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정치’는 정치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지지를 획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미디어의 발달과 변화가 정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보편화는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전통 미디어에 기대지 않고 시민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시민 입장에서도 인터넷은 정치인에게 지지·반대·압력을 보낼 수 있는 통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의 후임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고 공화당이 인준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아카이빙 민주주의 시대의 단면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별세한 다음날인 지난달 19일 후임 대법관 후보자 지명을 예고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를 공식 지명했다. 여당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와 인사청문회를 책임지는 상원 법사위원장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호응하면서 대선 전 인준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다.정보를 사실상 무제한 저장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저장된 정보를 꺼내볼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인터넷 미디어가 현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넓고 깊다. 특히 언론과 시민의 정치 감시가 용이해졌다. 실시간 정보 축적과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아카이빙(archiving)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

매코널 원내대표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그들의 4년 전 행적을 보여주는 게시물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 나돌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2월 보수 성향 앤토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하자 3월 후임으로 메릭 가랜드 후보자를 지명했다. 하지만 상원 과반수를 차지한 야당 공화당은 인준을 거부했다. 대선이 임박했다는 이유였다. 선봉에 매코널 원내대표와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있었다. 매코널 원내대표가 “대통령이 지명할 권한이 있듯이 상원은 동의를 제공하거나 유보할 헌법적 권리를 갖는다. 이번에 상원은 권리를 보류하겠다”고 했던 말이 복원됐다. 그레이엄 상원의원 역시 “만약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첫번째 임기 마지막 해에 (대법관) 공석이 발생한다고 해도 나 린지 그레이엄은 다음 대통령에게 맡기라고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적 사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던 야당이 집권하면 똑같은 사안에 관해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강변하는 사례가 흔하다. 재정 적자가 발생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비판했던 야당은 집권하고 나면 크게 우려할 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바꾼다.

아카이빙 민주주의 심화와 함께 정치인의 내로남불 폭로도 잦아지고 있다. 정치인과 정치집단의 과거와 현재 행적을 검색·비교하는 게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인의 책임성을 강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를 가져도 좋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미국 공화당 주류가 4년 전 한 정반대의 말과 행동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복원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법관 후보자 인준을 밀어붙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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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061452001&code=990100#csidxe8753ea73d0756da0126a8c9e1c9b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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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지만 중국에서 이 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했고,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기막힌 역사의 우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21세기 양대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은 미국과 중국이 협력의 시대를 끝내고 경쟁과 갈등의 시기로 접어든 상황에서 코로나19가 관계를 급속히 악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미·중 경쟁을 두고 ‘신냉전’이라는 용어가 종종 동원됐지만 동조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존재론적 경쟁’을 벌였던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 비해 미·중은 너무 깊숙이 연결돼 있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됐던 냉전 시절에 비해 전 세계도 훨씬 더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정은 달라졌다. 코로나19 이후 미·중은 마치 뺨때리기 시합을 하는 모양새다. 오가는 말과 행동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이제 미국 언론에서 신냉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국은 본격적인 이데올로기 대결을 예고하고 나섰다. 백악관이 지난 5월 공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보고서는 중국과의 신냉전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이 경제와 안보 외에 ‘미국의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전방위적 중국 봉쇄를 다짐했다. 경제와 안보 영역의 대립에 그치지 않고 가치의 영역에서도 적개심을 드러냈다. 중국공산당 일당체제, 인권탄압,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정치 및 이데올로기, 영토 영역에 대한 비판과 개입을 집중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미·중 수교의 주역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도서관에서 한 연설도 의미심장하다. 중국공산당을 ‘마르크스·레닌 정권’으로 규정하고, 시진핑(習近平)을 중국 국가주석이 아닌 공산당 총서기로 부르면서 ‘파산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신봉자’라고 비판했다. 냉전 시절 미국이 소련에 들이댔던 단골 프레임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러시 도시는 “미·중의 국력 격차는 좁아졌지만 이데올로기 격차는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냉전의 특징인 강대국에 의한 편가르기 경쟁도 재연될 조짐이다.

 

세계적인 냉전은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남북이 대치 중인 한반도는 역사적·구조적으로 냉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한반도에 드리운 냉전의 그늘을 거두기 위해선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절실한 판에 신냉전 구도의 현실화는 당혹스럽다.

 

다행히 신냉전 국면은 초입이다. 냉전도 불사하겠다는 미·중의 ‘전투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상호공존과 협력의 미덕은 여전하다. 국가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사람과 상품과 문화가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하고 공존을 도모했던 경험은 갈등과 분열, 대립과 충돌의 시대로의 회귀를 막아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한다. 인류가 당면한 도전인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협력은 더욱 절실하다는 여론을 키워나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우연적 사건의 부정적 파장이 필연으로 굳는 것을 막을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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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남았다. 미국 수도 워싱턴과 인접한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 산하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9월 초 시작되는 새 학년 새 학기에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받을지 선택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다. 주 이틀 학교 등교 수업 또는 주 나흘 온라인 수업 중에서 골라야 한다. 한번 선택하면 학년을 마칠 때까지 1년간 바꿀 수 없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자니 코로나19가 걱정이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만 듣게 하자니 학업과 스트레스가 걱정이다.

 

페어팩스의 개학 방안이 지난주 미국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학교가 정상적으로 개학해야 한다고 주지사들을 압박하고 나서자, 벳시 디보스 교육부 장관이 페어팩스를 콕 집어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디보스 장관은 모든 학교는 주 5일 대면 수업을 목표로 준비해야 한다면서 “페어팩스의 계획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을 충실히 따르는 난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플로리다주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사람 5명 가운데 1명이 확진 판정을 받을 정도로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도 주 내 모든 학교에 주 5일 등교를 전제로 개학 계획을 마련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리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모든 학생이 정상적으로 등교해 수업과 과외활동에 참가하는 것이 학업·심리발달·복지 등 모든 면에서 바람직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다. 자녀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부모들도 집에 발이 묶이기 때문에 경제 정상화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 등의 ‘압박’이 무모해 보이는 것은 이들이 적잖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 교직원, 학부모의 안전이다.

 

트럼프 대통령 등은 저연령층의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중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저연령층 감염 사례가 보고됐다. 저연령층 감염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학교들이 일찌감치 휴교를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학생 자신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더라도 바이러스를 부모에게 전파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그리고 교직원들은 저연령층이 아니다.

 

스콧 브라브랜드 페어팩스 교육감은 디보스 장관의 비판에 기존 학교는 학생 간 거리를 약 46㎝(18인치)로 계산해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다면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권고한 1.8m(6피트)를 유지하려면 페어팩스에만 200개의 학교가 더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페어팩스에서만 미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5개 크기의 공간이 새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교 건물만 문제가 아니다. 교직원과 스쿨버스도 늘어나야 한다. 마스크 등 개인보호 장비도 조달해야 한다.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고,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세계를 매일 보고 경험한다. 상당 기간 코로나19의 위험과 함께 사는 것이 ‘뉴노멀’이 됐다는 소리도 듣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강요받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확인된 통계로만 인구 100명 중 1명이 코로나19에 걸린 미국에서 새 학기 개학을 준비하면서 겪는 혼란과 고통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보인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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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선거의 공정성, 사법부 독립, 부패 억제 안전장치에 대한 압박을 포함해 민주적 규범과 기준들을 훼손하려는 노력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언론, 법의 지배 그리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다른 기둥들에 대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퍼부은 사나운 언어를 동원한 공격은 이 나라가 다른 정부들을 향해 핵심적인 인권과 자유를 지키라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했으며, 오히려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악용하는 데 활용됐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지난 3월 발표한 ‘2020 세계자유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 단체가 심각한 어조로 평가한 대상은 남미나 동유럽, 혹은 동남아의 어느 나라가 아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미국이 주인공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를 자처하는 프리덤 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국가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점수로 환산해 순위를 매기는데, 미국 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 후진국들을 압박할 때 프리덤 하우스의 평가를 자주 인용해 왔다.


민주주의의 후퇴 징후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최근 벌어진 사건 몇 가지만 봐도 미국 민주주의가 세계의 걱정거리가 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미국에선 야당인 민주당이 오는 11월 동시에 치러지는 대선과 총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안전과 투표권 보장을 위해 우편투표를 확대하자고 주장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여당인 공화당은 한사코 거부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증 혐의로 기소된 자신의 측근 마이클 플린의 유죄 판결이 임박하자 ‘정치판사’가 편향적인 판결을 하고 있다면서 사법부를 수시로 공격한다. 심지어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플린에 대한 기소 취하를 일선 검사들에게 종용해 담당 검사들이 집단 사퇴했다. 그리고 예산 및 권한 남용과 부패를 감시하기 위해 행정 각부에 임명된 감찰관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줄줄이 잘려 나갔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숨진 사건 역시 인종 차별 실태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 사건을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 모여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군중을 군경이 무력을 동원해 진압하는 장면도 미국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 공분을 자아냈다.


미국인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해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라는 것이 ‘극도로 자랑스럽다’거나 ‘매우 자랑스럽다’고 답한 비율이 2001년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해법은 단순하다. ‘민주주의의 후원자’를 자처한 그들이 그간 권위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후진국에 해왔던 조언과 요구를 스스로 실천하면 된다. 앞서 인용한 프리덤 하우스 보고서에 나온 선거의 공정성과 사법부 독립, 부패 억제, 법의 지배, 언론 자유 확대를 비롯해 소수자의 권리와 평등 보장 같은 것들이다. 관건은 민주주의의 교사를 자처해온 미국이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생으로 돌아가려는 겸손함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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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시민들이 18일(현지시간) 브루클린의 도미노 공원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한 물리적 거리를 두기를 지키라는 의미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려진 원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뉴욕_AP연합뉴스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가 9만명을 넘어섰다. 전 세계 사망자의 약 28%에 해당하는 규모이자 두번째로 사망자가 많이 나온 영국보다 2.6배 더 많다. 하루에 발생하는 사망자가 전보다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700~800명대여서 조만간 10만명을 넘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 백악관 코로나19 대응 태스크포스(TF)가 브리핑에서 자주 인용했던 미국 워싱턴대학교 보건계량분석평가연구소(IHME) 추계 모델은 8월 4일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가 14만3357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주들이 봉쇄했던 경제 활동을 서서히 풀면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이 받은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겪은 코로나19 사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공산이 크다.


미국 언론과 지식인들이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을 논할 때 종종 눈에 띄는 표현이 “‘미국 예외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 잡지 ‘아메리칸 퍼스펙티브’의 편집인인 로버트 쿠트너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미국 예외주의가 어떤 것을 뜻하든 이제 끝났다. 아마도 영원히”라고 적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이 1830년대에 당시로선 신생국이었던 미국의 정치·사회·문화를 분석하면서 ‘예외적인 나라’라고 언급한 이래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 내·외부의 관찰자들이 사용해온 개념이다. 미국은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고, 귀족 전통 없이 민주주의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유럽과 비교해 예외적이다. 미국인들은 미국이 신으로부터 특유한 은총과 덕목을 받으며 탄생했다는 신념이 강하다. 정치학자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미국에서 주목할만한 사회주의 운동이 부재했다는 사실이 미국 예외주의의 한 측면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국이 광활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우방국인 캐나다와 멕시코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외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이 믿음은 1941년 진주만 공습과 2001년 9·11테러를 거치면서 생채기가 났지만 미국이 심한 자연재해나 기근, 역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것도 사실이다.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지위 역시 미국인들로 하여금 어느 나라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코로나19 발병 초기 미국이 세계보건기구(WHO)가 배포한 진단 키트를 거부하고 자체 개발한 부실 진단 키트를 썼다가 사태를 키운 건 이런 믿음이 낳은 참사였다.


코로나19 사태는 미국이 예외적으로 안전하다는 믿음을 깨트렸다. 감염병 대응 측면에서 미국은 그들이 종종 경멸과 비하를 담아 부르는 ‘제3세계’에 비해 별반 나을 게 없었다.


미국 예외주의 종언 이후 미국은 어떤 길로 나갈까? 미국이 특유의 역동성과 진취성을 발휘해 자기 혁신, 그리고 외부와의 협력 강화에 나설 경우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일례로 미국 주요 언론과 정치인들, 특히 공화당에서도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성공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은 이런 기대를 낳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반성이나 혁신에서 거리가 멀어 보인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미국인들의 선택을 주의깊게 지켜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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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온 가족이 사실상의 가택연금 상태에 묶인 지 한 달이 넘었다. 워싱턴에 자리잡은 연방정부와 싱크탱크, 대학들도 일제히 재택근무 또는 휴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워싱턴 거리엔 조깅과 산책을 하는 사람뿐 한산한 풍경이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온 동양인에게 “아픈 사람이 왜 밖에 나왔냐”며 힐난했던 미국인들이었지만 이제 식료품점에 가려면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됐다. 미국 의료인력에게 줄 것도 모자란다는 N95마스크를 쓴 이들도 자주 보인다. 겉으로 태연했던 그들이었는데, 다들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할 정도다.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80만명에 육박하고, 유명을 달리한 이도 4만2000여명에 달한다. 잔인하고 암울한 시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사망자가 5만~6만명에서 그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앞서 나왔던 10만명이라는 전망에 비하면 다행이라는 취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코로나19 사태를 최악으로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는 ‘무오류’의 신화에 빠져 있다. 불과 두 달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계절성 독감에 비유하면서 “날이 따뜻해지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한 사실이 명백한데도 자신의 판단은 옳았으며 미국 정부의 대처는 ‘100점’이라고 강변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승리’ 추구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그의 태도 그리고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기후변화의 위협에 대한 대처법이 그대로 포개지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신종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쏟아지던 지난 2월28일 야당과 언론이 “새로운 거짓말”을 들고 나왔다고 비난했다. 기후학자들이 만장일치로 경고하는 기후변화의 위협을 ‘중국의 거짓말’이라고 일축하고 있는 것과 겹친다. 코로나19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 마스크 등 의료장비를 수출하고 검사 기준을 느슨하게 설정한 것은 환경 관련 규제들을 줄줄이 풀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방역 최일선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에 대한 지원을 중단시킨 것 역시 전 세계가 기후변화를 억제하기 위해 마련한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 절차를 밟고 있는 것과 닮았다. 트럼프 대통령 대처법과 별개로 신종 바이러스와 기후변화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협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피해를 입는다는 점도 같다.


차이점도 있다. 코로나19의 재앙은 눈 깜짝할 새 펼쳐졌지만 기후변화는 서서히 진행된다. 코로나19는 타인과의 접촉을 자제함으로써 피할 수 있지만 기후변화는 ‘집콕’으로는 대처하기엔 역부족이다. 코로나19와 달리 기후변화로 인한 온도 상승과 해수면 상승 등은 한번 진행되면 되돌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암울한 시절이어선지 봄은 더욱 찬란해 보인다. 벚꽃이 지면서 며칠째 ‘꽃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맹렬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우리는 코로나19의 위험을 무시한 미국이 치르는 혹독한 대가를 목격하고 있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전 인류가 치를 수밖에 없다. 4월22일은 ‘지구의날’이다.


<워싱턴 |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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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의료 물자 공급업체 대표들과 만나고 있다. 워싱턴 _ UPI연합뉴스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나라가 되면서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마트나 거리에서 만나는 미국인들의 표정에선 불안감이 흐른다. 마스크는 병자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마스크 쓰기를 거부해온 그들이지만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착용한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뒤에 숨어 있는 대량 실업의 공포도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


시민들의 건강과 안녕을 책임진 정치 지도자들이야말로 진짜 전쟁 중이다. 자신을 ‘전시 대통령’으로 규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물론이고 미국 내 감염자의 40%가 나오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최근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아직 재난의 초입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현재의 재난에 대처하고 앞으로 닥칠 더 큰 위기에 대비하면서도 시민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연방정부 대통령과 주지사 사이의 권한과 정치적 무게감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각자 일일 언론 브리핑을 하면서 드러난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큰 특징은 순간의 감각에 의존해 판단을 내리되 자신의 판단이 잘못으로 드러나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성격은 이번 위기에도 드러났다. 그는 3월 초까지만 해도 코로나19의 위험성을 평가절하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성을 드러내자 돌변했다. 유럽으로부터의 입국 금지를 전격 발표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의회에서 이끌어냈다. 자신이 내린 ‘물리적 거리 두기’ 지침을 조기에 완화하고픈 열망을 불태웠으나 사망자가 10만~20만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문가 경고 앞에 고집을 꺾었다.


그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해 태도를 바꾼 것은 미국인으로선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미덕은 거기까지다. 그는 초기의 낙관적 전망 때문에 사태 악화를 키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때그때의 판단은 옳았고, 200만명이 죽을 수 있다는 전망에 비하면 10만명이 죽는다면 아주 잘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자신이 100점 만점의 대응을 하고 있다면서 왜곡된 수치를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왼쪽)가 30일(현지시간) 뉴욕 항구에 도착한 미 해군 병원선 ‘컴포트호’ 앞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욕_AP연합뉴스


쿠오모 주지사는 솔직하다. 그는 매일 심각해지는 상황과 함께 부족한 병상 및 의료장비 현황을 공개한다. 나름의 대책을 설명하지만 완벽하지 않다는 점도 인정한다. 주 전역으로 물리적 거리 두기를 확대한다고 발표하면서 “누군가가 불행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불평하길 원한다면 나를 비난하라”며 “이 결정을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브리핑 스타일을 “일부는 브리핑이고, 일부는 설교이며, 일부는 영감 어린 대화”라고 평가했다.


재난의 순간에 맡은 책임을 다하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나 쿠오모 주지사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율은 집권 이후 최고치를 달리고 있으며, 쿠오모 주지사의 일일 브리핑은 뉴욕주뿐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애청자가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다.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 스타일이 극명하게 갈리는 두 지도자가 동시에 인기를 끄는 현상은 양극화가 심화된 미국 정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워싱턴 |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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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3일 국립보건원에서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과 대화하고 있다. 베데스다 _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피하지 못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문재인 대통령 등 동북아 국가 지도자들을 차례로 시험대 위에 올린 코로나19 위기가 급기야 트럼프 대통령을 찾아왔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의 9일(현지시간) 집계에 따르면 미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752명, 사망자는 26명이다. 미국 본토 50개 주 가운데 32개 주와 수도 워싱턴에서 감염자가 나왔다. 미국 보건당국이 코로나19 검사를 대폭 확대했으므로 발병 사례는 계속될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가리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했다. 한 사회 내의 한정된 권력과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말한 학자도 있다. 정치는 긴박한 위기의 순간에 최고 지도자의 철학과 가치관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국가적 위기를 맞이해 빛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31일 중국인을 포함해 2주 이내에 중국에 체류했던 모든 외국인의 미국 입국을 막는 발빠른 조치를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 야당인 민주당과 언론이 온통 막바지에 도달한 상원 탄핵심판에 정신이 쏠려 있던 시기에 나온 과감한 조치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신종 바이러스 진원지에 대한 빗장을 걸어잠금으로써 번 시간을 실수와 허술한 방역대책으로 까먹었다.


그의 상황 인식과 그가 구사하는 특유의 정치는 상황 악화에 일조했다. 그는 지금도 코로나19를 계절마다 찾아오는 ‘독감’의 한 종류로 여긴다. “미국에서 매년 2만7000~7만명이 독감으로 사망한다”면서 코로나19는 크게 우려할 만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코로나19는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메시지도 반복했다. 위기를 지적하는 야당과 언론의 비판은 ‘사기’이자 ‘제2의 탄핵 시도’로 치부했다.


외부와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잠그고 위험성을 강조할수록 바이러스 확산 가능성은 낮아진다. 다만 사회적·경제적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뿐 아니라 감염병 위협에 직면한 모든 사회의 지도자들이 고민하는 문제다. 11월 재선을 위한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후자를 지키는 데 높은 가치를 뒀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가치 배분은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고 방역대책을 세워야 할 미국 책임자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는 역할을 했다. 지역사회 감염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학교·회사의 일시적 폐쇄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 보건 당국자는 그로부터 호통을 들은 걸로 전해졌다. 이 당국자의 경고 중 일부가 현실이 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가 선거운동에 내세울 경제 실적으로 금지옥엽처럼 가꿔온 뉴욕증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폭락을 기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자신에게 도래한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바이러스의 도전은 처음이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절차와 규범을 무시하며, 습관적으로 편을 가르는 ‘트럼프 정치’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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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 삶도 일정한 영향을 받는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가 유독 2020년 미국 대선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은 이런 현실적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기존 미국 대통령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국정운영 스타일로 미국을 두 쪽으로 나눠놓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지 지켜보는 것은 어떤 정치 드라마보다 흥미를 자아낸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을 저지하겠다고 나선 민주당 후보들이 벌이는 경쟁 역시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쏠쏠한 데다 미국 정치 지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직 초반이지만 민주당 경선 판세를 요약하자면 ‘원조 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최근 여론조사를 집계해 낸 평균치를 보면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율 그래프는 지난 10일을 기점으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지지율을 뚫고 위로 올라섰다. 38세 신예이자 중도 성향인 피트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이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샌더스 상원의원과 각축을 벌였지만 ‘뒷심’을 의심받고 있다.


샌더스 상원의원의 강세와 비례해 민주당 기존 주류층의 ‘걱정’이 도드라진다. 그가 민주당 후보가 되면 트럼프 대통령을 이길 수 없다는 ‘샌더스 필패론’을 제기한다. 샌더스 상원의원이 자처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이념적 지향은 공화당 지지층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도 결집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언론과 민주당 주류가 샌더스 상원의원의 급진성을 부각시키며 필패론을 주장할수록 궁금증도 커진다. 샌더스 상원의원의 주요 공약인 국가 단일 의료보험 도입, 공립대 무상교육, 증세를 통한 복지재원 마련 등은 2016년 경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6년에 이어 2020년에도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공약을 앞세워 선전하는 동안 민주당 중도 진영은 무엇을 했을까? 시선을 ‘트럼프 이전으로의 복귀’에 고정시킨 나머지 살인적인 의료비와 주거비·교육비 등 미국인이 느끼는 문제를 풀 대안 제시에 게을렀던 것 아닐까?


민주당 주류에서 엿보이는 퇴행적 행태는 이런 의심을 강화시킨다. 경선 시작 직전 뛰어들어 막대한 재산을 뿌려대며 지지율을 쌓아가고 있는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과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러닝메이트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삼세판 가위바위보에서 두 번 연속 질 가능성이 높자 ‘오판삼선승제’를 하자고 떼쓰는 아이가 연상된다. 민주당 주류는 2016년에도 전당대회에서 클린턴 전 장관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표심 왜곡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 정치분석가들이 조심스럽게 점치듯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최종 후보가 될지,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필패할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샌더스 필패론을 열심히 설파하는 민주당 주류가 자기 혁신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앞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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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국인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신경이나 쓴다고 생각하는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탄핵 심판대 위에 올렸고, 폼페이오 자신도 무관치 않은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끊은 뒤 신경질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 유력 대권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부패 의혹을 수사하라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압력을 넣으면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키로 했던 군사원조를 연기시키면서 연계시켰다는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작년 가을 불거진 이후 반년 가까이 미국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지만 정작 미국인 다수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의도는 겉으론 언론이 편파적으로 이 사안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려는 것이었고, 속으론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는 주제를 회피하려는 데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가 지금 처한 상황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는 대단원으로 향하고 있다. 민주당 탄핵추진위원들의 마라톤 변론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 변호인단의 변론이 곧 끝난다. 상원의원들의 질의응답을 거쳐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탄핵 여부를 가리기 위한 표결이 이번주 후반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반적인 드라마라면 대단원을 앞두고 긴장이 최고조에 올랐겠지만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에 대한 미국 대중의 관심은 되레 사그라들고 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 조사를 보면 상원 탄핵심판 심리 첫날인 21일에 비해 23일 생중계 시청률은 29%포인트나 감소했다.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보도한 소셜미디어 분석업체 뉴스휩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다. 하원에서 탄핵조사 청문회가 시작된 작년 11월13~15일과 상원에서 탄핵심리가 시작된 지난 21~23일을 비교했더니 소셜미디어에서 탄핵 관련 상호작용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가 드라마의 결말을 알고 있는 데다 내용도 하원에서 훑은 내용의 재탕이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당이 하원 과반수를, 여당인 공화당이 상원 과반수를 차지한 미 의회 의석분포를 감안하면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더라도 상원에서 무죄로 막을 내린다는 것은 탄핵 드라마가 시작될 때부터 예정돼 있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기술한 회고록 내용 일부가 공개되면서 막판 변수로 작용할 기미가 있지만 대세를 바꾸기엔 역부족이란 관측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에 관심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가 여기서 완전히 끝날지, 약 10개월 뒤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가 민주주의를 ‘경쟁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 제도화된 정치체계’라고 정의했듯 미국 대선의 최종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 11월 선거에서 누가 웃는지를 보는 것이 재미없는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를 보는 묘미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 드라마 속 연기자인 미국 정치인들이 이토록 진지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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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최근 발표한 연말 보고서가 미국 언론 주목을 받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거짓 정보 유통이 민주주의에 끼치는 위험성을 경고한 대목이 마치 ‘가짜뉴스 공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것 같다는 추측을 낳았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 원리는 폭도의 폭력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됐고, 시민 교육은 도중에 실패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순식간에 소문과 거짓 정보를 대규모로 확산시킬 수 있는 우리 시대에는 대중이 정부와 정부가 제공하는 보호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미국 대법원장은 연말마다 짧은 보고서를 내는데 2005년 취임한 로버츠 대법원장은 늘 역사의 일화를 서두에 앞세웠다고 한다. 이번엔 헌법 원리 해설서로 유명한 &lt;연방주의자 논설&gt; 집필자 가운데 한 명이자 훗날 초대 연방대법원장이 되는 존 제이의 일화를 소개했다. 1788년 의대생들이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해 해부학 실습에 사용하고 있다는 소문에 분노한 뉴욕 시민들이 일으킨 이른바 ‘의사 폭동’ 당시 제이가 시위를 제압하려고 나섰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글의 폭도 얘기는 여기서 나왔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했거나 말거나, 민주주의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우려는 그가 내려온 판결과 모순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취임 당시 50세로 역대 세번째 최연소였던 그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제도를 왜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법률과 판례를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는 것이다. 특정 지역에 한해 투표 제도 변경 시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함으로써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투표권을 제약할 수 없도록 한 ‘선거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2013년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 판결, 사법부가 특정 정파의 당리당략을 위해 선거구를 기형적으로 획정하는 ‘게리맨더링’을 심판할 권한이 없다는 지난해 6월 판결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관점도 엿보인다. 소셜미디어 시대가 아니라도 소문과 거짓 정보의 위험성, 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다만 로버츠 대법원장의 글에선 소셜미디어를 통한 ‘여론’을 단순하게 폭도로 싸잡으면서 폄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피지배자 사이의 지식과 정보 유통을 두려워하며 억압했던 봉건시대 지배자를 연상한다면 지나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가 든 역사적 사례도 논지를 뒷받침하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근대 서구 의학 발달 과정에서 해부용 시신 부족은 공통적 현상이었다. 이른바 의사 폭동 당시 뉴욕에서도 해부 실습을 위한 시신 도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컸다. 일부 시민들은 이를 근절해달라는 청원을 했음에도 뉴욕시는 무시했다. 시민들의 소요 사태가 있은 다음에야 해부용 시신 관련 절차와 규정이 확립됐다는 게 역사적 평가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지 말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소셜미디어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 거짓 정보의 유통을 막겠다며 소통 가능성 자체를 억압하는 게 바로 그 꼴이 될 것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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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공저자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달 미국 코넬대에서 열린 학술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장군들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들, 즉 대통령, 총리의 손에서 죽는다. 시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이해했을 땐 너무 늦다.”


레비츠키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미국 역시 남미 국가들이 지난 세기 연속되는 쿠데타와 독재를 경험할 때 맞닥뜨린 것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인물과 세력을 ‘경쟁자’를 넘어 ‘적’으로 규정하는 ‘관용의 고갈’, 즉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촉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적 경쟁자를 향해 ‘반역자’ ‘인간쓰레기’라는 욕설을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깊이 결부돼 있다.


‘연방정부 셧다운’과 함께 2019년을 시작한 미국이 올 한 해 보여준 모습을 돌아보면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는 분명해 보인다. 35일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을 야기한 쟁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남부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거액의 장벽 건설 예산에 대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잘랐고,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가 몇 달, 몇 년이 멈춰서도 상관없다”고 버텼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 다른 예산에서 장벽 건설 예산을 끌어오고, 민주당은 이 조치를 법원에 제소함으로써 각자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끝났다. 법원은 나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여당과 야당이 국가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정부가 한 달 이상 멈춰서는 진통에도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면 정치의 기능 부전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였던 올해도 쉼없이 ‘분열의 정치’를 구사했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사에 대해 조롱과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임명한 각료나 고위 공직자일지라도 지시를 거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민주당은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심판대 위에 올렸다. 그가 정치적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부패 의혹을 조사하라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하면서 군사원조와 백악관 초청을 지렛대로 사용해 권한을 남용한 혐의를 포착했고, 이를 조사하려는 의회의 헌법적 권한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이 조만간 본회의를 열어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 무대는 상원으로 옮겨지지만 트럼프가 강제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전광석화’처럼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배경엔 공화당 지지자 10명 중 8명은 탄핵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자라잡고 있다. 물론 민주당 지지자 10명 중 9명은 탄핵에 찬성한다.


미국인들은 2020년 ‘선거의 해’를 맞는다. 앞서 말한 코넬대 학술행사에서 한 정치학자는 내년 대선과 관련해 일견 황당한 상상으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한번 유권자 투표에서 지고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길 경우 친트럼프·반트럼프 집단이 워싱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심지어 교외에선 무장 민병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정치적 폭력을 일부 용인할 의향이 있고, 4명 중 1명은 정당별로 나라를 쪼개면 좋겠다고 응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던 미국의 현주소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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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한·미동맹 재설정론’을 꺼냈다고 한다.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지금보다 5배 더 많이 받아내라는 ‘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비건 지명자가 워싱턴을 방문한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동맹 재설정론을 제기할 때 의도한 범위를 넘어서는 말이겠지만, 한·미동맹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질서가 전환기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동북아 안보질서 전환을 가져올 각종 사안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연말에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는 20일(현지시간) 미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워싱턴 _ AFP연합뉴스


북한은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뒤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하며 올해 말을 시한으로 설정했다. 북한은 최근 미국이 체제안전 보장과 제재 해제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는 한 비핵화 협상 자체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 중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창은 열려 있다”면서도 “북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맞서고 있다. 현재로선 북·미가 연내에 협상장에 모일 수 있을지, 모이더라도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매우 불투명하다. 남북 간 대화도 올스톱 상태다. 이대로 연말 시한을 넘길 경우 북한이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중지라는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미 간 뜨거운 쟁점인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도 연말이 1차 고비다. 미국은 서울에서 열린 3차 협상 당시 제임스 드하트 대표가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존 SMA가 정한 항목을 뛰어넘는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 요구가 받아들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온 반응이었다. 계산된 행동으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방위비 협상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해를 넘길 공산이 크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으로선 얼토당토않은 증액 요구를 받아들일 순 없다. 상황이 악화되면 일각의 우려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카드를 빼들고, 한국에선 친미·반미 여론이 격돌하는 극단적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불태우는 상황은 속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6시간 앞두고 극적으로 나온 한국과 일본의 합의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 8월 선언한 GSOMIA 종료 결정의 효력 중지는 일본 측의 수출규제 철회 및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복원을 전제로 한 조건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는 GSOMIA 종료 유예 대신 일본 측이 취해야 할 조치의 시한을 못 박지는 않았지만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이 신청한 해당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 작업이 내년 봄 시작된다고 한다. 연말이 지나면서 한·일 간에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긴장 수위는 다시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중 무역전쟁 역시 연말이 고비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 10월 무역협상 1단계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해 놓고도 정작 합의문 도출 작업은 난항을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단계 합의로 미·중 무역전쟁 승리를 선언하고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아는 중국은 호락호락 선물을 쥐여주지 않을 태세다. 


이처럼 2019년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반도와 동북아가 맞이할 2020년의 모습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다만 사안마다 우리가 내린 선택의 집합이 향후 동북아 안보질서에 반영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일수록 냉철한 상황 인식에 기초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변치 않는 기본 지침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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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중순쯤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연수 참가자들이 미국 국방부·국무부 관계자 및 싱크탱크 전문가들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 특히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는 무엇인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6개월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싱크탱크 전문가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은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봉쇄라는 정책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상태라는 설명이었다.


동아시아 정책만이 아니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노선 전체가 안갯속인 상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4월8일 ‘트럼프 독트린의 부상: 독트린을 따르지 말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후보 시절 시리아 내전은 미국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그가 화학무기 사용을 응징한다면서 시리아 공군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지시한 직후 나온 기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가치와 목표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면서 “나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예측불가능성’이 그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일관성 있는 트럼프 독트린은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예측불가의 행동도 거듭되면 ‘패턴’이 드러나는 법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그의 판단은 여전히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사례가 축적되면서 귀납적 추론을 통해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나타났다. 특히 지난 9월25일 트럼프 대통령의 74차 유엔 총회 일반토의 연설과 지난달 23일 시리아 철군에 관한 백악관 기자회견은 트럼프 독트린을 도드라지게 내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에서 한 연설의 핵심은 “각자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면 세계는 모든 나라에 더 좋은 곳이 된다”는 것이었다. 각국 지도자들에게 ‘국제주의’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각자의 나라, 각자의 국민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진력하라고 충고했다. 일종의 ‘자유방임주의’라고 해야 하나. 세계 각국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노력하면 이민문제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논리다. 74년 전 2차 대전의 참화를 딛고 탄생한 유엔에서 미국 대통령이 한 연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강행하며 밝힌 군사개입 원칙은 더욱 직설적이다. 그는 “후보 시절 나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험과 역사, 세계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해에 의해 인도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서 해외에서 미군이 개입할 3가지 원칙을 설명했다. 첫째, 미국의 국가적 이익이 명백히 걸려 있어야 한다. 둘째, 분명한 목표와 승리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셋째, 분쟁에서 빠져나올 경로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미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다면 그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다.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그간 세계 질서 유지라는 일종의 공공재를 제공해온 것은 사실이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퇴장하면 그 자리엔 공백이 생긴다. 공백은 채워져야 하는 게 물리법칙이다.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은 이미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마찰은 불가피하다. 역사가들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발발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심화를 꼽는다. 트럼프 독트린의 파장은 이제 시작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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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13개 영국 식민지 대표들이 1776년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할 때 그들에겐 답이 명료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국 당시부터 북미 대륙에 존재했던 인종적·민족적 다양성 때문에 이 질문의 답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최근 이 질문에 대해 복수의 답을 병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일들이 있었다.


14일은 ‘콜럼버스의날’이었다. 1492년 미주 대륙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해 연방 정부가 1937년 지정한 공휴일인 콜럼버스의날은 매년 10월 둘째주 월요일이다.


‘워싱턴’이라는 도시 이름은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게서 나왔다. 뒤에 붙은 DC(District of Columbia·컬럼비아 특별구)라는 명칭엔 콜럼버스의 자취가 담겼다. 워싱턴의 대표적 상징물이 백악관 앞에 우뚝 솟은 워싱턴 기념비이지만, 국회의사당 북쪽 ‘유니언 기차역’ 앞에 있는 콜럼버스의 형상을 새긴 ‘콜럼버스 기념 분수’도 중요 상징물인 이유다. 그런데 올해 워싱턴의 10월 둘째주 월요일은 콜럼버스의날이 아니었다. 워싱턴 시의회가 지난 8일 콜럼버스의날을 ‘원주민의날’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콜럼버스의날을 원주민의날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 미주 대륙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기에 그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며, 그가 이끈 원정대가 원주민 사회에 재앙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대두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싱턴 시의회 결의안은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북미에는 수백만명이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주 대륙을 발견하지 않았다”면서 “그는 수천명의 원주민을 노예화·식민화하고 학살하고 불구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미 미국 내 7개 주, 70개 이상의 도시가 10월 둘째주 월요일을 원주민의날로 기념하고 있다. 미국 정치·행정·사법의 심장부인 워싱턴도 콜럼버스의날 폐지에 동참한 것이다.


지난달 26일 워싱턴 시당국은 남동쪽 외곽에 자리잡은 ‘베리팜’ 지역 재개발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다. 남북전쟁 직후인 1860년대 후반 흑인 구휼기구인 ‘자유민사무소’는 해방된 흑인 및 자유민으로 태어난 흑인들에게 살 곳을 제공하기 위해 데이비드 베리로부터 농장을 사들여 대규모 공공주택 단지를 조성했다. 일종의 ‘해방촌’이 만들어진 셈이다. 1940년대 들어 주택난이 대두되자 연방정부는 이곳에 400동 이상의 공공주택을 짓는 대규모 사업을 벌였다. 역사가 긴 만큼 베리팜에서 나고 자란 유명 흑인도 많다.


베리팜 공공주택 단지는 1980년대에 대규모 개·보수를 거쳤다. 하지만 낡은 터라 재개발 여론이 대두됐다. 이 지역이 마약과 범죄로 악명 높았던 점도 쇄신 필요성을 더했다. 결국 워싱턴 시당국은 기존 건물들을 헐고 훨씬 더 큰 복합 공공주택 단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주민 이주가 시작됐고, 상당수 건물이 철거됐다. 그런데 이주를 거부한 일부 주민은 아직 남은 32개 동을 역사건축물로 보존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들은 워싱턴 중심부의 백인 거주 지역이라면 이처럼 일거에 밀어버리지는 않았을 거라면서 베리팜이 가난과 범죄로 악명 높았더라도 엄연히 그들의 삶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고 주장한다. 워싱턴 시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숙고 중이다.


두 사례는 모두 미국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간 배제되거나 과소대표 됐던 이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거나 스스로 마련하려는 노력이다. 미국 사회에 ‘백인 우월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인종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정의와 도덕을 유지하려는 힘이 내부에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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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전격 경질했지만 의외는 아니었다. 미국 언론에서 볼턴 경질설이 처음 나온 것은 올봄이었다. 이후 나온 경질설을 모두 합치면 그는 족히 서너 번은 밀려났어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년 가까이 참았거나, 볼턴이 용케 잘 버텼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미국과 경쟁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는 물론이고 전통적인 동맹 및 우방을 상대로 변칙적인 외교를 펼쳤다. 공 여러 개를 공중으로 연속해서 던지고 받는 저글링 묘기를 하는 것처럼 중국, 이란, 북한, 시리아, 탈레반, 베네수엘라 등을 상대로 ‘압박’과 ‘대화’를 오갔다.


23일 오후(현지시간) 뉴욕 인터콘티넨탈 바클레이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모두발언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욕 _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실적은 빈약하다. 작년 5월 이란핵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이란에 ‘최대의 압박’을 펼쳤지만, 이란은 미국이 내건 12가지 요구에 화답하기는커녕 핵합의가 제한했던 핵활동 빗장을 하나씩 풀어가며 저항 중이다. 호르무즈 해협 인근 유조선 피습, 미군 드론 격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 피습 등을 겪으며 중동정세는 악화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2차례 정상회담을 하고 판문점 ‘번개’ 회동에선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을 밟았지만, 북한 핵보유량은 계속 늘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불법정권’으로 규정하고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적극 지원했지만 마두로는 권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9·11테러 18주기를 코앞에 두고 탈레반 지도부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들여 평화협정을 맺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불발돼 미국 내 반발만 샀다.


‘거래의 기술’을 자랑해온 그로선 머쓱한 상황이다. 볼턴을 경질함으로써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고 느꼈음직하다. 다음 미국 대선이 1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다.


실제로 그는 볼턴이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북한 비핵화 방식으로 거론한 것은 ‘재앙’에 가까운 실수였다며 이미 잘린 그를 김정은 위원장에게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 중이다. 사우디 석유시설 피습 사건으로 가능성이 낮아지긴 했지만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면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여지를 살려두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대통령은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린다. 특히 외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대통령의 권한이 폭넓게 인정된다. 그럼에도 외교정책 결정과정에는 정부 내 여러 조직, 정부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세력이 펼치는 논리와 경쟁과 저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선 제약이 더 심하다. 집권 3년밖에 되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이 네번째 국가안보보좌관을 앉혔다는 사실은 그의 ‘까탈스러운’ 성벽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지만, 기성 관료 및 정치권의 이견과 반대를 뚫고 자신의 정책을 밀고나가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생긴 불가피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을 경질한 뒤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후임 국가안보보좌관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쉽다. 왜 쉬운지 아는가?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국가안보보좌관 역할까지 할 테니 누가 국가안보보좌관이 되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념형 매파’ 볼턴이 퇴진한 상황에서 미국 외교가 어떻게 변모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와 아이디어가 관철되는 비율이 높아질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극적인 반전을 연출해 자신이 그 중심에 서는 상황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세계가 감내해야 할 위험도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저글링하는 공의 개수를 늘리거나 속도를 높일수록 공을 떨어뜨릴 위험이 더 커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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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은 ‘강한 우려와 실망’이라는 미국발 파도를 불러왔다. 파도는 한·미관계에 새로운 갈등 요소를 드러냈다.


미국의 불만어린 표현은 즉각적이고 직설적이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마크 애스퍼 국방장관 등 미국 외교·국방 고위 당국자는 ‘문재인 정부’를 지목해 강한 유감과 실망을 쏟아냈다. 민주당 엘리엇 엥겔 하원 외교위원장, 공화당 마이클 맥카울 하원 외교위원회 간사 등 여야 구분도 없었다. 워싱턴 싱크탱크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의 아주 좋은 친구”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응이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22일 열린 반일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은 지난 2달 동안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 통제를 믿을 수 없다면서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한국을 수출절차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동안 한·일 양국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추가 조치 자제’를 요청하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과의 군사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체결한 협정을 종료하겠다고 하자 펄쩍 뛰고 나섰다.


GSOMIA가 자국 안보 이익에 직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일관계에 합리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워싱턴의 한 동북아 전문가는 “문재인 정부가 일본을 향해 극도의 불만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보 공유는 한·일 두 나라뿐 아니라 미국까지 포함되는 상호 이해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을 압박한다면서 남의 다리를 긁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1월 전격적으로 한·일 GSOMIA를 체결하면서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과의 정보 협력이 우리 안보 이익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 미국이 부여한 위상은 그 이상이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국 포위전략을 펼치고 있는 미국은 일본의 군사화를 지지하는 한편 한국과 일본이 역사 갈등을 해소하고 안보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동북아에서 대중국 봉쇄축 역할을 맡기를 바란다. 이른바 미·일동맹 하부구조로 한·미동맹 편입론이다.


한·일 역사갈등 봉합을 도모한 것이 한·일 위안부 합의였다면, GSOMIA는 안보 협력의 핵심이었다. 공식 파기 선언은 없었지만 한·일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 상태다. 이에 더해 한·일 GSOMIA까지 깨져나갈 상황이다. 미국으로선 동북아에 세웠던 대중국 봉쇄축 약화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제 화난 표정일지언정 미국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미국은 한국이 11월 22일 GSOMIA 효력 정식 종료 이전 재고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상태다. 미국이 이를 위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까지 포함한 중재안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설지, 한국에 재고만 요청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설사 한·일 갈등이 해소되고 미국 바람대로 한국이 GSOMIA 종료 결정을 번복한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반발이 예상된다. 칼을 뽑기도 어려웠지만, 다시 칼집에 넣기도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앞서 청와대는 한·일 GSOMIA 종료 결정을 발표하면서 “미국은 우리 정부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쏟아진 반발을 보면 청와대가 미국 측 이해 정도를 과장했거나, 예상되는 반발을 과소평가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전자였다면 정직하지 못했고, 후자였다면 나이브했다. 미국에 자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제는 “미국 입장을 이해한다”는 애매한 말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는 더 솔직하고 진지해져야 한다. 한·미갈등의 파도를 헤쳐나갈 국민적 지지를 모으기 위해선 더욱 그렇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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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미사일과 공격용 소총. 작동 원리와 파괴력이 판이한 두 무기가 최근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새삼 떠오르며 이목을 끌었다.

 

미국은 지난 2일(현지시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탈퇴함으로써 세계 군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냈다. 32년 전 미국과 소련은 INF를 통해 사거리 500~5500㎞ 탄도·순항미사일을 실험·생산·보유·배치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이로써 핵미사일 능력을 제한해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줬던 기둥 하나가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INF가 무너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와 아이오와주 데이턴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총기난사 사건이 일상화되다시피 한 미국이라지만 15시간의 시차를 두고 32명이나 숨진 사건의 충격은 컸다.

 

두 사건은 죽음의 도구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묻는 시험대에 인류를 올려놓았다. 배경에 자리잡은 발달한 기술, 변화된 환경, 파편화된 세계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INF 탈퇴 이유로 러시아가 INF 금지 미사일을 개발하고, 중국이 INF 바깥에서 미사일을 자유롭게 개발·배치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이런 불만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2014년 7월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INF를 위반했다고 공식 항의한 이후 문제제기를 해왔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군축 합의들이 전 세계 핵무기 비축량과 핵무기에 접근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늘어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효가 2년 앞으로 다가온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의 연장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극초음속 미사일, 핵추진 순항미사일, 핵탄두 탑재 수중 드론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존 군축 논의에서 거론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은 충격적이다. 기존 군축 합의를 보완하고 폭을 넓히려고 노력하기보다 조약 자체를 허물어 버렸다. 미국의 선택이 새로운 군축 패러다임으로 가기 위한 ‘창조적 파괴’인지, ‘신군비경쟁’의 신호탄인지는 시간이 판명해줄 것이다. 미국이 INF에서 탈퇴하자마자 아시아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전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미국 사회에서 재연된 총기규제 논쟁도 변화된 현실과 제도 사이의 괴리를 타고 흐른다. 엘패소와 데이턴의 총격범은 공격용 소총을 사용했다. 특히 데이턴 총격범은 30초 만에 41발을 쏴서 9명을 죽였다. 그는 총알이 100발이나 들어가는 탄창을 가지고 있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총알을 더 멀리 보내 더 많은 이를 죽일 수 있도록 개발된 무기가 대형마트·유흥가에서 시민들을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이다.

 

이제 공격용 소총은 총기난사 사건의 필수 구성요소나 다름없다.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나 사용될 법한 치명적인 총기류가 민간에 퍼져 있다. 그런데도 미국 연방의회는 지난 25년간 새로운 총기규제 법안을 단 한 건도 성공적으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대책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공격용 소총 판매 금지 같은 근본적 대책은 외면하고 총기난사범 사형 구형, 정신질환자 총기 소유 제한 등 사후적이고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월 하원에서 총기거래자 신원조회 전면 확대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은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은 요지부동이다.

 

미국에서 총기규제는 민주당 지지자 78%가 지지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는 불과 18%만 찬성(2017년 퓨리서치 조사)할 정도로 당파적인 주제다. 대선을 15개월 앞두고 새롭게 불거진 총기규제 논쟁의 향배는 미국 사회와 정치권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공통의 인식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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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미사일과 공격용 소총. 작동 원리와 파괴력이 판이하게 다른 두 무기가 최근 사람들의 근심거리로 새삼 떠오르며 이목을 끌었다.


미국은 지난 2일(현지시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공식 탈퇴함으로써 세계 군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찢어냈다. 32년 전 미국과 소련은 INF를 통해 사거리 500~5500㎞ 지상발사 탄도·순항미사일을 실험·생산·보유·배치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이로써 핵미사일 능력을 제한해 ‘공포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해줬던 기둥 하나가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INF가 무너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와 아이오아주 데이턴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총기난사 사건이 일상화되다시피한 미국이라지만 15시간의 시차를 두고 32명이나 숨진 사건의 충격은 컸다.


불법 총기류 근절을 요구하는 미국 시민들이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불법 총기류 범람 중단을 위한 행동 청원’ 기자회견에서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뉴욕_AFP연합뉴스


두 사건은 죽음의 도구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지 묻는 시험대에 인류를 올려 놓았다. 배경에 자리잡은 발달한 기술, 변화된 환경, 파편화된 세계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미국은 INF 탈퇴 이유로 러시아가 INF가 금지한 미사일을 개발하고, 중국이 INF 바깥에서 미사일을 자유롭게 개발·배치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이런 불만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처음 나온 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2014년 7월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INF를 위반했다고 공식 항의한 이후 문제제기를 해왔다.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체결하고 탈냉전 후 러시아가 계승한 군축 합의들이 전세계 핵무기 비축량과 핵무기에 접근할 수 있는 행위자들이 늘어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시효가 2년 앞으로 다가온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의 연장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극초음속 미사일, 핵추진 순항미사일, 핵탄두 탑재 수중 드론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두 기존 군축 논의에서 거론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의 행동은 충격적이다. 기존 군축 합의를 보완하고 폭을 넓히려고 노력하기보다 조약 자체를 허물어 버렸다. 미국의 선택이 새로운 군축 패러다임으로 가기 위한 ‘창조적 파괴’인지, ‘신군비경쟁’의 신호탄인지는 시간이 판명해줄 것이다. 미국이 INF에서 탈퇴하자마자 아시아에 중거리 미사일을 새로 배치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전자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미국 사회에서 재연된 총기규제 논쟁도 변화된 현실과 제도 사이의 괴리를 타고 흐른다. 엘패소와 데이턴의 총격범은 모두 공격용 소총을 사용했다. 특히 데이턴 총격범은 30초만에 41발을 쏴서 9명을 죽였다. 그는 총알이 100발이나 들어가는 탄창을 가지고 있었다. 더 빨리, 더 많은 총알을 더 멀리 보내 더 많은 이를 죽일 수 있도록 개발된 무기가 대형마트와 유흥가에서 시민들을 죽이는데 사용된 것이다.


이제 공격용 소총은 총기난사 사건의 필수 구성요소나 나름없다. 말그대로 전쟁터에서나 사용될 법한 치명적인 총기류가 민간에 퍼져 있다. 그런데도 미국 연방의회는 지난 25년 간 새로운 총기규제 법안을 단 한건도 성공적으로 통과시키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대책은 이유를 짐작케 한다. 그는 공격용 소총 판매 금지 같은 근본적 대책은 외면하고 총기난사범 사형 구형, 정신질환자 총기 소유 제한 등 사후적이고 소극적인 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월 하원에서 총기거래자 신원조회 전면 확대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은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은 요지부동이다.


미국에서 총기규제는 민주당 지지자 78%가 지지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는 불과 18%만 찬성(2017년 퓨리서치 조사)할 정도로 당파적인 주제다. 대선을 15개월 앞두고 새롭게 불거진 총기규제 논쟁의 향배는 미국 사회와 정치권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공통의 인식에 도달할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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