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1일(현지시간) 북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북한과 관련해 안보리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2년 만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5형’ 발사에 대응해 안보리가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던 2017년 12월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는 강경 일변도로 흐르지는 않았다. 북한의 도발 움직임을 경고하는 안보리 성명도 채택되지 않았고, 미국은 대북 협상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켈리 크래프트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를 거론하면서 “그 합의를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병행적이고 동시적으로 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에서 유연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무력시위에 나설 경우 “안보리는 응분의 행동을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빼놓지 않았지만 발언의 무게는 ‘유연성’에 실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크래프트가 언급한 동시·병행적 조치는 사실 미국의 기존 입장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이는 가능한 수준에서 합의를 이루고 신뢰를 쌓은 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단계적 비핵화 해법을 선호해온 북한의 입장과는 간극이 크다. 그런 만큼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도 현재로선 높지 않아 보인다. 다만 미국이 이 원칙을 협상 과정에서 유연하게 적용할 가능성을 시사한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오는 15일쯤 방한할 예정인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의 행보도 주목된다. 비건 대표는 방한기간 중 판문점 등에서 북한과 접촉하는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방한은 최근 고조되고 있는 북·미 긴장국면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연말 시한을 앞두고 북·미가 직접 접촉을 통해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낸다면 ‘파국시계’의 초침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연말 시한은 북한이 제시한 것이긴 하지만 미국도 내년 대선국면을 앞두고 북·미 협상이 파국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낸 채 미국과 충돌하는 사태는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우선 비건의 한국 방문이 북·미 판문점 대화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한반도 정세가 2년 전으로 회귀하는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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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한 외국공관의 한 외교관과 사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외교적 상황에 대해 맥락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한국의 외교관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한국 외교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 상황이 그렇다. 한국은 세계 최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냉전시대부터 이어져온 분단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중 패권경쟁으로 비롯된 ‘신냉전’ 기류의 여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한국만큼 복잡하고 중층적인 외교적 난제를 안고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1980년대 후반 냉전 구도 해체 전까지 한국은 미국의 날개 밑에서 비교적 안온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이 핵개발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하면서 북한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자 비로소 외교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국제관계 틀 속에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한국 외교의 복잡성을 극적으로 증대시킨 사건은 2008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였다. 금융위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파산과 함께 ‘세계유일 초강대국’ 지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중국이 굴기하기 시작해 곧바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면서 미·중이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세상이 됐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군사·외교력을 집중하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꺼내들었다. 미국의 군사력을 아시아 지역에 집중투사하고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을 새롭게 재편해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이에 편승한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우경화, 군사대국화로 치달았고 한·일 갈등이 증폭됐다. 미국의 이 같은 정책기조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더욱 거칠어진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아시아에서의 미·중 패권경쟁, 북핵 능력 고도화, 일본의 우경화 등이 만들어낸 안보 환경 변화가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떠밀고 있다. 안보를 한·미 동맹으로 대표되는 기존 질서에, 경제를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외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취약한 대외관계 구조 때문이다.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한국은 미·중의 협력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70년 가까이 이어진 한·미 군사동맹의 미래와 대(對)중국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한국 외교의 사활이 달려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방향성을 갖지 않고는 국가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 북핵문제와 남북관계는 물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중국해, 한·일 갈등,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주한미군 감축 등 한국이 갖고 있는 모든 민감한 외교 현안의 배경에는 모두 ‘미·중의 전략적 이익 충돌’이라는 공통의 요소가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OSOMIA) 파동과 방위비 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출발한 한·미 동맹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동맹으로 바꿔나가려 한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말할 때 한국은 북한을 떠올리지만, 미국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서 냉전과 식민지배의 잔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중 패권경쟁의 신냉전까지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관성처럼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에 의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당장 기존의 틀을 뛰쳐나가기도 어렵다.


이 같은 난관을 벗어나려면 전략이 있어야 한다. 전략을 세우려면 국가적 목표가 정해져야 한다. 국가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국가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부분에서 결함이 있다. 유독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감성적인 이상주의와 확증 편향, 지독하게 뿌리 깊은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가 건전한 담론 형성을 가로막고 여론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안보 문제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종북·빨갱이 또는 적폐·토착왜구 등으로 매도하는 조건반사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냉정한 현실 인식과 객관적 시각에 바탕을 둔 합리적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다면 한국이 처한 외교적 난관을 절대 헤쳐나갈 수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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