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6일 북한에 만나자고 공개 제의했다. 그는 이날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회동한 뒤 “북한의 카운터파트에게 직접 말하겠다”며 “일을 할 때이고 완수하자. 우리는 여기에 있고 당신들은 우리와 어떻게 접촉할지를 알고 있다”고 했다. 카운터파트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접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비건 대표는 “대통령의 지시로 우리는 북측과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균형 있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유연하게 협상할 것이며 실현 가능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창의적 방안을 제안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이 거론해온 ‘연말 시한’과 관련해 “미국은 데드라인이 없으며,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합의를 실천하기 위한 목표가 있다”고 했다. 비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비건이 던진 대북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북한이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라며 제시한 ‘연말 시한’에 미국은 얽매이지 않겠다는 점이다. 해를 넘겨 내년이 되더라도 북·미 양측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협상 열의가 식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은 균형 있는 합의를 위한 유연성 있고 실현 가능한 창의적 방안을 내놓을 것이며 북한의 모든 관심사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다고 한 것도 눈에 띈다.


비건 대표의 발언은 최근 짙어지는 북·미 간 ‘긴장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다시 협상모드로 복귀하자는 강력한 메시지로 평가할 수 있다. 비건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적인 대북 협상파이자, 최근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된 대북정책 핵심인사다. 그런 그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의 ‘중심 잡기’에 나선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북한으로서는 비건 대표의 대북 메시지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접 만나 비건이 강조하고 있는 ‘유연성’이 어떤 건지 확인해 본 뒤 판단해도 늦지 않다. 미국의 대화 제의에 화답한다고 해서 북한이 손해볼 일은 전혀 없다. 비건의 방한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유연한 태도가 북한에 필요하다.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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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이맘때면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사실상 전(前) 대통령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미국·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과는 달리 한·미동맹이 위계적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긴 해도 트럼프가 보여주는 일방적이고 무도한 행태는 반(反)동맹적이다. 7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선순환적으로 발전해온 한·미동맹의 본원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서울과 워싱턴의 외교안보 전문가 중 상당수는 사실과 동떨어진 트럼프의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가 한·미동맹의 건전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트럼프를 목전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근시안적 ‘동맹 파괴자’로 여긴다. 또한 극소수이긴 해도 트럼프의 저돌적 해결방식을 한·미동맹의 와해 내지 해체로 가는 전조(前兆)로 과잉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협량과 편견은 깊고, 오래갈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동맹의 침식(侵蝕)이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2019년 12월 7일 미국 플로리다 주 할리우드에서 열린 이스라엘아메리카평의회 전국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유지되고 있던 동맹이 약화되거나 해체되는 첫 번째 이유로 공동 적의 위협을 두고 동맹국들 모두의 인식 변화를 언급했다. 과거 소련의 위협이 약해지자 나토의 무용론이 회자(膾炙)된 것이 그 예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한·미가 함께 김일성·김정일 시대 북한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해왔다면 김정은시대 북한의 위협을 두고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 능력 증강과는 별개로 덜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적어도 1년 전에는 분명 그러했다. 


작년 9월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이 합의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남북은 비무장지대 11개 감시초소(GP)의 화기와 병력 등을 철수시키고 초소들을 파괴했다. 판문점공동경비 구역도 비무장화됐다. 이런 조치들은 외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동맹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축소되는 것으로 해석됐다. 


둘째, 동맹국 간 불신이 동맹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위기 발발 시 우위에 있는 동맹국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하위의 동맹국은 동맹을 이탈하거나 ‘중립적으로’ 위치를 옮기려고 한다. 1940년 히틀러의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루마니아가 히틀러의 패배가 짙어지자 소련으로 급선회한 사례가,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소련에서 미국으로 말을 바꿔 탄 경우가 그러했다. 동맹이 지정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하게 작동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국이 점차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는 경사론(傾斜論)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셋째, 한국과 미국의 인구 구성원들의 분포 변화와 이에 따른 정치·사회적 경향의 변화가 동맹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한·미 유권자들의 동맹에 대한 인식도 변할 것이며, 정치지도자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동맹의 혜택을 누려온 세대 내지 계층과 그렇지 않은 세대와 계층 간 이념적 갈등 양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정권 교체로 인한 동맹의 변화가 있다. 국가이익은 고정불변이 아니며 가변적이다. 단순히 정부의 교체(보수에서 보수 또는 진보에서 진보)나 합법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와 달리 정변이 발생하여 급격한 권력구조의 변동이 발생할 경우 국가이익에 기반을 두는 동맹의 패러다임 이동은 선명해진다. 혁명 프랑스 정부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끊은 일이 그랬으며, 볼셰비키 러시아가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은 일 등 사례가 적지 않다. 


66년간 정박되어 있던 한·미동맹호(號)를 묶은 밧줄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 혈맹도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잡초와 덩굴로 덮여버리는 정원처럼 되기 십상이다. 트럼프는 정원 관리비로 50억달러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하고 있다. 당분간 미국 주도 동맹의 매트릭스 위에서 우리 국가안보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더라도 트럼프 이후에는 한·미동맹이 인순고식(因循姑息)과 구차미봉(苟且彌縫)을 걷어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받들어 유실되지 않기를 고대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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