 공고해져야 하고 남북군사합의는 계속 효력을 발휘하며 작동해야 한다. 또한 북·미는 계속 대화를 이어가면서 비핵화 협상에서 진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 남북관계는 올스톱 상태다. 북·미는 대화를 재개키로 합의했지만 이른 시간 안에 성공적인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GSOMIA 종료로 한·미 공조가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GSOMIA에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이 깊이 얽혀 있다. 어떤 의미에서 GSOMIA는 일본보다 미국에 더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는 졸속적으로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한 데 이어 이듬해 콩 구워 먹듯 일본과 GSOMIA를 체결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모두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박근혜 정부를 압박해 순차적으로 이뤄놓은 것들이다. GSOMIA가 미국의 아시아전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GSOMIA를 한국이 종료시키면 미국도 큰 피해를 입는다. 미국의 국익에 손상이 가는데 한·미관계에 영향이 없을 리 없다. 물론 한국이 GSOMIA를 깨겠다면 미국은 한국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그에 따른 책임은 한국이 진다. GSOMIA 종료가 미국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내린 결정이며 미국도 한국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미 공조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청와대의 설명이 맞는지 여부는 앞으로 벌어지는 일을 봐야 알 수 있다. 


청와대가 처음 GSOMIA 카드를 들고나왔을 때 미국이 한·일 갈등 중재에 나서도록 압박해보겠다는 의도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GSOMIA를 종료시켜 미국을 움직이기 위한 카드가 아님을 입증했다. 어쨌든 이제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GSOMIA 중단으로 빚어질 파장이 매우 심대할 것임은 자명하다. 청와대는 정치·안보·국민정서 등 모든 것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청와대의 말대로 이번 GSOMIA 중단 결정은 모든 것에 대비하고 검토한 ‘철저하게 준비된 조치’여야 한다. 준비없이 시작했다 갈 데까지 가게 돼서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아베마리아를 외치며 시도하는 ‘헤일매리 패스’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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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8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백악관에서 군축 역사의 기념비적 합의문에 서명했다. 사거리 500~5500㎞의 지상발사 탄도·순항미사일을 생산·보유·실험하지 않기로 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다. 냉전 종식의 신호탄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1991년까지 모두 2700기의 미사일이 폐기됐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는 이 조약을 승계했다. 


‘핵군축의 골드스탠더드’라는 평가와 함께 가장 성공적 핵군축 사례로 꼽히던 INF가 2일(현지시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국은 지난 2월2일 국무부 성명을 통해 INF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도 같은 날 즉각 탈퇴 선언으로 맞받았다. 그리고 6개월의 유예기간이 종료되는 이날부터 ‘포스트 INF’ 시대가 열린다. 31년간 이 조약이 유지되는 동안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INF가 결국 ‘미국 최우선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종말을 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INF 폐기를 지론으로 내세워온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영향도 컸다.


INF 폐기로 양대 핵강국 미·러 간 군비통제 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이미 2002년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이 폐기됐고 2007년에는 유럽재래식전력감축조약(CFE)이 러시아의 탈퇴로 무력화됐다. 1996년 9월 유엔총회에서 결의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은 핵심 8개국의 비준을 받지 못해 지금까지 발효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만료되는 미·러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도 연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INF 폐기는 핵통제 체제 약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미국이 INF를 폐기한 것은 러시아와의 갈등 때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견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러가 INF에 묶여 있는 동안 중국은 장외에서 마음껏 중거리미사일 능력을 확대했다. 그중 대부분이 동아시아의 미군 전력이 중국 주변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배치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우리만 조약을 지키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직접 중국을 겨냥했다.


문제는 INF 파기 이후 미국이 중국의 중거리미사일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미국은 중국을 포함하는 새로운 조약을 지향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정말로 미국이 ‘보다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중거리미사일을 포함하는 새로운 군축 메커니즘을 원한다면 이런 식으로 INF를 깨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축은 적과의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아 합의에 이르는 힘든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개적이고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국제 통제체제가 되려면 중국 외에 중거리미사일 전력을 가진 나라들을 모두 포함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제기구를 통한 공개적인 토론과 협의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중국과 양자 간 군축 협상을 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는 중국의 20배다. 핵전력이 열세인 중국은 비선제공격과 최소억제 원칙의 핵전략을 갖고 있으며 지상발사 중거리미사일은 중국 핵전력의 근간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이 중거리미사일을 만들지 않으니 중국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 간의 군축은 서로 똑같은 무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에서 서로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를 제거하는 조치를 교환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하다.


트럼프는 냉전 시대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에 새로운 중거리미사일을 집중배치하고 중국을 굴복시키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 동북아에서 중국·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군비경쟁이 불가피하다. 미국은 한국에 미사일 기지나 탐지 레이더 등 MD 체계를 두려 할 가능성이 있다. 동북아에 냉전구도가 다시 펼쳐지는데 ‘한반도 냉전 해체 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으므로 북핵 문제 해결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동북아 군비경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중·러가 한반도 주변에서 합동초계비행을 하고 북한이 INF 위반 논란을 촉발시킨 ‘이스칸데르’급 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고 있는 것은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


INF 폐기는 장차 한국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다. 


‘포스트 INF 시대’에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대비 전략이 현시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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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최종 판결에 아직까지 공식 입장도 정하지 못한 채 안팎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무능해서만은 아니다. 판결이 나온 이상 이 문제는 ‘노답’이다. 정부가 대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한·일관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한마디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한·일관계를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적시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체제가 비록 지금 한계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이미 한·일관계와 근대 한국을 형성하는 뿌리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금에 와서 역사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정부를 ‘완벽한 딜레마’에 빠뜨렸다.


이 판결은 수십만의 강제징용·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승소가 보장되는’ 소송의 문을 열어줬다. 일본 기업들이 배상해야 할 액수는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며 한·일관계는 단절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2012년 5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가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을 때 이미 예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의 국제법적 문제나 외교적 파장 등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과 논쟁은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파기환송이 된 이상 결과가 다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종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수년이 걸리는 동안 국내적으로 이 문제가 공론화되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다면 정부의 대책 마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의 심지가 점차 타들어가고 결국 예상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기까지 6년 동안 정치인·관료·전문가·언론·시민단체 등 어디에서도 공개적이고 진지한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수습을 해야 한다. 일단 길은 두 가지다. 법대로 끝장을 보는 것과 외교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논란 종식을 위해서는 ‘법대로’가 쉽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도 그게 부합한다. 청구권협정의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맞는지 일본의 주장이 맞는지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결판내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승소 가능성은 둘째 치고 한·일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ICJ가 국제분쟁 해결에 기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ICJ 제소는 결과와 무관하게 양국관계를 파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만일 한·일 모두 파탄을 원치 않는다면 외교적 타협이 순리다. 지금 가장 먼저 할 일은 한·일 모두 ‘파탄을 피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입장을 밝힌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난 19일 정부가 제안한 ‘한·일 기업의 자발적 위자료 지급’은 대법원의 배상 명령과 별개여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정부의 설명과 맞지 않는다.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구조적으로 극복하려는 자세도 아니다. 하지만 파국을 피해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신호를 처음으로 보낸 것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제안대로 실행하자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 제안을 논의의 기초로 삼아 외교적 타협을 해보자는 의사타진이다. 


일본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것이 외교적 타협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일본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뜻이 있다면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외교적 해결을 시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는 한국 정부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본의 협조 없이 한국 혼자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된다. 이 문제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한·일 간의 불행했던 과거’가 그 근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한·일관계를 법으로만 규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법으로 대치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자기기만이다. 한·일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사실, 일본이 처음부터 이 문제를 법적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보였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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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대북 협상을 ‘미국의 방식’으로 주도하기로 작정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보여준 태도는 1년 전 싱가포르 합의에서 나타난 신뢰구축과 관계개선, 평화체제, 비핵화로 이어지는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협상에 대한 분명한 거부 의사다. 미국의 방식은 먼저 비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개념을 정리해 놓고 최종단계까지 가는 로드맵을 만든 뒤 그에 따라 행동에 착수하겠다는 것이다. 말로는 싱가포르 합의를 이행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단계적 구조의 싱가포르 합의를 대체할 ‘포괄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 같은 근본적 접근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작부터 그랬어야 했다. 정상회담을 2차례나 하고 이미 정상 간 합의도 해놓은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할 말은 아니다. “올바른 합의가 필요하다”는 트럼프의 말은 자신이 덜컥 도장을 찍어준 싱가포르 합의가 ‘잘못된 합의’라는 고백인 동시에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골대를 옮긴 것이니 북한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협상에서 한 수 삐끗하면 끝장이지만 미국은 실수를 해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당황한 것은 북한뿐 아니다. 청와대도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사실 미국의 태도는 돌변한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 합의 직후부터 이어졌던 것이다. 청와대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북·미관계가 앞으로 나가기만을 원했을 것이다. 부실한 싱가포르 합의를 기초로 그 위에 남북 경제협력 등의 구조물을 올리고 북·미가 모두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빨리 통과하기를 기다리다가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북·미는 협상의 방식을 논하는 초기 단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는 북한의 단계적 방식과 미국의 포괄적 접근법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한다.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으로 절충점을 모색하려는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미국의 입장은 ‘포괄적 합의를 위한 동시·병행적 추진’이다. ‘동시’는 상응조치의 시퀀싱(배열)을 의미하는 것이며 ‘병행’은 비핵화·관계개선·안전보장 등 협상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입체적으로 다뤄나간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단계적 접근과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포괄적 합의에 도달하려면 협상의 모든 요소들이 다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접근법은 근본적이긴 하지만 합의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의 최종적 모습을 보여줬다. 포괄적 합의가 이뤄지려면 김정은도 자신이 원하는 비핵화의 최종적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양측이 비핵화 조치, 관계 정상화 방안, 구체적 체제안전 보장책 등 모든 요소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합의해야 한다. 군사적 문제는 물론 주한미군이나 핵우산 제공과 같은 문제들도 포함된다. 


북한이 미국의 방식을 따를지도 불투명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합의에 이르는 것은 더욱 어렵다. 트럼프가 지금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북한도 조기에 제재 해제를 얻어내려는 생각을 접고 ‘자력갱생’을 외치며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 ‘조기 수확’이 절실히 필요한 청와대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청와대는 북·미관계를 서둘러 봉합하려는 조바심을 버려야 한다. 현재의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정착프로세스를 추진해야 한다. 지금은 빠른 진전이 아니라 뒷걸음치지 않는 견고한 진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기 내에 결실을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초석을 놓는 데 집중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 비핵화를 완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1~2년 사이에 이뤄질 일은 결코 아니다.


특히 청와대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본전제인 비핵화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비핵화 자체보다 비핵화 진전을 전제로 한 한반도의 미래에 집중해왔다. 지금도 북·미를 만나게 하고 어떤 방식이든 북·미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것을 기초로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청와대에서 ‘굿 이너프 딜’과 같은 무책임한 표현이 나오는 것이 그 방증이다. 한반도의 미래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비핵화를 이루기 위한 정교한 전략을 세우는 데 집중하는 게 먼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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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은 어쩌면 필연이다. 두 정상이 회담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이한 대화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인식 차이가 하노이에서 비로소 충돌했다는 것이 직접 원인이다.   


‘하노이 노딜’의 씨앗은 지난해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에서 뿌려졌다. 싱가포르 합의는 신뢰구축을 통한 새로운 관계수립-평화체제-비핵화의 순서로 정리돼 있다. 미국의 ‘선(先)비핵화’ 요구를 차단한 김정은의 승리이자, 준비 없이 회담장에 들어간 트럼프의 패배다.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그 합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다. 지난해 북·미 대화가 일시중단되고 위기를 맞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합의를 덮어버릴 새로운 합의가 필요했다. 반면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2차 회담이 필요했다. 하노이 회담은 북한에는 ‘싱가포르 합의 굳히기’였고 미국에는 ‘싱가포르 합의 바로잡기’였다. 


미국의 접근법은 현실적으로 변했다. 완전한 핵신고, 핵탄두 반출과 같은 1차 때의 황당한 발상을 접었다. 하지만 그것이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기조와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 1월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동시·병행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싱가포르 합의를 순차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동시에 하겠다는 뜻이다. 후순위로 처져 있는 비핵화를 앞으로 끌고 나오겠다는 선언이다.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의 동결과 폐기 약속’을 요구했다. 싱가포르 합의에 담지 못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바로 그 내용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완화’만을 반복했다. 비핵화는 싱가포르에서 이미 정리됐으니 이번에는 그 연장선에서 신뢰구축의 이행, 즉 제재완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큰 선물’을 내주면 트럼프가 반색할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트럼프에게는 영변 핵시설보다 WMD 폐기 약속이 더 절실했다. 그 약속이 없으면 영변도 소용없다. 만약 영변 폐기만을 들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면 트럼프는 ‘죽은 말’을 또 사왔다는 비난과 영변 이외의 핵시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WMD 폐기 약속을 받으면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격했던 반대파들에게 할 말이 생긴다. 영변 폐기는 실질적 비핵화 조치이지만, 정치적으로는 WMD 폐기 약속이 훨씬 잘 팔리는 상품이다. 트럼프가 그런 약속이 없는 영변 폐기를, 그것도 유엔제재의 핵심요소를 풀어주고 받아올 수는 없었다.


트럼프의 제안도 북한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를 보장하겠단 말로 북한의 WMD 포기 약속을 받아내려 했지만, 체제보장과 안보환경 변화가 정교하게 제시되지 않은 WMD 포기 약속에 김정은이 도장을 찍을 리 없다.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보여준 태도는 변덕도, 갑작스러운 전략 변화도 아니다. 싱가포르 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내용이다. 트럼프가 싱가포르 합의를 구체화한다는 레토릭을 앞세워 실제로는 ‘싱가포르 합의 형해화’를 시도해왔음을 파악하지 못하면 지금 미국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했으나 상황을 싱가포르 합의 이전으로 되돌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물론 ‘하노이 노딜’이 끝은 아니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의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1년간 북·미는 요란하게 친분을 과시했지만 행동으로 이뤄진 것은 없다. 핵무기는커녕 중고차를 거래할 정도의 신뢰도 아직 없다. 이것이 북·미 대화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가 맞닥뜨리고 있는 냉엄한 현실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방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가지 않았다는 점,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점이 위안거리일 뿐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미국은 비핵화 과정에 북한의 의무뿐 아니라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도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자신들의 마지막 카드가 핵무기인 것처럼 미국의 마지막 보루는 제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미국 내 여론이 북한과의 대화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트럼프가 지금 정치적으로 얼마나 무모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염두에 둬야 할 것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가 매우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트럼프가 앞으로 이 문제에 급격히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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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북·미 정상회담이 구체화되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회의론과 북핵 협상 무용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과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 대신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동결해 미국의 안보위협만을 해소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북한의 태도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와 한·미가 요구하는 ‘완전한 비핵화’가 같은 개념인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또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겠다는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은 주한미군 철수와 핵우산 철폐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런 의구심들은 북핵협상 무용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과연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가. 트럼프는 정말로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핵·미사일 동결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단계에서는 누구도 확신을 갖고 단언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폐기 의지가 불분명하고 트럼프의 속셈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대화와 협상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비핵화는 북한에만 요구되는 의무가 아니다. 미국이 말하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개념 속에는 북한의 핵무기, 핵물질, 장비를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북한이 핵을 포기한 뒤 다시 핵무장의 길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포함돼 있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게 핵을 폐기하는 것은 북한의 의무지만, 북한이 핵을 폐기한 뒤 다시 핵무장의 유혹이나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안정적인 안보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미·중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 관련국들의 의무다. 북한에 비핵화의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요구하려면 미국 역시 핵폐기 이후 안보환경을 해치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지대화’ ‘핵위협 제거’ 등의 표현에 집착하는 것은 미군철수와 핵우산 철폐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미국 핵전략자산이 한반도에 미치지 않도록 만드는 것만이 핵위협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 등 핵강국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이 중·러의 핵무기를 생존과 직결된 안보위협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중·러와 정상적인 국교를 맺고 있고 우호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면 미국의 핵위협이 사라지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북한이 훗날에 대비해 미군철수와 핵우산 철폐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두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요구를 할 것인지는 미국과의 협상 전개와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핵·미사일 동결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섣부른 예단이다. 동결은 비핵화를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다. 미국의 최우선 목표가 자국에 대한 위협 해소인 것은 틀림없지만, 핵비확산체제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고 국제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목표다. 핵·미사일 동결이 이뤄진다면 한국은 미·중을 설득하고 한국과 같은 입장에 처한 일본과도 협력해 조속히 핵폐기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핵 위기 발발 이후 북한이 핵문제에서 보여준 완강한 태도와 반복되어온 협상 실패, 이에 따른 불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진전된 북한의 핵능력 등을 감안했을 때 북한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 또한 동맹의 가치를 거침없이 훼손하고 제멋대로 일을 끌고나가는 트럼프의 돈키호테식 돌진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도 그런 북한을 강하게 추궁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큰일 났다. 이런 협상은 그만둬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북핵 협상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향해 걷는 여정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과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핵 협상을 지지하는 이유는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법을 가급적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혹여 잘못된 길로 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을 위한 비판과 망하기를 바라는 저주는 구별되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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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한반도의 평화정착 프로세스가 시작된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전쟁을 불사할 듯 극한 대결로 치닫던 북한과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 하나만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이 같은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년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지난 1년 동안 대화 국면을 이끌어왔던 환경과 여건이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합의에서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 신뢰구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보였다. 이는 북한 입장에서는 커다란 외교적 승리다. 외형상으로 이 합의는 미국이 줄곧 주장해온 ‘선(先) 비핵화’가 아닌, 북한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상호 신뢰 구축’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왜 이런 구조의 합의문에 서명하게 됐는지 정확한 내막은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합의 이후에도 미국이 여전히 ‘선 비핵화’ 요구를 접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전략적 결단을 내려 북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미국은 싱가포르 합의를 만들어낸 원동력인 ‘톱다운 방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히려 실무협의를 거친 합의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지금 북·미대화가 덜컹거리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실패작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주장은 자신들의 실수를 감추려는 허세일 뿐 아니라 싱가포르 합의에서 잘못한 부분을 2차 정상회담을 통해 만회해야 한다는 자기고백에 가깝다. 과거 북핵 협상을 통해 축적된 미국의 경험과 자산을 활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 이후 대화 방식을 바꾸려는 것 자체가 협상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은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3단계 방법’처럼 핵을 없애고, 제재를 해제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는 식의 간단한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실무협상을 통해 싱가포르 합의를 보완할 수 있는 결과가 보장되어야 김 위원장과 2차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북한이 ‘싱가포르 대첩’의 기억을 쉽게 잊을 리 없다. 북한은 북·미대화 경색의 책임이 싱가포르 합의를 수정하려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 행정부 고위관료들에게 있다고 보고 이들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조·미 수뇌분들의 신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트럼프가 또 한번 톱다운 방식으로 대화의 동력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싱가포르 합의의 ‘후속편’을 완성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을 축구 경기에 비유하자면, 미국은 상대를 얕보다 전반전에 불의의 골을 먹은 뒤 전술을 바꾸고 선수도 교체해 후반전에 임하려 하고 있고 북한은 전반전의 리드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수비에 치중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합의가 북·미대화 진전을 가로막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실로 아이로니컬하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정상이 만나고 싱가포르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 변화는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같은 패턴으로 성사시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무산된 것도 이 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도 비핵화와 제재해제의 빅딜이 성사되고 한반도 평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은 지금도 ‘1년 전을 되돌아보라’는 말을 자주한다.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일촉즉발 위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초석을 놓는 극적 반전 드라마를 쓴 것은 엄청난 성과라는 것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1년간의 성과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북·미대화 정체가 장기화될 경우 한반도 평화정착은 더욱 멀어질 뿐 아니라 정부는 남북관계와 비핵화 진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2018년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길이 남기려면 지난 1년간의 관성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변화된 상황에 맞는 창의력과 새로운 상상력으로 한국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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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갖는 법적·역사적·외교적 함의는 매우 엄중하다.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과 법리적 공방이 불가피할 뿐 아니라,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과 배치되는 판결이어서 정부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파장과 문제점을 논하기에 앞서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한국의 최고법원이 명확히 재천명했다는 점이 이번 판결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판결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반도 역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다.

 

한·일관계는 애초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할 때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안보·경제적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가 시급했던 탓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이 미국의 주도로 이뤄진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전후질서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에 있다.

 

13년이나 끌어 온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최종 선고가 원고 승소 판결로 내려진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강제징용 피해 당사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헌 기자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7년간의 일본 점령통치를 끝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독립국가가 됨과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소 냉전에 대비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전범국 일본에 서둘러 면죄부를 준 것이다. 당시 국제적 존재감이 미미했던 한국은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중요한 부분들은 미해결 상태로 종료됐다.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상호 필요성에 의존해 유지될 수 있었다. 냉전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는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고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한·일은 서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강제징용 판결은 이 같은 한·일관계 변화 추세의 결정판이다. 판결의 핵심은 간명하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므로 강제징용도 불법이고 따라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한·일이 외면하고 회피해왔던 한·일관계의 ‘태생적 모순’을 정조준하고 있다. 53년간 덮어놓았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1965년 체제’로는 더 이상 한·일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는 없다. 출발이 잘못됐으니 처음으로 돌아가 한·일관계를 근본부터 뒤집고 이미 국제적으로 뿌리내린 전후질서를 바꾸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은 미국 주도의 전후질서와 동아시아 전략의 희생물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만들어놓은 전후질서의 그늘 아래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는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싫든 좋든 현재의 체제 안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한·일은 이제 1965년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협력모델을 빨리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적 해결 노력과 국내 여론 설득을 병행할 수 있는 양국 정부의 ‘용기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일본은 청구권협정과 한일기본조약의 문구 하나하나를 머리카락 쪼개듯 분석하고 법적 효력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는 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알면서도 ‘법적으로 다 끝난 일이니 책임질 일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한국은 일본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일본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 즉각 비현실적인 강경론 일색의 반응이 나오고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한국에는 국민적 반일감정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부류, 이 같은 선동에 자극받아 대책없는 대일 강경론에 목소리를 높이는 부류, 이 같은 악순환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분위기에 눌려 모른 척 침묵하는 비겁한 부류가 존재한다. 정치인·학자·언론·관료·시민단체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개인과 집단 대부분은 이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걸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 문제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인 담론이 형성될 수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일 모두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법리적·현실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소지가 충분한 판결이지만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의 근본적인 사안에 대해 양국 모두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하도록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가치 있는 판결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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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20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될 때 전 세계 언론은 온통 비핵화 문제에 관심을 쏟았지만, 사실 이번 평양공동선언은 비핵화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공동번영을 남북이 주도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는 것에 더 많은 역사적 의미를 둬야 할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임을 선언하고 실천 방안을 명시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했다. 사실상 ‘남북 간의 종전선언’이다. 특히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문 대통령이 15만 평양 군중에게 “나와 김 위원장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고 확약했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70년 분단 역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한반도 안보 환경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알리는 자주적 선언이라고 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평양 시민들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평양공동선언은 문재인 정부의 진짜 목소리를 분명하게 드러낸 회심의 카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서 확실한 어젠다를 갖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주변정세와 북한의 태도,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확고한 한·미 군사동맹’은 지금까지의 한반도 안보환경에서 절대 변할 수 없는 상수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 안위를 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이 같은 안보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보 지형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지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북·미 비핵화 대화가 정체된 상황에서 이 같은 공동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 ‘굴욕을 감내하면서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긴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미국을 의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내에서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싱가포르 북·미 정상선언 이후 북·미 대화가 뒤처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국을 기다려주기보다 남북관계를 가속화하여 북·미 비핵화 대화를 끌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진 것이다.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진전으로 비핵화를 견인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북·미 대화 정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3차 남북정상회담과 미국이 그토록 불편해 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을 강행했다.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로 비핵화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 자신감은 올해 초 대화에 나서기 시작한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경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또한 북·미 모두 되돌아갈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는 판단도 과감한 행보에 힘을 실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마이 웨이’를 선언하기에 가장 부담 없는 타이밍은 북·미 비핵화 논의가 확실한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가 순항하기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 시점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앞으로가 문제다. 남북의 구상이 순항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김 위원장의 표현대로 ‘탄탄대로도 아니고 역풍도 각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평양선언을 이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탓이다.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은 남북의 의지 외에 국제적 지지도 필요하다. 미국은 평양선언의 비핵화 방안과 북·미 대화 접점 마련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지만, 평양선언 전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미국은 앞으로도 ‘한·미가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이 남북관계 진전을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히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한국 정부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할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한·미 군사동맹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성격 변화를 해야 하는지, 한반도 평화체제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물음에 즉각 답할 수 있는 확실한 원칙을 지금 문재인 정부가 갖고 있는지 여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김정은과 트럼프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퇴로가 없는 3자가 벌일 치열한 외교전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가 스러지고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높아지고 있다. 시간은 여느 때와 같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지만 지금 한반도는 운명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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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북·미 정상 공동선언을 역사적 의미나 상징성을 제외한 ‘북핵 협상’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논의해야 할 의제의 순서를 바꾸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신뢰구축을 통해 북·미 간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결과물로 비핵화에 이르게 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진전시키면 이에 상응하는 경제·정치적 조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던 그동안의 ‘선(先) 비핵화’ 논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2008년 12월 6자회담이 중단된 이후 북한이 줄곧 요구해왔던 것이었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합의를 해도 이행이 안된다는 것이 증명됐으니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통한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해보자는 주장이었다. 북한은 2010년 1월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이 같은 제안을 공식화했다. 당시 북한은 성명에서 “조선반도 비핵화 과정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세우기 위해서는 조·미 사이의 신뢰를 조성하는 데 선차적인 주목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미 사이에 신뢰를 조성하자면 적대관계의 근원인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부터 체결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지금 주장도 8년 전 이 성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미는 ‘비핵화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어 궤도에 오르고,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해도 비핵화 진행이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평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싱가포르 합의에서 미국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을 앞세워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북한의 입장에서 싱가포르 합의는 외교적 승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독특한 방식’이라고 표현하면서 “훌륭한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한 것은 비핵화보다 신뢰구축과 평화체제 논의를 먼저 하기로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싱가포르 합의 이후 진행되는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에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먼저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약속 위반이다. 지난달 7일 북한 외무성이 평양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뒤통수에 대고 “싱가포르 수뇌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배치되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거칠게 쏘아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신뢰구축 조치를 비핵화보다 앞세우기로 한 ‘조·미 수뇌분들의 약속’을 미국이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를 할 때 북한의 요구를 ‘통 크게’ 수용하고 새로운 협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보기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협상 방식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간과한 채 합의를 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함으로써 북한이 비난할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구축 작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비핵화가 먼저냐 신뢰구축이 먼저냐’의 논쟁이 아니다. 이 같은 논쟁은 현재 한반도 현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비핵화와 신뢰구축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상호 신뢰를 먼저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비핵화 진전이 있어야만 생긴다. 애초부터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시작한 이유도 북한의 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종전선언 문제만 봐도, 신뢰구축과 비핵화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이 신뢰구축을 위한 선차적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을 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미국의 비핵화 요구도 강해진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된 지금 ‘선 비핵화’를 내세운 협상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북한 핵미사일이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위협으로 떠오른 상태에서 핵문제를 그대로 두고 북·미 간 신뢰를 조성하겠다는 것도 비현실적 발상이다. 결국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낮은 단계부터 병행추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해법이 없다. 국제정세와 동북아시아 역학 구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응축된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매우 길고 험난한 여정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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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하수관이 터져 오물이 온 동네로 쏟아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먼저 오물이 퍼지지 않게 펜스를 쳐야 한다. 그리고 터진 곳을 막고 펜스 안에 고인 오물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확실히 막았는지 점검하고 재발방지 조치까지 마쳐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다.”

 

북핵 6자회담이 한창이던 10여년 전 미국의 북핵담당 고위 관료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비핵화’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비핵화는 핵물질·기술 이전 차단-동결-핵무기·핵물질·장비 폐기-검증-핵 재무장 방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완전한’ ‘비가역적인’ 등의 수식어를 앞에 주렁주렁 붙이는 것은 사족일 뿐이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라는 용어를 ‘시간 부족으로’ 북·미 합의문에 명시하지 못한 미국은 지금 PVID, FFVD 등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북한의 동의를 받아내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느냐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같은 개념인지 여부가 핵심이다.

 

북·미는 정상회담에서 “4·27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 판문점선언에도 남과 북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의미는 다르다. 한국 정부가 번역한 판문점선언 영문본은 ‘핵 없는 한반도(nuclear-free Korean Peninsula)’라고 되어 있지만 북한 외무성은 ‘한반도 비핵지대화(turning the Korean peninsula into a nuclear-free zone)’라고 번역했다.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나 ‘핵우산’까지 염두에 둔 표현이다. 미국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판문점선언을 원용했다.

 

비핵화 용어 논란은 미국의 허술한 준비를 드러낸 단편이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불안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방향이 틀렸거나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협상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와 미국의 협상력 부족 등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가 과연 비핵화를 이끌어낼 역량이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약탈적 거래’에 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이처럼 허술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북핵 문제를 지나치게 정략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의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한 것은 준비가 완료됐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정치 일정에 맞춘 결정이었다. 북·미 회담 성과가 급한 쪽은 오히려 트럼프였다. 실질적 내용보다는 정치적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외형에 집착했다. 상대에 대한 분석도, 전문 인력도 갖추지 못한 채 날짜를 먼저 정해놓고 협상을 시작했으니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합의문에 서명하자 북한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음이 더욱 명확해졌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재촉하고 있지만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양국 수뇌분들께서 합의한 대로’ 비핵화보다 신뢰구축 조치가 먼저라고 맞서고 있다. 실제로 북·미 정상이 서명한 합의문은 신뢰를 구축해 새로운 북·미관계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비핵화에 이르는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 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은 이미 북한과 밀착하고 있고 미·중은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정상 간 합의를 통한 톱다운 방식의 접근으로 돌파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논하는 각론에 들어가면 상황이 다르다. 돌파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최고 권력자들의 ‘통 큰 합의’로 일을 해결하는 방식은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쯤 트럼프는 전임자들이 왜 북핵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싱가포르 북·미 합의가 유지되려면 트럼프가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북한도 선(先)신뢰구축만을 주장하며 비핵화 논의를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비핵화 진전을 통해 신뢰를 만들어가는 조치를 병행해 미국 내 여론의 반대로 북·미 합의가 좌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북·미 모두 합의를 유지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타협점을 찾기 위한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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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남북 정상의 합의문에 중국과 미국 등 제3국이 등장하고 이들의 역할과 시한까지 명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중과 사전에 협의된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남북 모두 매우 빨리 일을 진행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정전체제가 끝났음을 확인하는 종전선언을 거쳐 평화협정으로 가는 로드맵을 상정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한국전쟁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전에 관련국 정상들이 모여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고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절차다.

 

문재인 정부가 법적 구속력도 없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종전선언을 그것도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하기 전인 ‘입구’에서 하려는 이유는 이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진작시키고 미국을 이 정치적 약속에 묶어두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비록 구속력은 없지만 정상들의 공개적 약속이어서 그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고 북·미 모두 이탈하기 어렵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제외한 미 행정부의 참모들은 모두 조기 종전선언에 부정적이다. 현실은 여전히 정전체제에 머물고 있는데 각국 정상이 이미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커다란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태도변화가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군사적 행동 가능성에 대한 우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종전선언은 협상 과정에서 대북 군사적 옵션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종전선언이 비핵화 과정에 극적 효과를 발휘하려면 ‘입구’가 아닌 ‘출구 직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비핵화·관계정상화·평화협정 발효를 마지막 순간에 동시에 한다고 해도 기술적으로는 일정한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북한으로서는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핵무기를 버리는 순간이므로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단계다. 이때 각국 정상이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약속으로 ‘마지막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탄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종전선언에 누가 참여하느냐도 문제다. 판문점선언에서는 평화협정 논의 과정에서 가급적 중국은 마지막 순간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속내가 드러난다. 중국이 개입하면 일을 빠르게 진척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평화협정 논의에서 중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강하게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매우 부담스럽다.

 

하지만 정상 간 합의 문서에 ‘3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을 적시한 것은 문제다. 이에 자극받은 중국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8일 다롄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유관 각국과 함께 역내 영구적 평화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이 1994년 판문점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지만 이 같은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중국은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 쫓겨났다. 한·중 수교를 했으니 군사정전위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로도 중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 지위를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법적 지위 여부와 무관하게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적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 것도 중요하고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는 절박감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정치인들이 만들어가는 일인 만큼 관련국 모두 국내 정치적 계산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정치적 효과는 일을 추동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은 극도로 세밀하고 신중하게 다뤄나가야 한다. 조급함과 정치적 욕심을 조금 자제하고 차분하게 한발씩 전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빠른 진전이 아니라 다시 뒷걸음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견고한 진전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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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외교 이벤트가 열린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첫 단추를 잘 끼우고 이를 토대로 북·미 정상회담에서 의미 있는 합의가 나온다면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와 평화구축, 남북 평화공존의 출발이 될 것이다. 실패하면 전쟁의 위기가 이전보다 짙게 드리워질 수 있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북한이다. 지금의 갑작스러운 정세변화의 원동력이 북한의 달라진 태도였던 것처럼, 앞으로 전개될 일들의 성패 역시 북한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북한의 태도 변화가 제재를 피하고 핵무기를 실전배치하기 위한 시간벌기라고 의심하는 시각도 있고 이번에야말로 북한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6일 정부의 대북 특별사절단에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핵포기와 ‘체제안전보장’을 위한 조치를 맞바꾸자는 제안이다. 북한의 진정성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단서는 앞으로 벌어질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체제안전보장을 위한 조치로 한·미에 무엇을 요구하는지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체제안전보장 조치에 대해 명시적이고 일관되게 밝힌 적이 없다. 우리에게 낯익은 ‘대북 적대시정책 철폐’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북한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체제안전보장은 평화협정 체결이나 불가침 선언일 수도 있고 북·미 관계 정상화, 제재 해제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미국의 핵우산 철폐,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나 완전 철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체제안전 보장을 위해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는 당사자인 북한도 잘 모른다. 북핵 협상에서 일괄타결식 아이디어가 나온 것도 북한에 딱히 뭐가 필요한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꾸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한·미의 고민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의 방안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라면, 북한의 고민은 체제안전을 어떻게 보장받을 것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북한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요구할 것인지가 대화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만약 북한이 이른바 ‘합리적 안보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를 한다면 진지한 협상의 기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핵우산 철폐나 주한미군 철수, 한·미 동맹 해체 등을 들고 나올 경우 한·미는 북한이 진정으로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체제안전을 위한 조치는 외부에서 제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한 국가의 정치체제 붕괴는 주로 정통성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외부 요인보다 내부 요인이 더 크다. 흔히 북한과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사태나 리비아 카다피 정권 붕괴도 본질은 핵무기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구소련이 남겨놓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독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핵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정권이 붕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은 형용모순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민중봉기로 붕괴하자 러시아가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개입했으며 우크라이나가 독립 당시 미·러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영토와 안전을 보장받은 ‘부다페스트 협약’이 결국 휴지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북한에 주는 시사점은 독재정권이 민중봉기로 붕괴했다는 점, 확실한 담보가 없는 다자안보조약은 무용지물이므로 견고한 장치의 동북아 다자안보체제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지, 핵포기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것도 나토와 미국의 공습 이전에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은 민중혁명이 직접 원인이다. 설사 우크라이나와 리비아가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내부에서 촉발된 정권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미가 제공할 수 있는 안전보장조치는 북한 체제안전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체제유지에 필요한 외부환경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지금의 북한 통치체제가 지속가능할 리 없다. 오히려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려면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북한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면 비핵화와 그에 따른 주변 강대국의 안전보장 외에 비현실적이고 기형적인 통치체제와 인권 문제를 점진적으로 정상화해 나가는 내부 개혁조치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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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한반도에는 봄기운이 감돈다. 곧 전쟁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엄혹한 상황에서 노심초사하던 것이 불과 한 달여 전 일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항구적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고 지난한 항해가 곧 시작된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장정이다. 가는 도중 어떤 암초와 풍랑을 만날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과연 끝까지 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생각할수록 아득한 여정이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위기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행이다.

 

온갖 제재와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꿈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받아들이면서 반대급부로 제시한 핵심 요구 사항은 ‘체제안전 보장’이다.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 안보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북한이 수십년간 국제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핵개발에 매달려온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을 맞바꾼다는 간단한 명제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비핵화는 북한의 핵폐기는 물론 이를 검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또 핵폐기 이후 다시 핵무장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동북아시아 안보환경을 다자안보체제로 바꿔주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은 북·미 적대관계 종식과 각종 대북 제재의 해제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든 스텝 하나하나가 세계사에서 유사한 사례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핵무기 완성 단계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한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세계 21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했다가 ‘일시 중단’ 상태로 60년 넘도록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또한 미국이 공식적으로 교전 당사국이며 불법 핵무장국이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낙인찍힌 북한과 정식 수교를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이 모든 것들을 병행 추진해 보조를 맞춰 진전시키다가 최종 단계에 이르러 한꺼번에 동시 발효시켜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당사국들이 과연 이 같은 험난한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핵 문제는 냉전체제와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역학관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모순 등이 모두 집약돼 만들어진 산물이다. 1990년대 초반 북핵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이 선행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국들은 이 같은 본질을 회피하고 뒤로 미루면서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거나, 북한의 핵물질과 기폭장치만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60년 이상 쌓여진 국제정치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고 만시지탄일 수도 있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보수와 진보정권을 거치는 동안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고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돼왔다. 평화체제에 대한 준비가 돼 있을 리 없다. 지금의 상황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미 접촉 성사’에 전력투구하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파격적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하는 ‘더 큰 파격’으로 대응했지만, 본디 행동을 먼저하고 계획은 나중에 세우는 그의 성향상 면밀한 대비가 돼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업적 과시에 집착하는 그가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열매를 자신의 임기 내에 따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국 최고지도자들은 원칙적 선언 수준의 합의를 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험난한 이행 협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국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국내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정치적 선언을 통해 입구에 들어선 이후 출구를 찾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출항의 뱃고동이 울리기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항해를 마치겠다는 각오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번 대화 국면은 아마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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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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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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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결정 이후 곧바로 남북 고위급회담에 나와 선수단·응원단·예술단 파견 문제를 일사천리로 결정해 나가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대화제의에 꿈쩍도 않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추세라면 평창 올림픽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한반도 상황은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평화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안도 뒤에는 한층 더 팽팽해진 긴장감이 잠복해 있다.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본게임’이 올림픽 이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만들어진 남과 북의 가느다란 대화통로가 한반도 주변에 터질 듯이 가득 찬 긴장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출구로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북한은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곧 갖게 된다. 길어야 수개월밖에 시간이 없다. 미국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외교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군사적 수단으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내에 압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공통 인식이다. 지금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버락 오바마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국은 눈앞에 닥친 국가안보 위협을 ‘전략적으로 인내하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과 북한의 대화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북·미는 그동안 매우 거칠게 대결국면을 유지해온 탓에 쉽게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은 이처럼 파국의 순간을 앞에 두고 열린 마지막 기회의 창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이 한반도 상황의 결정적 기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마련된 남북대화’라는 표현을 썼다. 또 “바람 앞에 촛불을 지키듯이 대화를 지키고 키우는 데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는 대목에선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 남북대화가 북·미 접촉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한반도가 매우 위험해진다는 것을 미국과 북한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남북대화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군사적 행동을 일단 유보하고 북한의 의중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고 싶다는 의미다.

 

북한 역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의 군사적 행동 가능성과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제재 강화도 큰 부담이다. 특히 미·중이 북한의 급변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북한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김정은 정권일 필요는 없다는 인식을 중국이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는 이 같은 상황에서 결정된 대화의 신호다.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대화를 안전하게 북·미 접촉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특히 북·미가 한 번 접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올림픽과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접근법이 전략적이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올림픽에 참석한 북한 고위급 인사와 의미 있는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 새로운 남북관계 틀을 구축한다는 ‘평창 구상’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구상을 실행할 적기가 아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꾸준히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를 거쳐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평창 구상’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하고 갑자기 북한이 올림픽에 뛰어들어온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그랜드디자인’은 불가능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위한 ‘홈런성 타구’가 아니라 북·미 대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해낼 ‘진루타 1개’다.

 

남북관계에서도 습관화된 과거의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북핵 문제가 심화되고 남북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국민들의 대북인식은 극도로 악화됐다. 적대적인 국민정서가 안타깝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현실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는 이미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하고 북핵 문제와도 연계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식의 감성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다. 비즈니스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북한·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비즈니스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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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과 중국은 북한 체제 붕괴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할 때가 됐다. 그런 대화가 이뤄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이 같은 현실이 도래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미·중이 이런 논의를 한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가 몰라야 한다.”

 

미 행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아시아 전문가가 2013년 초 사석에서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말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갑작스러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3대 권력세습이 이뤄져 정권의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었고 한국은 강경 보수 성향의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시대가 열렸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피벗(회귀)’을 내세우며 집권 2기를 시작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북한 체제가 정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미국과 ‘북한 붕괴’를 상정한 논의를 회피했다. 미국도 동맹국이자 북한 문제 당사국인 한국이 미·중 간의 이 같은 논의를 지켜보기만 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다.

 

4년 반이 지난 현재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2일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토론회에서 중국 고위 관계자들과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고 있다고 매우 직설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중국과 (북한의) 핵무기 확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이 이미 준비 행동을 하고 있다고 공개하고 “(미·중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진입하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할 것을 중국에 약속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공개석상에서 이처럼 민감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중국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급변사태 논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 역시 동맹국을 배려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북핵 문제를 급박한 안보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북핵 문제는 이미 한·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북한과 중국 역시 더 이상 북핵 문제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급변 사태 가능성은 1990년대부터 북한 정권이 취약성을 보일 때마다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기반이 공고해지고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할 정도로 북한 정권이 안정돼 있는 지금 미·중이 함께 북한의 급변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대비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 인위적으로 그와 같은 사태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미·중이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핵으로 무장한 북한 정권의 붕괴는 한국에는 혼돈 그 자체다. 더구나 지금 상태라면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미·중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중은 군사작전을 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자세한 행동규범을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핵무기 관련 문제에 관여할 수 없으며 전시작전통제권도 없다. 난민·국경·식량 등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한꺼번에 떠안아야 한다.

 

그동안 북한의 급변사태와 정권 붕괴는 곧 ‘한반도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 문제가 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된다면 상황은 다르다. 틸러슨 장관 말대로 북한 핵무기가 확보된 이후 주한미군이 휴전선 이남으로 복귀하고 북한에 친중정권이 수립되면 중국은 여전히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를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미·중은 실리를 얻고 타협할 수 있지만 한국은 북한 급변사태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평화가 얻어진다 해도 그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가 아니라 ‘분단 영구화를 위한 평화’가 될 수밖에 없다.

 

틸러슨 장관 발언이 전략적으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이로 인해 직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핵 문제는 기존의 판을 모두 걷어치우고 새로 깔아야 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패턴화된 대응, 진영논리에 기초한 접근법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북핵문제가 여기에 이른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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