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악화일로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 손해배상 판결, 11월 위안부 화해·치유재단 해산 발표, 12월 일본 초계기와 한국 군함 간 ‘위협비행-레이더’ 논란 등으로 갈등이 커지고만 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최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본질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라면서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전쟁범죄 주범의 아들’이라고 한 것도 일본의 반발을 샀다. 지난 15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 당시 문 의장 발언에 대해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무상의 항의가 있었는지를 두고도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한·일관계가 사실관계조차 엇갈리는 인식을 보이는 심각한 상태다.

 

이럴 때일수록 양국이 냉정을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현안 인식이 다를지라도, 상호 불신을 부채질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일본 정계의 움직임은 우려스럽다. 일본 언론은 여당인 자민당에서 한국에 대한 대응조치로 반도체 제조에 불가결한 불화수소 등 소재·부품이나 방위 물품의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국제질서와 규범을 준수한다는 일본이 초법적인 조치를 거론하는 것은 긴장만 높일 뿐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4일 미에현 이세신궁을 참배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세 _ 교도연합뉴스

 

일본 내 ‘혐한(嫌韓) 기류’에 편승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야마모토 도모히로 의원은 지난달 31일 레이더 문제와 관련해 “거짓말쟁이는 도둑의 시작이 아니라 도둑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원래 도둑이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나카야마 야스히데 의원은 지난 13일 “만약 한국에서 태어나 대통령이라도 됐다면 그 마지막은 사형 아니면 체포 아니면 자살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들이 국회 질의나 당 회의에서 버젓이 나오고 있다. 자민당 소속인 두 의원은 모두 일본 최대 극우단체 ‘일본회의’ 산하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와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원이다. 양국 정치인들이 비난전을 되풀이하면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

 

신경 쓰이는 대목은 또 있다. 일본에선 한·일 갈등과 관련해 한국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는 점을 빼놓지 않는다. 반일 감정이 높아져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에 역행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고노 외무상은 지난 15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3·1운동 100주년으로 반일 감정이 부추겨져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고 일본 언론은 보도했다.

 

‘역지사지’가 필요하다. 일본에선 ‘3·1운동’을 쉽게 말하지만, 3·1운동의 배경과 진행 과정, 당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는 움직임은 드물다. 최근 남북 화해 움직임이나 재일한국·조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헤이트 스피치’(혐오·차별 발언)가 넘쳐날 뿐 한반도의 질곡과 고통의 뿌리가 일제 식민 지배에 있음을 직시하는 이들은 소수다.

 

일본이 말하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은 과거에 집착한다”는 언설에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라는 원칙은 묻혀버린다.

 

“기억이 사라지면 없었던 일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비관해선 안된다. 새롭게 기억해 젊은 세대에게 계승해야 한다.”

 

지난 17일 도쿄 릿쿄대에서 열린 시인 윤동주 74주기 행사에서 야나기하라 야스코는 12년째 행사를 주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쿄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의 다즈케 가즈히사 실장은 “미래를 지향한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 100주년이 과거 역사를 직시하고 극복할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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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슈카쓰(就活·취업활동)’에서 ‘취직 에이전트(대리인)’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임 ‘어드바이저(조언자)’가 붙어 희망과 적성에 맞는 기업을 소개하는 일종의 ‘취업 코디네이터’다.

 

대학생은 무료로 조언을 받으면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반면, 기업은 원하는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일손 부족으로 우수 인재 확보에 부심하는 일본 노동시장 상황이 반영된 것이란 풀이가 나온다.

 

일본 대학생들이 2016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취업 박람회에서 기업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인재·컨설팅회사인 DYM은 2010년부터 취직 에이전트 사업을 하고 있다. 2013년 2만명이었던 등록자는 2019년 봄 대학 졸업 예정자만 12만5000명으로 늘었다. 최근 1년 간 4000명이 DYM을 통해 전국 1500개사에 취직했다.

 

친구를 통해 DYM에 등록한 대학 3년생 구니이 유키(國井柚希)는 지난해 12월 어드바이저와 면담을 통해 흥미를 갖고 있는 차와 관련된 인턴십을 소개받았다. 어드바이저로부터 “일단 참가해 어떻게 느꼈는가로 앞으로를 생각해보자”는 조언을 받았다. 슈카쓰에는 입사지원서 쓰는 방법, 자기분석 등 모르는 것 투성이. 구니이는 “혼자라면 이 인턴십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다고 해도 참가해야 할 지 고민했을 것”이라면서 “불안이 가득하지만 ‘백(후원자)’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간이 부족한 대학생들로선 취직 에이전트의 조언을 받으면서 슈카쓰를 할 수 있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니혼게이자이는 전했다. 에이전트 이용비는 기업이 내기 때문에 대학생의 부담은 ‘제로’다. 입사가 결정되면 에이전트는 기업으로부터 성과 보수로 수십만엔을 받는다.

 

취직 에이전트를 이용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마케팅업체 마이케이는 5년 전부터 DYM의 ‘신졸(新卒·그 해 졸업자)소개’를 이용하고 있다. 이다 유(飯田裕) 회장은 “지금까지는 각지의 회사설명회에 참가해 학생을 모았다”면서 “비용과 시간, 노력이 상당히 소요되지만 입사 3년 만에 절반이 그만둔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올 4월 신입사원의 경우 에이전트로부터 소개받은 40명을 면접해 20명을 내정했고, 이 가운데 8명이 입사를 결정했다. 이다 회장은 “원하는 인재는 사전에 면밀하게 협의하기 때문에 ‘미스 매치’가 없어져 이직도 줄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정보회사도 취직 에이전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마이나비는 2017년 10월 신졸소개 부서를 독립시켰다. 마이나비 회원 가운데 면담을 통해 신졸소개 회원으로 등록한 올봄 졸업 예정 대학생은 2만명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신졸소개협의회도 설립됐다.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취직 에이전트 사업을 포함하는 신졸채용지원 시장규모는 2017년에 전년 대비 8.6% 증가한 1193억엔(약 1조2000억원), 2018년에는 전년보다 8.0% 증가한 1288억엔(약 1조3000억원)으로 전망되고 있다. DYM 오키노조 마사히로(沖之城雅弘) 이사는 “프로가 적성을 살펴 학생과 기업을 연결함으로써 쌍방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서 “이용하는 학생도 기업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취직 에이전트로부터 ‘오와하라(취업이 확정된 대졸예정자에게 다른 회사를 더 이상 알아보지 말라고 요구)’를 받는 등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 한 대학의 슈카쓰 담당자는 니혼게이자이에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에이전트를 판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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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를 상징하는 말로 ‘#미투(MeToo)’를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10월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의 거물 하비 웨인스타인에 대한 폭로를 시작으로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성들이 잇따랐다. 이것이 ‘#미투’ 운동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졌다. 한국도 지난해 1월 서지현 검사 이후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피해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해 ‘신조어·유행어 톱 10’에 ‘#미투(MeToo)’가 포함됐다. 하지만 상황은 좀 달랐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2017년 5월 유명 방송기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지만 반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18일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 B&B서점에서 열린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북 토크에서 이 책을 번역한 사이토 마리코(오른쪽)와 서평가 구라모토 사오리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진우 기자

 

지난해 4월엔 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여기자에게) 속아넘어간 게 아니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등의 발언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아베 신조 정부는 아소 부총리의 발언을 뒷받침하듯 각의(국무회의)에서 “성희롱으로 처벌하는 취지를 규정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서를 결정했다. 지난 9일 인터넷 투표에선 ‘2018년 최악의 성차별 발언을 한 정치인’으로 아소 부총리가 선정됐다.

 

그렇게 2019년이 시작된 지 3주일, ‘#미투’ 사안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우선 남성용 잡지 ‘주간SPA!’의 ‘성관계 쉬운 여대생 순위’ 논란. 후지산케이그룹 산하로 보수 성향의 후쇼샤(扶桑社)가 출판하는 ‘주간SPA!’는 지난달 25일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성관계하기 쉬운 여학생들이 많은 여자대학 5곳의 순위를 실었다. 이에 인터넷을 중심으로 “준강간죄를 조장한다” “여성 경시다” 등의 비난이 빗발쳤다. ‘여성을 경시한 잡지 출판을 멈추고 사과하라’는 제목의 온라인 서명에는 5만명 가까이가 참여했다. ‘주간SPA!’ 편집부는 결국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친밀해지기 쉬운’이라고 표현해야 할 부분에 선정적인 단어를 쓰게 됐다” 등의 해명이 더욱 비난을 불렀다.

 

또 하나는 여자 아이돌그룹 멤버 피습 사건. NGT48의 야마구치 마호가 지난 8일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자택에서 괴한에게 습격을 받은 사실과 함께 소속사가 한 달간 아무런 대처도 없었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지난 10일 팬미팅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고개 숙인 것은 야마구치였다. 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공포를 눈물로 호소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도 모자라, 소속사는 피해자가 사과하도록 해 사태를 서둘러 수습하려 한 것이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남성’들의 대응은 한술 더 떴다. 일본의 유명 개그맨 마쓰모토 히토시는 후지TV의 한 프로그램에서 NGT48과 자매그룹인 HKT48의 사시하라 리노가 대책을 호소하자 “그건 자신 있는 몸을 사용해 어떻게 해보든지”라고 말했다. 여성이 출세하기 위해 ‘성’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편견을 여과 없이 노출한 것이다. 이런 차별적 발언을 후지TV에선 편집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보냈다.

 

해가 바뀌어도 일본 사회가 남성 중심의 철옹성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일 소설 <82년생 김지영> 일본어판 간행 기념 행사에서 서평가 구라모토 사오리는 “1980년대 얘기라고 생각했던 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변하지 않는 일본의 현실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인터넷 서명운동과 면담을 통해 ‘주간SPA!’의 사과를 이끌어낸 것은 야마모토 가즈나 등 여대생들이었다. ‘조직과 사회의 조화’ 등의 명목 아래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에 당당히 맞서는 젊은 세대들이 있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내건 ‘여성이 빛나는 사회’라는 구호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에 분노를 표현하고, 연대하고, 현실을 바꾸려는 누군가가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는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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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가 밝았다. 일본에서는 새해 첫날인 ‘오쇼가쓰’를 맞아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과 술을 즐긴다. 신사나 절을 찾아 한 해의 소원도 빈다.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는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달 29일부터 휴가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2019년이 어느 해보다 뜻깊은 해가 되길 바랄 것이다. 그는 올 11월 역대 ‘최장수 총리’ 등극을 앞두고 있고, 비원(悲願)인 평화헌법 개정에도 나선다. 장기 정권의 ‘레거시(정치적 유산)’로 북방영토(쿠릴 4개섬) 문제 해결도 노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3연임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2021년 9월까지 총리직을 이어갈 수 있다. 오는 8월에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의 전후 최장수 총리 기록(2798일)을 넘어서고, 11월엔 가쓰라 다로(桂太郞) 전 총리(2886일)를 제치고 역대 최장기 재임 총리가 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개헌과 북방영토 해결을 올해 목표로 잡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개정 헌법의 2020년 실시를 내걸었다. 자민당도 전쟁 포기와 전력 불보유를 규정한 헌법 9조에 자위대의 설치 근거를 두는 당 개헌안을 지난해 3월 마련했다.

 

하지만 지난해는 오산의 연속이었다. 사학 스캔들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소극적인 태도, 전면 배치했던 측근들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당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조차 하지 못했다. 자민당은 이달 하순 정기국회에서 당 개헌안을 제출할 생각이지만, 오는 7월 참의원 선거 전 국회 개헌 발의는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개헌 발의를 참의원 선거 이후로 미루고 내년 상반기까지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안이 부상하고 있다. 이런 안이 현실화할 경우 참의원 선거 결과가 개헌을 크게 좌우하게 된다.

 

아베 총리는 “2019년은 러시아”라며 북방영토 문제 해결에도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코탄·하보마이 섬을 일본에 인도하는 내용을 담은 1956년 소·일 공동선언에 기초해 평화조약 협상을 가속하기로 했다. 오는 21일 모스크바에서 가질 러·일 정상회담에서 북방영토 문제에 진전을 이뤄낼지 주목된다.

 

다만 국내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푸틴 대통령이 2개 섬 인도에 동의할지는 불투명하다. 설혹 2개 섬 반환에 합의해도 아베 총리가 당초 4개 섬 반환에서 2개 섬 반환으로 방침을 바꾼 데 대한 여론의 반응도 예단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중·참의원 ‘더블 선거’ 얘기도 솔솔 나오고 있다. 북방영토 협상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중의원을 해산한 뒤 중·참의원 동시 선거를 치러 개헌 정족수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올해의 ‘빅 이벤트’인 북방영토 협상, 참의원 선거, 개헌 발의가 얽히고설켜 있는 셈이다.

 

하지만 새해 소원이 대부분 그렇듯 아베 총리의 시나리오가 뜻대로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장기 정권에 필연적인 ‘레임덕’이 새 일왕이 즉위하는 5월1일을 기점으로 시작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경제도 불확실성을 더해가고 있다.

2019년은 돼지, 일본에선 멧돼지의 해다. 멧돼지는 무병장수와 용맹·모험을 상징한다. 저돌맹진(猪突猛進·앞뒤 안 보고 목표를 향해 돌진함)이라는 말도 있다.

 

아베 총리는 집권 6년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케 하는 안보법, 알 권리 침해 우려가 있는 특정비밀보호법, 범죄를 계획 단계부터 처벌할 수 있는 공모죄법 등을 여론의 반대에도 강행 통과시켰다.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나눠 사회를 갈라놓는 수법도 두드러졌다. 그가 자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멧돼지처럼 무턱대고 돌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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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면역이 없고, 운이 나빴다고 할까, 그런 블로그를 만나서 믿고 말았습니다.”

지난 23일 마이니치신문 인터넷판에는 50대 여성 ㄱ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ㄱ씨는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로 “블로그가 불안감과 공포감을 부추겼다. 세뇌당했다”고 했다.

 

ㄱ씨가 말한 블로그는 ‘여명(余命) 삼년 시사일기’라는 익명의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다. 이 블로그는 “조선인은 일본의 암”이라고 주장하면서 ‘재일(在日)’은 불법체류자로 입국관리국에 통보할 것, ‘반일(反日)’은 외환(外患) 유치죄 등으로 경찰에 고발할 것,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에 반대하는 변호사회 회장 성명에 찬성한 변호사는 ‘확신적 범죄행위’ 등으로 징계를 청구할 것 등을 촉구해왔다. 이에 지난해 전국 21개 변호사회에는 성명에 찬성한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징계 청구가 13만건이나 쇄도했다.

 

ㄱ씨는 징계청구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블로그에서 말한 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ㄱ씨는 2015년 한 개그맨의 개그 소재가 ‘반일적’이라는 인터넷 글을 보고 검색을 하다가 이 블로그를 만나게 됐다. “일본이 한국·중국과 분쟁 상태가 되면 재일코리안들과 실질적인 게릴라전 상황이 된다”라는 글에 위기감을 느꼈고, 블로그의 ‘지시’를 즐겁게 기다리게 됐다. 블로그 활동비를 보낸 일도 있다.

 

징계청구에 대해서도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블로그 댓글난에 주소와 성명을 기입하자 지난해 5월과 10월 각각 200장의 고발장과 징계청구서가 왔다. ㄱ씨는 청구서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고, 도장을 찍어 우편으로 보냈다. 그는 “일본을 위하고, 일본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쁜 듯한 심리상태였다. 다음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지시를 바란 부분도 있다”라고 했다.

 

징계청구 대상이 된 변호사들이 업무 방해 등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두려움을 느꼈고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블로그를 보는 것을 그만뒀다. 그는 징계청구라는 수단은 잘못됐지만, 자신이 차별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더러 차별주의자라고 하면 좀 이해가 안 간다”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ㄱ씨의 인터뷰를 보면서 지난 7월 만난 김류스케 변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959건의 징계청구 대상이 된 김 변호사는 당시 “두렵다”고 했다. 과거와 달리 실명으로 차별·혐오 발언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고 ‘일본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고, 당당하게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를 해도 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일본인들에게 존재하는 재일코리안을 배제하려는 감정이 유언비어나 선동에 쉽게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이번 대량 징계청구 사건을 두고 95년 전 간토(關東) 대지진 때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던 사태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 24일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징계를 청구한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김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징계를 청구했던 41세 남성에게 33만엔(약 330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해당 남성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서면으로도 자신의 입장을 제출하지 않았다.

 

ㄱ씨를 비롯한 청구자들에게 차별을 했다는 의식은 없어 보인다. 일부 청구자들은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에게 ‘사죄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손해배상 청구를 피하기 위한 편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케다 겐타(池田賢太) 변호사는 지난 5월 사죄문을 보낸 이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나한테 사죄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 안에 명확하게 존재하는 ‘차별을 하는 마음’과 마주하고, 차별을 즐기는 것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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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4일 총리 관저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만나 “(아베 내각) 역대 최고인 5명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한 차관급 인사에서 부(副)대신 25명 중 여성이 지난 개각 때보다 2명 늘어난 5명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25세 이상 여성 취업률은 미국을 웃돌고, 임원 수도 정권 발족 전보다 2.5배 늘었다”고 덧붙였다.

 

라가르드 총재는 “일본은 여성 활약 면에 세계의 챔피언 같은 존재”라고 덕담하면서도 일본이 노동시장에서의 성 격차를 줄이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이자 선도적인 여권(女權) 옹호자로 꼽힌다.

 

아베 총리가 라가르드 총재 앞에서 낯간지러운 자랑을 한 이유가 있다. 지난 2일 출범한 4차 아베 개조(改造) 내각에서 각료 19명 가운데 여성이 단 한 명밖에 없는 데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부대신에 여성을 늘렸다고 자랑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정무관(차관급) 인사에서 여성은 지난번보다 1명이 줄어든 1명이다. 한 일본 언론인은 “부대신은 큰 권한이 없다”며 “개각이 파벌의 의향에 얽매였고 여성 각료가 적다는 비판을 물타기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정치와 경제에서 여성 참여가 저조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 2017’에선 조사대상 144개국 중 114위를 차지했다.

이번 개각에서 이런 상황이 재확인됐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아베 정권의 ‘본심’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은 ‘여성 활약’을 간판 정책으로 적극 홍보해왔다. 실제 정권 출범 당시 여성 각료가 5명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개각 때마다 여성 각료가 3명, 2명으로 점차 줄어들어 이번에 달랑 1명이 됐다.

 

지난해에는 국제여성회의(WAW)를 유치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를 초청했다. 아베 총리는 이방카가 설립에 관여한 ‘여성기업가기금 이니셔티브’ 기금으로 5000만달러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유엔 연설에서는 “여성이 빛나는 사회”를 말했다.

이번 개각으로 그런 ‘여성 활약’ 구호를 내팽개친 셈이 됐다. 아베 총리도 이를 의식한 듯 개각 후 기자회견에서 “(여성 각료의 수가) 적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일한 여성 각료인 가타야마 사쓰키 지방창생상에 대해 “2명, 3명 몫의 발신력을 갖고 일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가타야마 지방창생상에게 2명, 3명 몫의 권한을 줄 리 만무하다. 오히려 여성이 2명, 3명 몫을 해야만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본사회의 풍토만 부각시킬 뿐이다.

 

아베 총리는 심지어 “일본은 여성 활약 사회가 막 시작돼 앞으로 점점 입각할 인재가 자랄 것”이라고 했다. 발족 6년이 다 돼가는 정권이 할 말인가 싶다. 정말 생각이 있었으면 그동안 여성 의원과 관료를 늘릴 수 있었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여성후보자 비율은 전체 17.7%에 훨씬 못 미치는 7.5%였다.

 

‘1억 총활약 사회’ ‘일하는 방식 개혁’ ‘사람 만들기 혁명’…. 아베 정권은 그간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신조어를 잇달아 만들어 정권의 치적을 강조하고 비판을 피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번 개각을 통해 적어도 ‘여성 활약’은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오히려 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사건에 대해 “함정에 빠진 거라는 의견도 많다” 등으로 옹호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이 건재한 게 정권의 본질에 가까운 게 아닐까.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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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지난 8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 사쿠라초등학교 강당에 ‘고향의 봄’이 울려퍼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40여명이 함께 입을 모았다. 휠체어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재일동포 고령자 모임인 ‘도라지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마련된 마당극을 여는 노래였다. 마당극 제목도 ‘고향의 봄 2’.

 

‘도라지회’는 1998년 1월 가와사키 후레아이칸(교류관)에서 글을 배우던 할머니들의 교류의 장으로 시작됐다. 매주 수요일 사쿠라초등학교 한쪽을 빌려 한국 요리나 노래, 춤을 즐긴다.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할머니들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위안을 얻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등록 회원은 110명.

 

마당극에 앞서 후레아이칸 30주년 및 도라지회 20주년 기념식도 열렸다. 후레아이칸은 재일 인권운동가 고(故) 이인하 목사(1928~2008년)의 주도로 1988년 설립된 다문화 복지시설이다. 후레아이칸과 사쿠라초등학교가 자리한 사쿠라모토(櫻本) 지역은 재일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날 마당극은 일제강점기와 태평양 전쟁, 해방 등 굴곡의 역사를 살아온 재일동포 할머니들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총 4마당에 걸쳐 할머니들의 연기와 노래, 춤이 펼쳐졌고, 중간중간 할머니들이 꼭꼭 눌러쓴 ‘개인사’가 소개됐다. 

 

섣달그믐 밤 어머니가 만들어준 치마저고리를 껴안고 자던 ‘고향’의 기억, 일제의 공출을 피해 쌀을 숨기다 발각된 아버지가 끌려간 일, 가난을 피해 혈혈단신으로 바다 건너 일본으로 온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한 잔에 40엔 하는 막걸리 가게를 열고 일본인이 먹지 않던 소 내장을 구해 야키니쿠(숯불고기) 가게를 한 일…. 할머니들의 질곡 많은 삶에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마당극에선 억척스럽게 역경들을 이겨낸 할머니들의 모습이 빛났다. 최고령자인 조정순 할머니(94)는 탄광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나르던 일을 담담하게 증언하면서도, ‘살아서 다행’이라는 의미로 몇 번이나 했던 한국말로 “아이고 참 좋다”를 외쳤다.

각 마당을 알리기 위해 한 할머니가 손팻말을 들고 엉덩이춤을 추자 관객석에선 “예뻐요”라는 말이, 할머니 10여명이 ‘노들강변’에 맞춰 부채춤을 추자 “멋지다”라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할머니들이 대사를 까먹어 서로 알려주거나 “잘 들리지 않으니 크게 말해” “내가 말할 차례니까 잠깐만”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할머니들은 무대를 내려오면서 “부끄럽다”면서도 웃었다.

 

마지막 마당에선 도라지회에 다니면서 젊은 재일동포들이 일본인들과 함께 “차별을 없애자”고 노력하는 걸 보고 “우리도 힘내야지”라고 다짐하는 할머니들의 심정이 소개됐다.

 

“돌아가라니. 지금 돌아갈 곳은 이곳밖에 없어. 그런 말 말고 도라지회에 오면 어때. 맛난 거 함께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좋지 않나. 제대로 만나보면 그렇게 말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어 페루에서 온 일본계 2세 오시마 마사코(大城正子) 할머니의 글이 소개됐다. 할머니는 “(페루에서) ‘네 나라에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며 “‘조선에 돌아가’ ‘죽어’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슬픈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마당극을 닫는 노래도 역시 ‘고향의 봄’이었다.

마당극이 끝난 뒤 할머니들이 모두 모여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 모습으로 모이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진행자의 농담에 모두들 환하게 웃었다. 이날 할머니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남달라보였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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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자민당 총재 3선이 ‘따 놓은 당상’으로 가는 흐름이다. 총리 주변에서는 남은 것은 총재 선거에서 압승해 ‘아베 1강’ 체제를 굳히는 것뿐이라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당내 세력 판도가 아베 총리 쪽으로 기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베 총리는 소속 파벌이자 당내 최대인 호소다파(94명), 2번째인 아소파(59명), 5번째인 니카이파(44명)의 지지를 받고 있다. 여기에 4번째 파벌인 기시다파(48명)의 수장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 정조회장이 최근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아베 총리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과 당원이 각각 405표이고,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국회의원 405표, 당원 47표로 결선이 치러진다. 의원표의 60%를 확보한 아베 총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아베 총리가 3선에 성공하면 최장 3년을 더 집권할 수 있고,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될 수 있다. 총리 측 바람대로 ‘아베 1강’ 체제가 탄탄대로를 달릴 가능성도 높다. 거칠 것 없이 밀어붙이기로 일관했던 1년여 전 상황이 재현되는 셈이다.

 

총리 측으로선 그렇게 된다면야 금상첨화지만, ‘아베 1강 체제’의 폐해가 커지는 건 아닌지 짚어볼 대목이다. 징조는 나타나고 있다. 총리 주변에선 “따르지 않는 사람은 찬밥을 먹을 것”이라고 의원들을 공공연하게 겁박하고, 의원들도 눈치껏 줄을 선다. ‘우에서 좌를 아우른다’던 자민당의 활력은 온데간데없다. 모리토모(森友)·가케(加計)학원 스캔들에서 드러났던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행동)’의 구조가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목할 대목은 또 있다. ‘아베 총리 3선 유력’ 보도가 나오던 즈음 실소를 자아내는 뉴스가 날아들었다. 자민당 소속 스기타 미오(杉田水脈) 의원이 “LGBT(성적 소수자) 커플은 생산성이 없다”면서 이들에게 세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월간지 기고에서 당당히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자민당은 “각각 정치적 입장, 다양한 인생관이 있다”(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는 식으로 대응했다. 보편적 인권 문제에 눈을 감은 것이다.

 

문제는 이번 논란이 어느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 의원의 돌출 행동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스기타는 “남녀평등은 망상”이라거나, 성폭행을 폭로한 여성 저널리스트에 대해 “여자로서 잘못이 있었다”라는 등 망언을 반복해온 인물이다. 그가 선배 의원들로부터 “잘못한 게 없으니 가슴을 펴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듯이, 자민당 내에도 이런 인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인식이 일본 우익의 논리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우익은 전전(戰前)의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가족국가’ 체제가 대표적이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것이 아베 총리의 최대 후원세력이자 최대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다. 이들은 전쟁 가능한 국가로 가는 개헌을 외치고 있고, 위안부 문제 등 식민지배와 전쟁의 역사를 뒤집으려는 ‘역사수정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스기타는 ‘소녀상 폭발’ 발언을 하는 등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는 활동도 적극 해왔다. 그가 지난 총선에서 공천받을 때 우익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를 추천해줬다고 밝힌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기타 의원은 아베 총리 파벌인 호소다파 소속이다.

‘아베 1강 체제’의 장기화는 자민당의 활력만 잃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일본 사회 전반에 ‘손타쿠’와 ‘침묵’의 구조를 심화시킬 위험성도 지적된다. 최근 아베 총리와 자민당 의원들의 ‘폭우 술자리’를 비판하는 측에게 ‘거국일치’ 역공이 있었던 것은 이를 예고하는 듯하다. 조만간 스기타 같은 인물들이 더 당당하게 차별적 발언을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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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20일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으로 일본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옴 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본명 마쓰모토 지즈오) 등 7명에 대한 사형이 지난 7일 오전 전격 집행됐다.

 

NHK 등 방송들은 당일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긴급 속보를 내보냈고, 주요 신문들도 호외를 발행하는 등 관련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후에도 시리즈 기사나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옴 진리교 사건의 파장과 의미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23년 전 옴 진리교 사건이 일본 사회에 던진 파장이 그만큼 심대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일본 언론들이 이번 사형 집행을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일단락짓는 행위로 풀이하고 있는 점이다. 헤이세이는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연호로, 1989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내년 4월30일 퇴위하고, 아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5월1일 새 일왕에 즉위할 예정이다. ‘헤이세이 최대의 흉악 사건’으로 불리는 옴 진리교 사건을 헤이세이 안에 마무리짓고 새 연호의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옴 진리교는 1989년 사카모토 변호사 일가족 살해 사건, 1994년 마쓰모토시 사린 사건, 1995년 지하철 사린 사건 등 극악한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으켰다. 이들 사건으로 29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은 인파가 몰리는 출근시간대 도쿄 도심에서 화학무기로 일반시민을 무차별적으로 노렸다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새해 벽두 발생해 6300여명이 숨진 한신(阪神) 대지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하철 사린 테러 사건 며칠 뒤엔 경찰청장 저격 사건까지 벌어졌다. ‘치안대국’을 자부하던 일본이 받은 충격은 컸다. 옴 진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총리 관저에 24시간 체제의 위기관리센터를 설치하고, 위험단체를 규제하는 법을 제정하는 등 위기관리체제를 크게 전환하게 된다.

 

일본 사회가 옴 진리교 사건에서 헤이세이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읽는 이유는 더 있다. 1984년 요가 서클로 출발한 옴 진리교가 교세를 확장해 결국 테러집단으로 변질해간 것은 앞선 연호인 쇼와(昭和·1926~1989년) 말기에서 헤이세이에 걸쳐서다. 이 시기는 일본의 경제와 사회 구조가 크게 바뀌던 때다. 버블 경제와 그 붕괴, 급속한 국제화로 인해 지금까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흔들렸다. 옴 진리교의 성장 배경에는 당시 ‘삶의 허무함’을 느끼던 젊은이들의 심리를 파고든 점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남는다. 왜 옴 진리교는 사회를 적대시해 사린 살포라는 극단으로 치달았는가. 왜 학력이 높았던 젊은이들이 교주의 지시 아래 무차별 살인으로 돌진했는가. 이들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없었던 건가.

 

옴 진리교의 뒤를 잇는 단체들은 현재 신자 1600명, 35곳의 관련시설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길거리나 대학, 인터넷에선 젊은이들을 노리는 ‘컬트집단’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한다. 고립감이나 불만, 극단적 사상의 유포 등 젊은이들이 옴 진리교에 끌렸던 상황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가 이들이 기댈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등 타자를 배제하고 소외감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宮台眞司)는 “사회 전체가 ‘옴’적으로 되고 있는데도 그 자각도 학습도 없이 사형이 집행됐다. 일본 사회는 ‘옴’을 자신들의 문제로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했다. 일부 언론들이 “옴 진리교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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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석개(朝變夕改)도 이 정도면 ‘갑’이다. 보는 사람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최근 북한에 ‘러브콜’을 연발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얘기다.

 

아베 총리는 지난 16일 “북한과 신뢰 관계를 증진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큰 결단을 기대한다”며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깨고 전진하고 싶다”고 했다. 18일에도 “납치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내가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에게는 북·미 정상회담을 실현한 지도력이 있다”고도 했다. ‘대북 강경’ 일변도였던 그 아베 총리가 맞나 싶다. 그는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위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 “최대한의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에서 북.미 정상 회담 관련 기자 회견을 갖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런데 지난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태도를 180도 바꿨다. 아베 총리가 “도널드”라고 부르면서, “100% 일치”를 과시했던 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계기를 줬다. 문재인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까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유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 ‘도널드’가 하는데 ‘신조’가 안 한다? 상상하기 어렵다.

 

‘절친’ 도널드와 이심전심인 만큼 향후 전개 과정을 알아챘을 수도 있다. 한 전문가는 “아베 총리까지 정상회담을 하려는 건 비핵화에 진전이 있다고 보는 거 아니겠냐”고 했다.

 

아베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이유는 더 있다. ‘재팬 패싱(배제)’ 우려를 씻고 현 국면에 올라타겠다는 셈법이다. ‘납치의 아베’로 지금 자리까지 오른 아베 총리로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자칫 정치생명까지 위험하다고 직감했을 것이다. 각종 스캔들로 떨어진 지지율 부양과 오는 9월 자민당 총재 3연임에는 북·일 정상회담이 ‘믿는 구석’일 것이다. 실체 없는 ‘대북 교섭설’이 흘러나오고, ‘다음은 내 차례’ ‘나는 속지 않는다’ 같은 낯뜨거운 제목들이 친(親)아베 언론에 등장하는 게 우연일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북·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걸 말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아베 정권에게 ‘북한 위협론’은 주요한 자산이었다. 지난해 10월 갑작스러운 중의원 해산의 명분도 북한 핵·미사일 위기로 인한 ‘국난’ 돌파였다. 그런 북한이 이번에 정반대에서 아베 정권의 ‘동아줄’이 된 건 아이러니하다. 북한의 ‘대화 공세’를 “미소 외교” “시간 벌기”라고 비난하더니 지금은 “신뢰관계 증진” “상호 불신의 껍데기를 깨자”고 한다.

 

일본이 북·일 정상회담의 목표로 삼고 있는 납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그간 압력이 필수라는 자세로 일관해왔다. 스스로 선택지를 좁혀온 셈이다.

 

더욱이 아베 총리가 북·일 국교 정상화의 기초로 삼자고 하는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은 ‘불행한 과거의 청산’과 ‘현안사항의 해결’을 병기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와 납치 문제의 동시 청산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후자만 강조됐고, 전자는 사실상 무시됐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아베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 위에 새로운 북·일관계를 만들어갈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다.

 

한 일본 언론인은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일본 보수우익 세력들이 말 그대로 ‘멘붕(정신 붕괴)’이라고 했다. 지난 70년간 한반도 분단 체제와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의존해온 이들에게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전면에 내세운 공동선언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비단 아베 총리나 일본 보수우익세력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동북아시아가 새로운 평화체제로 가는 것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지 말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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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상사가 끊이지 않는 일본에서 최근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대학 미식축구 라이벌전의 ‘악질 태클’ 파문이다. 사건은 지난 6일 미식축구 명문인 니혼(日本)대와 간세가쿠인(關西學院)대의 라이벌전에서 일어났다. 니혼대 수비수가 볼과 상관없는 곳에서 무방비 상태인 간세가쿠인대 쿼터백에게 백태클을 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힌 것이다.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해당 니혼대 선수는 지난 22일 사죄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과 코치가 ‘악질 태클’을 하라고 사실상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선수는 “의욕이 부족하다고 연습에서 제외됐다가 코치로부터 ‘상대팀 쿼터백을 첫 플레이에서 부숴버리면 (경기에) 내보내겠다고 감독이 얘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감독에게 “상대팀 쿼터백을 부수겠다. 써달라”고 말했고, 감독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해당 감독과 코치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지시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또 “‘부숴라’는 미식축구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니혼대도 같은 내용의 답변서를 간세가쿠인대에 보냈다.

 

하지만 간세가쿠인대 측은 “답변서에 모순이 많다”면서 수사기관 등에 의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전문가들도 해당 수비수가 경기를 계속했고, 감독의 질책이나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코치진이 사실상 ‘악질 태클’을 유도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건 추이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치부를 드러낸 대학 스포츠계가 일본 사회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적지 않은 이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는 도쿄신문 칼럼에서 이번 사건이 ①감독이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 ②코치가 ‘상대방 쿼터백을 부숴라’ 등 구체적 지시 ③ 다른 선택지가 없이 내몰린 선수가 ‘부술 테니 써달라’고 자청하는 구조라고 분석하면서 과거 일본 군대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에는 지금도 일본 군대의 명령 계통과 역할 분담으로 움직이고 있는 곳이 많다고 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군은 사라졌지만, 일본군의 조직 원리나 문화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2015년 도시바의 대규모 분식회계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던 2008년 도시바의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120억엔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분식회계를 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무리한 지시가 떨어져도 어떻게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 도시바의 조직문화였다.

 

아베 총리가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학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총리의 의도를 공무원들이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행동)한다.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명령한 적이 없다”고 하면 된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이번 사건에서 전후 일본 사회의 ‘무책임의 구조’를 본다고 했다. 일본은 주변국에 심대한 고통을 안겼던 전쟁 책임 문제를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기업으로 치면 회장이라 할 일왕부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퇴위도 하지 않았고, 전쟁 책임에 대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었다.

 

역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는 <일본 전후사>에서 이런 일왕의 태도가 “전후 일본인의 정신사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쳤다”면서 “전쟁 책임의식을 희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치적 책임, 도의적 책임을 지는 방식에 맺고 끊는 것이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악질 태클’ 사건에 일본 사회의 이런 무책임 구조를 대입하는 것이 이 언론인만의 과대 해석은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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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도쿄 와세다대 근처의 아바코 예배실을 찾았다. 그림책 <꽃할머니>의 일본어판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꽃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기초로, 열세 살 소녀가 겪어야 했던 모진 고초를 그리면서 전쟁과 폭력이 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한·중·일 3국이 기획한 ‘평화 그림책’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중국에선 2010년 출간됐지만, 일본에선 8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됐다.

 

이날 행사에는 <꽃할머니> 작가 권윤덕씨와 함께 일본 그림책 작가 다시마 세이조(田島征三·78), 하마다 게이코(浜田桂子·71)가 나왔다. 두 사람은 ‘평화 그림책’ 탄생의 산고(産苦)를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 10여년간의 여정을 때로는 웃음을 섞어가면서 담담하게 술회했다.

 

<꽃할머니> 작가 권윤덕씨(왼쪽에서 두번째)가 지난 28일 도쿄 신주쿠에서 열린 일본어판 출간 기념행사에서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김진우 기자

 

‘평화 그림책’은 다시마를 비롯한 일본 그림책 작가 4명으로부터 시작됐다. 다시마는 “어떻게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에서부터 피해를 입힌 아시아의 작가들에게 호소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2005년 한국과 중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취지를 설명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기도 했다. 2007년 중국 난징(南京)에 한·중·일 작가들이 모였다. 언어는 달랐지만, 아이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지난날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오늘의 아픔을 나누며, 평화로운 내일로 함께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 그림책’은 다시마의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하마다의 <평화란 어떤 걸까>(이상 한국어판 제목) 등의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다. 다만 <꽃할머니>는 “심 할머니의 증언이 공문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등의 이유로 일본어판 발간이 취소됐다.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광’에 묻힐 뻔한 책을 살려낸 것도 다시마 등이었다. 기획을 처음 제안했다는 책임감이, 작고하기 전 만난 심 할머니와의 약속이 이들을 움직였다.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없었을까. 다시마는 “새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며 웃었다. 그는 우익의 선전차량들이 집 주변을 돌면서 스피커를 통해 “아이들을 적화(赤化)시킨다”고 비난하는 일을 겪었다. 하마다는 임신으로 부른 배를 안고 가두선전을 하는 우익들에게 다가가 “그만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마는 “80여년 전 미디어나 출판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한 게 일본이 점점 (태평양)전쟁에 가까이 가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갖은 곡절을 겪으면서도 ‘평화 그림책’을 밀어붙인 동력은 무엇일까. 실마리는 반평생을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면서 반전·평화·생명의 메시지를 전해온 이들의 이력에 있어 보였다. 다시마의 얘기처럼 일본 작가들이 한·중 작가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데는 ‘가해국’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양심과 실천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의 이케다 에리코(池田惠理子) 관장은 마무리말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열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일본 시민들이 제안을 했고, 각국에서 온 이들이 서로 얼싸안고 했다. 가해자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여정은 멀다. 하지만 역사의 아픔에 공감하고,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어,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데서 미래가 바뀐다는 뜻처럼 들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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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의혹, 새로운 증거가 튀어나오는 이상(異常) 사태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지난 한 달여간이 그렇다. 오죽했으면 여당인 자민당 간사장의 입에서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나올까.

 

상황이 이런데도 발뺌과 책임 전가에 급급한 정권의 모습은 견제장치 없는 ‘아베 1강’의 본질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아베 총리와 그 주변에서 내뱉는 무수한 언어들은 국민들을 ‘지긋지긋’하게 만들어 “정치가 다 그런 거지”라는 정치 허무·혐오에 빠뜨리려는 것 같다. 문제가 없다고 계속 강변하다 보면 어차피 국민들은 곧 잊는 법, 이라고 깔보는 걸까.

 

아베 정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은 더 있다. 재무성 관료 ‘톱’인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사무차관의 성희롱 의혹이다.

 

잡지 ‘주간신초’는 지난 12일 후쿠다 차관이 회식 등의 자리에서 재무성 출입 여기자들에게 성희롱을 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후쿠다 차관은 “키스해도 되느냐” “호텔로 가자” 등 노골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심지어 모리토모학원 문제를 질문하는 여기자에게 “가슴 만져도 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주간신초는 13일 성희롱 음성 녹음을 공개했다. 하지만 후쿠다 차관이 16일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문제는 이 사건을 대하는 아베 정권의 자세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은 “후쿠다 차관에게 긴장감을 갖고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의를 줬다”고 밝혔다. 후쿠다 차관의 간단한 보고만을 바탕으로 구두 주의를 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 것이다.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긴장감을 갖고 행동하게 하겠다”고 밝힌 걸로 봐서 아베 총리가 이번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베 정권은 ‘모든 여성이 활약하는 사회’를 주요 과제로 내걸고 있다.

 

이런 자세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과학성 사무차관의 경우와 대비된다. 아베 정권은 마에카와 전 차관의 ‘데아이케(만남) 바’ 출입 보도에 호들갑을 떨었다. “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등 인신공격까지 반복했다. 그래 놓고선 현역 사무차관의 성희롱 의혹에는 무르게 대응했다.

 

하긴 스가 관방장관은 가케(加計)학원 수의학부 신설 특혜 의혹과 관련, 총리 비서관의 ‘총리 사항’ 발언이 적힌 에히메(愛媛)현 면담기록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문서에 대해 정부가 코멘트하지 않는다”고 발을 뺐다. 정권에 불리한 일은 덮거나 피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측은 철저하게 때려 부순다.

 

아베 총리는 잇따르는 불상사에 대해 “고름을 다 짜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름이 멈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권은 고름이 나오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데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태가 장기화되고 진위가 흐릿해지면 국민들의 관심은 사그라들 것이라는 속내일지도 모른다. 실제 총리 관저에선 “2015년 안보법 통과 때도 야단법석이었지만 얼마 뒤 잠잠해졌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아베 정권이 지금까지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해온 ‘자신감’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분란을 싫어하고 안정을 지향하는 일본 국민들의 성향, 지리멸렬한 야당 상황 등도 거론된다.

 

그렇다면 지난 14일 도쿄 국회의사당 앞을 가득 메운 3만 시민의 외침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아베 정권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잇따라 나오는 증거들과 커지는 분노들. 반면 국민의 ‘지긋지긋한 감정’의 허점을 파고드는 정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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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료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최근 한 달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흔들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한때 일본을 떠받친다고까지 얘기됐던 관료 세계의 혼란과 해이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선 모리토모(森友)학원에 대한 국유지 헐값 매각 의혹을 둘러싼 재무성의 문서 조작. 아베 총리 측이 헐값 매각이나 문서 조작에 관여했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두드러지는 점은 의혹이 제기된 당시 담당 국장이던 사가와 노부히사(佐川宣壽) 전 국세청 장관을 필두로 재무성 관료들이 정권 옹호에 필사적이었다는 것이다. 사가와가 국세청 장관에 임명된 것도 이런 ‘충성심’을 평가받은 덕분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런데 문서 조작 사건이 터지자 상황이 180도 뒤집혔다. 아베 정권은 “최종 책임은 사가와”(아소 다로 부총리)라면서 재무성 관료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사가와는 ‘꼬리 자르기’ 대상으로 전락했다.

 

또 하나의 ‘사학 스캔들’이었던 가케(加計)학원 특혜 의혹은 다른 양상이다. ‘총리 의향’이라고 적힌 문부과학성(문부성) 문서가 공개된 데 이어 마에카와 기헤이(前川喜平) 전 문부성 사무차관도 “총리 관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마에카와는 ‘데아이케(만남)바’ 출입 보도 등으로 부도덕한 인물로 낙인찍혔다. 최근에는 문부성이 마에카와의 중학교 강연내용을 뒷조사했고, 친아베 성향의 자민당 의원 2명이 이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은 끝까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앞서 사가와 건과 비교하면 정권에 충성해도 잘리고, 정권에 반항해도 잘린다.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시계를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아베 정권 추락의 신호가 된 재량노동제 데이터 조작 문제가 있다. 아베 총리는 “재량노동제 노동자의 근무시간이 일반 노동자보다 짧다는 자료도 있다”고 답변했지만 전제조건이 다른 데이터를 비교한 자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무부처인 후생노동성이 잠깐만 조사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실수한 것을 두고 ‘과잉 충성’에 눈이 먼 탓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의도적인 사보타지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난해 유행어였던 ‘손타쿠(忖度)’ 문제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관료들이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기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감추고 보는 관료 집단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난맥상의 배경에 5년 넘게 이어진 아베 ‘1강 체제’의 부작용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베 정권은 2014년 내각인사국을 신설해 관료들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관료들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총리관저의 뜻대로 알아서 움직이게 됐다는 지적이다. ‘손타쿠’ 구조의 정점에 총리가 있는 셈이다. 일련의 사건에서 보이듯 아베 정권은 관료들을 정권을 지키는 도구로 생각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시한다. 자민당 와다 마사무네(和田政宗) 의원은 지난 19일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오타 미쓰루(太田充) 재무성 이재국장이 민주당 정권 시절 총리 비서관을 지냈던 점을 들면서 “아베 정권을 깎아내리려고 의도적으로 이상한 답변을 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철학자 우치야마 다카시(內山節)는 근대 정치의 병리로 ‘독재정치’를 낳는 불완전한 대의민주주의와 관료제 문제를 들었다. 정치가는 선거가 끝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정치가 밑에서 관료들은 자기보신에 몰두한다. 그 속에 주권자에 대한 공복(公僕) 의식은 없다. 지금 총리 관저 앞에서, 도쿄와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울려퍼지는 함성은 바로 그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훼손된 데 대한 분노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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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31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의 공동주택 ‘소셜하임’에서 화재로 40대부터 80대의 남녀 1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소셜하임’은 빈곤층의 자립을 지원하는 시설로, 입주자는 경제적으로 곤궁하거나 돌봐줄 친·인척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8월에는 아키타현 요코테시의 맨션 ‘가테야미나미초 하이츠’에서 화재가 발생해 50~70대 입주자 5명이 숨졌다. 사망자는 모두 중·고령의 독거 남성들이었다.

 

앞서 지난해 5월엔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의 맨션 ‘나카무라소’가 전소해 50~80대 6명이 숨졌다. 나카무라소는 임차료를 하루씩 내고 살 수 있는 곳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생활보호를 신청한 노숙인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3건의 화재에서 공통되는 것은 피해자들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독거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모두 낡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소셜하임’은 원래 3층짜리 목조 여관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1층과 2층에 10㎡ 정도의 개인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이 빨리 번져 몸이 불편한 고령자들이 대피하기에 시간이 부족했다.

 

‘소셜하임’ 참사 한 달여를 맞아 일본 언론들은 이번 사고가 ‘방재선진국’ 일본의 방재·피난 대책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셜하임’이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는 시설에 포함되지 않은 점을 들어 법의 ‘사각(死角)지대’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독거·빈곤 문제 등 초고령사회를 맞은 일본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배경으로 드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화재가 발생한 3곳은 모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독거노인이나 빈곤층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일본에선 2000년대 들어 비영리법인(NPO)을 중심으로 빈곤층의 생활보호자 신청을 지원하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복지 행정은 이들을 받아들일 곳을 정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열악한 주거 환경에 고액의 이용료를 징수하는 ‘빈곤 비즈니스’ 시설이 생겨나게 됐다. 행정 측도 빈곤층이 살 수 있는 공영주택을 줄여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NPO 등은 직접 건물을 확보해 빈곤층에게 거처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자금력에는 한계가 있어 활용할 수 있는 건물은 노후화된 목조 건물이 대다수였다.

 

일본에선 독거노인들이 집을 빌리기란 쉽지 않다. 집주인들이 ‘고독사’ 등을 우려해 집을 빌려주길 꺼리기 때문이다. 결국 재해에 가장 취약한 곳에, 재해에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가 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소셜하임’을 운영하는 업체 대표는 화재 직후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여력이 안됐다”며 고개를 숙였다. ‘소셜하임’은 유료노인홈이나 무료저가숙박소에 해당되지 않아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 해도 수천만원의 비용이 든다. 지금까지의 ‘선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생활보호 급여자 2명 이상이 이용하고, 법적 지위가 없는 시설이 2015년 6월 현재 전국에 1236곳이 있다.

 

최근 일본에선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실내 동사(凍死)’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노인 고립과 빈곤 문제가 배경인 것으로 분석된다. ‘소셜하임’ 사고가 정부의 규제 강화로만 끝날 게 아니라, 노인·빈곤 문제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소셜하임’ 사고 같은 화재 참사가 발생하면 여론은 떠들썩해지곤 한다. 하지만 빈곤 노인의 고독사에 대해선 그 정도 반응이 없는 것은 왜일까. 비단 일본에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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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한국인을 그냥 자기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아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그랬어요.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최근 저녁 자리에서 만난 재일동포 2세가 한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얘기까지 나오나 싶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70년 넘게 살아온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재일동포들이 겪은 일상적인 차별과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또 다른 재일동포는 “일본인의 ‘분풀이’ 대상이 일본 사회 내의 힘없는 사람, 특히 재일동포”라고 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남북 분단의 고통을 누구보다 절감해온 이들이다. 그래서 평창 동계올림픽의 의미는 남다른 듯했다. 본국에 평화와 통일의 불씨가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한국과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하는 일본 사회의 야멸찬 시선에 대한 우려가 더 커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평창 블리스 힐 스테이트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현안에 대해 논의 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실제 최근 평창 동계올림픽을 둘러싼 일본 정부와 일부 언론 등 일본 사회의 대응은 편향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북한 핵·미사일 개발로 인한 일본의 위기감이나 대북 압박 정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적지 않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 유사시’를 상정한 대응책이나 관련 언급들을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방한 전부터 아베 신조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조속한 실시를 요구할 것이라고 대놓고 공언했다. 일부 언론에선 ‘만일의 경우’라면서 평창을 노린 북한 미사일 공격을 버젓이 거론하는 등 올림픽 개막 직전까지도 위기론을 부채질했다. 한국 일부 보수단체의 시위를 반복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2일자에 북한 응원단이 쓴 남성 가면 논란을 보도하면서 아예 ‘김일성이 200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인터넷은 더 심하다. 유튜브에 ‘평창오륜’으로 검색해보면 아연실색하게 된다. 한국은 북한의 꼭두각시 나라고, 평창은 한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아 당장 망할 것 같다. ‘헤이트스피치(차별·혐오 발언)’에 저촉되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한국 조롱’과 ‘혐한(嫌韓) 정서’가 넘쳐난다.

 

문제는 이런 퇴행적 인식들이 일부 누리꾼을 넘어 TV 방송과 출판 등 전체 미디어에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일 후지TV에 나온 한 패널은 ‘오사카에 북한 테러리스트가 대량 잠복해 있어 위험하다’는 내용의 언급을 했다. 오사카에는 재일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사회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살펴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일본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는 <영속패전론>에서 일본의 보수 세력들이 1945년 패전 뒤 미국에 깊이 굴복하는 반면,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에서 온 힘을 다해 패전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뒤틀림이 일본과 주변국에 실질적인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어 파국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전후 70년이 지나도록 과거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역사·영토 왜곡 주장을 강화하고, ‘전쟁가능한 국가’를 향한 개헌을 서두르고 있다. 뭐든 트집을 잡아 ‘재일동포 탓’으로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상당수 일본인은 이에 무관심하다.

 

일본 TV의 와이드쇼 진행자는 올림픽 직전의 한국 사회 ‘혼란상’을 전하면서 “한국 사회의 폐색감(꽉 막힌 느낌)”을 원인으로 들었다. 최근 일본의 과도한 ‘한국 때리기’가  패전 이후 일본의 ‘뒤틀림’ ‘폐색감’의 분출이라고 한다면 편향적이라고 할 것인가.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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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맞닿은 일본 아키타(秋田)현 오가(男鹿)시.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사찰 도센지(洞泉寺)에는 유골 10구가 임시 안치돼 있다. 이 유골들은 지난해 11~12월 북한에서 표류해온 것으로 보이는 조잡한 목선 내부 등에서 발견된 것이다.

 

본당에 줄지어 놓여 있는 하얀 유골함들 앞에서 주지 스님은 매일 아침 독경을 한다. 그는 “해마다 4~5구의 유골을 받아들이지만 작년은 이상하게도 많았다”고 도쿄신문에 말했다.

 

도센지는 오가시의 의뢰로 1950년대부터 신원불명의 유골을 받아들여왔다. 1~2년이 지나도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유골은 경내 무연고자 묘에 안치된다.

 

지난달 초 ‘재일조선인’이라는 여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북한의) 어업권이 중국에 팔려서 거친 동해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등의 내용이 써 있었다. 봉양에 써달라면서 1만엔이 동봉돼 있었다. 이 밖에도 감사 편지가 몇 통 더 왔고,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방문한 남성도 있었다. 주지 스님은 “북한에 대한 생각은 복잡하겠지만 따뜻한 반응이 많아 안심”이라고 했다.

 

해가 바뀌었어도 북한 추정 어선이나 어민의 시신이 일본 해안에 떠밀려오는 일이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앞바다에 북한 어선 추정 목선 1척이 뒤집힌 채 밀려왔다. 부근에선 일부 백골화한 남자 시신 1구가 발견됐고, 며칠 후 선박 안에서 남자 시신 7구가 수습됐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2013~2016년 50~60척이던 북한 추정 어선은 지난 1년간 사상 최대인 104척이 밀려왔다. 이 중 생존자가 있는 경우는 5건으로 42명이었다. 시신이 발견된 경우는 11건으로 43명의 사망이 확인됐다. 일본에 표류해오는 배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북한 당국이 식량난 타개를 위해 어업을 장려하면서 어민들이 먼바다까지 나온 데다 예년보다 날씨가 안 좋아 풍랑에 휩쓸렸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 당국에 발견되지 않고 바다를 떠도는 배와 시신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낡은 목선을 타고 거친 바다로 나오는 이들. 그리고 시신이 되어 차가운 바다를 떠도는 이들. 북한 당국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 표류 어선과 어민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론과 맞물려 과도한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물론, ‘북한 때리기’ 소재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관심은 북한 공작선이 아닌지, 북한 스파이가 타고 온 건 아닌지에 집중됐다. 지난해 11월 홋카이도 앞바다 무인도에 표착한 북한 어민들의 ‘도둑질’이 여론을 악화시켰다곤 해도 과잉 반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치인과 언론들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 키웠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공작원 등 여러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집권 자민당의 한 의원은 바이오 테러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북한 공작원이 굳이 낡은 목선을 타고 거친 겨울 바다에 나와 일본에 잠입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란 추론은 묻혔다. 과열 반응이 지나고 남은 것은 냉담이다.

어지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목숨을 걸고 차가운 바다로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차가운 바다를 시신으로 떠도는 이들도 누군가의 남편, 아버지, 자식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시신이 되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북한 당국이 인수에 소극적인 탓도 있어서, 앞서 도센지 같은 곳의 무연고자 묘에 묻힌다. 이들은 ‘신원불명의 행로병자’로 처리된다고 한다. 앞서 도센지 주지 스님은 “일본인도 북한인도 생명의 무게는 같다. 시신은 가족이 있는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장례식도 올리지 못한다. 부디 편안히 잠들라고만 기원하고 있다”고 했다.

 

<도쿄|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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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 ‘기대 반 불안 반’의 심정이 된다. 다가올 1년이 어떨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서다. 언론에서 신년 기획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새해의 과제를 짚고, 어떤 1년이 될지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비롯해 방송과 주간지 등에선 ‘2018년 일본’을 전망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내년 4월 말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퇴위로 ‘헤이세이(平成·현 일왕의 연호)’ 시대가 31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점을 비추어 헤이세이 시대를 되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짚는 ‘헤이세이라는 것은’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8년 일본 경제 대예측’ 특집을 통해 지난해 2만2900선대까지 올랐던 닛케이 평균주가가 올해 3만선대를 훌쩍 넘어설 것이란 전문가의 예측을 실었다. 일본 경제가 장기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최근 상황이 이 같은 낙관적인 전망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대목은 향후 일본 경제의 ‘변수’로 북한 핵·미사일 위기, 미국과 중국 등 글로벌 경제 동향과 함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선택’을 드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이 어디까지 현실화할지에 따라서 일본 경제, 아니 일본 사회의 향방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일본은 올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는 중대 분기점을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명분으로 전방위적인 무장 강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戰力) 보유를 하지 못하도록 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앞서 아베 총리는 지난해 헌법기념일인 5월3일 ‘전쟁 포기’(1항)와 ‘전력 불보유 및 교전권 비인정’(2항)을 규정한 현행 헌법 9조에 자위대의 근거를 명확히 한 개정 헌법의 2020년 시행을 목표로 제시했다. 집권 자민당도 최근 개헌안의 국회 발의를 연내에 마치고 늦어도 내년 봄까지 국민투표를 거쳐 2020년 새 헌법을 시행한다는 목표를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당 등 개헌 세력은 현재 중·참의원 모두 개헌안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개헌에 신중한 연립여당 공명당과 개헌에 반대하는 제1야당 입헌민주당, 그리고 절반 가까운 개헌 반대 여론이 변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아베 총리가 필생의 비원(悲願)인 헌법 개정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둘 경우 국민 분열 등 적지 않은 진통이 불가피해 보인다. 개헌 논의에만 매몰될 경우 모처럼 회복세를 보이는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연두소감(신년사)에서 헌법 개정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위대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작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당연히 당에서 (개헌 논의를) 진행해 줄 것”이라며 개헌 논의에 박차를 가할 뜻을 내비쳤다.

 

공교롭게도 아베 총리는 신년사에서 150년 전 메이지(明治) 유신을 사례로 들면서 ‘국난 극복’을 강조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지만, 이때 정해진 일본의 행로는 70년 후 군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진다. 보수우익세력들은 일왕을 중심으로 세계에 위세를 떨치던 ‘메이지 일본’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패전 후 73년. 아베 총리는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새로운 국가 만들기’가 어떻게 될지, ‘불안’의 한 해가 시작된다고 느끼는 일본 시민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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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가진 남성이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 일명 ‘후라리맨’을 두고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후라리맨’은 ‘흔들흔들’을 뜻하는 일본어 ‘후라리’에 남성을 뜻하는 영어 ‘맨(man)’을 합친 말이다. 원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만 했던 남성들이 정년 퇴직 후 가정에서 있을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한 일본 사회학자가 만들어낸 용어다. 그런데 최근엔 ‘후라리맨’이 한창 일할 나이인 남성들에게도 쓰이고 있다. 회사 업무가 끝난 뒤에도 귀가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의 발단은 공영방송 NHK의 한 정보프로그램이 이 ‘후라리맨’을 특집으로 잇따라 다루면서다. 방송에선 퇴근 후 집에 바로 가지 않고 근처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거나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성 회사원들이 등장했다. 저녁 시간대 도쿄 시내의 가전양판점에 양복 차림의 남성들이 가득한 모습도 보여줬다. 일본 정부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일하는 방식 개혁’으로 퇴근이 빨라졌지만 정작 여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는 남자들이 ‘후라리맨’이 된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방송이 나간 뒤 인터넷에는 비판 댓글이 쇄도했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남성들이 “혼자만의 시간의 필요하다” “일찍 귀가해도 아내의 집안일에 방해가 된다” 등의 이유를 댔는데, 이게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아내에게 가사와 육아를 강요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혼자만의 시간은 여성도 필요하다” 등의 비난이 잇따른 것이다. 그중에는 “워킹맘이 식사를 만들지 않으면 ‘엄마 실격’이라면서, 남성은 ‘후라리맨’이라고 해서 ‘여러 부담을 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니 도대체 뭐냐”라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자 NHK는 후속 보도로 이 같은 반론들과 실태들을 더 다뤘다. 다른 방송이나 신문, 잡지도 관련 기사를 앞다퉈 보도했다. 그런데 후속 보도들에서도 여전히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자도 괴로워’류의 흥미 위주식 보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NHK는 비판의 목소리를 소개하면서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을 이해한다” “전업주부라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등 ‘공감의 목소리’를 전했다. 마치 여론이 찬반으로 양분된 인상을 준다. “아이 중심의 집은 거북하다” “육아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아내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남성들의 심리를 전했다. 한 언론에선 “집 안 내 서열이 반려동물보다 아래”라는 ‘핍박받는 남성’ 사례를 다루기도 했다. NHK는 또 앞서 소개된 남성이 아내와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취미를 함께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물론 남자도 괴롭다. 사회는 무뚝뚝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미덕이던 과거와는 다른 남성상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선 ‘이쿠맨(육아하는 남자)’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쿠맨’이 마치 능력 있는 남성의 ‘브랜드’처럼 쓰이는 면도 없지 않다. 가사와 육아라는 끝나지 않은 작업에 짓눌려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련의 후라리맨 보도에선 사회의 요구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진지하게 짚는 대목을 좀체 보기 힘들다. 일본에는 여성 60%가 첫째 아이를 낳은 뒤 퇴직하는 등 성별 역할 분담이 강고하게 남아 있다. 반면 일손 부족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차치하고 ‘일하는 방식 개혁’의 지향점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고, 부부가 적정하게 가사·육아를 분담하는 것이다. 종국엔 가정과 일을 병립하고, 아이를 키우기 쉬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후라리맨’ 논란은 그러한 의식과 제반 여건이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을 거꾸로 보여줬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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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자마(座間)시의 한 아파트에서 9구의 시신 일부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 지 3주가 지났다. 그 사이 피해자 9명의 신원이 확인되는 등 사건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이 적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되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여성이 대부분이다. 가장 어린 피해자는 15세 여고생으로, 17세 여고생 2명까지 여고생만 3명이다. 19세 대학생과 20대 초·중반 4명 등 5명도 모두 여성이다. 이 밖에 실종된 여자친구를 찾으러 나섰던 20대 남성 1명이 살해됐다.

 

용의자 시라이시 다카히로(白石隆浩·27)는 사건 현장인 아파트에 입주한 지난 8월 말부터 약 두 달 동안 이들 9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는 사체를 절단해 아이스박스에 나눠 담은 뒤 일부는 밤에 쓰레기로 버렸다. 그는 피해자들에 대해 “트위터에서 알게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관적인 게시물을 트위터에 올린 여성들에게 “함께 죽자”는 메시지를 보내 집으로 불러들였다. 시라이시는 경찰 조사에서 “정말 죽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항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보면 피해자들은 “죽고 싶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린 것이 계기가 돼 사건에 휘말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자살을 바라다가 화를 자초했다고 간단히 결론지어도 될까.

 

마지막으로 희생된 20대 중반 여성은 한부모가정 자녀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나온 뒤 생활보호를 받으면서 이 여성을 길렀다. 그 어머니마저 지난 6월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피해 여성은 지난여름 이혼한 뒤 아이를 혼자 길렀다.

 

이 여성은 마음의 병을 안고서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게 이번 사건의 배경에 있는 게 아닐까. 피해 여성들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소설을 좋아하는 여대생이거나 만화가를 꿈꾼 여고생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실종되기 직전까지 학교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가족과도 접촉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에게는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상대나 장소가 없었다. 주변에서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인터넷상에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누군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길 바랐을지 모른다. 시라이시는 이런 여성들의 ‘틈’을 파고들어갔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일본 정부가 검토하고 있듯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규제가 능사는 아니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실태를 알아야 한다. 구루메(久留米)대학이 지난해 일본 중·고생 2만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죽고 싶다고 때때로 생각한다’는 응답이 23.7%였다. 이들이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로 가족에 이어 인터넷이 뒤를 이었다. 친구나 학교보다 인터넷에 의지하는 학생이 적지 않은 것이다.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공개한 ‘더 나은 삶의 지수 2017’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통계가 집계된 31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 특히 어려울 때 믿을 만한 친구나 친척이 있는지 ‘사회적 지지도’를 묻는 질문에 75.9%만 ‘그렇다’고 답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현대 사회에선 개인을 지지해주던 가족이나 친구, 연고 집단이 해체되고 있는 반면 새로운 사회관계는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우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도와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만드는 게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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