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코로나19의 역유입을 막는다며 한국인들의 입국 절차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산둥성 웨이하이시가 지난 25일부터 한국·일본에서 오는 사람들을 14일간 강제 격리한 데 이어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푸젠성 등도 한국발 입국자에 대해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창춘에서는 재중동포를 자가 격리시킨 뒤 집을 봉인했는가 하면 상하이에선 중국 주민들의 집단민원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이는 지방정부가 하는 일이며, 한국인들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전 협의도 없이 입국 절차를 강화한 중국 측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초기부터 줄곧 냉정하게 대처해왔다. 중국 후베이성에서 오는 모든 외국인에 대해 입국을 금지했을 뿐이며, 지금도 중국과 홍콩, 마카오에서 들어오는 내·외국인은 국내 연락처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만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강력한 추가 조치를 촉구하는 야권의 압력을 감내하며 냉정 대응 기조를 견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이 한국 정부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한국인들에 대해 입국 조치를 강화한 것은 상호주의 위반이다. 특히 다른 나라 입국자에 비해 1주일이나 더 긴 한국인 입국자에 대한 격리 기간과 한국인만을 위한 전용 통로 개설, 그리고 중국인들의 집단적인 한국인 경계 등은 차별이다. 한국을 깔보는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오만한 처사이다. 강경화 외교장관이 2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통화하면서 과도한 조치에 우려를 표명한 정도로는 대응이 부족하다. 


중국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장본인이다. 한국이 중국 내 상황에 맞춰 객관적으로 대응했듯 중국도 사실에 근거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한국인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가 시기상조라고 했다. 왕이 외교부장이 강 장관에게 “감염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중·한 우호 관계가 더 깊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 진심이라면 중국은 한국인에 대한 과도한 조치를 철회해야 한다. 중국 시민들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행위도 막아야 한다. 이를 지방정부의 일이라며 방관하는 태도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혹여 한국발 승객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가 확대된다면 한·중관계를 거꾸로 돌리는 심각한 사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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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흑사병이 돌자 베네치아는 항구를 닫았다. 정박하려는 배들은 선상에서 검역당국의 검사를 받고 허가를 받아야만 입항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40일간 항구 밖에서 격리되었다. 검역소(quarantine)는 이탈리아어로 ‘40일간’을 뜻하는 quarantina에서 기원한다. 오늘날에는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검역소라는 의미뿐 아니라 격리, 교통 차단 등 다양하게 쓰인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부쩍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자 당국에서는 ‘코호트 격리(cohort quarantine)’를 통한 집중관리에 나섰다. 코호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360~800명으로 구성된 군대 세부조직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학에서는 같은 시기에 특정한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의 집단을 일컫기도 한다. 코호트 격리는 환자와 의료진을 동일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리를 통해 전염병을 관리하는 것이다. 집중관리로 전염병의 확산 위험을 줄이는 조치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할 때 대전 대청병원을 시작으로 전국 10여개 병원에서 운영된 바 있다. 당시 의료진은 메르스와 싸워야 할 뿐 아니라 환자도 다독여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최근 부산 두 곳의 요양병원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추가로 코호트 격리가 이뤄졌다. 요양병원 특성상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자가 많은 상황에서 종사자 가운데 환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코호트 격리가 고통인 이유는 외부와의 강제적인 차단 때문이다. 범죄자를 교화시설에 가두는 것이 형벌인 까닭은 격리를 통해 자유를 빼앗기고 세상과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리는 법과 절차에 따라 최소한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중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26일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 사는 우리 교민의 아파트 문과 벽에 봉인 딱지가 붙는 일이 발생했다. 아파트 단지 주민위원회가 교민이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한 것이다. 주민위원회는 “14일 뒤 문을 열어주겠다” “음식은 사흘에 한 번씩 주민위원회를 통해 배달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유사한 일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도 발생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와 이기심이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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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2월26일 (출처:경향신문DB)


세계보건기구(WHO)는 1948년 창설 이래 세계 시민들의 건강과 보건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다. 천연두와 결핵, 에이즈, 에볼라 바이러스 등 전염병뿐 아니라 노화, 식품 위생, 영양 문제까지 활동분야도 다양하다. 특히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에는 세계보건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대처에서 WHO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WHO는 지난해 말 늑장대응으로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실패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지난달 23일 괴질이 중국 우한에서 확산하는데도 국제적 비상사태 선포를 거부했다. 28일에는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고까지 말했다. 중국 내부에서 당국의 초기대응 실패를 지적하던 때였다. 그러다 30일 뒤늦게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중국이 아닌 주변의 다른 나라들의 문제 때문”이라고 중국을 옹호했다.


WHO 국제조사팀 파견도 마찬가지다. 전염의 쓰나미가 몰려오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2월9일에야 국제조사팀을 보냈다. 중국이 발병을 처음 보고한 지 한 달 반, 국제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한 지 열흘이 지난 뒤였다. 더욱이 조사팀은 베이징, 광둥성, 쓰촨성을 방문하면서 정작 진원지인 우한을 빼놓았다. 비난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방문했다. 지난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회견이 화룡점정이었다. WHO는 우한지역의 병상 부족과 열악한 치료 실태에는 눈을 감았다. 대신 “중국이 특별하고 역사상 가장 야심차고 민첩한 조치를 했다”면서 “전 세계가 당신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가 중국의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골적이고 불공정한 중국편들기다.


2017년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으로 WHO 수장에 올랐다. 중국은 10년간 600억위안(약 10조원)을 WHO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그를 지원했다. 국제 청원 사이트인 체인지(www.change.org)에는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인터넷청원이 늘고 있다. WHO가 ‘Woo Han Organization(우한기구)’이라는 말도 나온다. WHO는 지구인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 중국이나 우한만의 대변인이 아니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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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두 국방장관(오른쪽)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회담을 마친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워싱턴 _ EPA연합뉴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정경두 국방장관과 회담한 후 기자회견에서 “한·미 양국의 합참의장이 신종 코로나에 관한 우려로 (3월 초로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훈련에 관한 사항은 양국 합참의장끼리 협의해 국방장관에게 보고해 결정하는데, 이르면 주내에 결론이 날 수 있다고 한다. 한·미가 방위비 분담금을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도 연합훈련 실시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을 모은 것이다. 양국의 결정을 환영한다. 


이번 연합훈련 축소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다. 한국군은 확진자가 18명에 이른 데다 2차 감염 가능성이 있어 야외훈련을 전면 중지한 상태다. 주한미군도 대구에 거주하는 군 가족 1명이 확진자로 판명돼 대응 단계를 높였다. 또 3월 연합훈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진행하는 지휘소연습(CPX)이지만 미 본토나 주일미군 기지의 일부 지상 장비와 항공기도 훈련에 참가해왔다. 한국군이나 주한미군 모두 정상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데 원래 규모대로 훈련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양국은 훈련을 축소·연기·취소하는 방안을 모두 검토해왔다. 미국은 이번 훈련을 축소하더라도 꼭 실시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미 들여온 장비가 있는 데다 계획된 훈련을 연기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때에 한·미 양국군 장교들이 밀폐된 지하벙커에 모여 훈련하는 것은 위험하다. 북한도 지금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제사회에 예방약품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한·미가 일단 연합훈련을 하면 북한도 대응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가 굳이 훈련을 실시해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훈련을 연기해 경색된 북·미, 남북 관계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연기한다고 당장 북·미관계가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와 대화 모멘텀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미 회담 답보에 불만을 품고 있는 북한이 연합훈련을 빌미 삼아 군사적 행동에 나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남측으로서도 개별 관광을 추진하려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한·미 연합훈련의 축소를 넘어 연기함으로써 그 단초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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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올림픽은 어떻게 될까요?” 지난주 만난 일본인 기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얘기다. 코로나19 여파로 해외에서 선수나 관객들이 오겠냐고 했다.


요즘 일본 정부나 언론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5개월 남은 도쿄 올림픽 개최 문제다. 지난달 30일 한 인터넷 사이트가 ‘도쿄 올림픽 중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자 ‘가짜 뉴스’ 취급하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지난 주말 ‘소동’을 봐도 그렇다. 영국 집권 보수당 소속 런던시장 후보가 트위터에 도쿄 대신 런던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한 게 ‘불씨’가 됐다. 일본 언론들은 발언 내용을 보도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터넷 여론도 들끓었다.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해 요코하마항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이 영국 선적임을 들어 “너희 배나 가져가라”고 분노하는 이도 있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코로나19 확산이 멈추지 않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 대응에 불신이 커진 때문이다. 24일 현재 크루즈선 감염자는 691명으로, 전체 승선자의 20%에 육박한다. 일본 열도 전역에서도 감염자가 계속 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많다. 코로나19의 국내 유입을 막는 ‘미즈기와(水際·물가) 대책’에만 집중하다 국내 유행 가능성을 소홀히 했고, 크루즈선의 해상 격리에만 신경 쓰다 선내 집단감염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음성 판정을 받고 하선한 승객의 감염이 잇따라 확인되는 등 검역에 구멍이 뚫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각료 3명이 코로나19 정부대책회의를 빠지고 지역구 행사를 챙긴 것도 비난을 샀다. 아베 총리가 ‘대책본부 8분 출석’ 이후 ‘언론사 간부들과 3시간 회식’을 한 것도 입방아에 올랐다. 정권 스캔들을 추궁하는 야당을 향해 “이 와중에”라고 역공하던 아베 정권도 결국 ‘보여주기식 쇼’를 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도쿄 올림픽 취소’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는 ‘올림픽, 취소되나? 과학자들, 올림픽 개최 불가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아베 정권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다. 도쿄 올림픽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 소비세 인상 등으로 주춤하고 있는 경제를 부양하고, 각종 스캔들로 흔들리고 있는 정권 기반을 다지길 바라왔기 때문이다.


유념할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아베 정권이 도쿄 올림픽 성공에 집착하다가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정치적 판단이 개입하면서 사태를 키운 것이다.


아베 총리는 7년 전 도쿄 올림픽 유치 연설에서 2011년 원전 폭발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福島)에 대해 “언더 컨트롤”(통제하)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내달 26일 시작되는 올림픽 성화 봉송을 후쿠시마현에서 시작하는 등 도쿄 올림픽을 ‘부흥올림픽’으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후쿠시마의 피난지역은 아직도 안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주민들도 많다. 후쿠시마든 코로나19든 ‘언더 컨트롤’이라는 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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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문제는 그 중요성과 달리 일반의 관심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발표와 뉴스만으로는 그 내막을 파악하기 어렵다. 국가 간 첨예한 이해관계와 국내 정치세력의 입장이 착종되어 누구 말이 옳은지 구분하기 곤란하다.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선거 때면 한·미 동맹 주요 이슈가 현안으로 자주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 같으면 시끌벅적할 일도 대충 결정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안보 문제는 대충 처리하거나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국제정치학자들은 한·미 동맹을 ‘비대칭’적이라 규정하며, ‘개입과 연루’ ‘후원과 피후원’ 같은 개념을 동원한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해도 한국과 미국이 불평등한 관계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최근 한·미 간 긴장이 발생하는 것은 한국이 과거와 달리 자주성을 더 이상 양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은 한국의 자주성을 더욱 억제하려는 양상을 보인다. 미·중 패권경쟁 상황에서 동맹국 이탈을 단속하고 결속을 강화하려는 전략 때문일 것이다.


미·중 양자 사이에서 한국이 지극히 당연한 최소한의 손해와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미국의 입김도 작용하겠지만 국제관계와 국익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익을 위해 미국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 어김없이 ‘그럼 미국을 버리자는 것이냐?’는 반론이 튀어 나온다. 우리에게 중국과 미국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말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미국과의 관계는 그 중요성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중국은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너무 중요하다. 굳이 양자의 의미를 평가하자면 미국을 버리면 안보적인 자살, 중국을 버리면 경제적인 자살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교역국인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전통적인 동맹국인 미국을 버리자는 것으로 오역하는 것은 의도적 난독증이자 자해적이며 왜곡된 사대주의적 자의식의 반영일 뿐이다.


국력이 신장하고 민도가 높아지면서 미국이 우리의 대외정책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는 전략도 고도화되어가고 있다. 그람시에 따르면 강대국이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동의’와 ‘강요’이다. 강대국의 요구가 정당하거나 국력차이가 아주 크게 벌어져 어떠한 거부도 가능하지 않을 때는 ‘동의’의 기제를 사용한다. 그러나 국력이 강해지고 국민들의 자의식이 성숙해지면 정당하지 않은 강대국의 요구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럴 때는 동의와 강요 사이에 존재하는 ‘회색지대’가 동원된다. 사실상 ‘강요’지만 ‘동의’의 형식을 띤다.


박근혜 정권이 흔들리던 마지막 시기에 한·미 간 주요 안보이슈에 대한 결정이 무더기로 이루어졌다.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배치했다. 이런 결정들이 박근혜 정권의 정당성이 약화되던 시기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동의와 강요 사이의 회색지대가 동원되었다는 혐의를 둘 수 있는 상황이다. 권력의 정당성이 약화될 때 강대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뒤따르는 법이다. 중국의 보복이 뒤따랐다.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정권 말기와 같은 상황이 재현될까 우려스럽다. 지정학적 자살이라는 평가를 받는 호르무즈해협 해군함정 파병 결정이 내려졌다. 총선을 앞두고 집권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는 시점에 제기되고 있는 사드 성능개선과 추가배치, 중거리핵미사일 배치, 주한미군 주둔비용 인상과 같은 현안들이 걱정된다. 정치권이 진영으로 양극화되는 상황에서, 집권세력이 정치적인 수세에 몰리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것과 같이 국익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집권세력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한 야권의 의도적인 중국 때리기는 우리 스스로 동의와 강요의 ‘회색지대’로 들어가게 하는 채찍질이다.


사드 성능개선과 추가배치 그리고 중거리핵미사일 배치는 중국의 극단적 반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이다. 자칫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치명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사드 배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손실을 당할 것이다. 강력해진 한·미 동맹도 중국의 보복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벌충할 수 없다. 강력해진 한·미 동맹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새로운 안보위협이 발생할 것이다.


이번 총선으로 어떤 정치적 국면이 조성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네 편 아니면 우리 편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국제관계의 본질을 도외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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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 삶도 일정한 영향을 받는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가 유독 2020년 미국 대선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은 이런 현실적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기존 미국 대통령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국정운영 스타일로 미국을 두 쪽으로 나눠놓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지 지켜보는 것은 어떤 정치 드라마보다 흥미를 자아낸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을 저지하겠다고 나선 민주당 후보들이 벌이는 경쟁 역시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쏠쏠한 데다 미국 정치 지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직 초반이지만 민주당 경선 판세를 요약하자면 ‘원조 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최근 여론조사를 집계해 낸 평균치를 보면 샌더스 상원의원의 지지율 그래프는 지난 10일을 기점으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지지율을 뚫고 위로 올라섰다. 38세 신예이자 중도 성향인 피트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이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샌더스 상원의원과 각축을 벌였지만 ‘뒷심’을 의심받고 있다.


샌더스 상원의원의 강세와 비례해 민주당 기존 주류층의 ‘걱정’이 도드라진다. 그가 민주당 후보가 되면 트럼프 대통령을 이길 수 없다는 ‘샌더스 필패론’을 제기한다. 샌더스 상원의원이 자처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이념적 지향은 공화당 지지층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층도 결집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언론과 민주당 주류가 샌더스 상원의원의 급진성을 부각시키며 필패론을 주장할수록 궁금증도 커진다. 샌더스 상원의원의 주요 공약인 국가 단일 의료보험 도입, 공립대 무상교육, 증세를 통한 복지재원 마련 등은 2016년 경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6년에 이어 2020년에도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공약을 앞세워 선전하는 동안 민주당 중도 진영은 무엇을 했을까? 시선을 ‘트럼프 이전으로의 복귀’에 고정시킨 나머지 살인적인 의료비와 주거비·교육비 등 미국인이 느끼는 문제를 풀 대안 제시에 게을렀던 것 아닐까?


민주당 주류에서 엿보이는 퇴행적 행태는 이런 의심을 강화시킨다. 경선 시작 직전 뛰어들어 막대한 재산을 뿌려대며 지지율을 쌓아가고 있는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과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러닝메이트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삼세판 가위바위보에서 두 번 연속 질 가능성이 높자 ‘오판삼선승제’를 하자고 떼쓰는 아이가 연상된다. 민주당 주류는 2016년에도 전당대회에서 클린턴 전 장관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표심 왜곡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 정치분석가들이 조심스럽게 점치듯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최종 후보가 될지,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필패할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샌더스 필패론을 열심히 설파하는 민주당 주류가 자기 혁신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앞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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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중동평화구상’은 트럼프 행정부가 오래 공들인 결과물이다. 트럼프 구상의 골자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루살렘을 온전히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도록 하고 이를 받아들일 경우 10년간 50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불법을 힘으로 합법화하려는, 중동에 평화가 아닌 혼란과 충돌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하고 부당한 시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대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유지해온 원칙이 있다. 1960년대부터 무수히 만들어진 안보리결의, 유엔총회 결의는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확장한 영토가 불법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정착촌 합병은 국제법 위반이다. 또한 유엔은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도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구상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전부 통치하도록 했다. 동예루살렘을 떼어주겠다고 했지만, 그곳은 팔레스타인이 말하는 동예루살렘이 아니라 분리장벽 바깥의 변두리 땅이다.


트럼프는 이를 ‘현실적인 2국가 해법’이라고 했다. 2국가 해법은 원래 1967년 이전 국경을 기준으로 이·팔이 각각 국가를 건설해 공존한다는 뜻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 개념이 확립된 이후 2국가 해법은 중동분쟁 해결의 기본원칙으로서 국제적인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있다. 2국가 해법의 핵심은 정착촌 철수·동예루살렘 지위·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등에 대해 양측이 합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구상은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입장만을 반영했다. 트럼프의 ‘현실적 2국가 해법’은 국제사회가 원칙으로 삼고 있는 기존의 2국가 해법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다. 


사실 오슬로 협정은 20년이 넘도록 휴면상태다. 그 사이 정착촌 규모는 160여개, 인구 60만명으로 확대됐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위협과 빈곤, 무능한 리더십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다. 이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피로감도 쌓여 있다. 트럼프는 이런 여건을 활용해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팔레스타인을 압박하고 있다. 


일부 친미국가를 제외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은 유엔결의와 국제법, 1967년 이전의 국경선에 기초한 2국가 해법을 강조하며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유럽연합(EU)도 “미국의 구상은 국제적 합의를 벗어난 것”이라며 거부 성명을 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노력을 평가하며, 이·팔 문제가 2국가 해법에 기초하여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냈다.


이 논평에 나오는 2국가 해법이 ‘트럼프식 2국가 해법’인지, 국제사회가 유지해온 원칙으로서 2국가 해법인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 대변인은 유엔 등 국제사회가 갖고 있는 원칙을 지지하는 입장이냐는 질문에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는다”며 선을 그음으로써 트럼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임을 인정했다. 백악관이 트럼프 구상을 지지하는 각국 반응을 홈페이지에 소개하면서 한국 외교부의 논평을 자랑스럽게 포함시킨 것을 보면 미국 측의 요청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2018년 5월 예루살렘의 지위와 관련해 “국제사회의 대다수 국가들이 지지하는 2국가 해법에 입각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번 논평은 정부가 그동안 유지했던 중동문제 원칙에서 이탈한 것이어서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한국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 미국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외교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일관된 원칙을 갖고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 있어야 외교적 자율권과 독자영역을 가질 수 있다.


우리에게 한반도 평화가 중요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에는 중동 평화가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준이 어디서나 보편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평화의 개념도 지역을 불문하고 같아야 한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이 있고 진보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입장이 나온 것은 유감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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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크루즈 여행은 1844년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P&O사가 사우샘프턴에서 출발해 지브롤터와 몰타, 아테네 등 지중해의 여러 도시로 항해하는 여행상품을 판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회사는 이후 알렉산드리아와 이스탄불을 왕복하는 크루즈 상품도 선보였다. 이보다 10년 앞선 1833년 이탈리아의 ‘프란시스코 1세’를 크루즈의 효시로 꼽는 연구도 있다. 유럽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을 태운 이 배는 나폴리를 떠나 3개월 동안 시러큐스, 몰타, 아테네, 이스탄불 등을 여행했다. 오늘날 크루즈 여행의 상징이 된, 샴페인을 든 채 우아하게 선상 파티를 즐기는 장면은 바로 이 배에서 시작됐다. 


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상륙 우려로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다이코쿠 부두에 정박 중인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 고립된 탑승객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자위대가 설치한 식량 및 의약품 전달 통로가 10일 두꺼운 천으로 뒤덮여 있다. 요코하마 _ AFP연합뉴스


오늘날 크루즈 관광의 성장세는 놀랍다. 미국의 한 회사는 아시아를 비롯해 지중해, 북유럽, 카리브해, 호주·뉴질랜드, 남미 등 세계 7대륙 80개국 490여 도시로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크루즈 관광은 먼 나라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크루즈 여행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격리돼 있는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만 13일 현재 218명의 감염자가 발생해 전 세계의 우려 섞인 시선이 쏠리고 있다. 중국 밖 감염자가 440여명, 그리고 이 배를 제외한 일본 내 감염자가 29명인 점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런가 하면 승객과 승무원 2300여명을 태운 또 다른 크루즈 선박 ‘웨스테르담’호는 일본과 대만, 필리핀, 태국 등 5개국으로부터 입항을 거부당해 보름간 해상을 헤맸다. ‘꿈의 여행’을 기대했던 승객들로서는 ‘선상 감옥’이 따로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본 정부의 대응이다. 상당 기간 전원검사를 미룬 채 선내 공공시설 이용을 제한하지 않았다. 당초에는 19일까지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도록 했다 뒤늦게 방침을 바꿨다. 배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세균 배양접시’ 역할을 하면서 감염을 촉진할 가능성을 무시한 것이다. 올림픽 안전을 염려해 감염자를 육지로 들이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무모하기 짝이 없다. 지진이 나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을 세계는 경이롭게 보았다. 일본인들의 그 ‘냉정 대응’이 달리 보인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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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계질서는 어느 지역이 선도해 갈까? 1990년대를 관통했던 화두 중 하나다. 당시 상당수 학자들은 유럽연합(EU)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지난 1월 말로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서 이런 전망이 무색해졌다. 그렇다면 브렉시트, 나아가 EU의 오늘은 우리에게 어떤 화두를 다시 던지는 걸까?


경제적으로만 보면 영국이 더 잃는 선택이다. EU의 역내 무역규모는 영국의 10배에 달하고, 영국은 무역의 50%가량을 EU시장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도 최악의 경우 경제규모가 8% 이상 축소될 수도 있다고 본다. EU 잔류를 원하는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분리 독립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럽의회 의원들이 2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협정안 비준 투표를 끝낸 후 손을 잡고 ‘올드 랭 사인’을 부르고 있다. 브뤼셀 _ AP연합뉴스


그렇다면 왜 떠나는 걸까? 핵심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EU에 남을 경우 자신들의 처지가 더 나빠지리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민자 및 불법체류자 문제를 빌미로 정치적 반격을 가한 것이다. 


영국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당시 EU 출신자 360만명과 비EU 출신자 574만명이 영국에 거주 중이다. 인구 대비 각각 5.5%와 8.8%에 해당하는 수치다. 한국으로 치자면 665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EU 출신자 중에서는 폴란드 및 루마니아 출신이 폭증해서 각각 83만명과 40만명에 달했다. 문제는 증가 속도였다. 2008년 이후로 연평균 30만명 이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배경 원인은 EU의 회원국 확대 조치였다. EU는 2004년에 폴란드, 헝가리를 포함해 동유럽국가 10개국, 그리고 2007년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다. 유럽시민권자가 확 늘어난 것이다.


이런 결정의 기저엔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도하겠다는 EU 지도자들의 섣부른 자신감이 내재해 있다. 실제 2000년대 초반까지 EU는 세계 최대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고 단일통화 도입 등으로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했다. 동유럽까지 합칠 경우 미국도 능가하는 세계 최대 경제권이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시장확대 과정에서 노동자의 초국적 이동은 자본이나 재화의 이동과 달리 더 세심한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했다. 시장만능주의 사고가 EU 지도자들의 전략적 결정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와 2010~2012년의 ‘아랍의 봄’을 거치면서 동유럽 인구이동 및 난민 유입이 맞물리며 유럽 전역에 걸쳐 극우정치세력이 창궐하는 원인이 된다. 특히 유럽 전역에 걸쳐 불법체류자가 400만명 규모로 급증했고, 이들 가운데 4명 중 1명 정도가 영국으로 몰려들었다. 브렉시트는 그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EU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두 갈래 상반된 길에 직면해 있지 않나 싶다. 하나는 정치통합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다. 현재 EU의 장기침체나 지역 및 국가 간 불균형 발전 문제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느슨한 국가연합으로는 힘들다. 그 상징적 예가 EU의 1년치 예산규모다. 회원국 정부들 총예산의 5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금융정책을 제외한 주요 거시경제 및 사회복지 정책들도 여전히 회원국 정부들이 주요 권한을 갖고 있다.


다른 길은 시장통합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특히 자본과 노동에 대한 초국적 이동 제한과 유로화의 폐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 유로화 도입 이후 환율 위험이 사라지면서 역내 초국적 자본의 이동 양과 속도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유로권 전체가 거대한 부채연결망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장기침체에 시달리는 핵심 이유다. 


두 길 모두 결코 간단치 않다. 시장통합을 제한하는 조치들은 EU의 존립근거 자체를 허무는 격이고, 정치통합은 회원국들이 주권을 더 양도해야 하는 일이다. 진퇴양난이다. 상당기간 혼란과 정체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초국적 시장통합은 그에 걸맞은 정치사회적 통합과 상보적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장래 동북아 자유무역지대 창설이나 남북한 간 경제협력을 통해 시장통합을 도모한다고 할 경우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문제다. 


특히 노동자의 초국적 이동에 대해선 면밀한 제도적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2018년 말 기준 체류 외국인이 약 236만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4.6%, 불법체류자는 36만명에 달한다. 다문화주의가 필요하다는 당위적 주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나 싶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판 극우정치와 사회·정치 분열의 또 다른 원인이 되기 전에.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룩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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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120개국이 넘는 정부에 암호장비를 팔아온 스위스 회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유였으며, 이 업체를 통해 손쉽게 세계 각국의 기밀 정보를 빼내왔다고 미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중국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가 중국 당국과 유착됐을 가능성을 비판해온 미국이 수십년간 적국은 물론 한국도 포함된 동맹국의 기밀을 무차별적으로 털어왔다니 경악할 일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독일의 방송사 ZDF와 함께 입수한 기밀문서인 CIA 작전자료를 토대로 스위스 암호장비 회사 ‘크립토AG’의 실체를 폭로했다. CIA와 독일 연방정보원(BND)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크립토AG를 통해 세계 각국의 기밀을 입수해 왔다. 프로그램을 미리 조작해 이 장비를 통해 오가는 각국의 기밀정보를 쉽게 취득한 것이다. 크립토AG는 CIA가 BND와의 협력하에 비밀리에 소유한 회사다. 회사의 고객은 120개국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으며 확인된 62개국에는 한국과 일본도 포함됐다. 


세계 각국이 쓰는 보안 장비를 ‘기밀 취득 통로’로 만들어 놨으니 미국의 첩보 수집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WP에 따르면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집트와 이스라엘, 미국이 중동평화협정을 맺을 당시 이집트 대통령의 본국과의 기밀 통신을 미국이 엿들었다고 한다. 1982년 포클랜드전쟁 당시엔 아르헨티나군의 정보를 영국에 넘겼다. ‘루비콘’으로 불리던 이 기밀 취득공작을 미국은 2018년까지 지속해 왔다고 한다. 아무리 첩보전의 세계가 냉혹하다지만, 세계 최강 국가가 이런 추악한 방식으로 각국의 기밀정보를 통째로 취득한 것은 묵과하기 어렵다. 더구나 한국은 1981년 기준으로 이 회사의 8번째로 큰 고객이었다고 하니 한국 정부의 웬만한 기밀들은 죄다 미국에 넘어갔을 것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미국은 중국 화웨이가 당국과 유착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우방국들에 화웨이 장비를 쓰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지난해 6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이 같은 발언을 했으며 11월에는 미 국무부 경제차관이 한국 통신업체들을 불러 압박하기도 했다.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당사자인 CIA는 WP의 취재에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 진상을 밝힐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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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의 소프트웨어공정 직업학교 기숙사 사이에 학생들의 물품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사진 웨이보


지난 9일. 중국 소셜미디어(SNS)에는 쑥대밭이 된 한 대학의 기숙사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왔다. 


우한에 있는 소프트웨어공정 직업학교(WHVCSE) 기숙사 건물 두 개동 사이로 이불, 세숫대야, 신발, 컵 같은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학교 2학년 학생 두펑(杜鵬)이 7일 기숙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격리 병동으로 바뀐다는 소식을 듣고 교직원들이 기숙사를 정리하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동영상 속 직원들은 기숙사 사물함에 있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꺼내 치웠다.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일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도 마치 쓰레기처럼 ‘처리’됐다. 학생들과 누리꾼들은 분노했다. 


학교 측은 빠르게 사과했다.  


10일 새벽 발표한 사과문에서 7일 우한시에서 학교 기숙사를 격리 시설로 이용한다는 긴급 통지를 받았고 9일까지 200여명의 직원들이 이 업무에 매달렸다고 설명했다. 사흘간 기숙사 7개동을 2000개 병상이 있는 격리 시설로 개조해야 하는 명령을 이행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학교 측은 정리 과정의 부적절한 점을 인정하고 파손품은 보상하겠다고 했다. 또 “특수한 시기의 학교의 어려움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이 학교 기숙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계단을 이용할 시간도, 인력도 없었다. 학교 측은 창문으로 학생들의 물건을 던진 후 한꺼번에 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한의 소프트웨어공정 직업학교 기숙사 내부에 생활용품이 쌓여있다. 이 학교는 기숙사를 신종 코로나 환자 격리 병동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정부 통보를 받았다. 사진 웨이보


코로나19 발병지인 우한은 12일 0시 기준 누적 확진자가 1만9558명으로 중국 전체 확진자의 44%를 차지한다. 이중 820명이 사망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치사율(4.19%)을 나타내고 있다.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병상과 격리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우한이 속한 후베이(湖北)성은 7일 우한시 소재 대학인 WHVCSE를 비롯해 우한 상학원(商學院), 장한(江漢)대학, 우한 선박직업 기술학원 등 4군데 기숙사를 신종 코로나 경증 환자 치료 격리 거점으로 삼고 8800개의 병상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우한의 확진환자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정부의 요구도 달라졌다. 


쑨메이화(孫美華) WHVCSE 부총장은 남방주말과 인터뷰에서 7일 통지에서는 1000개 병상을 요구했지만 다음날 두 배로 늘어나 2000개의 병상을 만들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우한 상학원도 당초 1000개로 통보 받았지만 하루 만에 2400개로 바뀌었다고 했다. 


우한시 봉쇄령으로 외부로 통하는 항공, 철도, 도로가 막혀 상당수의 시민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지하철, 버스 등 내부 교통도 통제 돼 일할 수 있는 교직원을 찾기도 힘들었다. 대부분 교수들이 ‘이삿짐 정리’에 동원됐다. 한 교수는 “물건을 쓸어담으면서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임무가 워낙 막중하고 시간이 절대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병실로 개조해야 할 학교는 계속 늘어나 우한시 교통학교, 우한시 제일직업교육중심 등이 추가됐다. 


전염병으로부터 인명을 구하는 것은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통지, 늘어난 요구, 부족한 인력과 시간 속에서 학생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또 3일 만에 만들어진 격리 병동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불안한 부분은 없는지 제대로 점검할 시간도 확보되지 않았다. 


우한시는 3일 1000개 병상 규모의 임시 격리병동 훠선산(火神山)병원, 9일에는 1600개 병상 규모의 레이선산(雷神山)병원을 열었다. 두 병원 모두 열흘 만에 지어졌다.  


훠선산 병원 개원을 앞두고 중국 관영방송 CCTV는 완공되기까지 10일간의 기록을 2분으로 편집해 내보냈다.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러면서 ‘중국속도’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빠르게 번지는 코로나19를 막고,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 격리병동을 빨리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속도만 강조하면서 중요한 것들이 무시되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박은경 특파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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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 전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3차 정상회담을 열기 원하지 않는다고 참모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는 협상 재개로 얻어지는 이득보다 리스크가 더 클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CNN의 이 보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일 국정연설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북한을 거론하지 않은 사실과 연결하면 대선 전까지는 북·미관계를 동결하려는 분위기가 미 정부 내에 형성돼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북한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북한은 선제적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며 협상 문턱을 높여둔 것 외에는 대미 태도에 특별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다. 지난 8일 건군절도 조용히 지나갔다. 북한 노동신문이 11일 사설에서 “장애와 난관을 성과적으로 뚫고 나가자면 과학기술이 발전을 선도해나가야 한다”고 한 것은 당분간 자력갱생에 집중하려는 내부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무엇보다 신종 코로나 대응이 ‘발등의 불’이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내내 북·미관계는 교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에 수동적으로 젖어들어서는 안된다. 북·미 대화가 멈춰 서면 남북관계도 ‘올스톱’되는 것은 한국이 스스로를 한반도 문제에서 소외시키는 격이다. 이런 폐단에서 벗어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올 초 “북·미 대화만 쳐다볼 것 아니라 남북 간에 할 수 있는 협력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며 독자적 남북협력 의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 기조하에서 추진하려던 북한 개별관광은 신종 코로나라는 돌발악재로 힘이 빠진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남북 간 방역협력이다. 감염병 같은 재난은 한반도 전체의 문제다. 북한 내에서 통제되지 못하면 한국에도 영향이 미친다. 감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전 세계가 힘을 모으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웃한 남북이 방역협력에 나서는 것은 국제사회적으로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다. 


한·미는 11일 서울에서 북핵 차석대표회의를 열어 북·미 대화와 남북관계 증진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서 방역협력의 필요성도 협의됐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 간 방역협력에 미국이 이의를 제기했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남북 간 방역협력을 정식으로 북한에 제안할 필요가 있다. 북한도 화답해 재난에 대한 남북 공동대응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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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폭넓게 모으고 있다는 인식으로, 모집하고 있다는 인식은 없었다.”


지난달 28일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정부 주최 ‘벚꽃을 보는 모임’을 ‘사유화’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일본공산당 미야모토 도루(宮本徹) 의원이 “(총리 지역사무소의) 참가자 모집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원래 ‘공적·공로’가 있는 이들을 초대하는 모임 참가자를 사무소가 대거 모집해도 괜찮냐는 지적에 이런 기상천외한 답변을 한 것이다. 미야모토 의원은 “48년 일본어를 사용해왔지만, ‘모으다’와 ‘모집하다’는 같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0일 시작된 정기국회에서 벚꽃 모임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자료가 없다”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 “중대 또는 복잡·곤란한 사건의 수사와 공판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지난 3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모리 마사코(森雅子) 법무상은 지난달 31일 각의(국무회의)에서 이달 7일 정년퇴임 예정이던 구라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도쿄고검 검사장의 정년을 8월까지 연장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검사장의 정년 연장은 전례가 없는 일로, 검사 정년을 만 63세로 규정한 검찰청법 위반 의혹까지 제기된 터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결정이 오는 8월 물러나는 이나다 노부오(稻田伸夫) 검사총장(검찰총장) 후임으로 구로카와 검사장을 지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로카와 검사장은 아베 정권과 가까운 인물. 일본 검찰은 복합리조트(IR) 사업과 선거부정 의혹 등으로 자민당 의원들을 수사하고 있다. 결국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를 무디게 하려는 포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무리수들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문제가 다른 문제를 압도하고 있는 탓이다. 각종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던 아베 정권으로선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아베 총리는 야당의 추궁에 장기인 ‘밥 논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침밥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쌀밥’에 대해 질문받은 것처럼 ‘먹지 않았다’고 논점을 흐리는 식이다. 야당에 대해선 “이 시국에 ‘벚꽃’만 하고 있다”고 역공하고 있다.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은 지난달 29일 질문에 나선 입헌민주당 렌호(蓮舫) 의원을 두고 “이 상황에서 감염증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 감각에 놀라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려 물의를 빚었다. 자민당은 심지어 신종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재해 발생 시 내각 권한을 강화하는 ‘긴급사태 대응’ 신설 논의 등을 해야 한다며 ‘개헌론’ 군불을 땠다.


이런 안하무인식 태도는 신종 코로나 정국으로 각종 스캔들이 지지율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전례가 없는 ‘나쁜 사례’를 남발하는 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아베 정권의 각종 스캔들에서 드러났듯 공사를 혼동하고, 공금을 유용하는 것은 국정의 사유화다. 입맛에 따라 검찰 인사에 개입하는 것은 검찰의 사유화다. 어쩌면 전염병만큼이나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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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의 발원지인 우한에서 당국의 대응을 고발해온 시민기자 천추스를 감금 중인 사실이 10일 CNN에 의해 폭로됐다. 천추스는 우한 봉쇄령이 내려진 다음날 현지에 도착, 소식을 전해왔는데 지난 6일부터 종적이 끊겼다. 당국은 가족에게 천추스를 격리하고 있다고만 할 뿐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신종 코로나의 위험성을 경고한 의사 리원량을 괴담 유포자로 몰아붙인 데 이어 당국이 또다시 여론을 통제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전염병 대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중국은 이런 원칙을 어겼다. 지난해 12월 리원량이 처음 ‘사람 간 전염’ 위험성을 알렸을 때 중국 우한 경찰은 이를 유언비어로 몰아붙이며 반성문을 쓰게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중국 정부가 ‘사람 간 전염’을 인정하고 우한을 봉쇄했을 때는 바이러스가 이미 세계로 퍼져나간 뒤였다. 발병 초기에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축소·은폐에 급급하는 바람에 감염병 확산을 차단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지 상황을 전하는 일조차 제대로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 때에도 관련 정보를 축소·은폐하고 늑장 대응하다 일을 키운 중국이 또다시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답답하다. 


리원량과 천추스가 한 일은 다른 나라에서라면 당연히 허용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시민의 기본적 권리이다. 그리고 질병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도 정보 은폐와 여론 조작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중국 당국이 반대의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고 여론을 통제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개선하지 않고는 굴기니, G2니 하는 목표가 사상누각이라는 점을 중국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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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주 코커스(caucus, 당원대회)는 미 대선의 풍향계로 불린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이곳에서 첫 경선을 하는데, 이기면 당의 대선 후보로 뽑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최근 12번 중 8번, 공화당은 11번 중 5번 아이오와 코커스 1등이 대선 후보로 뽑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후보들은 초반 기선 제압을 위해 이에 올인한다. 대선의 첫 관문을 연다는 아이오와 주민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런데 3일 밤(현지시간)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공화당 코커스는 투표 개시 25분 만에 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는데 민주당 코커스 개표가 지연된 것이다. 각 후보에 대한 지지표와 그에 따른 확보 대의원 수 집계가 들쭉날쭉해 결과 발표를 하루 뒤로 미뤘다. 당원들이 실망한 것은 둘째치고 첫번째 대회에서 기선을 제압해 기세좋게 출발하려던 후보들도 머쓱해졌다. 특히 1위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버니 샌더스에게 밀린 것으로 나온 조 바이든은 주최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민주당 대선 레이스가 출발부터 삐끗한 것이다.


민주당의 아이오와 코커스 개표 지연은 4년 전에도 있었다. 2016년 2월1일 힐러리 클린턴과 샌더스 후보가 개표 막바지까지 49.8%, 49.6%로 팽팽히 맞서 승자를 선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개표 지연은 흥행의 전조였다. 진보 색채가 강한 샌더스 후보는 이후 바람몰이를 하면서 클린턴을 상대로 선전했다.


이번 사고를 놓고 미국의 대선 제도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말이 나온다. 코커스가 갖는 중요도에 비해 그 시스템이 형편없이 낙후됐다는 것이다. 미국 선거제도는 역사적 산물이라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다. 요즘 현실과 맞지 않는 점이 많다. 이런 제도의 허점에 앞서 민주당의 실수가 뼈아프다. 트럼프 진영은 당장 “역사상 가장 멍청한 열차 사고”라며 “코커스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하면서 무슨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것이냐”고 조롱했다. 민주당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제기하고 경선에 김을 빼려는 의도이다. 5일에는 미 상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표결이 있다. 벌써 트럼프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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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친구들이 나한테 계속 물어오는데, 여기서 한꺼번에 답할게. 그거 진짜야!”


중국 영화감독 쉬정이 지난달 24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다.


쉬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마(로스트 인 러시아)>는 당초 이날 개봉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으로 상영이 갑자기 취소됐다. <중마>를 포함해 춘제(중국의 설) 특수를 노린 기대작 8편이 모두 상영되지 못했다. 나머지 7편은 ‘언젠가 개봉될 그날’ 기다리기로 했지만 <중마>는 동영상 플랫폼과 인터넷TV로 무료 공개하겠다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전무후무한 선택에 반신반의하는 관객들에게 쉬 감독이 직접 ‘진짜 공짜’라고 답한 것이다.  


파격적인 결정은 극장 업계에서는 ‘규탄’을, 관객들에게는 ‘환영’을 받고 있다.


중국 23개 극장체인과 영화배급 관계자들은 “온라인 무료 상영은 시장 파괴 행위이며 현 영화 배급 시스템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친다”며 관련 당국에 상영 규제를 촉구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에 발이 묶인 관객들은 무료 상영을 환영했다. 영화제작사 주가는 무료 상영을 발표한 당일 19%나 올랐다. <중마> 배급사는 극장 측과 춘제 기간 박스오피스 수입이 24억위안(약 4072억원)을 넘어야 6억위안(약 1018억원)을 배당받을 수 있다. 영화사 측은 개봉이 취소되자 온라인 업체와 6억3000만위안에 판권 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온라인 무료 상영에 나섰다. 공개 첫날에는 바이트댄스와 연관된 12개 동영상 플랫폼 애플리케이션이 다운로드 차트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왔다. 개봉 전만 해도 “쉬정 감독이 나한테 영화표 한 장 값 빚졌다”는 혹평이 나온 영화였지만 온라인 상영으로 판세를 뒤집었다.


지난해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 누적 수입은 642억위안(약 11조원)으로 전년 대비 5.4% 성장했다. 온라인에서 영화표를 사고 오프라인 극장으로 관람하는 것이 그간의 중국 관객들의 영화 소비 행태였다. <중마>의 온라인 상영을 시작으로 온라인 선 상영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드라마 시장에서는 방송국이 아닌 각 동영상 플랫폼으로 옮겨가 플랫폼 자체 제작 대작 드라마가 드라마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2002~2003년 발생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은 의료진을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아픈 사건이다. 그러나 전염병의 공포는 온라인 쇼핑 성장의 계기가 됐다. 그동안 온라인 쇼핑을 꺼리던 이들이 전염병으로 외출을 자제하면서 전자상거래 첫 경험을 시작했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징둥 등 중국의 대표적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이 시기에 성장했다. 2003년 알리바바 매출은 전년 대비 5배 이상 늘었다.


중국청년보는 4일 “그동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후 소셜미디어로 영화평을 나누는 것이 고정 패턴이었지만 <중마>의 온라인 선 상영은 오랫동안 몸에 밴 소비 습관을 깨뜨렸다”고 했다. 사스가 인터넷 쇼핑을 경험시켰듯이 신종 코로나는 극장 관람에 대한 고정 관념은 흔들었다. 극장업계들의 저항이 거센 것은 그만큼 시장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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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창궐로 전 세계적으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전염병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종 코로나를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에 이어 설상가상으로 후난성에서는 치사율이 높은 조류인플루엔자가 발병해 전염병의 확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진화생물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인류의 운명을 바꾼 3대 요소 중 하나로 병균을 들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티푸스, 흑사병, 천연두, 독감과 같은 전염병이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 창궐하면 민심이 흉흉해져 체제불안이 커질 뿐 아니라 인구감소로 생산이 줄고 국력이 약해진다. 


이번 전염병사태에 북한당국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전염병 유입을 막기 위해 1월21일부터 중국여행객의 입국 금지, 북한 거주 내외국인의 중국여행 제한, 중국에서 들어온 내외국인의 한 달간 격리,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잠정 폐쇄, 1월31일엔 북·중 간 항공기, 국제열차 운행중단을 발표했다. 북한은 몇 년 전 사스나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국경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었다. 


북한당국이 전염병 유입에 극도로 민감한 것은 오랜 경제난으로 영양상태 악화와 의약품 부족으로 주민들의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년 들어 중국에서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가 유입된 데 이어 작년에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유입돼 대북 제재로 가뜩이나 어려운 북한경제와 주민생활에 커다란 짐이 되고 있다. 


그간 북한은 그런대로 전염병 위기에 잘 대처해 왔다. 하지만 북한의 위기는 전쟁(총), 경제(쇠)에서도 온다. 북한은 냉전해체 후 외부 군사위협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과 달리 북한에 쉽게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를 협상카드로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최근 장기성을 띤 정면돌파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비핵화 없이 경제발전을 이루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안전보장의 토대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경제난의 장기화는 김 위원장이 내건 ‘인민생활 향상과 경제강국 건설’의 목표달성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북한주민들의 영양상태 악화와 면역력 저하로 전염병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유엔보고서는 작년도 북한의 실질 GDP 성장률이 1.8%라 밝혔지만, 최근 발표된 한국은행 북한경제 보고서는 유엔제재로 북한의 보유외화가 크게 감소해 물가·환율 불안정 위기를 경고했다. 


북한이 원하는 제도안전과 경제발전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국제경제체제 편입 없이 자력갱생이나 옛 사회주의 대국과의 연대만으로 이룰 수 없다. 11월 미 대선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셈법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면,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장기국면에 대처하는 게 합리적 대안이 될 것이다. 북·미 협상의 답보국면 속에서 남북대화에 대한 미국의 양해가 있었고 정부의 개별관광 추진도 그 연장선에서 제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 측 이해와도 맞는다. 북한은 자력갱생을 통한 정면돌파전의 핵심으로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관광이 제대로 되려면 각종 인프라가 깔려야 하고 그 출발점은 철도·도로가 될 것이다. 북한은 기존 철도·도로의 연결이 아니라 단번도약을 위해 고속철도·고속도로의 건설을 원한다. 따라서 2018년 12월의 착공식에서 더 나아가 고속철도 공동조사·설계작업부터 남북이 시작하면 된다.


작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의 노딜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신종 코로나의 발생은 남북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에게 위로 서한과 지원금을 보낸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에는 여전히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남아있고, 신종 코로나 확진환자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감염병에 대한 공동방역을 위해 남북 보건의료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정부는 신종 코로나 검사시약, 방역물자뿐 아니라 아프리카돼지열병 치료제 제공 등 남북 긴급의료협력을 북한에 제안할 필요가 있다. 


신종 코로나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에는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부터 재개하고 개별관광을 위한 남북당국자 대화를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다. 북한당국은 제재 국면하에서 새로운 정면돌파를 위해서도 더 이상 남측이 내미는 손을 뿌리쳐서는 안될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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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통합(Integration)’을 교육하고 외쳤던 독일은 분단 45년 만에 통일을 이뤘는데, 분단 직후부터 ‘통일’을 외쳐온 우리는 75년이 지난 지금 통일이 더욱 요원해졌다. 통일을 위한 절대적 선행조건인 ‘통합’을 경시한 탓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통일은 다음과 같은 장벽들로 막혀 있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국민 통합’을 호소해야 한다.


첫 번째 장벽은 ‘미·중 한반도 분점 밀약’이다. 1972년 2월21일 닉슨과 마오쩌둥 간의 최초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1971년 8월과 10월에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대만과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중 양국 간의 룰’을 정했다. 이를 토대로 양국은 정상회담에 이어 국교 수교(1979)를 했고, 오늘의 G2 시대까지 이르렀다. ‘미·중 밀약’의 핵심 내용은 트럼프 정부 초대 국무장관 틸러슨이 “유사시 중국 군대가 북한지역에 들어오게 될 경우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갔더라도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겠다고 중국 측에 미국이 보장했다”라는 2017년 12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확인된다. 미·중은 패권 다툼의 적처럼 보이나 경제적으로는 상호 4000억달러에 이르는 직접투자를 하고 있는 ‘경쟁적 연대’ 속에서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켜온 것이다. 유사시 중국군의 북한지역 점령 계획은 미국 의회가 출자해 설립한 방송인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상원 외교위원회 전문위원 보고서를 토대로 2012년 12월 보도한 바 있다. 또 중국이 매년 실전을 방불케 하는 ‘북한 진입’ 훈련을 오래전부터 해왔음은 미연방 국제방송인 ‘VOA’ 등 국내외 다수의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두 번째 장벽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중의 남북 분단전략을 간파한 가운데 핵무기를 기반으로 미·중 양국을 활용해 ‘독자적 국가 구축 전략’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장벽은 통일의 절대적 선행조건인 ‘국민 통합’이 초토화된 국내 상황 때문이다. 정치권은 오히려 이를 자신들의 기득권 확장 수단으로 편승·악용하고 있다. ‘국민 통합’의 부재, 북한의 통일 거부, 4대 열강의 통일 방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남북통일이 불가능함은 자명하다. 


국가원수로서 문 대통령의 통치행위 차원의 결단이 요구되는 중차대한 시점이다. 먼저, 통일을 ‘미래지향적 가치’로 명시한 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내용으로 헌법 및 관계 법령 개정이 긴요하다. 그런 뒤 중국·러시아 등과 관계를 개선했듯이 북한과도 국가 대 국가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유럽연합(EU)식 국가연합’에 이어 ‘미국식 연방국가’도 지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분단시대 독일은 ‘통일’이 아니라 ‘통합’ 및 ‘통합과정’에 국가역량을 집약해서 오늘의 통독시대를 일궜다. 나토 구성국인 터키는 국민 통합을 통해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 속에서 국가적 자존감을 확고히 했다. 문 대통령은 잔여 임기를 국민 통합에 전심전력함으로써, 부디 국민 통합의 초석을 다진 대통령으로 역사 속에 남기를 바란다.


<홍원식 | (사)피스코리아(국민통합비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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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두근거림과 달뜬 기대, 평화에 대한 열망은 가라앉은 지 오래다. 남북의 지도자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고, 독설을 주고받았던 북·미 지도자가 서로 우의를 다졌던 몇몇 장면들이 아득한 옛일 같다.


북한은 ‘새로운 길’을 예고했다. 미국은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지만 대화할 진짜 의지는 없어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때 ‘중재자’로 성가를 높였지만, 지금은 종영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존재감이 없다. 북한 매체들은 문 대통령을 수차례 조롱했으며,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자른다. 물밑에서 들리는 정보들을 종합하면 전망은 어둡다. 그럼에도 남·북·미가 연출했던 몇몇 장면과 성취들을 허비하기엔 아깝다. 왜 이렇게 됐을까. 되짚어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북·미 모두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됐던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바람 잘날 없는 내치로 욕을 먹던 그로선 이 모든 것을 가리는 이벤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잘되면 노벨 평화상도 탈 수 있고, 재선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장사꾼 트럼프의 머릿속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큰 그림이 있기나 했을까. 탄핵 등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놓은 조악한 ‘중동평화구상’을 대단한 성취인 양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안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북한을 너무 몰랐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북한이 감격할 줄 알았다. 춥고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약속만 하면 냉큼 핵을 포기할 거라 믿었다. 붕괴 공포감에 시달려온 북한이 핵을 체제유지의 근본으로 여긴다는 것도 제대로 몰랐다. 이에 대해선 미국 언론도 지적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2월22일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 개념을 규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북한에 뒤섞인 메시지를 보냈고, 이행할 수 없는 약속도 너무 많이 했다고 했다.


북한도 진지한 비핵화 의지를 가지고 협상에 나섰을지 의심스럽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내 아이들이 핵을 지닌 채 평생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이 말을 믿었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표정은 금세 바뀌었다. 협상이 교착되고 제재완화 등이 이뤄지지 않자 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에 손댔다.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핵무장력의 급속한 발전”을 언급했으며, 협상이 잘되는 듯 했을 때 깍듯이 대했던 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했다.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고 제재완화를 끌어내려는 남측 노력이 성과를 내지 못했더라도, 비핵화 의지가 진정이었다면, 북한이 그렇게 쉽게 과거 행태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했던 여권 관계자들도 고개를 젓는다. 비핵화 협상과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북한이 핵동결 정도의 조치로 국제사회 대북제재에서 벗어나고, 정상국가로 인정받겠다는 계산을 한 것 같다”고 했다.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영변 핵 폐기 등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이벤트를 한다면 핵 이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성과에 목마른 트럼프를 대충 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결국 지금의 교착은 양쪽 모두 진심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은 결과로 보여진다. 출발부터 틀렸으니, 그 이후가 제대로 전개되기 쉽지 않다.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해법을 둘러싼 논쟁,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개념 차이 등 기술적 쟁점들이 거론되지만 근본은 잘못된 출발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북·미가 내켜하지 않더라도, 테이블에 다시 않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북·미도 이제와서 포기한다면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결국 한반도 당사자인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 개별관광 추진 등 정부의 대북 정책 독자 드라이브도 이런 절박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국이 딴지를 걸고, 북한이 냉대하고, 국내 보수세력이 비판해도, 주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잠시나마 드리웠던 평화의 햇살에 박수를 보냈던 국제사회 다수 여론은 박수를 칠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이지만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


<이용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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