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밤 경기 파주에서 탈북단체가 보낸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이 23일 홍천군 서면 마곡리 인근 야산에 떨어져 경찰이 수거하고 있다. 발견된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은 2∼3m 크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일가의 사진이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정부와 사회 각계의 호소를 무시하고 기어이 대북전단 살포를 시도했다. 이 단체 박상학 대표는 22일 밤 경기 파주 지역에서 대북전단 50만장을 풍선에 띄워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단 살포용 풍선 등은 23일 오전 강원 홍천에서 발견됐다. 살포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70㎞가량 떨어진 남측 지역이다. 접경지역 주민들의 안위는 무시한 채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한 탈북민단체의 행위가 참으로 무책임하다.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에서 전단 살포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전쟁도 아닌 평화기에 악의로 가득 찬, 그것도 심리전의 효과조차 의문시되는 조악한 내용의 전단으로 북측을 자극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북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도 국가 안보나 접경지역 주민들의 안위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다. 이 탈북민단체는 당국의 눈을 따돌리고 전단 살포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통일부는 “풍향 등 정황상 전단의 대량 살포는 믿기 어렵다”며 “북측 지역으로 간 전단은 없다”고 밝혔다.


북한은 전단 살포를 빌미로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한 데다 추가 살포가 ‘남북 충돌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방하는 문구를 담은 전단 실물을 공개한 데 이어 살포용 풍선 3000개를 준비해놓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승인만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북한은 다음 조치에 대해 “남측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골치가 아플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방법으로 전단을 살포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자칫 2014년 10월처럼 서로 화기로 대응사격하는 상황이 재연되는 것은 물론 휴전선 일대 육지와 서해 북방한계선(NLL), 상공 모두에서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다. 


북한은 판문점선언에 따라 철거한 대남 확성기를 2년 만에 재설치하고 있다. 대남방송까지 재개할 경우 남측으로서도 맞대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남·대북 방송 심리전을 재개하는 것은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남측보다 열악한 장비로 북한이 얻을 것은 없다. 전단 살포와 확성기 방송 재개는 판문점선언의 폐기를 의미한다. 한반도 평화를 담보하는 소중한 약속이 깨져서는 안 된다. 당국은 이번 전단 살포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여당도 전단 살포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법적 조치 마련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야당도 탈북민단체의 전단 살포를 만류해야 한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대북전단 살포를 막지 않았나. 시민의 안전을 넘어 민족의 안위를 위해 더 이상의 도발은 자제돼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한이 대남전단(삐라) 살포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재차 예고한 21일 경기 파주시 북한군 초소가 보이는 접경지역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말과 행동이 너무 험하다. 어제와 오늘 말이 다른 행태를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북한의 태도 변화는 너무 극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6·15 메시지는 “철면피한 감언이설”이 됐고,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포옹에 박수를 보냈던 남쪽 사람들은 “남조선 것들”이 됐다. 급기야 북한은 “쓰레기들과 이를 묵인한 자들의 죗값”이라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단둘이 대화하고, 그해 9월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함께 손을 들어올렸던 게 엊그제 일이다. 대북 제재가 여전하고, 남북협력 사업은 진척이 없고, 북·미관계가 교착되는 등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게 섭섭했을 수 있다. 하지만 70년 쌓인 불신과 냉전의 잔재를 몇 차례 정상회담으로 모두 거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북한은 너무 조급했다.


북한 의도를 둘러싼 해석은 갈린다. 다수 전문가들은 미국을 겨냥했다고 한다. 남측을 때려 긴장을 조성하고, 대북 외교를 치적으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해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대북전단을 꼬투리 삼아 남북관계 속도를 내지 못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에선 북한이 불안한 국내 상황을 덮고 후계구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긴장을 연출한다고 관측한다. 어느 분석이 맞을지 알 수 없다. 여러 이유가 겹쳐졌을 수도 있고, 다른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이유가 어떻든 북한은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미국을 움직이려 한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코가 석 자다. 미국은 코로나19 사망자와 감염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고, 트럼프 대통령은 대응 실패 비판에 허덕이고 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에 연방군을 투입한다고 했다가 군부 반발에도 부딪혔다.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지지율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볼 여력이 있겠는가.


만에 하나, 대화가 이뤄지더라도 북한이 바라는 수준, 예컨대 핵동결과 제재완화 등을 맞바꾸는 식의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홍보용 이벤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을 통해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론이 악화되고 불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북한을 감싸기 어렵다. 정부는 대화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악화된 국내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제동에도 남북관계에 속도를 낸다는 생각을 지난해 말 이전부터 했었던 것 같다. 지난 4월 총선 압승 후엔 그런 구상이 더 굳어졌다. 북한이 대북전단을 문제 삼았을 때 법적 근거 논란이 일었음에도 단속의지를 천명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 그 증거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를 믿고 기다렸어야 한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금강산관광 재개 등을 모색해 국제사회 제재로 막힌 경제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우는 방안을 모색했어야 한다. 하지만 연락사무소 폭파는 당분간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한때나마 김 위원장을 동생처럼 여겼을 문 대통령은 “어이구, 이 친구야” 하며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북한이 국내 문제를 덮기 위해 도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 위원장 신변에 문제가 발생해 후계구도를 굳히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면에서 남쪽을 때리는 상황을 보면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북한은 손해보는 장사를 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 2년간 만들려 노력했던 정상국가 이미지는 연락사무소 폭파의 굉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정상국가라면 내부 문제를 덮기 위해 이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밤 김 위원장은 싱가포르 외교부장관과 관광지를 산책하며 악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셀카에 찍혔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은둔의 왕국에서 성장한 젊은 지도자는 과거 관행들과 결별을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김 위원장은 ‘불량국가의 믿을 수 없는 독재자’로 되돌아갔다. 북한은 무엇을 바라는가.


<이용욱 국제부장>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한이 대규모 대남전단 살포를 준비 중이라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 비방 대남 전단을 공개하며 살포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21일 ‘삐라(전단) 살포’에 대해 “이미 다 깨어져 나간 북남관계를 놓고 우리의 계획을 고려하거나 변경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밝혔다. 전날 조선중앙통신은 대량으로 대남 전단을 제작, 살포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며 전단 내용을 공개했다. 지난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파괴와 금강산·개성지역에 대한 화력부대 배치에 이어 대남전단 살포 공세를 행동에 옮기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까지 나서 남북합의를 준수하겠다며 대북전단 살포를 막으려는 노력을 외면한 채 공세로 일관하는 북한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전단을 살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상호 비방 전단을 살포하지 않기로 한 판문점선언을 남측이 먼저 어겼으니 되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또 남북 합의가 이미 깨졌기 때문에 지킬 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전단 살포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북한이 공개한 전단의 수준은 경악할 정도이다. 문 대통령의 사진 위에 담배꽁초와 담뱃재, 머리카락 등을 뿌려놓고, ‘다 잡수셨네…북남합의서까지’라고 썼다. 단연코 이런 저급한 전단으로 얻을 수 있는 선전·선동 효과는 없다. 전단이 남측 집권세력을 흠집 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산이다. 오히려 남측 주민들에게 혐오감만 주고 대북 여론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낼 것이 틀림없다.


전단 살포 시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우발적 충돌 위험이다. 북한은 전단 살포 주민과 인민군 보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접경지대로 진입시킬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해상에서 선박을 이용해 전단을 살포할 경우에는 해류에 의해 의도치 않게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근접할 수도 있다. 남북은 2014년 10월 한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로 조준사격과 대응사격을 한 전례가 있다. 지금같이 민감한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낳을 수 있다. 북측은 그동안 격한 대남공세를 통해 메시지를 충분히 전한 만큼 전단 살포를 자제해야 한다.


남측 내 탈북자 단체들의 전단 살포 행위도 중지되어야 한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은 25일 전후로 대북전단을 살포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다른 탈북단체가 대북 쌀 페트병 보내기 행사를 보류했듯 전단 살포 계획도 마땅히 취소해야 한다. 정부도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북한이 전단 살포를 ‘남북 충돌의 도화선’이라고 한 점을 남북 모두 명심해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20일(현지시간) 인종차별 철폐 지지자들이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 등으로 도배된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버트 리 장군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을 지냈다.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체포 과정에서 사망한 이후, 미 곳곳에서 노예제를 옹호했던 인물들에 관한 기념물들이 철거 위기를 맞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8분46초간 경찰의 ‘무릎 목 누름’에 숨진 조지 플로이드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수천~수만명이 참가하는 인종차별 철폐 시위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흑인 탄압의 기억·기념물들을 역사에서 지우는 작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유엔은 탄압국으로서 미국을 조사하는 위원회 설치를 추진 중이다.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는 이제 차별 철폐의 상징이 됐다. 


흑인 시위는 언론도 바꾸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오피니언 담당 에디터는 “(흑인 시위를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라”는 상원의원의 기고문을 실었다가 사임했다. 일부 시위대의 건물 방화 등을 지적하며 ‘건물도 중요하다(Buildings Matter, Too)’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수석편집장 역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표현의 자유는 미국에서 필수불가결하고 우월적인 가치다. 1791년 제정한 수정헌법 1조를 통해 어떠한 법률로도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서 의견 기사로 언론인이 사임한 것은 이례적이다. 


흑인을 지칭하는 블랙(Black)을 표기할 때 첫 알파벳 ‘B’를 대문자로 바꾸는 언론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인종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인데, 로스앤젤레스타임스·USA투데이·NBC 등에 이어 글로벌 뉴스통신사 AP가 기사 작성 지침을 바꿨다. 100년 전 미국 흑인인권지위향상협회가 흑인의 또 다른 표현인 니그로(negro)에서 ‘n’을 대문자로 바꿔달라며 언론사에 편지쓰기 운동을 벌였는데 이제서야 미 언론계가 화답한 셈이다. 


그런데 미 언론의 반성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국내 일부 언론은 특정 지역·사건을 폄하하는 표현을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폄훼하는 책 <반일종족주의> 내용을 거리낌없이 전달하고 있다. 여성 비하 표현인 ‘○○녀’ 등은 얼마 전까지 신문과 방송에서 일상처럼 접했다. 장애인과 외국인을 조롱하는 표현을 무심코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헌법 21조 제4항은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 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한국 언론 역시 차별과 혐오에서 자유로운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김종훈 논설위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7일(현지시간) 인도 하이데라바드 주민들이 중국과의 국경 충돌로 숨진 군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AP 연합뉴스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은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구는 1위이고 면적은 러시아와 캐나다에 이어 세 번째다. 4만㎞에 달하는 국경선은 14개 나라와 맞닿아 있다. 영토분쟁이 없을 수 없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끊임없이 인접국과 국경분쟁과 협상을 이어왔다. 국경 획정은 1960년대 미얀마, 네팔, 북한, 몽골,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90년대 라오스(1991), 카자흐스탄(1994), 키르기스스탄(1996), 베트남(1999)에서 대략 마무리됐다. 


문제는 러시아와 인도였다. 1960년대 중국과 러시아는 전투까지 벌일 정도로 영토분쟁을 겪었지만 국경을 획정하진 못했다. 두 나라는 소련이 해체된 뒤인 1994년에야 중앙아시아 지역의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우수리강 유역을 포함한 전체 중·러 국경을 획정한 것은 2005년이었다. 중국-인도의 국경은 1947년 인도가 독립하고 이태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정하지 못했다. 1962년 양국이 설정한 LAC(실질통제선)가 국경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3488㎞에 달하는 기다란 LAC는 산악 지형, 소수민족 거주 등으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양국이 70년 넘게 국경을 놓고 싸우는 이유다.


지난 15일 인도 북서부 라다크 갈완계곡 LAC에서 인도 순찰대와 중국군 간에 난투극이 벌어져 인도 군인 20명을 비롯해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투석, 쇠몽둥이질과 같은 육탄전에 의해 희생됐다고 한다. 라다크 지역은 1962년 중국-인도 국경 전투로 수천명이 전사한 대표적인 분쟁지역이다. 이후 양국은 교전 방지를 위해 ‘비무장 경계’에 합의했고, 두 나라 군인들은 총기를 소지하지 않은 채 국경지역을 순찰해 왔다.


중국-인도의 국경 유혈사태는 영토분쟁의 심각성도 보여주지만 대국 간 기싸움이기도 하다. 두 나라는 세계 1·2위의 인구 대국이자 핵을 보유한 군사 강국이다. 인도는 최근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맞서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인도는 미국과 일본이 중심이 된,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의 주요 축이기도 하다. 히말라야에서 맨손으로 벌이는 국경분쟁에 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7일(현지시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도훈 본부장은 대북특별대표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과 한·미 수석대표 협의를 갖고 한반도 정세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한다. 이 본부장의 방미는 전부터 조율돼온 일정이지만,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 와중에서 남북관계 악화를 방지하는 데 초점이 모아지게 됐다. 북한의 대남 공세에는 미국 때문에 남북 합의를 이행하지 못하는 남측에 대한 불만이 포함돼 있는 만큼 한·미 양국이 대북공조의 공과를 점검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17일 담화에서 남측이 “ ‘한·미 실무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물고 북남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바쳐”왔다고 했다. 또 남측이 “첨단무기를 사가라고 하면 허둥지둥 천문학적 혈세”를 바쳤다면서 이 역시 합의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이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번번이 제동을 걸어왔고, 이것이 남북관계 진전을 더디게 해온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올해만 해도 정부는 개별관광 등 독자적 남북협력 방안을 모색했지만 미국은 한·미 공조를 앞세워 이를 막았다. 그 핵심 제동장치가 한·미 실무그룹이다. 이로 인해 비무장지대 내 물품·장비 반입 등이 좌절·지연됐다. 


이번 한·미 협의에서는 북한의 추가 행동을 막는 방안과 함께 새로운 접근법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남측은 맹비난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부드러운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본부장은 이 점에 주목해 미국과 대응책을 협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추가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겠지만 ‘강 대 강’으로 받아치는 것은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고갈 공산이 크다. 당장 한·미 양국 내에서 끓어오르는 한·미 연합훈련 실시 주장도 바람직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대북 경제제재를 1년 더 연장하겠다고 밝혔는데, 제재 일변도의 대북정책이 한반도 긴장만 키운 것 아닌지도 이번 협의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미 실무그룹의 역할도 재점검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가지 않도록 북한도 이제는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 노동신문은 이날 “(연락사무소 폭파는) 시작에 불과하다”며 “(다음 조치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잠수함 등 신무기를 선보일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의 이런 행동은 한·미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것이다. 남북, 미국 모두 냉철하게 상황을 유지하면서 새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폭파로 앙상한 기둥만 남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북한이 지난 16일 폭파한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공개됐다. KBS는 17일 오후 헬기 촬영 영상을 단독보도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로부터 직선으로 16㎞ 떨어진 파주 장단콩마을 2000m 상공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4층 높이의 연락사무소 건물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외벽은 사라진 채 앙상한 기둥만이 간신히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KBS 제공


북한이 전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17일 원색적인 언어로 남북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이날 담화를 통해 6·15정신을 되돌아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화 제안을 “철면피한 궤변”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굴종적인 상대와 더 이상 북남관계를 논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청와대의 대북특사 파견 제안 사실까지 공개했다. “서울 불바다설이 다시 떠오를 수 있다”고도 했다.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대변인 발표문을 통해 금강산 관광지구와 개성 공업지구,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에 군부대를 재주둔시키고 서해상 군사훈련도 부활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북한의 이날 비판은 상궤를 벗어났다.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일방적으로 저버리는 조치를 하고도 남측 정상을 향해 “역스럽다”라는 언사를 동원했다. 특사 제의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외교관례를 깼을 뿐 아니라 그 거절 과정을 모욕적으로 언급했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북한에 대해 ‘몰상식한 행위’ ‘비상식’이라고 비판했다. 당연한 대응이다. 나아가 윤 수석은 “북측의 사리분별 못하는 언행을 감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6월 18일 (출처:경향신문DB)


북한이 예고한 DMZ 내 군대 재주둔은 9·19 군사합의를 파기하는 심각한 사안이다.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을 없애버리는 조치다. 개성 공업지구 군부대 재배치, 금강산 관광지구 시설 철거와 군부대 재배치가 이뤄지면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대화가 단절되는 정도가 아니라 대결의 시대로 후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군사적 도발까지 한다면 한반도는 순식간에 2017년처럼 일촉즉발의 위기로 빠져들 수 있다. 북한은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조치를 중단해야 한다. 


내부 결속용이든, 한국을 추동해 북·미 협상을 촉진하려는 것이든 지난 20년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이 쌓아온 성과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려는 행태는 결코 옳지 않다. 남북이 대결 국면에 접어들어서 북한이 얻을 것은 내부 단속 효과뿐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오히려 “북한은 역시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대북 제재의 명분은 확실해진다.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면 인민의 삶은 더욱 곤궁해진다. 한국 내에서도 대북 교류협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손해볼 것은 북한이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 등 일정을 감안하면 북한의 공세는 계속될 것이다. 당분간 남북 간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북한이 미국을 직접 비난하지 않은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상황관리에 집중하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을 되돌아보고 재점검해야 한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이날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안보실을 포함해 외교안보 전체의 진용을 쇄신하는 방안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일본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죄한다 해도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반대로, 일본이 반성은 제대로 하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배상만 하면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한·일 갈등의 핵심요소인 위안부 문제는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이 전부인 것처럼 인식된 지 오래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짓밟은 위안부 문제를 법적으로만 해결하려는 이 상황은 지독한 역설이자 한·일 모두의 불행이다. 


법은 인간사회의 가치체계에서 가장 하위의 개념이다. 특히 동양적 사고체계에선 가장 정점에 있는 ‘성(聖)스러움’을 인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현실적 의미를 담아 구체화할 때 정의-도덕-예의-법의 순서로 내려온다. 정의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며 도덕은 누구나 갖춰야 할 덕목이다. 예의가 없으면 비난을 받게 되고 법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적 계약에 따라 처벌받는다. 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행동의 최소한일 뿐이다.


도의적 책임은 있으나 법적 책임은 없다는 일본의 주장은 “천벌 받을 짓은 했으나 사람에게 벌 받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인류 보편적 가치 짓밟은 범죄

법적 책임 여부로만 해결 안 돼

시민단체에 휘둘린 정부는 방치

천덕꾸러기 된 위안부 문제

도덕적 우위 회복으로 

뒤틀린 정의 바로잡아야


법적 책임이 없다는 근거를 찾기 위해 청구권협정 문구를 머리칼 쪼깨듯 잘라 해석하는 것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서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반인도적 행위를 자신들이 했다는 사실을 엄중히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다. 한국도 배상이 아니라 이 부분을 명확히 하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뒀어야 한다.


한국이 처음부터 법적 배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는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할 테니 일본은 은폐하지 말고 진상을 조사해 이를 역사에 남김으로써 후세를 교육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인 한국의 의연한 태도에 일본은 더욱 위축됐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위안부 문제 해결 원칙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시민단체와 일부 피해자의 주장과 국민 감정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는 학계와 시민단체가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고 세상에 드러낼 때까지 회피·외면으로 일관해왔다. 이 때문에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용기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의 주도권이 시민단체에 넘어가고 정부가 이들이 주도하는 위안부 운동 방향과 여론 조성에 휘둘리게 된 것은 어쩌면 정부의 업보인 셈이다. 


특히 이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라는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은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노무현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공식 입장을 정하고도 일본과 법적 해석 차이를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이다. 이 결정으로 정부는 한·일관계의 아킬레스건인 청구권협정의 법적 해석을 놓고 일본과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고, 그 결과는 2015년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2015년 합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행을 거부했지만 파기할 수는 없었다. 재협상을 해도 법적 책임 인정과 배상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부가 2015년 합의를 이행도 파기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허공에 띄워놓자 피해자들은 다시 헌법재판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헌재는 2011년 결정 때와는 달라진 태도를 보이며 “이 문제는 위헌심판 대상이 아니다”라고 각하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미해결 상태로 방치하고, 헌재는 골치 아픈 문제를 갖고 오지 말라 하고, 상징적 시민단체의 대표는 국회의원으로서 정계로 진출해버리고, 가해자 일본은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이 위안부 문제를 30년간 끌고온 한국이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는 천덕꾸러기로 만들어놓고 끝낼 사안이 아니다. 지금 할 수 없다면 다음 정부, 앞으로 ‘환골탈태’된 시민단체, 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국민들이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위안부 문제에서 실종돼 버린 한국의 ‘도덕적 우위’를 되찾아 오는 것이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6일 오후 개성 공동연락사무소 청사가 폭파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북한이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했다. 조선중앙TV는 이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완전 파괴하는 조치를 이행했다”고 폭파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2018년 4월27일 남북 정상 간 합의에 따라 문을 연 사무소는 1년9개월 만에 사라졌다. 일방 철거는 엄연히 남북 합의 위반이다. 게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소통과 협력으로 문제를 풀자고 한 지 불과 하루 만이다. 청와대가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 “북측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할 경우 강력히 대응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힌 것은 당연하다.


이날 폭파는 북한이 최근 밝힌 대남 적대선언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3일 담화에서 “머지않아 쓸모없는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 지 사흘 만에 실행에 옮겼다. 앞서 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날 남북 합의로 비무장된 지역에 군대를 투입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북한의 공세가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북한이 언급한 군대 파견 비무장화 지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또 지상·해상·공중 완충 구역 내 군사 활동 재개와 공동경비구역(JSA) 근무병 총기 휴대, 철거된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복구도 거론된다. 


만일 북한이 예고한 대로 개성공단 지역에 군대가 재배치된다면 이는 남북관계의 결정적인 퇴조가 될 것이다. 과거 2003년 12월 개성공단 착공 전까지 이 지역에는 북한의 전차와 자주포, 방사포로 무장한 사단과 포병여단이 주둔했다. 금강산 지역에도 관광특구가 되기 전 잠수정과 전차, 방사포 기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개성과 금강산 지역에서 군대를 빼내 평화지대로 만드는 과정에서 북한 군부가 크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성공단·금강산 지역이 다시 요새화하면 완충지대가 사라져 전방 지역 긴장 고조는 불 보듯 뻔하다. 남북 협력의 상징인 개성과 금강산을 첨예한 군사 대결의 장으로 되돌려서는 안 된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9·19 군사합의 파기다. 이 군사합의는 남북 정상이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한 한반도 평화와 긴장 완화의 가장 중요한 장치다. 그동안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군사합의 파기는 남북이 어렵게 이룬 합의와 신뢰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뿐 아니라 남북을 대결시대로 회귀시킨다. 북한이 군사합의를 파기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이유이다.


북한이 강경 행동에 나선 것은 대북 제재에 코로나19 창궐까지 겹치면서 전에 없는 경제난에 봉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서는 북·미 하노이 핵 담판 실패 후 높아진 내부 불만에 대해 단속을 강화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움직이려는 ‘벼랑 끝 전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 이런 식의 행동은 북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의 모험적 행동은 한·미 양국의 운신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북한은 추가 행동을 멈춰야 한다. 정부도 북한의 돌발적인 군사행동에 대비해 대북 감시·대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 상황을 냉철하게 관리하면서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선거의 공정성, 사법부 독립, 부패 억제 안전장치에 대한 압박을 포함해 민주적 규범과 기준들을 훼손하려는 노력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언론, 법의 지배 그리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다른 기둥들에 대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퍼부은 사나운 언어를 동원한 공격은 이 나라가 다른 정부들을 향해 핵심적인 인권과 자유를 지키라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훼손했으며, 오히려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악용하는 데 활용됐다.”


미국의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지난 3월 발표한 ‘2020 세계자유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 단체가 심각한 어조로 평가한 대상은 남미나 동유럽, 혹은 동남아의 어느 나라가 아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미국이 주인공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지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를 자처하는 프리덤 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국가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점수로 환산해 순위를 매기는데, 미국 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 후진국들을 압박할 때 프리덤 하우스의 평가를 자주 인용해 왔다.


민주주의의 후퇴 징후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최근 벌어진 사건 몇 가지만 봐도 미국 민주주의가 세계의 걱정거리가 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미국에선 야당인 민주당이 오는 11월 동시에 치러지는 대선과 총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안전과 투표권 보장을 위해 우편투표를 확대하자고 주장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여당인 공화당은 한사코 거부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증 혐의로 기소된 자신의 측근 마이클 플린의 유죄 판결이 임박하자 ‘정치판사’가 편향적인 판결을 하고 있다면서 사법부를 수시로 공격한다. 심지어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플린에 대한 기소 취하를 일선 검사들에게 종용해 담당 검사들이 집단 사퇴했다. 그리고 예산 및 권한 남용과 부패를 감시하기 위해 행정 각부에 임명된 감찰관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줄줄이 잘려 나갔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숨진 사건 역시 인종 차별 실태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 사건을 항의하기 위해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 모여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군중을 군경이 무력을 동원해 진압하는 장면도 미국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 공분을 자아냈다.


미국인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해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라는 것이 ‘극도로 자랑스럽다’거나 ‘매우 자랑스럽다’고 답한 비율이 2001년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해법은 단순하다. ‘민주주의의 후원자’를 자처한 그들이 그간 권위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후진국에 해왔던 조언과 요구를 스스로 실천하면 된다. 앞서 인용한 프리덤 하우스 보고서에 나온 선거의 공정성과 사법부 독립, 부패 억제, 법의 지배, 언론 자유 확대를 비롯해 소수자의 권리와 평등 보장 같은 것들이다. 관건은 민주주의의 교사를 자처해온 미국이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생으로 돌아가려는 겸손함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0일(현지시간)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끌어 내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 주변을 주 경찰관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다. AP 연합뉴스


동상은 ‘구리(銅)로 만든 조각상’이다. 그리스 신상이나 불상도 조형의 재료가 구리라면 모두 동상이다. 하지만 철이나 돌, 석고로 만든 인물조각상 역시 동상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동상은 흔히 재질에 상관없이 인물을 빚어낸 조형물을 가리킨다. 중국 간신 진회의 동상이나 전두환의 감옥 동상처럼 악인을 징치하기 위해 만든 동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상은 인물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세운다. 주인공은 거개가 군주, 장군, 선각자와 같은 영웅이다. 그렇다고 영웅이 모두 동상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건립 당시의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담아내야 한다. 미술평론가 맬컴 마일스의 말을 빌리면, 동상은 “과거 권력자의 담론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현재 권력자의 담론”이다. 


동상 건립은 국민의 통합과 일체화의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에 동상 건립이 집중된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서양에서는 20세기를 전후해 동상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에 동상 건립 붐이 일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국민통합을 내세우며 동상건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순신, 세종대왕, 이황, 정약용 등의 동상이 이때 건립됐다. 흔히 동상을 ‘불멸의 신체’라고 한다. 그러나 합의 없이 건립된 동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남산에 세운 이승만 동상은 4·19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수많은 스탈린 동상은 그의 사후 짓밟혔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동상, 사담 후세인 동상 역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서양인의 동상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은 시위대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영국 브리스틀에 있던 17세기 노예상인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은 바다에 던져졌다. 런던의 윈스턴 처칠 동상은 낙서로 훼손됐다. 서양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들이 원주민 학살, 인종차별의 장본인으로 격하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동상 훼손과 함께 역사 왜곡 논란도 거세다. 그러나 ‘권력자의 기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처럼 역사는 새롭게 쓸 수 있다. 동상 역시 ‘불멸의 신체’일 수는 없다.


<조운찬 논설위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통계학적으로 대형사고를 예측하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대형사고 1건이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 29건과 경미한 징후 300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남북관계에 적용하면 최근 북한이 내놓은 대남 조치들은 작은 사고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이전부터 여러 징후가 있었으나 우리가 이를 무시했거나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 대형사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300> 북한의 대남, 대미 강경 선회의 조짐은 작년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나타났다. 작년 4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 결정서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더 이상 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겠다며 한·미 군사연습, 북한탄도미사일 요격시험 등 북한 적대정책을 중단하라면서 연말까지 새로운 셈법을 요구했다.


북측은 블라디보스토크 북·러 정상회담과 평양 북·중 정상회담을 연 데 이어 판문점에서 6·30 남·북·미 정상회동을 갖는 등 여러 가능성을 모색했다. 작년 5월부터 금년 3월까지 17차례 단거리발사체 시험발사를 계속하면서 최소한의 연락채널만 남긴 채 남북대화를 일절 거부하고 10월 초 북·미 실무회담 결렬을 선언하며 북·미 대화도 완전히 중단했다.


북측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경축사를 비난하며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평통은 한·미 군사연습, 첨단무기 도입을 지속하며 ‘남북군사합의’를 위반했다면서 남측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단언했다. 작년 11월 초 우리 측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청한 사실을 공개하며 “이치도 모르는 상대”라면서 거부했다.  


<29> 김 위원장이 정한 시한이 다 되도록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내놓지 않자, 연말에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고 미국과의 대치가 장기성을 띠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이때 이미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파국이 예고됐었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떨던 3월3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은 청와대가 북한 군사훈련을 문제 삼은 데 대한 불만을 나타냈지만 아직 본격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북한은 코로나19 사태의 진정과 남측의 4·15 총선 결과를 기다리며 대남 비난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4월 하순 한·미 연합공중훈련, 해병대 연례상륙훈련이 실시되자 전염병 사태로 전 세계가 군사훈련을 자제하고 있음에도 공격형 훈련을 실시했다고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북한당국이 아니라 우리민족끼리, 통일신보 등 선전매체들이 나섰다. 


마침내 6월4일 김여정이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며 대남정책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김여정 6·4 담화를 신호탄으로 북측은 남측을 ‘적’으로 규정한다는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 모든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한다는 대남사업부서 사업총화 회의 지시를 잇따라 내놓았다. 김여정의 6·13 담화에서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와 군사행동 가능성을 언급했다.


<1> 여러 징후들과 작은 사고들로 볼 때 한반도 정세를 2017년 상황으로 되돌릴 대형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측이 예고한 조치들로는 이미 실시한 통신연락선 전면차단 외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개성공단 철거 및 군부대 배치, 9·19 군사합의서 폐기 등이 있다. ‘대적 행동’을 넘겨받은 북한군 총참모부가 시행할 군사도발로는 해안포 봉인 해제 및 사격훈련,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복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무기반입,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등이 예상된다.


이제 북측 화살은 미국을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리선권 외무상은 “전략적 목표는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보다 확실한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정근 미국국장도 “비핵화는 개소리”라며 “힘을 계속 키울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여정이 넘긴 대적 행동권의 주체가 전략군이 아닌 총참모부인 걸로 볼 때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같은 북·미 합의를 깨는 조치까지는 당장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오는 11월3일 미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북측이 북·미 합의를 넘어선 전략도발을 저지른다면 ‘양치기 소년’이 되어 북·미 대화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대남 압박 수위를 높인다고 우리 정부가 북측에 끌려다닐 걸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대북전단 살포금지법은 정부와 여당이 준비해왔던 것이라 북측 요구에 호응한 것뿐이다. 싱가포르에서 김 위원장이 말한 대로 ‘눈과 귀를 가린 그릇된 관행들’에서 벗어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이제라도 ‘우리 민족끼리’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20주년 더불어민주당 기념행사에 남북 정상의 만남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20돌을 맞아 “나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000만 겨레 앞에서 했던 한반도 평화의 약속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며 “오랜 단절과 전쟁위기까지 어렵게 넘어선 지금의 남북관계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난관이 조성되고 상황이 엄중할수록 6·15선언의 정신과 성과를 되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20년 전 오늘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대결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 남북관계는 대결 시대로 회귀할 것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20주년 행사들도 빛이 바랬다. 지난해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는 남측에 연대사를 보내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함께 열자고 했지만, 올해 북측은 6·15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착잡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6·15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해왔지만 최근 2년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언급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남북관계가 이렇게 된 데는 북·미관계가 당초 기대와 예상만큼 풀리지 않으면서 북한의 초조함이 커졌고, 그 원망이 남쪽으로 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6·15선언 20주년을 맞아 재확인할 것은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이다. 6·15선언의 첫째 항목은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이다. 이는 ‘통일’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평화를 자주적으로 일구기 위해서는 남북 간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 신뢰는 남북이 해왔던 말과 약속을 지키는 데서 시작되지만, 북측은 물론 남측도 제대로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이번 남북 갈등의 불씨가 된 대북전단 살포 중단도 남북 간 합의에 포함돼 있었다. 문 대통령은 역대 정부의 남북합의가 “정권과 지도자가 바뀌어도 존중되고 지켜져야 하는 남북 공동의 자산”이라고 했다. 이 합의를 뒷받침하려는 노력에 정치권과 우리 사회가 게을렀던 점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북한을 향해 “소통을 단절하고 긴장을 조성하며 과거 대결의 시대로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면서 “어려운 문제들은 소통과 협력으로 풀어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평범하고 진부한 듯 보이지만, 정공법이다. 현 상황에 답답한 것은 남북이 마찬가지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제안에 호응하길 바란다. 남북이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할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고 실천하자는 제안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올 6월은 매우 특별한 달이다.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이고, 25일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다. 70년 전인 1950년, 강대국들 간의 동서냉전이 그들이 갈라놓은 한반도에서 6·25전쟁으로 터졌다. 우리 민족은 대량 학살당하고 ‘불신과 대결’의 질곡 속에서 반세기를 살아오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화해와 협력’으로의 대전환을 이뤄냈다.


오늘 우리는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맞는다. 6·15 공동선언의 의의는 무엇이며,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정책적 시사점은 무엇인가? 올 6월 들어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6·15의 핵심적인 의의는 공동선언 제1, 2항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남북한은 한반도 통일문제의 ‘주인’으로서 서로 협력하여 ‘자주적’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해나가자. 둘째,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길이고, 통일은 ‘과정’으로 이뤄나가되, 현재의 통일단계는 ‘연합제’ 단계이다. 이러한 공동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가자는 것이었다. 


위의 의의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고통받아온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이 협력해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 경쟁자인 남북한 간에 통일의 현주소와 방안에 대해 공동인식과 합의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동인식과 합의 없이는, 민족 화해와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 정착 등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논의하기도 어렵고 합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불신·대결에서 화해·협력으로 

2000년, 남북의 역사적 대전환 

이후 2018년 9·19군사합의까지 

믿음 위에 이뤄진 서로의 ‘약속’ 

근본적 열쇠는 언제나 ‘신뢰’다


한편 한반도 문제는 민족문제와 국제문제가 결합되어 있어 자주성(민족주의)과 국제성(국제주의)의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2000년 6월 남북 지도자들은,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강대국 이익 중심의 질서임을 인식하면서 통일문제 등 우리의 운명은 당사자인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간다는 ‘자주’의 원칙에 합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최초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을 6·15의 가장 중요한 의의와 성과로 꼽기도 했다.


김 대통령에게 있어 자주는 ‘민족 대 외세’라는 기계적인 이분법에 얽매인 ‘배타적 자주’가 아니라, ‘민족 공조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국제공조를 확보’해나가는 ‘열린 자주’였다. 회담 초기에 배타적 자주를 주장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결국 열린 자주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6·15가 현재 우리에게 주는 정책적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6·15 이후 역사상 유례없는 폭과 깊이로 진행된 남북관계 개선, 한반도 전쟁 위협 완화와 평화프로세스는 다름 아닌 위에서 설명한 6·15의 ‘약속’ 위에서,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러한 약속을 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믿음’ 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역사적인 6·15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최근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와 북한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남북관계가 문재인 정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북한은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면서, 정상 간 핫라인, 군사통신선 등 남북 간 모든 통신선을 끊었다. 남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산산조각 났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번 대남 적대행동은 총참모부의 군사적 행위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북한은 왜 이렇게 강하게 나오고 있는가? 추측컨대, 북한 지도부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강경파들의 리비아식 비핵화 요구를 보면서 그들이 북한 정권교체의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지난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태양절 참배에 불참하자, 외부 세계가 이를 김정은 사망, 김여정 후계자, 북한의 급변사태, 작계 5029 이행 준비 등으로 이어가면서 상황을 북한 정권교체 쪽으로 몰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탈북민 단체까지 나서 북한 지도자 및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 대북전단을 더욱 과감하게 살포했다. 이에 북한은 전단 살포 중지를 약속한 판문점선언의 당사자인 문재인 정부가 전단 살포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고 보고, 그동안 북한 나름대로 쌓였다고 주장해온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북한도 한반도 문제의 해결 당사자이고,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합의서의 당사자라는 점이다. 남한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우선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정반대로 나오고 있어 크게 실망스럽다. 북한이 군사적 강공으로 나온다면, 남한 사회에서 대북 적대감이 어떻게 증폭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현재의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 남북 정부 사이에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6·15시대를 열 수 있었던 신뢰, 10·4 정상선언,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9·19 군사합의서를 가능케 했던 그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민족 자주의 원칙’을 재인식하고 공유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제대로 진전시키지 못하면 우리 민족이 한반도의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훈의 실천을 주도하고, 북한에도 이 교훈을 실천토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조속히 비공개 대북 특사를 파견해 남북 지도자 차원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나설 것을 기대한다.


<백학순 | 세종연구소장>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여정 북한 제1부부장의 대북전단 살포 비난 담화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거, 대남 군사행동까지 시사하는 담화가 연일 쏟아지고있는 가운데 14일 판문점으로 향하는 길목인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가 이동 차량이 적어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북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3일 담화에서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며 “곧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머지않아 쓸모없는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며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고도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쌓아올린 남북관계를 아예 없던 일로 되돌리겠다는 ‘결별 예고’이자 파국 압박이다.  


지난 열흘간 북한은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다가 급기야 군사행동까지 시사하는 단계로 남북관계를 몰아갔다. 마치 ‘파국 시나리오’라도 정해놓고 움직이는 듯 일사불란하다. 지난 4일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는 북한의 담화가 나오자 통일부는 곧바로 대북전단 규제방안을 발표했다. 이어 대북전단을 살포해온 탈북인 단체 2곳을 수사 의뢰했다.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대북전단 살포행위 엄정대응 방침을 내놨다. 대북전단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일면 타당하다고 본 정부가 이례적일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남북 간 통신 연락선을 모두 단절하는 등 강수를 연발하면서 대화 여지를 아예 차단해왔다. 왜, 무엇 때문에 북한이 이토록 과잉행동을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15일은 남북 정상이 해방 후 처음으로 만나 남북 화해와 협력을 다짐한 6·15공동선언 20주년이다.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상호 신뢰를 쌓는 ‘이정표’를 세운 날을 함께 기리기는커녕 결별을 위협하는 현실은 실로 유감스럽다. 특히 2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특사로 방한해 ‘화해의 전령’ 역할을 했던 김여정 부부장이 대남 압박을 진두지휘하는 건 더 안타깝다. 남북행사 때마다 예의를 갖추며 남측 인사들을 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일견 북한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세 차례나 열고도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등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의 대북 제재에 갇혀 있는 남측 정부에 실망감이 클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 초 ‘북·미관계와 무관하게 남북협력을 증진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공교롭게도 코로나19 사태로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제재 장기화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탓에 쌓인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미국보다 부담이 덜한 남한을 압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북한이 당면한 어려움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이런 방식은 곤란하다.  


청와대는 14일 심야에 NSC를 긴급 소집해 대책을 협의했다. 만일의 사태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다. 지금과 같은 북한의 난폭한 언행은 남북화해를 열망하는 여론을 악화시키고 국제사회의 대북 피로감만 키울 뿐이다. 북한은 더 이상의 대남 압박은 멈춰야 한다. 지지부진한 남북합의 사항 중 못마땅한 게 있다면 현 상황에서 가능한 것부터 실천하며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 게 정도이지 않겠는가.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만들어 북한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6월 3일 (출처:경향신문DB)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지 플로이드는 코로나19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4000만명이 넘는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식당 겸 나이트클럽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다 실직했다. 운명의 날인 지난 5월25일, 그는 위조지폐로 담배를 사려 했다. 흉기를 지니지도 않았다. 경찰을 위협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은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그의 목덜미를 무릎으로 8분46초간 눌러 살해했다. “숨을 못 쉬겠다”고 10여차례나 애원했건만 허사였다. 키 193㎝·몸무게 100㎏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일까. 흑인이어서일까. 아니면 과거 무장강도 전과 때문일까. 이 어느 것도 경찰의 야만적인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관행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의 죽음 이후 미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시위는 ‘내가 다음 희생자’라는 공포의 표현이자,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항의의 몸짓이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제도화된 폭력인 공권력의 실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경찰의 임무가 시민 보호와 봉사가 아니라 잠재적 위험 제거라는 인식과 관행이 오래전부터 자리 잡았다. 흑인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됐을 뿐이다. 경찰폭력의 뿌리는 ‘노예 사냥’ 시절로 거슬러간다. 하지만 플로이드를 비롯한 일련의 사망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30년 전 시작된 ‘경찰의 군대화’ 계획이다. ‘1033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미 국방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걸프전 이후 남는 군 장비를 경찰 등 다양한 법집행기구에 활용할 목적으로 도입했다. 1997년 국방수권법(NDAA)에 포함되면서 공식화됐다. 그 후 ‘테러와의 전쟁’이 더해지면서 2014년까지 51억달러 규모의 군 장비가 미 전역 8000여 법집행기구에 전달됐다. 존재가 알려진 계기는 2014년 8월 ‘퍼거슨 사태’였다. 비무장 10대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관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지면서 미주리주 퍼거슨은 혼란의 도가니가 됐다. TV화면에 잡힌 경찰은 군인을 방불케 했다. 퍼거슨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군 장비로 무장한 경찰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군인처럼 행동했다. 시위대는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경찰의 군대화는 폭력시위를 자극했을 뿐 아니라 시민을 적으로 여기게 했다. 플로이드 죽음이 촉발한 시위 현장의 경찰도 마찬가지다. 소속을 알 수 없는 요원들이 중무장을 한 채 시위 현장 곳곳에 배치돼 논란을 빚었다.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이 재조명받은 것도 눈에 띈다. BLM은 2012년 2월 10대 트레이번 마틴을 살해한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맨이 무죄 평결을 받은 데 항의하기 위해 시작됐다. 경찰의 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살해되는지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번 시위 현장에서 “숨을 못 쉬겠어”와 함께 BLM 구호가 울려퍼진 것은 이 운동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SayHerName)’ 운동의 존재도 확인됐다. 경찰에 의해 숨진 흑인 여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다. 2015년 7월 텍사스의 한 교도소에서 사망한 샌드라 블랜드의 죽음이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 블랜드는 숨지기 사흘 전 단순 신호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된 뒤 교도소에 수감 중 자살했다. 체포 과정과 죽음, 인종차별적인 경찰폭력 모두가 흑인들의 분노를 유발시켰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무능한 지도력을 재확인시켜준 계기가 됐다. 그는 이번 시위가 폭동으로 변질된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시위대를 “폭력배”라고 부르고, 배후에 극좌 ‘안티파’가 있다고 했다. 시위 진압을 위해 연방군까지 동원하려 했다. 퍼거슨 사태와 볼티모어 폭동을 계기로 축소된 1033 프로그램을 확대시킨 이도 트럼프다. 일부 몰염치한 백인들이 플로이드 죽음을 조롱하기 위해 ‘플로이드 챌린지’ 영상을 배포하며 인종갈등을 부추겼지만 트럼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플로이드가 숨진 미니애폴리스 시의회가 경찰조직을 해체하기로 하고, 민주당이 경찰개혁법안을 발표하는 등 경찰폭력을 막기 위한 긍정적인 신호가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가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있어 결과를 예측하기 쉽지 않다. 


플로이드 죽음의 아이러니는 피해자 플로이드와 가해자 쇼빈이 같은 곳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한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교류했을 가능성은 없다. 근무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플로이드는 주중에, 쇼빈은 주말에 일을 했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면, 이들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찬제 논설위원 helpcho65@kyunghyang.com>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백악관 앞 라 파이예트 광장에서 시위대를 막기위해 대기중인 경찰과 방위군. AP 연합뉴스


미국 백악관 북쪽에는 좁은 도로와 접한 공원이 있다. 라파예트 광장(Lafayette Square)이다. 프랑스 후작으로 의용군을 이끌고 미 독립전쟁에 참전한 드 라파예트의 이름을 땄다. 공원 네 모퉁이에는 라파예트를 비롯해 독립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운 외국인 영웅 4명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 조경의 아버지로 불리는 앤드루 잭슨 다우닝이 공원으로 개발했다. 그 전까지는 경마장, 묘지, 동물원, 노예시장, 군대 야영지 등으로 쓰였다. 백악관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라파예트 광장은 ‘시위 1번지’로 유명하다. 백악관 앞 시위는 그 상징성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시위객들이 몰려든다. 과거 유신정권과 광주민주화항쟁 때 한국의 재야인사·재미교민들도 이곳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40년째 비닐움막을 치고 반핵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다. 윌리엄 토머스와 콘셉시온 피시오토 등은 1981년 6월부터 반핵시위를 벌이기 시작해 죽기 전까지 이곳을 지켰다. 반핵시위는 이들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불법 노숙이라는 이유로 비닐움막이 철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후 이곳이 인종차별 철폐 시위의 ‘메카’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출한 17분간의 ‘포토 쇼’ 이후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지난 1일 경찰은 트럼프가 광장 건너편 세인트존스 교회로 가도록 길을 터주기 위해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최루탄 등을 쏴 강제해산시켰다. 그리고 이튿날 백악관 둘레에 높이 2m가 넘는 철조망이 둘러졌다. 국립공원관리청은 10일까지 라파예트 광장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트럼프가 재갈을 물린 것이다. 보다 못해 민주당 지도부가 나섰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가 트럼프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광장을 열라고 요구한 것이다. 라파예트 광장이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 트럼프의 운명은 몰락하기 시작할지 모른다. 광장은 그렇게 무섭다.


<조찬제 논설위원>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한이 9일 판문점과 연락사무소, 군 통신선, 청와대 핫라인 등 남북 간 모든 연락채널을 단절했다. 북한은 또 “대남 업무를 대적사업으로 전환”한다며 남측을 ‘적’으로 규정했다. 대북전단 살포와 이에 대한 남측 당국의 대응을 비판해온 북한이 남북관계 단절을 위한 실행 조치에 착수한 것이다. 북한의 조치는 남북관계를 2018년 이전의 험악했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북한은 진정 남북대결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연락채널 단절이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의 첫 단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추진 중이라는 사업계획에는 이미 공언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개성공단 완전 철거, 9·19 남북군사합의 폐기 등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연락사무소와 남북 군사합의서는 문재인 정부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주요 성과물이다. 이를 폐쇄·폐기하겠다는 것은 지난 2년반의 남북관계를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 된다. 북한은 최근 대남 압박조치들을 주민들이 보는 노동신문에 게재하고, 군중집회까지 열고 있으니 당분간 태도를 돌릴 가능성도 낮다. 대남 군사행동에 나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행동은 한반도 평화를 해칠 뿐 아니라 남북화해를 지지하는 남측 여론까지 등 돌리게 할 수 있다. 북한은 더 이상 대남 압박을 멈추고 문제해결을 위해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북한의 대남 압박은 북·미 대화를 촉진하려는 한국 정부의 힘만 빼는, 북한으로서도 백해무익한 행동이다.


북한이 남북 간 모든 통신 연락채널을 폐기한다고 밝힌 9일 경기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보이는 북한 초소에서 북한군이 남측을 바라보고 있다. 파주 _ 연합뉴스


정부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한편 사태악화의 원인이 된 대북전단 살포 문제에 비상하게 대응해야 한다. 대북전단은 북한에 대한 극도의 증오·저주를 담고 있으며, 북한 지도층을 모욕하기 위해 합성한 저질 사진이 실린 적도 있다. 이런 전단까지 ‘표현의 자유’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일부 탈북인 커뮤니티에서는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자며 페트병·풍선에 코로나19 환자들이 사용하던 물품을 넣어 보내자는 논의가 공유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발상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하루빨리 이들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보수세력은 정부의 전단 규제 움직임에 대해 ‘대북 굴종’이니 ‘북한 하명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때부터 경찰관직무집행법에 의거해 대북전단 살포를 막아왔으며 대법원도 이를 정당한 직무집행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대북전단 살포를 규제하기 위한 입법 시도도 전부터 있었던 만큼 ‘하명법’ 운운은 당치 않다. 대북전단 살포는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2014년 10월 북한군은 남측에서 띄운 대북전단 풍선을 향해 고사총 10여발을 쏜 바 있다. 탈북민 단체들이 오는 25일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하면 그런 일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에 여야가 의견을 달리할 수 없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일본인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은 관광객 정도다. 이곳에 살면서는 오히려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항공권 발급시간이 10초 지났다고 예약한 비행기 대신 다음 항공편 구입을 허리 숙여 알려주고, 태풍으로 철로가 끊겨 숙소에 전화하니 상냥하게 위약금 청구서를 보내온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이 조금씩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주문 마감시간에서 1분이 지났다고 추가주문을 받지 않는 식당 주인이나, 곱빼기 회덮밥을 보통으로 잘못 만들었음을 알고는 그대로 버리는 주방장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일본인 마음에는 무엇보다 규칙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에는 길이 2m를 조금 넘는 횡단보도들이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는 보행자를 위한 것이라며 차가 없으면 건너는 서구 등과 다르다. 사진은 도쿄 분쿄구에서 지난 7일 촬영했다. 이범준 기자


일본의 코로나19 대응이 실패라는 근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연구 결과 코로나19를 옮기는 시기는 대체로 증상 발현 이틀 전부터 증상 이후 엿새까지다. 일본에서는 체온 37.5도가 나흘 동안 지속돼야 검사 신청 대상이고, 검사를 받으려면 이틀이 더 걸린다. 전파력이 사라진 다음이다. 일본 정부는 감염을 거의 막지 못했다. 최근에야 검사 기준을 풀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6월 하루 PCR 검사 수는 많은 날이 3221건, 적은 날은 1276건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날 때까지 검사가 극적으로 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일본인 친구가 봄부터 말했다. 규칙을 뒤집는 일이 일본에서는 어렵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이유로 2015년 메르스 경험을 꼽는다. 당시 한국에서 186명이 감염돼 38명이 숨졌다. 일본은 환자가 없었다. 정작 메르스에 바탕을 두고 규칙을 만든 곳은 일본이다. 치사율 35%인 메르스 같은 상황에 대비해 PCR 검사를 억제했다. 중증으로 발전하면 치료해 의료붕괴를 막고 목숨을 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전파력은 강하지만 치사율은 낮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한국은 드라이브 스루를 고안해 검사에 나섰고, 이태원 감염에는 신속하게 익명검사를 시작했다. 일본은 이제야 드라이브 스루 검사 매뉴얼을 시험하고 있다. 


일본인의 계획 세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 변호사단체 회장단 선출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임기 2년 치 이사회 날짜를 이날 잡았다. 다다음해 선약들이 있어 맞추는 데 한참 걸렸다. 은행에서는 계좌개설을 설명하며 수천쪽짜리 매뉴얼을 올려놓았다. 대신 경험하지 못한 일, 준비하지 못한 일에 취약하다. 긴급재난지원금도 한국은 2주 만에 97%가 받았다. 일본은 경제 타격이 가장 크다는 삿포로시 주민도 70%가 지난주까지 받지 못했다. 준비 없이 지원금 온라인 신청을 받겠다고 했다가 공무원들이 신청서를 출력해 재입력하는 일도 있었다. 많은 곳에서 온라인 접수를 중단했다. 


19세기 변방국가 일본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은 신중한 태도가 감염병 시대를 맞아 단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의 일관성은 한국인의 유연성과는 다른 여전한 장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까지 지켜만 보는 태도다. 일본헌법 12조는 국민에게 말한다.“이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자유 및 권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은 부단히 노력하여야 한다.” 권리나 자유는 주장·행사하지 않으면 사라지므로, 국민 스스로가 정부의 침해에 맞서라는 선언이다. 때로는 신중도 병이다.


<이범준 사회부 기자>

'경향 국제칼럼 > 이범준의 도쿄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시마를 생각한다  (0) 2020.09.02
대화를 위한 일본어  (0) 2020.08.05
신중함이라는 병  (0) 2020.06.10
개인의 죽음  (0) 2020.05.13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북한 노동신문이 7일 탈북민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규탄하는 각계의 반응을 보도했다. 사진은 마스크를 쓴 채로 노동신문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연못무궤도전차사업소 역전대대 노동자들. 노동신문 홈페이지 캡처. 연합뉴스


북한이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문제를 들어 남북관계 단절까지 언급하는 등 연일 격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적은 역시 적” “갈 데까지 가보자”는 극언까지 나왔다.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통일전선부는 지난 5일 대변인 담화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적한 내용들을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남측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방치할 경우 취할 조치로 거론한 개성공단 완전 철거, 연락사무소 폐쇄, 남북군사합의 파기를 실행에 옮길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돼온 남북관계가 2년 반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지극히 유감스러운 상황 전개다. 


북한이 갑자기 이처럼 격한 태도를 보이는 배경과 의도는 분명치 않다.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핵 협상을 둘러싸고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남북정상회담을 세차례나 열고도 미국의 대북제재 등을 해소하지 못한 남측의 역할에 실망감을 표시한 것은 분명하다. 북한 선전매체가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와 북·미협상의 선순환’ 기조에 대해 “성격과 내용에서 판판 다른 남북관계와 조미관계를 억지로 연결시켜 ‘선순환관계’ 타령을 하는 자체가 무능의 극치”라고 한 데서 이런 인식이 보인다. 핵 협상을 진전시켜 경제개발을 촉진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은 만큼 북한으로서는 답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측을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한 문제 해결 방식이 아니다. 남북연락사무소와 남북군사합의는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이 거둔 최대 성과물이다. 이런 장치가 파기된다면 남북화해 기조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위험으로 몰아넣는 대남 압박을 중단해야 한다. 


정부도 상황을 관리하면서 대북 접근 방식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과 협상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한편 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대북 정책과 협력사업을 모색해야 한다. 탈북자 단체는 한국전쟁 70주년인 오는 25일 대북전단 100만장을 뿌리겠다고 한다. 탈북자 단체의 전단은 북한에 대한 극도의 증오·혐오 표현을 담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납하기 어렵다. 정부는 ‘북한 눈치 보기’ 비판에 굴하지 말고 대북전단 규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 1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대북전단 살포가 남북관계를 훼손하거나 주민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정치권도 진영을 떠나 이 문제 해결에 협력해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