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대북 정보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는 허다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은 그 직후 부인 김성애가 체코에 있는 딸과 통화한 것을 포착해 알아냈다. 또 연평해전 때도 북한 함정이 본부와 교신하는 내용을 가로챘다. 이처럼 한·미 정보당국의 대북 정보는 인공위성과 정찰기, 그리고 지상의 시설을 통해 북한 내 영상 및 신호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 사람을 들여보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군의 최첨단 정찰기들이 연일 한반도 상공으로 출격하고 있다. 한 종류만 떠도 주목할 판에 여러 기종의 정찰기가 한꺼번에 날아들고 있다. 이 중에는 미 공군에 단 두 대밖에 없는 기종도 있다. 과거 긴장이 높았을 때도 대북 감시 시간이 20~22시간 정도라고 했는데 지금은 24시간 감시 상태에 있다. 주 임무는 미사일 발사를 전후로 발신되는 마신트(MASINT, 계측 및 기호정보) 수집이다. 신호와 음성 정보 수집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집중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찰기는 공격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머리 위에 늘 떠 있는 이 ‘척후병’들은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다. 이쯤 되면 미사일 이동은 물론 관련 기관과 주요 인사들 간 일상적인 통화·대화조차 불편할 것이다. 미 정찰기들의 출격은 북한을 향해 내부를 손바닥의 손금 보듯 다 들여다보고 있으니 도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그 덕분인지 북한의 도발이 성탄절에 이어 연말도 넘기는 분위기다. 지금은 미국의 무력시위가 정찰기들의 출동에 머물러 있지만 상황이 언제 급변할지 알 수 없다. 미 당국자들이 최근 북한 타격을 부쩍 자주 언급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미 정찰기들이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카데나 미 공군기지에서 출격하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이들은 수집한 정보를 한·미 공동 정보분석센터(오산)로 보내지 않고 주일미군에 직송하게 돼 있다. 1994년 북핵 위기 때 미국은 한국에 알리지도 않은 채 정보분석 요원들을 대거 입국시켜 북폭을 준비한 바 있다. 한국과 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빌 클린턴 대통령 때인데도 그랬다. 미 정찰기들의 출격을 마음 편하게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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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의 시기에 북한이 언제 미사일을 발사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처량할 정도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련의 무력과시 옵션을 사전 승인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 위협이 한반도를 뒤덮을 수 있는 현실은 암울하다. 미국의 대응으로 북한이 연말연시에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다.


이제까지 북한핵 문제 해결에 실패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국력과 군사력 그리고 국제사회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북한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대응하려 하지 않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내몰린 것은 물리적인 힘의 부족이 아니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인식능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말이다. 북핵 문제를 주도한 미국의 책임만이 아니다. 남의 일처럼 뒤에 숨어 눈치를 보거나 북핵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고자 했던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


냉정하게 현 상황을 평가해 보면 북·미 간 핵협상의 주도권이 북한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물리쳤다. 북한핵을 비난만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가 현 상황의 핵동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국과 중국을 방문해서 북한과의 대화를 요청했으나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간 것은 북한의 주도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면서 미사일을 발사할 듯하다가 조용해진 것은 미국의 군사적 압박 때문이라기보다 북한이 과거와 다른 행동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북한은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켰다.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뢰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상대방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은 강대국의 특권이다. 만일 크리스마스 선물이 블러핑(허풍·엄포)이라면, 이는 북한이 강대국의 전유물이던 게임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블러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과거처럼 신뢰성을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핵과 미사일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북한을 상대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이 말과 행동의 자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새로운 길’을 언급했다. 그러나 모두들 ‘새로운 길’보다는 미사일 발사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달을 보라고 하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 북한은 그동안 자신들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생존을 보장받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북한이 말한 비핵화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현 상황에서 동결하겠다는 것이지 자신들이 가진 핵과 미사일 능력을 제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의 개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때, 하노이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는 약속 위반이다.


북한이 주장한 ‘새로운 길’은 더 이상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접근방식을 모색하지 않고 완전한 핵 미사일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이를 위한 조건도 갖춰지고 있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지금의 분위기로 비추어 볼 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추가적인 유엔 안보리 제재에 찬성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유엔 안보리는 무력화될 수도 있다. 북핵 문제에서 비롯된 유엔 안보리 무력화는 미·중 패권경쟁과 맞물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국제질서 변화의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중앙의 균열은 항상 변방에서부터 시작된다.


북한은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2020년 미국의 대선정국은 북한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다. 대선기간 동안 북한은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새로운 길’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그들의 행동은 기존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새로운 길’ 선언으로 대화와 타협 방식의 북핵 해결은 불가능해졌다. 완전한 핵능력을 갖춘 북한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북핵을 그냥 인정하는 것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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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조선중앙통신은 “현 정세하에서 당과 국가의 당면한 투쟁 방향과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정책적 문제들이 상정됐다”고 전했다. 또 “혁명 발전과 변화된 대내외적 정세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국가의 전략적 지위와 국력을 가일층 강화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진군 속도를 높여나가기 위한 투쟁 노선과 방략”이 회의에서 제시될 것이라고 했다.


28일 북한 노동당 제7기 제5차 전원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이번 회의는 김정은시대에 개최된 5차례 당 전원회의가 하루 만에 끝난 것과 달리 이틀 이상 진행됐다. 정치국과 당 중앙위, 당 중앙검사위 성원 등 정규 참가자들 외에 노동당과 내각 성 및 중앙기관, 각 도 인민위원장, 시·군당 위원장 등이 방청객으로 대거 참석한 것도 이례적이다. 규모도 커지고 기간도 길어진 것은 북한이 현 정세를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유지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갖고 나올 것을 요구한 바 있다. 그 ‘연말 시한’이 성과 없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북한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정하는 중차대한 회의인 셈이다.  


김 위원장은 내년 1월1일 발표할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미리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대미 강경 노선과 자위적 국방력 강화, 자력갱생 경제발전 전략 등이 거론된다. 전원회의에서 ‘전략적 지위’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미뤄 핵보유국 지위 강화를 내세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어떤 것이 됐건 한반도 긴장지수를 끌어올리는 방향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안고 있는 고민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 정책을 고수하면서 북한의 선택지가 많지 않은 형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에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을 제출했고, 한국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대북 제재 일부 완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현 상황을 타개하려는 주변국들의 행보와 고민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1년 전인 지난해 12월30일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문 대통령과 자주 만나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한 논의를 진척시키고 비핵화 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고 했다.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지만, 한반도 평화를 이루겠다는 김 위원장의 초심은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사흘 뒤에 나올 새해 신년사에도 이런 초심이 반영돼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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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미국 간의 긴장이 한창인 가운데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지난 20일 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해 아베 신조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아베 총리는 회담에서 일본 자위대 구축함 1대와 대잠 초계기 1대를 이란 인근 해역에 파병할 계획에 대해 설명하며 사전 양해를 구하는 모양을 갖췄다. 로하니 대통령은 파병안을 투명하게 설명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했다. 아베 총리는 중동의 긴장완화와 안정화를 위해 일본 정부가 노력하겠다면서 이란이 미국 등과의 핵합의를 충실히 이행해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건설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란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2000년 이후 19년 만으로, 아베 총리의 지난 6월 이란 방문에 대한 답방 성격도 띠고 있다. 


경위야 어찌 됐건 미국의 맹방인 일본이 미국과 대립 중인 이란 대통령을 초청해 정상회담을 연 것은 주목을 끌 수밖에 없다. 미·일동맹의 영향으로 일본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선입견을 무색하게 한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이번 회담에서 미국과 이란 간에 모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이란관계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상황은 좋지 않다. 미국이 지난 9월 테러지원을 이유로 이란 중앙은행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면서 이란과 의약품 등 인도적 교역마저 중단됐다. 이란 중앙은행이 국내 시중은행에 개설한 원화계좌도 동결돼 이란 당국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대이란 제재가 한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외교 당국도 제재를 풀기 위해 미국과의 협의에 나서고 있지만 좀 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일본이 정상외교에 나선다고 해서 우리도 따라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선 소리나지 않게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현명한 대처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방식이건 최근의 중동 긴장이 한·이란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호르무즈해협 파병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수십년간 돈독하게 다져온 한·이란관계를 악화시킬 개연성이 다분하다. 이를 한·미동맹이나 방위비 분담금 등과 연계하려는 것도 온당치 않다. 명분도 없고, 득보다 실이 큰 파병은 백지화하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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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는 서로 원하는 바를 알 것이다. 지난 10월 스웨덴 만남 이후 북한은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내놓으라고 하고, ‘일단 만나자’는 미국의 요청에 묵묵부답이다. 북한은 새해에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단계를 밟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연말 시한을 거론하고 ‘새로운 길’을 공론화했다. 최고지도자의 체면이 있으니 뭐라도 할 것이다. 두 차례 ‘중대한 시험’ 실시, ‘전략적 핵전쟁 억제력’ 표현 등으로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관련된 모종의 조치를 연상하도록 했다. 김정은은 이달 초 백두산에 다녀온 뒤 말을 아끼며 신년사 내용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2년간 북·미 비핵화 대화를 이끌어온 핵심 키플레이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김정은의 ‘새로운 길’도 트럼프의 대응 방향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반도 정세는 트럼프의 상황 인식과 결정이 주요 변수인 셈이다. 내년에 트럼프의 가장 큰 목표는 대선 승리다. 국내 정치적 상황과 지지자 여론, 대선 캠페인의 득실이 대북 정책의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트럼프는 2018년 이후 북한에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쏘지 않고 핵실험도 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북한 비핵화를 서두르지도 않겠다고 한다.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없었다는 점은 트럼프의 외교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기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가 김정은을 “좋은 관계”라고 적당히 띄워주고 군사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면 대선 가도에 나쁘지 않다고 볼 것이다.


김정은의 처지는 트럼프와 다르다. 비핵화 결단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트럼프를 두 번 만났지만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실질적 이익은 별로 없다. 현재로선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다. 북한은 더는 기다려주지 못하겠다는 태도다.


내년 한반도 정세를 낙관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으로 판을 크게 흔들 것이라는 관측, 미국의 강력 대응을 초래하고 중국·러시아도 불편해할 레드라인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교차한다.


서로가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양측의 기본 입장을 일단 견지하면서도 교착상태를 탈피해 협상 테이블에서 만날 구실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북·미가 격렬하게 부딪치다가도 협상을 앞두고는 체면을 세워줬다. 지난해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을 했던 빈센트 브룩스는 “북한의 ‘체면 지키기’라는 문화적 요소를 항상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들(북한)이 변화하면 우리(미국)도 변화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일부 완화 결의안’ 시도는 북한의 군사행동에 따른 상황 악화 방지를 위한 체면 살리기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북·미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한 제재 완화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지 않고선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기 어려운 입장을 감안한 것이다. ‘비핵화 이전 최대의 압박 유지’ 입장이 분명한 미국이 일부 제재 해제에도 공개적으로 동의해줄지는 미지수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유예가 주목받는 것은 실현 가능성을 감안해서다. 북한은 연례적인 한·미 연합훈련에도 ‘전쟁연습을 하면서 무슨 대화냐’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낸다. 지난해 북·미 대화의 촉매제도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었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중단으로 화답했다. 이번에도 이런 주고받기로 대화판을 깐다면 트럼프는 북한의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을 유지하면서 원칙을 깨지도 않고 외교적 성과도 훼손되지 않는다. ‘대선에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놨던 트럼프도 대화 유지 틀에서 ‘북한 변수’ 관리가 가능하다.


그렇게 상황이 진전되면 비핵화 조치와 제재 완화 문제를 논의하는 협상의 본궤도에 들어갈 수 있다. 북한은 ‘제도적 안정을 위한’ 체제 안전보장과 ‘발전권을 위한’ 제재 완화를 비핵화 협상의 조건으로 요구한다. ‘원샷딜’은 비현실적이다. 비핵화 실무협상을 총괄하는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주 서울에서 판문점 회동을 제안하며 “‘타당성 있는 단계’와 ‘유연한 조치’로 균형 잡힌 합의에 이를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확인하고, 1단계 비핵화와 일부 제재 완화를 고려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찌 됐건 시급한 일은 북·미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연말·연초 고비를 넘기면 기회가 오도록 말이다.


<안홍욱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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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4일 한·중·일 비즈니스 서밋에서 “동북아에서 철도공동체를 시작으로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 평화안보 체제를 이뤄낸다면 기업의 비즈니스 기회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며 남북 철도·도로 연결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전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러의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완화 추진 결의안에 대해 논의한 데 이어 리커창 총리와의 회담에서도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통한 동북아 철도공동체를 함께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문 대통령이 방중 기간 동안 연이틀 동북아 철도공동체 구상을 밝힌 것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물론 정부가 미국과의 대북공조 대열에서 이탈해 중국·러시아와 함께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모르지 않는다. 더구나 중·러가 지난 16일 유엔에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 초안을 제출하고, 미국이 반대하고 나서는 등 대북 제재를 둘러싼 공방이 벌어진 민감한 시점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쓰촨성 청두 세기성 박람회장에서 열린 한중일 비즈니스 서밋에 참석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번 비즈니스 서밋은 대한상공회의소·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일본경제단체연합회 등 한중일 경제인들이 주최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의 동북아 철도공동체 구상은 빈사 상태에 빠진 북·미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내겠다는 충정으로 해석하는 게 온당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대북 제재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은 대북 제재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남북이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 착공식을 한 지 26일로 1년을 맞지만 후속 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 대한 기대를 접고 내년에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힌 상태다. 내년 한반도가 2017년을 방불케 하는 긴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북·미 경색은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 북한은 지난해 북·미 협상에 앞서 풍계리 핵실험장 해체 등 선제조치에 나섰지만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크다. 영변 핵시설 해체와 대북 제재 완화를 맞바꾸자는 하노이 제안도 미국은 거부했다. 반면 북한은 비핵화의 전체 그림을 제시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양측이 한 발짝씩만 뒤로 물러났더라면 해결할 수 있는 쟁점들이었다.  


중국 환구시보는 최근 시평에서 “제재를 완화하면 북한은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북·미 간 상호 신뢰도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중·러의 제재 완화 결의안을 뒷받침하는 취지이지만, 논리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대북 제재를 유지하면 할수록 북한은 핵능력을 더 고도화하는 ‘제재의 역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미국은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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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4일 중국 청두에서 45분간 회담했다. 한·일 정상회담은 지난해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성사된 데 이어 15개월 만이다. 30분 예정이던 회담시간을 15분 넘겨 진행된 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려면 직접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또 “일본과 한국은 역사적·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교역과 인적 교류에서도 더욱 중요한 매우 큰 동반자”라며 “잠시 불편함이 있어도 결코 멀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했다. 아베 총리도 양국은 중요한 이웃이라면서 “저로서도 중요한 일·한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며 “오늘은 솔직한 의견 교환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화답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리커창 중국 총리 24일(현지시간) 한중일 협력 20주년 행사가 열리는 중국 쓰촨성 청두 두보초당에 입장하고 있다. 두보초당은 당나라 시인 두보가 머무른 곳이다. 연합뉴스


한·일 간 현안과 관련해 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7월1일 이전 수준으로 조속히 회복돼야 한다”고 했고, 아베 총리는 “수출 당국 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했다. 수출규제 해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시점을 확정짓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도 양국 간 입장 차를 확인하면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데 공감했다고 청와대가 설명했다. 


외견상 별 소득이 없어 보이는 회담이었다. 하지만 한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한·일관계다. 지난 몇년에 걸쳐 켜켜이 쌓인 불신, 오해가 통역을 낀 45분간의 대화에서 모두 풀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두 정상이 ‘솔직한 대화’를 강조하면서 자주 만나자는 데 뜻을 모은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중국 쓰촨성 청두 세기성 샹그릴라호텔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상외교의 미덕은 최고지도자끼리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대화를 거듭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사이에 엉킨 매듭도 자연히 풀리게 마련이다. 물론 알맹이 없는 만남을 반복해서는 안되겠지만, 꼭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는다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굴곡이 많은 한·일 간에는 만남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긴요하다. 이날 회담을 기점으로 한·일 정상이 ‘셔틀외교’ 방식으로 정례 회담을 지속한다면 양국 간에 깊게 팬 골은 메워질 것이다. 


일본은 회담 나흘 전인 지난 20일 반도체 소재인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수출규제 완화 조치를 취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일본은 수출규제의 원상회복 절차에 속도를 내주기 바란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해법 마련에 지혜를 모아줄 것을 당부한다. 두 정상이 한목소리로 밝힌 ‘솔직한 대화’가 향후 양국관계를 풀어나가는 기본 덕목이 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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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 광둥성 잉더(英德)시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은 단순했다. ‘고사리손이 어른 손을 잡는’ 방식으로 가정마다 ‘ETC’를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ETC는 고속도로 통행료 자동 결제 장치로 중국판 ‘하이패스’다. 학교가 아이들을 동원해 어른들에게 ETC 등록을 강요한 것이다. 편지에 동봉된 회신문은 한술 더 떴다. 학부모 이름, 소유 차량 대수, 차량번호, ETC 단말기 설치 여부를 적어 제출하게 돼 있었다. 학부모들은 차량번호까지 조사한 것은 명백하게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며, 학생들의 피교육권까지 훼손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최근 중국 정부는 전국 고속도로의 ETC화를 추진하고 있다. 요금수납원이 있는 차로를 대폭 줄여 ETC 사용을 확대하겠다는 의도다. ETC 단말기를 설치하면 무엇보다 통행료를 내기 위해 차를 세우고 지불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시간도 절약된다. 요금소 주변 정체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국 정부의 ETC 보급은 강제적이다. ‘고사리손’까지 끌어올 정도니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나오고 있다. 후난성 등 일부 지역의 톨게이트에서는 수납원 차로를 아예 없앴다. 


샤먼시 북역 고속도로 요금소는 “ETC 미장착 차량, 국가적 호소에 응답하지 않은 차량은 고속도로 사용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ETC 단말기를 설치하지 않은 차량은 매년 받아야 하는 자동차 검사도 받지 못한다. 사실상 운행금지나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용의 편리성을 부각시키거나 할인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차주들을 핍박한다. 괴로운 건 운전자뿐이 아니다. ETC는 각 은행 카드와 연동해 요금을 지불하게 돼 있는데 전용카드 판매 실적 할당을 채우지 못하면 문책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은행마다 카드 가입자를 끌어모으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내년 1월1일부터 중국 고속도로 요금소의 대부분 통로가 ETC 전용으로 바뀔 예정이다. 현금 및 전자페이 같은 수납원을 통한 방식은 대폭 줄인다. 충분한 준비기간 없이 이뤄진 갑작스러운 정책에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9일에는 광둥성에 사는 뤄모씨는 구이린(桂林)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다 저지당했다. 차량에 ETC를 설치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고속도로 관리원은 당장 설치하지 않으면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고 했고, 구이린에서 다시 나올 수 없다는 협박까지 했다. 차에는 임신한 아내가 타고 있었다. 뤄씨는 실랑이 끝에 2시간 만에야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교통운수부는 연말까지 ETC 이용률을 90% 이상 높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요금소마다 1개의 수납원 통로는 유지해야 하지만, 지방정부는 수납원 통로를 아예 없애는 방식으로 성과 달성에 나선 상태다.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정부가 직접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편리함을 내세우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빅데이터 수집을 진짜 이유로 꼽는다. 4차산업 흐름 속에서 빅데이터 패권을 노리는 중국은 14억 인구를 기반으로 각종 데이터 수집에 집중하고 있다. ETC는 데이터 확보에 효과적 수단이다. 


그러나 운전자의 동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서 발생하는 사생활 침해는 보호막이 없다. 고속도로 ETC가 아니더라도 공항, 지하철역, 기차역 등에 설치된 안면인식 카메라로 개인 사생활은 훤히 드러난다.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빅브라더’의 도래가 바짝 다가온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중국인들에게는 없다. 혹시 교통수단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모를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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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3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열어 북·미 대화 촉진과 한·중관계 복원 방안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중국에 북·미 대화 중재를 요청했다. 시 주석은 “중국과 한국은 북·미가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게 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북·미 대화가 교착에 빠지고 북한이 도발을 언급하는 상황에서 두 정상이 대화를 강조한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두 정상이 양국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의 관계 발전을 강조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베이징 _ 연합뉴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북·미 대화를 중재해달라고 요청한 점이다.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가 중단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한·중 양국은 물론 북한에도 결코 이롭지 않다”며 중국의 중재를 공개적으로 당부했다. 북·미 대화가 교착에 빠지고 남북관계마저 얼어붙은 현시점에서 북한의 도발을 막고 북·미 대화를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에 시 주석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중 입장이 일치한다면서 대화를 통한 해결 방식을 지지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대북제재 완화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고 한다. 중국이 조만간 북·미 대화 중재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두 정상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로 소원해진 양국관계 발전을 논의했다. 문 대통령은 인화를 강조한 맹자의 말을 인용, 한·중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시 주석도 “우리는 줄곧 긴밀하게 협력해온 친구이자 파트너”라며 “양자관계가 새롭고 더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도록 견인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두 정상이 한목소리로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심화하자고 한 것은 인상적이다. 양국관계가 정상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낳는다. 반년 만에 만난 두 정상이 예정된 시간보다 25분 넘겨 총 55분간 대화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오찬까지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북·미 대화가 연말 시한을 넘기고 북한이 성탄절이나 신년사를 통해 강경 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 위험한 물길을 돌리는 데 중국의 역할이 요구된다. 중국이 ‘한한령’을 3년 넘게 유지하는 것도 양국관계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시 주석의 방한이 성사돼 한·중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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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가짜뉴스’ 타령이다. 자신의 비행을 폭로하거나 비판한 언론 보도를 가짜뉴스로 ‘퉁치는’ 행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가짜뉴스 논쟁은 지금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남미의 트럼프’라는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아마존 대형산불’에 대한 책임을 묻는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했다. 보수반동 지도자들만이 가짜뉴스 운운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끝난 영국 총선이 가짜뉴스 홍수에 뒤덮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짜뉴스 풍년이다.


그동안 거짓 뉴스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해도 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 무대인 정치의 영역에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뉴스를 언론에 흘리거나,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는 경우가 빈발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은 오랜 시간 ‘폭도’ ‘북한군 개입설’에 시달렸고, 얼토당토않은 이 가짜뉴스를 지금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동안 가짜뉴스 검증에 게을렀거나 회피했던 언론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기레기 논란은 과거 잘못에 대한 업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가짜뉴스를 쟁점화하는 쪽의 의도가 대개 불순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가짜뉴스를 진짜 걸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안이든 가짜뉴스 프레임을 덧씌워 논점을 흐리려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를 매개로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비리 조사를 압박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마녀사냥’ ‘가짜뉴스’라는 말로 덮으려 한다. 18일 탄핵소추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트럼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보우소나루는 무분별한 개발정책이 아마존 산불을 초래했다는 국제사회 비판을 “브라질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가짜뉴스 캠페인”이라고 했다.


치부를 덮는 데도 동원됐다. 홍콩 정부는 경찰의 홍콩 시위 강경진압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보도를 ‘가짜뉴스’로 규정한 뒤 일부 언론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홍콩 경찰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판했다. 경찰의 실탄 발사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시위 와중에 실명하고 사망한 사람까지 나왔음에도 가짜뉴스라고 우긴 꼴이다. 중국 외교부는 신장(新疆) 위구르 소수민족 박해 의혹을 지난 16일 트위터로 비판한 아스널 축구스타 메수트 외질을 향해 “가짜뉴스에 속은 것 같다”고 했다.


급기야 근대적 민주 정치가 제일 먼저 싹텄다는 영국 총선도 가짜뉴스로 뒤덮였다. 집권당인 보수당은 제1야당인 노동당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정책을 담당하는 의원이 관련 질문을 받고, 답변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한 영상을 퍼뜨렸다가 사과했다. 야당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영국 런던 브리지에서 발생한 무슬림 흉기난동 사건을 두고 ‘보수당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공작이었다’는 가짜뉴스가 노동당 지지자들의 페이스북에 떠돌기도 했다.


한국이라고 예외겠는가. 탄핵 이후 기반이 허물어진 보수강경 세력은 한풀이하듯 ‘가짜뉴스 타령’을 해왔다. 우리공화당은 “거짓 촛불이 조작한 가짜뉴스로 죄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불법적으로 탄핵했다”고 몇 년째 주장한다.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하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태극기 세력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최근 민의의 전당 국회에까지 난입해 가짜뉴스 타령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추종하는 세력이 국정농단으로 몰락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꺼냈을 것이다.


문제는 여권에서도 ‘가짜뉴스를 잡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는 저널리즘의 신뢰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언론의 공정성과 자유를 해친다”고 했다. 여당은 가짜뉴스를 방치하는 유튜브에 과징금을 물리는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물론 여권 말처럼 극우 유튜버 등이 퍼뜨리고 있는 가짜뉴스들의 폐해가 적지 않다. 근거가 약하거나, 근거가 아예 없는 가짜 뉴스들이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사례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짜뉴스를 쟁점화하는 측 의도가 불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비판여론을 옥죄려 한다는 야당 주장에 빌미를 줄 수 있다. 가짜뉴스 판정은 누가 할 것인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이 지천에 깔렸다. 정부가 가짜뉴스 판정을 내리면, “사실은 XXX한 이유 때문에 가짜뉴스로 몰고 간다더라”는 식의 또 다른 가짜뉴스가 퍼질 것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나 보우소나루의 단골메뉴인 가짜뉴스라는 말을 촛불 대통령이 언급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자체가 개운치 않다.


<이용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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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고등법원이 정부가 “이란 다야니 가문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 대한 유엔 국제중재판정부 판정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지난해 6월 내려진 중재판정은 최종 확정됐다. 정부는 다야니 측에 730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판결의 의미는 매우 크다. ‘양자협정의 독소조항인 ISD를 현실에 맞게 바꾸라’는 주문이자, 경고다. 


이번 사건은 2010년 4월 다야니 가문의 싱가포르 회사 D&A를 통한 대우일렉트로닉스(대우일렉) 인수과정에서 투자확약서상 자금부족 사실이 드러나, 계약해지와 계약금 578억원을 몰취당하면서 불거졌다. 다야니 측은 서울중앙지법에 낸 매수인 지위 인정 등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자, ISD를 제기했고 중재판정부에 이어 제3국 법원이 다야니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ISD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한 국가의 부당한 대우, 정책 변화로 손해를 입었을 때 국제기구의 중재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투자자 보호가 핵심으로 최근 기업 승소율은 70%에 달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공정책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커, 학계와 시민단체 등은 끊임없이 폐기 또는 개선을 주문해왔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지금까지 제기된 ISD는 청구액 1000억원 이상만 5건으로 총 규모는 9조원에 이른다. 인수·합병 등 과정에서 손해배상은 물론 정부의 토지수용정책에 대한 ISD도 제기된 바 있다. 최근에는 전기요금 감면·제주 영리병원 허가취소·하청노동자 정규직 전환 등 정부 정책에 대한 ISD 제기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ISD 소송 대상을 정부 공기업까지 확장한 중재판정을 받아들인 영국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정부는 다야니소송에서 “한국 정부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채권단에 있는 캠코가 공기업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투자는 D&A가 했으므로 다야니 가문은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주장도 기각됐다. 중재판정-취소소송 과정에서 국내 법원의 판단은 반영되지 않았다.


해외 직접투자 규모가 국내투자보다 많은 상황에서 ISD의 전면 폐기는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빈부격차 해소 등을 위한 공공정책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당장 ISD 개선에 나서야 한다. 투자보장협정과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잘못된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론스타 사례처럼 ‘페이퍼 컴퍼니’까지 제소가 가능토록 한 조항은 없애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유럽연합 등이 ISD를 대신할 기구로 추진 중인 상설투자법원 설립도 검토해야 한다. 막대한 소송비용 유출을 막기 위한 국제소송전문가 양성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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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까지 북·미 간 비핵화 협상타결은 불가능해 보인다. 애초 연말 시한을 설정한 것은 북한의 자충수다. 트럼프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 시한을 무시해야 국내정치적으로 더 유리해지는 패였기 때문이다. 북한은 거꾸로 판단했을 수 있다. 협상 결렬 이후 북한이 도발하게 되면 트럼프의 재선가도에 큰 타격이 될 것이므로, 그전에 협상에 적극 나설 것으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는 중대한 오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정치문법을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한 것이다. 북한 문제는 미국 정치에서 판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변수가 아니다. 의료보험, 경제, 이민 문제 등에 비해 정치권 및 유권자들의 관심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미시간주 배틀크리크 켈로그아레나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집회’에 나와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배틀크리크 _ AFP연합뉴스


사실 한국 정부도 비슷한 오류를 범해오고 있지 않나 싶다. 작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후 일부 외교안보 관계자들은 트럼프가 11월에 있을 미국 중간선거에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협상 타결에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전망에 근거해 평양회담의 여세를 몰아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연내에 추진해서 종전선언에 이은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까지 일사천리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막상 중간선거 일정이 시작되자 트럼프는 자기 선거유세 일정이 바쁘다면서 북·미 정상회담을 선거 이후로 한참 미뤘고, 그렇게 해서 잡힌 회담이 금년 2월의 하노이 회담이었다.


이 오판은 지속됐다. 북한이 4월에 연말로 협상시한을 설정하자, 내년도 대선국면에 들어서면 트럼프가 선거일정으로 바빠질 테고, 또 대선에서 본인의 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올해 말까지 협상 타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아니, 한국 정부가 더 적극 나서 연말까지 타결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6월 말 판문점에서 트럼프·김정은의 깜짝 만남이 성사되고, 실무협상을 재개하기로 하자 이 같은 전망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아는 바와 같다. 탄핵 국면이 시작되면서 북핵 문제는 미국 내 정치담론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제 노딜이 가시화되자 미국에선 다시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전망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은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예고했고, 이달 들어 두 차례에 걸쳐 미사일 엔진연료 시험으로 추정되는 “중대한 시험”을 했다. 위성발사를 가장한 ICBM 발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후로 추정한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내년에는 어떤 형태로든 도발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사실 트럼프식 대북 유화적 접근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에선 북한의 도발을 오히려 바라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제 북한이 도발할 경우 트럼프의 재선가도에 심각한 타격을 줄까? 지극히 회의적이다. 도발의 책임을 트럼프에게 돌리기보다는 북한을 비난할 미국 유권자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물론 미 민주당이야 트럼프의 대북 정책 실패를 성토하겠지만 별로 효과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절대다수의 미국민들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협상을 통해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극히 소수다. 그러니 북한의 도발로 인해 트럼프가 받을 정치적 타격 또한 그리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군사적 수단에 의한 북핵해결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입장에선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북한이 도발할 경우 한국은 고조될 군사적 긴장과 충돌로 인해 가장 직접적이고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될 당사국이 된다. 당연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도록 제어해 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 이유는 한국 정부가 스스로의 역할을 북핵협상의 ‘촉진자’나 ‘중재자’로 자임하면서 수동적으로 제한해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과 미국의 셈법이 있다면, 이들과 다른 “한국의 셈법”도 당연히 필요하다. 여러 전략적 이슈를 복합적으로 연계해서 강온전략을 구사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선의에 기반한 온건평화 전략으로만 일관하지 않나 싶다. 수가 너무 뻔히 읽힌다. 1970년대 미·소 신데탕트가 시작된 계기는 어느 쪽에서 먼저 선제 핵공격을 하든지 간에 공격받은 쪽이 남은 핵전력으로 선제공격 상대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비롯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선, 유화적 접근 못지않게 한국의 독자적인 핵억지 군사능력 향상이 필수다. 평화를 위해선 강군을 육성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지만, 보다 더 과감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야 협상에서뿐만 아니라 실질 군사능력 면에서도 북·미에 대한 최소한의 압박능력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룩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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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이 연말 협상 시한을 앞두고 대화에 나서기는커녕 군사적 긴장을 계속 높이고 있다. 찰스 브라운 미국 태평양공군사령관은 17일 기자들에게 “내가 예상하기로는 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일종이 (북한이 언급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이라며 “(남은 것은 쏘는 시점이) 성탄전야냐, 성탄절이냐, 신년 이후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교적 접근이 실패할 경우 2017년 북·미 대치 상황에서 검토했던 많은 수단들을 동원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서 전략폭격기 등의 한반도 전개 가능성까지 열어뒀다. 북·미 모두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여서 유감스럽다.


[시사 2판4판]산타클로스 선물. 김용민 화백


브라운 사령관의 언급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강력하게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도발을 좌절시키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브라운 사령관이 전략자산 전개를 언급한 것은 도를 넘어선 부적절한 처사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을 감안할 때 브라운 사령관의 발언은 북한을 자극해 도발의 길로 몰아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름으로 연말까지 미국과 협상하지 못하면 장거리미사일발사 등 강경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예고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북·미가 2년 전처럼 전쟁국면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을 내가 동결했다”고 자랑해온 것이 물거품이 된다. 국방연구원은 협상이 결렬되면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나 다탄두 ICBM 개발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을 비핵화하기는커녕 북한의 핵개발을 방조한 셈이 된다. 북한도 함경북도 풍계리 핵 실험장까지 폭파한 대가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부장관 지명자가 19일부터 이틀간 중국을 전격 방문한다. 이번 방중 목적은 일단 중국과 러시아를 대북 제재의 틀 안에 묶어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북한과의 접촉을 기대한다는 미국의 신호도 들어 있다. 북·미 양측은 비건 대표가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접촉해야 한다.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이끄는 중국의 중재도 기대한다. 북한이 크리스마스에 무력도발을 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선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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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의 공저자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달 미국 코넬대에서 열린 학술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장군들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들, 즉 대통령, 총리의 손에서 죽는다. 시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이해했을 땐 너무 늦다.”


레비츠키 교수는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미국 역시 남미 국가들이 지난 세기 연속되는 쿠데타와 독재를 경험할 때 맞닥뜨린 것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인물과 세력을 ‘경쟁자’를 넘어 ‘적’으로 규정하는 ‘관용의 고갈’, 즉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적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촉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적 경쟁자를 향해 ‘반역자’ ‘인간쓰레기’라는 욕설을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깊이 결부돼 있다.


‘연방정부 셧다운’과 함께 2019년을 시작한 미국이 올 한 해 보여준 모습을 돌아보면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징후는 분명해 보인다. 35일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을 야기한 쟁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남부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이었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거액의 장벽 건설 예산에 대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잘랐고,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가 몇 달, 몇 년이 멈춰서도 상관없다”고 버텼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 다른 예산에서 장벽 건설 예산을 끌어오고, 민주당은 이 조치를 법원에 제소함으로써 각자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끝났다. 법원은 나중에 트럼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여당과 야당이 국가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놓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을 기본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정부가 한 달 이상 멈춰서는 진통에도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면 정치의 기능 부전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3년차였던 올해도 쉼없이 ‘분열의 정치’를 구사했다.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사에 대해 조롱과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임명한 각료나 고위 공직자일지라도 지시를 거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민주당은 마침내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심판대 위에 올렸다. 그가 정치적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부패 의혹을 조사하라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압박하면서 군사원조와 백악관 초청을 지렛대로 사용해 권한을 남용한 혐의를 포착했고, 이를 조사하려는 의회의 헌법적 권한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이 조만간 본회의를 열어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면 무대는 상원으로 옮겨지지만 트럼프가 강제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상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전광석화’처럼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배경엔 공화당 지지자 10명 중 8명은 탄핵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자라잡고 있다. 물론 민주당 지지자 10명 중 9명은 탄핵에 찬성한다.


미국인들은 2020년 ‘선거의 해’를 맞는다. 앞서 말한 코넬대 학술행사에서 한 정치학자는 내년 대선과 관련해 일견 황당한 상상으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한번 유권자 투표에서 지고도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길 경우 친트럼프·반트럼프 집단이 워싱턴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심지어 교외에선 무장 민병대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이 정치적 폭력을 일부 용인할 의향이 있고, 4명 중 1명은 정당별로 나라를 쪼개면 좋겠다고 응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리던 미국의 현주소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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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6일 북한에 만나자고 공개 제의했다. 그는 이날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회동한 뒤 “북한의 카운터파트에게 직접 말하겠다”며 “일을 할 때이고 완수하자. 우리는 여기에 있고 당신들은 우리와 어떻게 접촉할지를 알고 있다”고 했다. 카운터파트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접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비건 대표는 “대통령의 지시로 우리는 북측과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균형 있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유연하게 협상할 것이며 실현 가능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여러 창의적 방안을 제안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이 거론해온 ‘연말 시한’과 관련해 “미국은 데드라인이 없으며, 역사적인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합의를 실천하기 위한 목표가 있다”고 했다. 비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비건이 던진 대북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북한이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 오라며 제시한 ‘연말 시한’에 미국은 얽매이지 않겠다는 점이다. 해를 넘겨 내년이 되더라도 북·미 양측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협상 열의가 식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은 균형 있는 합의를 위한 유연성 있고 실현 가능한 창의적 방안을 내놓을 것이며 북한의 모든 관심사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다고 한 것도 눈에 띈다.


비건 대표의 발언은 최근 짙어지는 북·미 간 ‘긴장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다시 협상모드로 복귀하자는 강력한 메시지로 평가할 수 있다. 비건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적인 대북 협상파이자, 최근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된 대북정책 핵심인사다. 그런 그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의 ‘중심 잡기’에 나선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북한으로서는 비건 대표의 대북 메시지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적극적인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접 만나 비건이 강조하고 있는 ‘유연성’이 어떤 건지 확인해 본 뒤 판단해도 늦지 않다. 미국의 대화 제의에 화답한다고 해서 북한이 손해볼 일은 전혀 없다. 비건의 방한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유연한 태도가 북한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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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이맘때면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사실상 전(前) 대통령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미국·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과는 달리 한·미동맹이 위계적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긴 해도 트럼프가 보여주는 일방적이고 무도한 행태는 반(反)동맹적이다. 7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선순환적으로 발전해온 한·미동맹의 본원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서울과 워싱턴의 외교안보 전문가 중 상당수는 사실과 동떨어진 트럼프의 위협적이고 과장된 언사가 한·미동맹의 건전성에 도움이 안된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트럼프를 목전의 이익에만 혈안이 된 근시안적 ‘동맹 파괴자’로 여긴다. 또한 극소수이긴 해도 트럼프의 저돌적 해결방식을 한·미동맹의 와해 내지 해체로 가는 전조(前兆)로 과잉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협량과 편견은 깊고, 오래갈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동맹의 침식(侵蝕)이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2019년 12월 7일 미국 플로리다 주 할리우드에서 열린 이스라엘아메리카평의회 전국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유지되고 있던 동맹이 약화되거나 해체되는 첫 번째 이유로 공동 적의 위협을 두고 동맹국들 모두의 인식 변화를 언급했다. 과거 소련의 위협이 약해지자 나토의 무용론이 회자(膾炙)된 것이 그 예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하면, 한·미가 함께 김일성·김정일 시대 북한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해왔다면 김정은시대 북한의 위협을 두고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 능력 증강과는 별개로 덜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적어도 1년 전에는 분명 그러했다. 


작년 9월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남북이 합의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남북은 비무장지대 11개 감시초소(GP)의 화기와 병력 등을 철수시키고 초소들을 파괴했다. 판문점공동경비 구역도 비무장화됐다. 이런 조치들은 외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동맹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축소되는 것으로 해석됐다. 


둘째, 동맹국 간 불신이 동맹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위기 발발 시 우위에 있는 동맹국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하위의 동맹국은 동맹을 이탈하거나 ‘중립적으로’ 위치를 옮기려고 한다. 1940년 히틀러의 독일과 동맹을 맺었던 루마니아가 히틀러의 패배가 짙어지자 소련으로 급선회한 사례가,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소련에서 미국으로 말을 바꿔 탄 경우가 그러했다. 동맹이 지정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이런 유혹은 더욱 강하게 작동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국이 점차 중국으로 기울고 있다는 경사론(傾斜論)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셋째, 한국과 미국의 인구 구성원들의 분포 변화와 이에 따른 정치·사회적 경향의 변화가 동맹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한·미 유권자들의 동맹에 대한 인식도 변할 것이며, 정치지도자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동맹의 혜택을 누려온 세대 내지 계층과 그렇지 않은 세대와 계층 간 이념적 갈등 양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정권 교체로 인한 동맹의 변화가 있다. 국가이익은 고정불변이 아니며 가변적이다. 단순히 정부의 교체(보수에서 보수 또는 진보에서 진보)나 합법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와 달리 정변이 발생하여 급격한 권력구조의 변동이 발생할 경우 국가이익에 기반을 두는 동맹의 패러다임 이동은 선명해진다. 혁명 프랑스 정부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끊은 일이 그랬으며, 볼셰비키 러시아가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은 일 등 사례가 적지 않다. 


66년간 정박되어 있던 한·미동맹호(號)를 묶은 밧줄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 혈맹도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잡초와 덩굴로 덮여버리는 정원처럼 되기 십상이다. 트럼프는 정원 관리비로 50억달러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하고 있다. 당분간 미국 주도 동맹의 매트릭스 위에서 우리 국가안보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더라도 트럼프 이후에는 한·미동맹이 인순고식(因循姑息)과 구차미봉(苟且彌縫)을 걷어내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받들어 유실되지 않기를 고대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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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지난 7일에 이어 엿새 만인 지난 13일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북한 국방과학원 대변인은 14일 담화에서 이같이 밝히고, “최근에 우리가 연이어 이룩하고 있는 국방과학 연구성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믿음직한 전략적 핵전쟁 억제력을 더 한층 강화하는 데 적용될 것”이라고 했다. 주목할 것은 이번 실험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전략적 핵전쟁 억제력’이라고 밝힌 점이다. 국방과학원에 이어 7시간 뒤 북한군 서열 2위인 박정천 총참모장이 담화를 내고 최근의 시험이 “미국의 핵 위협을 확고하고도 믿음직하게 견제, 제압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무기 개발에 적용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13일의 ‘중대시험’을 발표하면서 군 고위당국자까지 동원해 ‘핵 억제력’ ‘전략무기’ 등을 언급한 것은 심상치 않다. 보통 핵 억제력은 상대방의 핵 공격과 위협을 핵무기를 통해 방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지난 7일과 13일에 실시한 시험은 인공위성 발사가 아니라 핵무기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요컨대 북한은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엔진 시험이 중대 성과를 거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행동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위협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라면서 설정한 연말 시한을 앞두고 대미 압박수위를 극단까지 끌어올리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북핵 위기 때마다 반복돼 온 벼랑 끝 전술이 또다시 되풀이되는 현실에 유감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엄중한 정세 속에서 15일 방한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손에 어떤 대북 제안이 들려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가 내놓는 대북 메시지의 수위와 북한의 반응이 한반도 정세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비건 대표는 방한 전 “미국의 방침은 변한 게 없다”고 했지만 중요한 담판을 앞두고 말을 아꼈을 수 있다. 북한 박 총참모장이 담화에서 “대화도, 대결도 낯설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은 북한도 일단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비건의 방한은 ‘연말시한’을 앞두고 한반도 대결국면을 진정시킬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북한도, 미국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상대방의 패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강 대 강’ 대치는 소모전일 뿐이다. 양측이 조금만 열린 태도로 나선다면 극적인 타협을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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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1일(현지시간) 북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미국이 북한과 관련해 안보리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2년 만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5형’ 발사에 대응해 안보리가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던 2017년 12월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는 강경 일변도로 흐르지는 않았다. 북한의 도발 움직임을 경고하는 안보리 성명도 채택되지 않았고, 미국은 대북 협상에서 유연성을 발휘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켈리 크래프트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를 거론하면서 “그 합의를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병행적이고 동시적으로 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에서 유연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무력시위에 나설 경우 “안보리는 응분의 행동을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빼놓지 않았지만 발언의 무게는 ‘유연성’에 실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크래프트가 언급한 동시·병행적 조치는 사실 미국의 기존 입장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이는 가능한 수준에서 합의를 이루고 신뢰를 쌓은 뒤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단계적 비핵화 해법을 선호해온 북한의 입장과는 간극이 크다. 그런 만큼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도 현재로선 높지 않아 보인다. 다만 미국이 이 원칙을 협상 과정에서 유연하게 적용할 가능성을 시사한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오는 15일쯤 방한할 예정인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의 행보도 주목된다. 비건 대표는 방한기간 중 판문점 등에서 북한과 접촉하는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방한은 최근 고조되고 있는 북·미 긴장국면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연말 시한을 앞두고 북·미가 직접 접촉을 통해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낸다면 ‘파국시계’의 초침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연말 시한은 북한이 제시한 것이긴 하지만 미국도 내년 대선국면을 앞두고 북·미 협상이 파국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낸 채 미국과 충돌하는 사태는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우선 비건의 한국 방문이 북·미 판문점 대화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한반도 정세가 2년 전으로 회귀하는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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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한 외국공관의 한 외교관과 사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의 외교적 상황에 대해 맥락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한국의 외교관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한국 외교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 상황이 그렇다. 한국은 세계 최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냉전시대부터 이어져온 분단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중 패권경쟁으로 비롯된 ‘신냉전’ 기류의 여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한국만큼 복잡하고 중층적인 외교적 난제를 안고 있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1980년대 후반 냉전 구도 해체 전까지 한국은 미국의 날개 밑에서 비교적 안온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이 핵개발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하면서 북한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자 비로소 외교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국제관계 틀 속에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한국 외교의 복잡성을 극적으로 증대시킨 사건은 2008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였다. 금융위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파산과 함께 ‘세계유일 초강대국’ 지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중국이 굴기하기 시작해 곧바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면서 미·중이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세상이 됐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군사·외교력을 집중하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꺼내들었다. 미국의 군사력을 아시아 지역에 집중투사하고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을 새롭게 재편해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이에 편승한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우경화, 군사대국화로 치달았고 한·일 갈등이 증폭됐다. 미국의 이 같은 정책기조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더욱 거칠어진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아시아에서의 미·중 패권경쟁, 북핵 능력 고도화, 일본의 우경화 등이 만들어낸 안보 환경 변화가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떠밀고 있다. 안보를 한·미 동맹으로 대표되는 기존 질서에, 경제를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외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취약한 대외관계 구조 때문이다.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한국은 미·중의 협력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70년 가까이 이어진 한·미 군사동맹의 미래와 대(對)중국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한국 외교의 사활이 달려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방향성을 갖지 않고는 국가의 미래를 논할 수 없다. 북핵문제와 남북관계는 물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남중국해, 한·일 갈등,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주한미군 감축 등 한국이 갖고 있는 모든 민감한 외교 현안의 배경에는 모두 ‘미·중의 전략적 이익 충돌’이라는 공통의 요소가 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OSOMIA) 파동과 방위비 협상에서 볼 수 있듯이 한·미 동맹의 성격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해 출발한 한·미 동맹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동맹으로 바꿔나가려 한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말할 때 한국은 북한을 떠올리지만, 미국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서 냉전과 식민지배의 잔재를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중 패권경쟁의 신냉전까지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관성처럼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에 의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당장 기존의 틀을 뛰쳐나가기도 어렵다.


이 같은 난관을 벗어나려면 전략이 있어야 한다. 전략을 세우려면 국가적 목표가 정해져야 한다. 국가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국가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부분에서 결함이 있다. 유독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감성적인 이상주의와 확증 편향, 지독하게 뿌리 깊은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가 건전한 담론 형성을 가로막고 여론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안보 문제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종북·빨갱이 또는 적폐·토착왜구 등으로 매도하는 조건반사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냉정한 현실 인식과 객관적 시각에 바탕을 둔 합리적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다면 한국이 처한 외교적 난관을 절대 헤쳐나갈 수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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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방문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중국의 엄청난 발전이다. 중국의 발전이 분명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최근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갖게 된 의문은 ‘이렇게 번성하는 중국에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인구, 영토, 경제력 그리고 이에 따른 군사력 등을 고려할 때 군사전략적 고려를 제외하면 한국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중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상당수의 한국인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들은 중국의 조그마한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팔을 가져다 댄 것에 대해 외교적 실례라는 반응 등이 그 좋은 예다. 아마도 이 이면에는 일개 외교부장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중국의 번성을 부활한 역사와 함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견해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세기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천하질서하에서 한국은 동쪽의 오랑캐로 간주되었고 우리는 국내 정치 정통성의 상징으로 중국을 종주국으로 대했었다. 최근에 이르러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성장하면서 중국 내부는 물론 한국과 서구에서도 향후 동아시아에 현대판 종주권 질서의 등장을 주장하는 견해들이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후발산업화의 성공국가로서 중국은 상실의 역사를 회복하고 지역 및 세계의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하게 됐다. 이 같은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전통적 질서를 고려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내적 평등을 구가하던 마오쩌둥(毛澤東) 공산체제하에서도 천하질서 개념이 죽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연속적 역사관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바로 냉전 기간 동안의 변화이다. 수천년 연속적 한·중관계에서 냉전은 불과 수십년 지속되었던 짧은 역사였다. 그러나 냉전은 그 짧은 역사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수천년의 한·중관계 역사를 뒤집을 만한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것은 한국의 국가정체성이다. 20세기 초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를 거쳐 2차대전 후 서구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한국과 중국은 정치적 적대국으로 실제 관계가 전혀 없던 이웃일 뿐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지리적, 역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이 거의 절연상태로 들어간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한국의 서구 지향성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혼란을 야기했지만 궁극적으로 서구적 패러다임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서구 민주주의를 채택했고, 자본주의적 경제질서는 물론 교육·문화 면에서도 서구, 특히 미국 지향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과 연결 고리의 기초였던 유교질서도 형해화 과정을 겪었다.


한국 근대화에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면 탈식민지 국가 중 최초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한국은 제3세계의 영국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패러다임 속에서 일본식 근대화를 하다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면 한국은 냉전 구도 속에서 근대화를 하면서 과거와의 큰 단절 속에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 한국이 단순히 경제개발과 민주화에 성공한 사례라는 것을 기계적으로 되뇔 것이 아니라 한국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처한 이런 세계사적인 함의는 중국에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당면해 있는 도전이 새로운 힘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국제사회에 자신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면, 한국이 새로운 정체성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서구 정체성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가 중국의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경제·군사적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이 중국에 갖는 중요한 의미이다. 또한 안정되면서 한국적 특성을 가진 민주주의 정착과 새로운 경제질서의 구축이야말로 한국의 중요한 국제정치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학계와 언론계에 팽배해있는 한·중관계를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중국의 변화에 지나치게 압도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런 시각은 냉전의 단절이 한국 정체성의 변화가 주는 의미를 간과하기 쉽다. 지정학적 숙명론으로 국내 정치를 어지럽게 하기보다는 정치, 경제 등 국내체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지정학적 숙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초임을 인식할 때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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