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57)은 숱한 명언을 남겼다. “누구라도 실패는 하기 때문에, 나는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시도조차 않는 건 용납 못한다.” “성공하려면 이기적이라야 한다. 최고 수준에 오르면 이타적이어야 한다.” “나이키는 흑인도 신고 백인도 신는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프로농구(NBA) 역사는 조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도 한다. 불세출의 슈퍼스타인 그는 스포츠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로도 꼽힌다. 올봄에 나온 10부작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는 그의 화려한 전설과 코트 밖 일상을 재조명해 주목받았다.

 

현역 시절 조던은 민감한 사회 문제에 말을 아꼈다. 1990년 흑인 최초로 노스캐롤라이나주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로 나선 하비 겐트의 지지연설 부탁을 거부해 비난에 휩싸였다. 민권 운동에 앞장선 무함마드 알리와 자주 비교됐다. 조던은 “신념을 위해 목소리를 낸 알리를 존경하지만, 나는 운동선수이지 운동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며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랬던 조던이 지난 5월 미국 전역에 규탄 시위가 번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 이례적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매우 슬프고 고통스럽고 화난다”면서 “이 나라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유색인종 폭력에 반대하는 이들과 같은 편에 서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투표를 통해 체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도 했다. 이후 인종차별 철폐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향후 10년간 1억달러(약 1183억원)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단호하게 입장을 밝히고 확실한 실천에 나선 것이다.

 

지난 23일 위스콘신주 흑인 피격 사건에 분노한 선수들의 보이콧 항의로 사흘간 중단됐던 NBA 플레이오프 경기가 30일 재개됐다. 현재 NBA 샬럿 호니츠 구단주인 조던이 선수들과 소통하고 구단주회의에 참석해 적극 중재하며 파국을 막았다. 조던과 함께 선수들의 뜻을 확실하게 전달할 방안을 마련키로 한 구단주들은 “경기를 계속해야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권했고, 선수들은 믿고 따랐다. 코로나19 속에서 환자의 생명과 안전에서 멀어져 파업하고 있는 한국 의사들이 새길 대목이다. 의료계에도 ‘조던’이 더 많아져야 한다.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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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적인 갑부 소리를 들으려면 순재산이 10억달러(약 1조1853억원)는 넘어야 한다. 이런 억만장자(billionaire)가 올해 3월18일 현재 전 세계에 2095명(포브스 선정) 있다. 세계 첫 공식 억만장자는 20세기 전후 석유로 재산을 모은 존 록펠러(1839~1937)다. 1916년에 기록을 세웠다. 억만장자보다 10배 더 부자인 100억달러 부자는 80년 뒤에 탄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65)가 주인공이다. 첫 1000억달러 부자는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56)다. 2017년 11월 이 기록을 세운 베이조스는 3년째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베이조스의 순재산이 지난 26일 사상 첫 2000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분 11.2%를 가지고 있는 아마존 주가가 급등한 덕이다. 아마존 주가는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비대면’ 소비행태 덕에 연초보다 80%가량 급등했다. 이런 추세라면 베이조스는 첫 ‘조만장자(trillionaire)’가 될지 모른다. 첫 조만장자 탄생은 지난 5월 한 분석회사의 발표로 관심을 끌었다. 이 회사는 향후 5년간 베이조스의 재산이 지난 5년간 평균 증가율(34%)만큼 늘어난다면 그가 2026년에 첫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1조달러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다. 모든 지구인에게 140달러씩 줄 수 있다.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하면 세계 15위(멕시코)나 16위(인도네시아) 나라와 맞먹는다.

 

조만장자 시대의 도래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고, 기업 실적도 꾸준히 올라야 하는 등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향후 60년 내 조만장자 11명이 탄생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새 기술과 창의력으로 무장한 혁신적 기업가라면 그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획기적인 암 치료제나 기존 연료 대체 기술 개발자 등이 후보자들이다.

 

조만장자의 탄생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최근 아마존은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물류센터 직원들에게 출근을 강요해 물의를 빚었다.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재산을 늘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부의 편중에 대한 견제 심리도 더욱 강하게 발동할 것이다. 세계 최고 부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윤리의식과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조찬제 논설위원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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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유행은 사실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는 오히려 악화일로였다. 하루 평균 확진자는 여전히 25만명 이상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누적확진자가 600만명, 사망자도 18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여전히 하루 평균 4만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획기적인 백신 개발 이전엔 호전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인구밀도가 한국에 비해 15배 정도 낮은 것을 고려하면 미국 사회가 얼마나 대응을 잘못해오고 있는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상황이 워낙 어렵다 보니, 요즘 미국에선 나라가 어쩌다 “바나나 공화국”으로 전락해 버렸느냐는 자조 섞인 비판이 넘친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은 소설가 오 헨리가 1904년 중남미 온두라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lt;양배추와 왕들&gt;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바나나 생산 및 수출 관련 독재와 부정부패, 계급착취가 만연한 후진사회를 풍자한 용어였다. 미국이 지금 그 정도로 한심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7월 말 현재, 실업수당을 받는 노동자가 2800만명을 넘고 2조5000억달러(GDP의 13.3%)에 달하는 긴급재난지원자금도 소진돼 추가적 부양책이 없을 경우 경제위축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물론 중산층을 포함, 저소득 취약계층이 더 고통을 받는다.

혹자는 미국 주식시장은 활황이지 않냐고 반문하지 않을까 싶다. 맞다. ‘역대급’ 활황이다. 하지만 주식시장 활황은 미 연준의 천문학적인 유동성 공급으로 인해 발생한 착시효과다. 실물경제와 따로 움직인 지는 이미 오래다. 오히려 역으로 주식시장 활황은 기존 사회경제적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 가구의 반 정도는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고 있지 않고, 그나마 주식보유자의 상위 1%가 주식시장 전체의 90% 정도를 소유 중이다.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미국 사회의 자산불평등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자산순위 상위 0.1%에 해당하는 16만가구의 부의 규모가 하위 90% 인구의 전체 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바나나 공화국”이라 자조하는 더욱더 근본적인 이유는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의 사법방해 행위는 탄핵위기 이후 궤도를 이탈한 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다. 유죄가 확정된 측근들을 사면 또는 감형하는 건 기본이고, 측근 관련 재판에 개입해 검찰의 구형량을 낮추라고 압력을 행사하며, 자신과 가족의 비리를 수사하던 뉴욕남부지검 연방검사를 전격 해임하기도 했다. 사법방해의 정도가 도를 넘어서니 전·현직 검사 수천명이 연판장을 돌리며 법무부 장관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낙선할 경우, 그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등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제기되는 이유다.

 

이에 더해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의 정당성마저 도전받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 4월 3000만명에 육박하는 유권자가 참여한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러냈지만, 미국에선 상황이 전혀 다르다. 코로나19 창궐을 우려해 많은 주들에서 우편투표가 실시될 예정인데, 트럼프 진영에선 부정투표 가능성이 높다며 우편투표 등 투표 자체를 방해하는 일들을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다. 이 우편투표 논란은 트럼프가 선거에서 지더라도 선거부정을 빌미로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실제 트럼프는 이미 선거 불복 가능성을 에둘러 피력해왔다.

 

미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미국인 10명 중 8명 정도는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걱정하는 것으로 조사된다. 물론 트럼프 지지자들에겐 민주당 편향의 진보 언론매체들에 의한 가짜뉴스고 백색소음이다. 하지만 대내외적으로 상생과 연대의 구심점이 필요한 시기에 미국이 패권국으로서의 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 사회제도 및 시스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오류를 시정하려는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당연히 중요한 나라다. 하지만 미국의 동맹국은 50여개에 달한다. 한국이 50분의 1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미국을 보는 것과 같이 미국에도 한국이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민낯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합리적인 패권국이다. 합리적 논리로 비판하고 반박하는 나라는 존중하지만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는 오히려 하찮게 여긴다. 코로나19 와중에도 여전히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했다길래 든 상념이다.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루크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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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상하이사변 막바지인 1937년 10월. 상하이의 ‘사행창고(四行倉庫)’는 항일 전투 최후의 보루였다. 4개 은행이 공동으로 세웠다는 뜻의 이 6층짜리 창고는 강을 사이에 두고 영국이 통치하는 국제조계지와 마주하고 있다.

 

국민당 군대인 국민혁명군 제88사단 524연대를 이끌던 셰진위안과 400여명의 소속 군인들은 4일간 일본군의 10여 차례의 무차별 공격을 몸으로 막아냈다. 장비와 병력 수로는 열세였지만, 몸에 폭탄을 설치하고 적군에게 뛰어드는 희생으로 사행창고를 지켜냈다. 당시 일본군 희생자는 200명이 넘었으나 중국 측 희생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외부에는 일부러 실제보다 많은 “800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고 알린 데서 유래해 ‘800명의 용사들’로 불린다.

 

이 사행창고 전투를 담은 영화 <팔백(八佰)>이 중국 대륙을 달구고 있다. 개봉 나흘째인 24일 박스오피스 수입 10억위안(약 1718억원)을 돌파했다. 25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봤다. 코로나19로 영화관 관람객 수를 상영관 좌석의 30% 이내로 제한한 악조건 속에서 거둔 흥행이다.

 

‘중화민족 만세’ 대사를 비롯해 애국심 고취 요소가 곳곳에 뿌려져 있다. 외부 적들에 맞서 싸우는 용사들을 내세운 애국주의, 이른바 ‘국뽕’ 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이한 점은 중국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 군대가 주도한 전투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실제 이 영화는 국민당 미화 문제로 개봉되지 못할 뻔했다. 지난해 6월 상하이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상영될 예정이었지만 전날 갑자기 취소됐다. 지난해 7월 개봉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취소됐다. 당시 영화사는 “각 분야와의 협의를 통한 결정”이라고만 했다. 영화 속 군인들이 현재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등 국민당 미화 내용이 문제가 됐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과거 중국 영화는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대를 비겁하거나 악하게 묘사해왔다. 2005년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와 롄잔 국민당 주석의 첫 당 대 당 회담이 열린 후에야 비교적 중립적인 묘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진핑 시대 들어서는 적극적으로 국민당의 항일 역사를 흡수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아예 루거차오 사건을 기점으로 삼아 8년으로 규정했던 항일전쟁을 14년으로 수정한 교과서까지 도입했다. 항일전쟁에서 공산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공산당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다.

 

미국과의 대립이 심화되고,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과 코로나19 책임론을 둘러싸고 전 세계적으로 반중 정서가 번져 있다. 내부 결속과 충성이 필수적이다. 공산당의 역사 해석과 인식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사행창고 전투는 1975년 대만에서도 <팔백장사>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다. 1970년대는 대만의 외교적 암흑기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대만은 중국의 압력으로 1971년 유엔에서 탈퇴했다.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소외됐고, 주요 국가들과 줄줄이 단교했다. 당시 대만의 선택도 항일을 통한 ‘중화민국(대만 국호) 만세’였다. <영렬천추> <견교영 열전><팔백전사> 같은 항일전쟁 영화에서 잇달아 개봉하며 고립된 대만인들에게 준엄한 국제정세에 맞서 싸우라고 선동했던 것은 우연일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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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007년 9월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자 1년 만에 물러났다. 후임인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등 자민당 총리들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총선 패배로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줬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집권 3년3개월간 3명의 총리가 등장했다. 6명의 ‘단명 총리’를 거치면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주요 7개국(G7) 회의 같은 국제 행사장에서 일본 총리들은 외톨이 신세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무려 5명의 일본 총리에게 “미·일 동맹은 굳건하다”고 다짐해야 했다. 미 국무부 관리들이 새 일본 총리의 이름을 헷갈려하는 장면에 일본인들은 혀를 찼다.

 

민주당 정권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은 끝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9개월 만에 퇴임하면서, 외교 주도권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 등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 빼앗겼다. 동아시아 중시 외교를 부르짖던 민주당 정권하에서 중국·한국과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됐다. 단명 총리에 진저리가 난 일본 사회에서 ‘웬만하면 총리를 끌어내리지 말자’는 안정희구 심리가 커졌다. 아베의 재집권은 이런 흐름에서 나왔다. ‘재수(再修) 총리’ 아베의 장기집권은 처음부터 예고됐던 셈이다.

 

24일로 아베 총리의 재임기간이 2799일을 기록, 전후 최장기 연속집권을 달성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장기 집권 요인으로 야당의 지리멸렬과 함께 관료인사권 장악을 꼽는다. 총리실 산하에 내각인사국을 두고 관료사회에 맡겨온 부처의 인사권을 국장급까지 거머쥐면서, 관료들이 알아서 기는 ‘손타쿠’ 관행이 생겨났다. 모리토모·가케 학원 사태 등 예전 같으면 총리 사퇴감인 대형 스캔들을 관료들이 몸을 던져 덮었다. 관료 장악은 결국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도쿄 올림픽 개최에 집착하는 총리의 심기를 읽은 관료들이 코로나19 사태 초기 방역관리보다 확진자 수 억제에 신경쓰다 방역에 실패해 민심을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아베의 최장수 총리 기록보다 그가 언제 퇴임할지에 관심이 쏠려 있다. 총리단명 사태가 빚어낸 ‘장수 총리’의 시대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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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격언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학자이자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제목(There’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으로도 유명한 문장이다. 무엇을 얻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유사한 의미지만 세계 각지에는 약간씩 결이 다른 명언들이 있다.

 

중국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진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왕은 자신의 사후에도 백성들이 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 백성들이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할 영원한 법칙을 찾아주길 요청했다. 3개월 후 이들은 천하의 지식을 집대성해 3권의 책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백성들이 책을 3권이나 읽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을 것 같아 계속 연구하길 명했다. 2개월 후 학자들은 1권으로 압축해 가져왔으나 왕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다시 한 달 후 학자들은 종이 한 장을 왕께 바쳤다. 왕은 백성들이 이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귀중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며 매우 만족하였다. 종이에는 ‘천하에 공짜 점심은 없다(天下沒有免的午餐)’라는 글귀 한 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나라에서 양제츠 정치국원 겸 중앙외사공작영도소조 비서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한국에 던지고 있다. 첫 번째는 진일보한 한·중관계의 개선에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 내 사드 배치 이후 냉각된 한·중관계의 회복을 추구해왔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의 연내 방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었는데 이번 방문에서 이를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다룬다고 한다. 게다가 벌써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한한령 해제, 냉각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중국의 역할 등의 기대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번 방문에서 이런 사안들이 건설적인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한·중관계 개선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는 한국 정부가 그렇게 바라던 시 주석의 방한 등을 저울질하며 2018년 7월 이후 2년여 만에 찾아온 양 정치국원이 한국에 요구할 내용에 대한 우려이다. 1975년 6월 중국 외교부에 들어온 이후 45년이 넘게 외교 분야의 경력을 쌓았고 중국외교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주미대사, 외교부장,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역임했던 그가 최근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역시 나날이 격화되는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국이 미·중 사이의 민감한 현안들에서 중국의 손을 들어주거나 최소한 중립의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주길 바라는 중국의 입장을 강하게 요구해 올 수도 있다.

 

사실 최근 중국의 상황은 곤혹스럽다.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경제와 군사·안보에 이어 ‘이념’의 영역으로 전선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대만, 홍콩,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현안에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 문제가 연이어 제기되고,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체제 우위’ 논쟁이 불거져 나왔다. 이어 미국은 지난 5월20일 ‘미국의 대중국 전략적 접근’ 보고서에서 중국과 ‘중국 공산당’을 구분하더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에 이어 중국의 ‘홍콩보안법’ 제정 이후에는 윌버 로스 상무장관까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념’의 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을 ‘미국 대 중국’의 구도에서 한층 유리한 ‘자유진영국가 대 중국’의 구도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국가들의 결집력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대표적인 5G 기업인 화웨이 문제에 대해 영국, 프랑스에 이어 독일마저도 미국에 점차 기우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처럼 중국과의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던 호주도 최근 중국의 경제적 보복을 감수하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중국의 시각에서는 자유진영국가들 중 ‘모호한’ 한국이 약한 고리라고 인식할 수 있다. 한국이 바라는 요구들을 ‘통 크게’ 수용하며 대만·홍콩·신장 문제의 ‘내정’ 인정, 남·동중국해와 화웨이 문제에서 중국 입장 지지, 한국의 ‘3불(不) 입장표명’을 공식문서로 합의하는 것 등을 슬쩍 타진해 볼 수 있다. 정말 하나같이 신중한 고민이 요구되는 사안들이다.

 

중국과 팽팽한 외교를 펼치는 러시아와 일본에도 ‘공짜’에 관한 속담이 있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 있다’와 ‘공짜보다 비싼 것은 없다’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한국이 이번에는 어떤 대응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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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판도가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의 우세로 바뀌자 국내에서 ‘전략적 인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미국이 허송세월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방치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다. 이 같은 인식은 트럼프가 승리해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재개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오바마는 정말 북한에 관심이 없었을까. 재임 시절 그의 대북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직후 북한과 직접 접촉을 모색했다. 그러나 북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4월5일 오바마가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설파하던 날을 골라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리고 한 달 뒤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취임 첫 행보부터 북한에 모욕을 당한 오바마에게 국내적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오바마는 그해 12월 특사를 평양에 보내 6자회담 복귀를 설득했다.

 

북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그해 11월 원심분리기를 공개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뒤 곧바로 연평도 포격 사건을 일으켰다. 대북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오바마는 비공개 접촉을 시도했다. 언론은 물론 의회에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결국 오바마는 2011년 8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뉴욕으로 불러 북·미 고위급회담을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두 차례 추가 회담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2·29 합의’다. 이 합의는 북한이 죽었다고 선언한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고 비핵화 목표를 재확인한 의미 있는 성과였다. 북한은 또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등 핵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2·29 합의는 북한과의 합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모든 요소가 갖춰진 전범(典範)이었다.

 

하지만 2·29 합의는 북한이 그해 4월 태양절을 맞아 위성 발사를 감행하면서 깨졌다. 북한은 위성 발사가 평화적 우주 개발의 권리라고 강변했지만, 2·29 합의에 들어 있는 미사일 발사 중단 약속에 위성 발사도 포함된다는 사실은 북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의를 깨고 위성 발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는 권좌에 오른 지 석 달밖에 안 된 김정은의 불안한 권력적 위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29 합의 파기로 얼마 남지도 않은 미국 내 대화론자들은 ‘멸종’했고 오바마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글린 데이비스 협상대표는 언론의 눈을 피하려 한동안 국무부 뒷문으로 다녔다. 그 와중에도 오바마는 백악관팀을 극비 방북시켜 대화 복원을 시도하다 공화당의 비난을 받았다. 오바마 2기도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자 북한은 장거리미사일을 쐈고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에는 3차 핵실험을 했다. 이어 2013년 3월 핵·경제 병진노선 채택, 4월 원자로 재가동으로 내달렸다. 

 

오바마 재임 시절은 북한이 김정일 말기~김정은 초기에 걸쳐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기다. 북한은 그 위기를 핵능력 완성으로 돌파하려 했다. 북한은 일단 핵을 손에 넣은 뒤 뒷일을 감당하겠다고 작정하고 ‘만패불청’의 태도로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렸을 것이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도 2번의 핵실험과 무수한 미사일 발사를 거듭하다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 성공과 함께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면서 폭주를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남북, 북·미 대화에 나섰다. 오바마 시절 대화가 없었던 것은 오바마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대화 국면이 열린 것은 트럼프가 잘했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북한의 시간표에 따른 것일 뿐이다.

 

바이든이 승리해도 대화 기조는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접근법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민주당은 대북협상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집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트럼프처럼 정치적 과시를 위해 이행도 하지 못할 합의문에 도장을 찍고 이후에는 드러누워버리는 무책임한 협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다자적 접근, 동맹국과의 조율을 통한 정책을 선호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대외정책은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에 달라진 북한의 핵능력을 감안한 정책을 펼 수도 있다. 따라서 바이든이 이긴다면,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고 전략적인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과의 공조는 물론 한반도 미래가 걸린 북핵 협상에서 국익을 지키기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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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 자리는 양면적 특성이 있다. 늘 1인자의 그늘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다. 묵묵히 뒤를 지키는 병풍 같은 존재다. 하지만 1인자의 뒤에 있으니 비판받을 일이 없다. 힘을 모아 후사를 도모하기에 이만한 자리가 없다. 슈퍼파워 미국 행정부의 2인자, 부통령 자리도 비슷하다. 초대 부통령 존 애덤스는 “부통령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하찮은 자리”라고 자평했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78)도 한 정치풍자 프로그램에서 군인들에게 핫도그를 배달하는 게 헌법이 부여한 부통령의 임무라고 농담했다. 하지만 어떤 대통령을 만나느냐에 따라 부통령의 역할은 크게 달라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딕 체니 부통령은 실세 역할을 했다. 리처드 닉슨 등 14명이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된 것을 봐도 무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미국 부통령은 1804년 수정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한다. 그 전까지는 대선 2위가 부통령을 맡았다. 부통령은 사망, 하야, 탄핵 등으로 인한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실제 9명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해리 S 트루먼도 194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부통령은 상원의장도 겸한다. 평소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가부가 동석일 때 캐스팅보트를 행사한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은 4번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이 러닝메이트로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55)을 선택했다. 해리스 의원은 자메이카 출신 아버지와 인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색인종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며 정치적 입지를 다져왔다. 첫 여성이자 첫 흑인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도 지냈다. 그리고 이제 사상 첫 흑인 여성 부통령 후보이자 첫 아시아계 부통령 후보로 낙점받았다. 민주당 내 강경파로 분류되는 해리스 의원은 ‘중도 성향의 70대 백인 남성’인 바이든 후보의 약점을 보완해줄 카드다. 미국 시민들은 12년 전 젊은 흑인 대통령 후보 버락 오바마와 안정감 있는 백인 부통령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의 흑백 조합에 손을 들어준 바 있다. 흑인 여성 2인자의 탄생으로 미국 사회가 통합을 향해 또 한발 전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영환 논설위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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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일간지 빈과일보(果日報)의 로고는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 애플처럼 ‘한 입 베어먹은 사과’다. 제호의 ‘빈과’는 사과를 뜻한다. 하지만 사과의 의미는 다르다. 애플은 IT기업답게 중력을 발견하게 한 아이작 뉴턴의 사과다. 빈과일보는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악도 뉴스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빈과일보는 홍콩에서 발행부수(10만부)가 두번째로 많은, 반중국 성향의 대표적인 매체다. 1995년 6월 창간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설립자 지미 라이(黎智英·72)는 창간 직전 도발적인 TV광고를 만들었다. 사격 표적지처럼 자신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은 광고였다. 기존 매체에 던진 도전장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신문과 달리 타블로이드 판형을 도입하고, 표준중국어 대신 광둥어를 썼다. 판매 전략도 파격적이었다. 다른 신문보다 절반 이하의 낮은 가격으로 첫날에만 20만부를 팔았다. 하지만 ‘옐로·파파라치 저널리즘’을 추구해 정론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중 매체가 된 계기는 2003년 둥젠화(董建華) 당시 행정장관의 국가보안법 추진이다. 1면에 반대 및 민주화 세력 지지 기사를 실었다. 그 대가는 ‘광고 보이콧’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 시위(우산혁명) 때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지지했다. 지난해 송환법 반대 시위와 올해 홍콩보안법 반대 시위를 주도하며 명실상부한 민주화 세력의 대변지가 됐다. 당연히 설립자 지미 라이는 중국 정부에 눈엣가시였다. 그는 송환법 반대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7월 미 백악관을 방문해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을 만남으로써 중국 당국을 자극했다. ‘시위 배후조종 4인방’으로 지목되면서 지난 6월 말 홍콩보안법 시행 후 최우선 체포 대상에 올랐다.

 

홍콩 경찰이 지미 라이와 일부 기자를 체포하면서 빈과일보가 홍콩 민주화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중국의 무자비한 조치에 성난 홍콩 시민들이 구독운동에 동참해 발행부수가 50만부 이상으로 5배나 늘었다. 모기업 넥스트 디지털의 주가는 주식 사주기 열풍 덕에 이틀 새 12배 이상 올랐다. 중국 및 홍콩 당국은 세계인이 빈과일보의 운명을 주시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조찬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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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지만 중국에서 이 바이러스가 처음 발병했고, 미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기막힌 역사의 우연으로 기록될 것이다. 21세기 양대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은 미국과 중국이 협력의 시대를 끝내고 경쟁과 갈등의 시기로 접어든 상황에서 코로나19가 관계를 급속히 악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미·중 경쟁을 두고 ‘신냉전’이라는 용어가 종종 동원됐지만 동조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존재론적 경쟁’을 벌였던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 비해 미·중은 너무 깊숙이 연결돼 있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됐던 냉전 시절에 비해 전 세계도 훨씬 더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정은 달라졌다. 코로나19 이후 미·중은 마치 뺨때리기 시합을 하는 모양새다. 오가는 말과 행동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이제 미국 언론에서 신냉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국은 본격적인 이데올로기 대결을 예고하고 나섰다. 백악관이 지난 5월 공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보고서는 중국과의 신냉전 선언과 다름없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이 경제와 안보 외에 ‘미국의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전방위적 중국 봉쇄를 다짐했다. 경제와 안보 영역의 대립에 그치지 않고 가치의 영역에서도 적개심을 드러냈다. 중국공산당 일당체제, 인권탄압,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정치 및 이데올로기, 영토 영역에 대한 비판과 개입을 집중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미·중 수교의 주역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도서관에서 한 연설도 의미심장하다. 중국공산당을 ‘마르크스·레닌 정권’으로 규정하고, 시진핑(習近平)을 중국 국가주석이 아닌 공산당 총서기로 부르면서 ‘파산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신봉자’라고 비판했다. 냉전 시절 미국이 소련에 들이댔던 단골 프레임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러시 도시는 “미·중의 국력 격차는 좁아졌지만 이데올로기 격차는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냉전의 특징인 강대국에 의한 편가르기 경쟁도 재연될 조짐이다.

 

세계적인 냉전은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남북이 대치 중인 한반도는 역사적·구조적으로 냉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한반도에 드리운 냉전의 그늘을 거두기 위해선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절실한 판에 신냉전 구도의 현실화는 당혹스럽다.

 

다행히 신냉전 국면은 초입이다. 냉전도 불사하겠다는 미·중의 ‘전투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상호공존과 협력의 미덕은 여전하다. 국가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사람과 상품과 문화가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하고 공존을 도모했던 경험은 갈등과 분열, 대립과 충돌의 시대로의 회귀를 막아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을 제공한다. 인류가 당면한 도전인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협력은 더욱 절실하다는 여론을 키워나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우연적 사건의 부정적 파장이 필연으로 굳는 것을 막을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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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쓰이기 시작한 ‘꽃미남’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이 뜻을 묻는 단어다.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에서 왔지만 본래 뜻과는 무관한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뜻인 일본 속담 ‘꽃보다 경단’에서 경단과 남자의 일본어 발음이 비슷한 점에 착안한 만화 제목을 줄였다. 우리식으로 하면 ‘금강산미남’과 비슷해 대부분 일본인들은 꽃미남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한다. 꽃미남이 <꽃보다 남자>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주면 한국어를 아는 일본인도 놀라워한다.

 

일본 영화 <64>에는 가출한 딸을 찾는 부모가 나온다. 나이가 비슷하고 연고가 없는 시신이 발견되면 어디든 달려가 확인한다. 이번에도 딸이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전차를 기다린다.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한국어 자막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이다. 하지만 열차가 연착하지도, 사고가 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 으레 쓰는 표현이다. 주문받은 음식을 3분 만에 내오면서도 하는 말이다. 이 장면에서는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가 우리말에 가깝다.

 

지금 일본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공식 장소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을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를 어기고 있다고 일본 언론은 비판한다. 일할 생각이 없으면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말까지 나온다. 신문들은 코로나19 이후 아베 총리의 발언을 되짚으며 정치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기자회견에서도, 국회 답변에서도 전문가 의견을 따른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고 했다. 야당은 이제라도 방역과 경제를 저울질해 정치 판단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던 지난 3월 한국·중국 등을 입국금지 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최종적으로 정치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 판단을 위해 경제적, 의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했느냐는 지적은 있었지만, 정치 판단이 잘못이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가 정치적 판단을 시인했다며 비판하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일본어 ‘세이지 한단’과 한국어 ‘정치 판단’은 한자만 같을 뿐 쓰이는 의미가 다르다. 이 경우 일본에서는 책임, 한국에서는 정략의 의미로 쓰였다.

 

도쿄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비즈니스일본어 수업을 들었다. 주로 일본 회사에 취업할 외국인 학생이 대상인데 일본인 학생도 모르는 내용이 많다고 한다. 유명 대기업 출신인 강사는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도 같은 수업을 한다. 과정이 끝날 무렵 일본인처럼 말하는 방법을 하나 알려줬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에 하지 않는 것이었다. 주제 정도를 꺼낸 다음 상대방 말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할 것이고, 거기에 맞춰 다음 말을 이어가는 게 좋다고 했다.

 

세상에 말로 풀지 못할 갈등은 없다. 말로 풀지 못하면 못 푸는 것이다. 힘으로는 못 푼다. 대화의 전제는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다. 농구장에선 손을 써야 하고, 축구장에선 발을 써야 한다. 한국은 일본을 안다고, 일본도 한국을 안다고 말한다. 서로에 대해 그렇게 밝은데도 사이는 좋아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양국이 상당히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핵심을 말하지 않고 에두르는 사람들과, 칼로 찌르듯 결론에 치닫는 사람들 사이에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한지 이 시절에 생각해본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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