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의 시기에 북한이 언제 미사일을 발사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처량할 정도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련의 무력과시 옵션을 사전 승인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 위협이 한반도를 뒤덮을 수 있는 현실은 암울하다. 미국의 대응으로 북한이 연말연시에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다.


이제까지 북한핵 문제 해결에 실패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국력과 군사력 그리고 국제사회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북한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대응하려 하지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내몰린 것은 물리적인 힘의 부족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인식능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말이다. 북핵 문제를 주도한 미국의 책임만이 아니다. 남의 일처럼 뒤에 숨어 눈치를 보거나 북핵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고자 했던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


냉정하게 현 상황을 평가해 보면 북·미 간 핵협상의 주도권이 북한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물리쳤다. 북한핵을 비난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가 현 상황의 핵동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국과 중국을 방문해서 북한과의 대화를 요청했으나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북한의 주도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면서 미사일을 발사할 듯하다가 조용해진 것은 미국의 군사적 압박 때문이라기보다 북한이 과거와 다른 행동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북한은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켰다.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뢰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상대방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은 강대국의 특권이다. 만일 크리스마스 선물이 블러핑(허풍·엄포)이라면, 이는 북한이 강대국의 전유물이던 게임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블러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과거처럼 신뢰성을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핵과 미사일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북한을 상대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이 말과 행동의 자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새로운 길’을 언급했다. 그러나 모두들 ‘새로운 길’보다는 미사일 발사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달을 보라고 하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 북한은 그동안 자신들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생존을 보장받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북한이 말한 비핵화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현 상황에서 동결하겠다는 것이지 자신들이 가진 핵과 미사일 능력을 제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의 개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때, 하노이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는 약속 위반이다.


북한이 주장한 ‘새로운 길’은 더 이상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접근방식을 모색하지 않고 완전한 핵 미사일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를 위한 조건도 갖춰지고 있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지금의 분위기로 비추어 볼 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추가적인 유엔 안보리 제재에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유엔 안보리는 무력화될 수도 있다. 북핵 문제에서 비롯된 유엔 안보리 무력화는 미·중 패권경쟁과 맞물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국제질서 변화의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중앙의 균열은 항상 변방에서부터 시작된다.


북한은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2020년 미국의 대선정국은 북한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다. 대선기간 동안 북한은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새로운 길’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의 행동은 기존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새로운 길’ 선언으로 대화와 타협 방식의 북핵 해결은 불가능해졌다. 완전한 핵능력을 갖춘 북한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북핵을 그냥 인정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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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조선중앙통신은 “현 정세하에서 당과 국가의 당면한 투쟁 방향과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적 문제들이 상정됐다”고 전했다. 또 “혁명 발전과 변화된 대내외적 정세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국가의 전략적 지위와 국력을 가일층 강화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진군 속도를 높여나가기 위한 투쟁 노선과 방략”이 회의에서 제시될 것이라고 했다.


28일 북한 노동당 제7기 제5차 전원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이번 회의는 김정은시대에 개최된 5차례 당 전원회의가 하루 만에 끝난 것과 달리 이틀 이상 진행됐다. 정치국과 당 중앙위, 당 중앙검사위 성원 등 정규 참가자들 외에 노동당과 내각 성 및 중앙기관, 각 도 인민위원장, 시·군당 위원장 등이 방청객으로 대거 참석한 것도 이례적이다. 규모도 커지고 기간도 길어진 것은 북한이 현 정세를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유지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나올 것을 요구한 바 있다. 그 ‘연말 시한’이 성과 없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북한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정하는 중차대한 회의인 셈이다.  


김 위원장은 내년 1월1일 발표할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미리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대미 강경 노선과 자위적 국방력 강화, 자력갱생 경제발전 전략 등이 거론된다. 전원회의에서 ‘전략적 지위’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미뤄 핵보유국 지위 강화를 내세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어떤 것이 됐건 한반도 긴장지수를 끌어올리는 방향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안고 있는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 정책을 고수하면서 북한의 선택지가 많지 않은 형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에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제출했고, 한국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대북 제재 일부 완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현 상황을 타개하려는 주변국들의 행보와 고민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1년 전인 지난해 12월30일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문 대통령과 자주 만나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한 논의를 진척시키고 비핵화 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고 했다.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지만,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김 위원장의 초심은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사흘 뒤에 나올 새해 신년사에도 이런 초심이 반영돼 있기를 희망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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