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8일 오후 함경남도 연포 일대에서 초대형 방사포로 추정되는 단거리 발사체 두 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지난달 31일 평안남도에서 같은 발사체를 발사한 지 28일 만이며, 올해 들어 13번째 발사다. 그동안 세 차례 시험에서 실패한 연속사격 성능을 이번에는 입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합참은 이례적으로 작전부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 “북한의 행위는 한반도 긴장 완화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강력한 유감을 표한 뒤 군사적 긴장고조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의도는 미국과 남측을 강하게 압박해 북·미 회담을 촉진하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달에만 군 관련 행사를 세 번이나 했고, 다시 발사체까지 쏘았다. 지난 25일에는 김 위원장이 연평도 포격 9주기(11월23일)에 맞춰 서해 창린도를 방문, 해안포 수발을 발사했다. 9·19 군사합의를 처음으로 위반했다. 대남 매체를 통해 금강산관광특구 내 남측 시설도 다 부수겠다고 엄포를 놨다. 북·미 대화가 교착에 빠지자 다시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을 협상장으로 불러들이기는커녕 한반도의 긴장만 높이는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북한의 연이은 도발 행위에 미군은 정찰기를 띄워 감시를 강화했다. 27일 RC-135V 정찰기에 이어 28일에는 북한의 미사일과 장사정포, 잠수함 등을 정밀감시하는 첨단 지상감시정찰기 E-8C까지 띄웠다. 한반도에서 긴장이 이미 고조되고 있다.


북한은 연말까지 북·미 협상이 잘되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을 재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미 군당국은 북한이 추가 도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협상하자면서 도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북한은 당장 도발을 멈추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제시한 연말 시한에 얽매이지 말고 협상 조건과 내용을 놓고 미국과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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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한·미동맹 재설정론’을 꺼냈다고 한다.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을 지금보다 5배 더 많이 받아내라는 ‘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비건 지명자가 워싱턴을 방문한 여야 3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동맹 재설정론을 제기할 때 의도한 범위를 넘어서는 말이겠지만, 한·미동맹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질서가 전환기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동북아 안보질서 전환을 가져올 각종 사안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연말에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는 20일(현지시간) 미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다. 워싱턴 _ AFP연합뉴스


북한은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뒤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하며 올해 말을 시한으로 설정했다. 북한은 최근 미국이 체제안전 보장과 제재 해제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는 한 비핵화 협상 자체에 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 중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창은 열려 있다”면서도 “북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맞서고 있다. 현재로선 북·미가 연내에 협상장에 모일 수 있을지, 모이더라도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매우 불투명하다. 남북 간 대화도 올스톱 상태다. 이대로 연말 시한을 넘길 경우 북한이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중지라는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을 넘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미 간 뜨거운 쟁점인 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도 연말이 1차 고비다. 미국은 서울에서 열린 3차 협상 당시 제임스 드하트 대표가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존 SMA가 정한 항목을 뛰어넘는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 요구가 받아들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온 반응이었다. 계산된 행동으로 보인다. 이대로라면 방위비 협상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해를 넘길 공산이 크다.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으로선 얼토당토않은 증액 요구를 받아들일 순 없다. 상황이 악화되면 일각의 우려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카드를 빼들고, 한국에선 친미·반미 여론이 격돌하는 극단적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빈대 잡느라 초가삼간 불태우는 상황은 속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6시간 앞두고 극적으로 나온 한국과 일본의 합의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 8월 선언한 GSOMIA 종료 결정의 효력 중지는 일본 측의 수출규제 철회 및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복원을 전제로 한 조건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는 GSOMIA 종료 유예 대신 일본 측이 취해야 할 조치의 시한을 못 박지는 않았지만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이 신청한 해당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 작업이 내년 봄 시작된다고 한다. 연말이 지나면서 한·일 간에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긴장 수위는 다시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중 무역전쟁 역시 연말이 고비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 10월 무역협상 1단계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해 놓고도 정작 합의문 도출 작업은 난항을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단계 합의로 미·중 무역전쟁 승리를 선언하고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아는 중국은 호락호락 선물을 쥐여주지 않을 태세다. 


이처럼 2019년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지만 한반도와 동북아가 맞이할 2020년의 모습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다만 사안마다 우리가 내린 선택의 집합이 향후 동북아 안보질서에 반영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일수록 냉철한 상황 인식에 기초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변치 않는 기본 지침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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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구의원 선거 결과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범민주 진영이 전체 452석 가운데 389석(86.1%)을 획득하는 등 압승을 거뒀다. 반면 중국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친중파는 60석(13.1%)을 얻는 데 그쳤다. 4년 전 치러진 선거 때와 정반대 결과로 해외 유학생들까지 급거 귀국해 투표하는 등 젊은층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가 이런 혁명을 이뤄냈다. 반면 중국이 강조한 ‘친중 숨은 표’는 없었다. 친중파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홍콩 정치 판도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홍콩 시민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홍콩 구의원 선거 사우스 호라이즌스 웨스트구에 출마한 켈빈 람(오른쪽)과 청년 활동가 조슈아 웡이 25일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홍콩 _ AP연합뉴스


이번 선거에서 표출된 홍콩 시민들의 뜻은 분명하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억압한 홍콩 정부 및 중국 중앙정부를 심판함으로써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홍콩 시위대는 송환법 공식 철회를 비롯해 강경 시위 진압에 대한 독립적 조사,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 5개 조건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이 행정장관 직선제이다. 홍콩 시민들은 범민주 세력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다음 행정장관 선거에서 친중파 후보가 다시 선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홍콩의 상공업계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등을 친중파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홍콩 반환 당시 2017년부터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하기로 영국과 합의해놓고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간접선거를 결정했다. 홍콩 시민들이 이에 반발해 ‘우산혁명’을 일으켰으나 중국의 억압과 회유로 무위에 그친 바 있다. 결국 홍콩 시민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다시 행정장관 직선제를 비롯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국가라면 선거 결과로 나타난 유권자들의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 관영 언론은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하면서 서방 책임론을 제기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까지 직접 나섰는데 친중파가 몰락했으니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민심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중국 정부는 민심을 읽고 홍콩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 전 세계 시민들의 홍콩 시민들에 대한 연대를 내정간섭으로 치부해서도 안된다. 이제 중국 정부는 홍콩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 등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 주석의 중국몽은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통제력 강화에서부터 장애를 만날 것이다. 그다음 단계인 대만 통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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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되기 전의 유고연방 헌법은 “유고가 적국에 항복하는 문서는 이 헌법에 의하여 무효다”라고 선언하였다. 나치 독일에 끈질기게 항전한 유고 국민들의 결기가 보인다. 적국에 항복한 후 이런 헌법 조항을 만든 나라도 있다. “(…)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1945년 패전 후 만들어진 일본 헌법 제9조다. 누가 읽어도 무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지만, 실상 이 나라는 이름만 자위대일 뿐 세계 5위의 전력을 가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아예 자위대의 설치 근거를 명문화하려고 헌법 개정을 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일본의 섭정 쇼토쿠 태자는 607년에 당나라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다. 그 초두의 글귀가 기이하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이 글을 보내노니….” 나라의 자존을 지키자는 거야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감각으로 볼 때 이런 태도는 과대망상이거나 무지에 가깝다. 수양제가 노발대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일본이 백제 멸망 후 한반도에서 벌인 663년의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놀라, 대륙과 한반도의 정세에 민감해진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인도까지 지배하겠다며 16세기 말 조선을 침략하러 나섰다. 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이한 세계관은 까막눈인 그의 개인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동아시아 국제역학관계의 기본틀인 천하주의에 맞서 외부세계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려는 일본인들의 인식이 표출된 것이다.


그다음엔 19세기의 정한론이라는 게 있다. 이것도 정상은 아니다. 이 침략론을 내세운 사이고 다카모리는 내내 극렬분자였으므로 그렇다 쳐도, 이토 히로부미의 정적이었고 자유주의자라는 후쿠자와 유키치마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인의 대외인식이 삐뚤어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조선 인민의 이해 전반을 논할 때는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다.” 오만하다 못해 이상하지 않은가? 역사 왜곡 논란을 가져온 후소샤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정한론의 배경으로 조선 정부의 무례함을 들면서 사이고를 무사도 정신으로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통상 거부가 왜 무례하다는 것이며, 남의 나라에 무사도라는 폭력적 사고방식을 들이대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정한론은 망상이다. 일본인들의 의식에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일본이 치른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은 성격상 침략전쟁이거나 침략을 위한 예비전쟁이었다. 그중 청일전쟁을 기술하는 첫머리에서 후소샤의 교과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하나의 팔처럼 조선반도가 돌출돼 있다. 당시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고, 배후지를 갖지 못하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 방위가 곤란해진다.” 일본 문부성이 수정 지시를 내리기 전의 판본에선 여기에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어져 있는 흉기가 되기 쉬운 위치관계에 있었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지만, 또 다른 문제는 저들의 망상과 그 기저에 놓인 불안감이다.


승산 없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미국을 ‘귀축’이라 일컬었다. 귀신과 축생의 줄임말이다. 그 귀축에게 항복하고 나서 일본은 미국도 이해하기 어려워한 굴종적 자세로 일관했다. 언제는 아시아가 야만이라고 탈아를 외치며 구미열강을 따라잡자(脫亞入歐)고 외치더니, 다시 대동아공영권을 이루자며 아시아인의 단결과 서구에 대한 대항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과 동남아를 침략한다. 이 모순된 언동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스스로의 정체성 인식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열등감과 우월감, 피해의식과 가해적 성향은 이렇게 분열적으로 작용한다. 우월감은 실상 열등감의 다른 모습이며 가해자는 엉뚱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어령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은 내부적으로는 한없이 축소지향적이면서도 외부로 나가면 서투르고 유아적이다. 침략전쟁에 선린으로서의 진정한 사죄가 없는 데엔 이런 자아분열로 인한 자존감 결여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섬나라이면서도 영국은 근대적 민주정을 창출하고 전통적으로 분열된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을 외교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비민주적 의사결정에 매여 있고, 통일대국이 들어선 중국 대륙과 오랫동안 독립을 지켜온 한반도를 앞에 두고 늘 위기의식과 불안감에 싸여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아베 총리가 측근들에게 “한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적어도 5년간 개선되기 어렵다”고 말하며 다닌다고 보도했다 한다. 지금의 한·일 간 갈등은 일본의 이런 인지왜곡이 빚은 퇴행적 현상이다. 오래갈 것이다. 호흡을 길게 가지고 마음을 다잡을 때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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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 19일 담화를 내고 “조선반도 핵문제의 근원인 미국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이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게 철회되기 전에는 그에 대해 논의할 여지도 없다”며 미국은 비핵화 협상에 대해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김영철 위원장은 “조미(북·미) 사이에 신뢰구축이 선행되고 우리의 안전과 발전을 저해하는 위협들이 깨끗이 제거된 다음에야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도 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이 전날 내놓은 담화와 거의 동일한 메시지다.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도 내달 북·미 실무협상 재개와 관련해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조미 대화는 열리기 힘들게 되어있다”고 이날 밝혔다. 한·미 당국이 연합공중훈련을 전격 연기해 협상 재개의 명분을 제공했지만, 북한은 이를 평가절하한 채 미국이 한 발짝 더 움직여야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버틴 것이다.


북한이 경직된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협상 의제 선점을 위한 기싸움의 성격도 있겠지만, 비핵화 협상의 ‘연말 시한’이 50여일밖에 남지 않은 데 따른 초조감의 발로로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7일(현지시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당신은 빨리 행동해야 하며 합의를 이뤄야 한다. 곧 보자!”면서 3차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북한을 설득할 카드를 미국이 들고 오지 않는 한 북한은 협상장에 나서기 힘들다는 입장을 시사해왔다. 지난 2월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의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임기가 1년이 채 남지 않은 데다 탄핵 정국에 몰려 있는 트럼프 행정부와 ‘큰 거래’를 하는 것이 타당한 건지 의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이 핵실험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단 등 ‘선제적 조치’를 무위로 돌릴 가능성까지 시사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비상한 각오로 ‘통 큰 결단’에 나서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시간만 허비하게 될 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그렇다면 한·미 연합공중훈련 연기라는 모멘텀을 지렛대로 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미국도 좀 더 유연한 태도로 북한을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북 제재 유지’에 집착하다 ‘큰 거래’의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북·미 모두 결단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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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공산당은 나다’, ‘#공산당은 동료다’.


지난주 일본 트위터에서 이런 해시태그(#)를 단 글들이 확산됐다.


일본공산당 지지자들이 올린 글들만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은 공산당 지지자가 아니지만 “공산당과 주권자를 우롱하는 움직임에 반대한다” “이론(異論)을 말했다고 딱지를 붙이는 데 반발한다” 등의 글들이 잇따랐다. 계기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유’ 때문이다. 


지난 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 입헌민주당 스기오 히데야(杉尾秀哉) 의원이 2016년 방송국에 전파 정지를 명령할 수 있다고 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상의 발언에 대해 질문할 때였다. 각료 좌석에 앉아 있던 아베 총리가 실실 웃는 얼굴로 스기오 의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공산당”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행위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저널리스트 아오키 오사무(靑木 理)는 “총리가 ‘공산당’을 비판의 단어로 삼는 것은 넷우익같이 저열하다. 삼권분립의 근저가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아베 총리가 야유로 주의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비슷한 식의 야유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자신이 연루된 의혹을 받는 가케학원 스캔들과 관련한 문서 작성의 경위를 따지는 무소속 이마이 마사토(今井雅人) 의원을 향해 각료석에서 “네가 만든 것 아니냐”고 야유했다. 아베 총리는 “좌석에서 발언을 한 것은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발언 내용은 철회하지 않았다.


사실 아베 총리는 초·재선 의원 시절 국회 상임위원회 등에서 질문 중인 야당 의원에게 자주 야유를 하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야유 쇼군(將軍·장군)’이라고 불렸을까.


이런 태도는 한 나라의 지도자인 총리가 돼서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2012년 12월 2차 집권 이후 “빨리 질문해” “당신에게 주의하고 싶다” “없어, 그런 건” 등 문제가 된 야유가 한둘이 아니다. 마이니치신문이 국회의사록을 조사한 결과 올해에만 26차례의 야유 등 돌출적인 발언이 있었다.


50년 가까이 일본 정계를 지켜봐온 정치평론가 모리타 미노루(森田實)는 마이니치에 “전후 많은 총리를 봐왔지만 이처럼 품격을 결여하고, 민주주의를 흔드는 듯한 발언이 잇따른 적은 없었다”고 했다. 정부의 대표인 총리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에게 야유를 하는 것은 삼권 분립과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아베 총리는 20일 가쓰라 다로(桂太郞) 전 총리(2886일)를 제치고 역대 최장 재임 총리에 등극한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최근 잇따른 스캔들에 휘말리고 있다. 스가와라 잇슈(菅原一秀) 경제산업상과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 법무상이 선거법 위반 의혹 등으로 잇따라 낙마했고,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상은 “(수험생들은) 자기 분수에 맞춰서 하면 된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아베 총리 자신도 정부 주최의 ‘벚꽃을 보는 모임’에 지역구 지지자를 대거 초대해 ‘국고의 사유화’ 비판을 받고 있다. 장기 집권에 따른 해이가 역력하다.


일련의 스캔들이 아베 정권에 결정타가 될지는 미지수다. 아베 총리를 대신할 당내 차기 후보나 대안 야당이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선 아베 내각을 지지하는 이유로 ‘다른 내각보다 낫다’가 많다. 반면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다’가 가장 높다. 아베 총리는 잇따른 스캔들에 문제가 된 인물을 경질하거나 제도를 중지시키는 등 ‘꼬리자르기식’ 대응을 하고 있다. 대안 부재와 국민의 무딘 반응은 이런 대응을 반복하는 이유다. ‘달리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신뢰할 수 없는’ 정권이 줄곧 이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걸로 일본의 무엇이 바뀔지 궁금하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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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인민무장경찰부대가 있다. 중국인들이 ‘우징(武警·무장경찰)’이라 부르는 이 부대는 경찰이 아니라 군대다. 무장경찰은 인민해방군의 전국 5대 전구(戰區)에 편제되어 군의 지휘를 받는다. 맡은 역할은 국가시설 경비, 군 기강 단속, 시위·폭동 진압, 대테러작전 등으로 폭이 넓다. 한국의 특수부대, 헌병대, 전투경찰을 합한 부대라 할 수 있다. 군대이면서 일반 군과는 다른 중국의 특수군대가 무장경찰이다.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진 홍콩이공대 인근에 18일 경찰에 체포된 학생과 시민들이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다. 홍콩 _ AFP연합뉴스


중국 무장경찰의 부대 이름은 표범, 독수리, 호랑이 등 맹수에서 따온 게 많다. 예컨대 ‘쉐바오(雪豹) 돌격대’는 인민무장경찰 베이징시총대 예하 특수부대의 이름이다. 쉐바오 돌격대는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테러방지 임무를 수행하며 일반인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후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파견돼 대테러 훈련을 벌였으며 이라크대사관 등 주중 외국공관의 무장경비를 담당했다. ‘례잉(獵鷹) 돌격대’는 쉐바오와 함께 베이징 경호를 담당하는 쌍두마차다. 당초 비행기 납치테러를 막기 위해 설립된 ‘특종경찰대학 특수부대’였으나 임무 수행의 공적을 인정받아 2014년 시진핑 국가주석으로부터 ‘례잉 돌격대’라는 이름을 새로 받았다. ‘쉐바오’는 눈표범, ‘례잉’은 보라매라는 뜻. 이 밖에 ‘슝잉(雄鷹·독수리) 특수부대’는 산둥성 일대에서 육·해·공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무장경찰이고, ‘둥베이후(東北虎·동북호랑이)’는 인민해방군 북부전구에 속한 대테러부대를 말한다. 


5개월째 시위가 계속되는 홍콩에 대테러부대가 투입됐다는 소식이다. 언론에 따르면, 지난 16일 홍콩 시내에 ‘쉐펑(雪楓) 특전대대’ ‘특전 8중대’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군인들이 투입돼 거리 청소에 나섰다고 한다. 쉐펑 특전대대는 중국 항일전쟁의 영웅 펑쉐펑(彭雪楓)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이며, 특전 8중대는 쉐펑 대대의 임무를 부여받아 대테러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다. 모두 인민해방군 서부전구 소속으로, 특전 8중대는 ‘톈랑(天狼·천산의 이리) 돌격대’라고도 불린다. 중국 공산당은 특수부대 투입이 자발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지만, 특수부대의 등장은 심상치 않다. 홍콩 시위를 테러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인민해방군 투입도 시간문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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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비핵화 꿈이 2년도 채 되지 않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날 듯하다. 지나치게 낙관했거나 성급했던 까닭에 남·북·미 모두 비핵화 길(로드맵)에서 어긋났다. 북한 비핵화라는 거대한 담론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작금의 한반도 안보 상황이 야기하는 (조선인민군이 오래전 한반도에서의 다음 전쟁은 재래식전쟁이 아닌 핵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위협과 불확실성은 작년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작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에 맞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의 방남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빠르게 순항했다. 남북 정상 간 직통전화까지 개설되자(2018·4·20) 장삼이사들은 남북한 두 정상이 언제라도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일주일 후 판문점(4·27)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천명했다.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 등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거듭 확인됐다. 신(新)한반도 여정의 서막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비핵화 협상이 장기 뇌사상태다. 비핵화를 통해 북한에 궁핍과 절망으로부터 탈주(脫走)의 길을 터주고자 했던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난망한 처지다. 세간의 지적처럼 비핵화 정의가 합의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서로의 계산법이 맞지 않아 사달이 난 것일까. 트럼프와 김정은은 정말로 비핵화를 할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 서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만책이 아니라면 비핵화 발목을 잡는 세력이 있다는 의미인가. 나는 비핵화에 재를 뿌리려는 세력들이 비핵화 길목 곳곳에 잠복해 있다고 추정한다. 


우선 김정은을 둘러싼 200~300여명의 지배 엘리트들을 비핵화의 적들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이 보기에 비핵화는 체제를 말살하는 아편과 같은 존재이다. 평양 엘리트들의 주된 관심은 북·중동맹 틀 속에서의 현상유지이다. 비핵화 논의가 깊어질수록 현상타파는 불가피하다. 북한 최상부 기득권층인 이들은 자신들의 체제 불안을 대외적 군사적 모험으로 표출할 수 있다. 수세(守勢) 안에 공세(攻勢)를 취하는 격이다. 


둘째,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들 수 있다. 군수산업은 지구촌의 크고 작은 전쟁과 각종 분쟁을 주식(主食)으로 하면서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중심축이 됐다. 군산복합체의 강고한 먹이사슬에 놓여있는 집단은 정계, 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싱크탱크, 무기중개상 등 직군도 다양하며 국적을 불문한다. 이들 거대 집단의 폐단이 얼마나 심각했기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고별연설(1961·1·19)에서까지 군산복합체의 폐해를 지적했을까. 


셋째,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력의 신뢰에 회의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일군의 사람들이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북핵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독자적 핵무기 개발임을 주창하는 사람들이다. 핵무기의 힘을 욕망하는 이들의 비핵화에 대한 저항은 이미 ‘핵무기가 배태된 저항’이다.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물론 핵무기 개발을 시도할 경우 닥칠 후과(後果)에 대해서도 애써 침묵한다. 따라서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오래 생각해보는 비핵화 길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관념적 핵무장론’은 자기만족이자 무책임한 선동과 진배없다. ‘눈에는 눈’의 보복은 우리 모두를 장님으로 만들고 만다. 


판문점, 평양, 싱가포르 그리고 하노이에서 서로 주고받았던 말들을 하나하나씩 곱씹어야 할 때다. 중단(stopping)이 곧 종결(ending)을 뜻하지는 않지만 비핵화 협상 중단으로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되고 나아가 비핵화에 비협조적인 세력들의 입지가 오히려 강화되는 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일본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북한의) 금강산관광 시설물 철거 요구 등과 함께 비핵화 협상 교착이 문 대통령에게는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는 삼장법사의 긴고주가 됐다. 삼장법사는 나쁜 동기로 긴고주를 외는 일은 없다고 했는데,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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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생시인가. 아마존 숲이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나무 타는 냄새가 주변에 그득했다. 지난 밤 불길이 할퀴고 간 산등성이는 검게 그을려 있다. 황망한 기분 탓에, 난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타잔과 치타는 이제 거리로 나앉게 되나?” 옆에서 화재 현장을 지켜보던 한 사람은 “ ‘지구의 허파’가 불타고 있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마존 열대우림은 지구 산소의 20%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아뿔싸! 타잔을 동정할 일이 아니구나. 잘못하면 인류가 끝장날 수 있겠구나.


매캐한 연기 때문에 눈을 비볐다. 장면이 바뀌었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미국 뉴욕 유엔총회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단에서 비장한 어조로 연설을 하고 있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대멸종의 시작점에 있는데, 당신들은 영구적 경제성장이란 동화를 거론하며 오직 돈 타령만 하고 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는가(How dare you?).” 회의장에 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테라 앤 아쿠아 MODIS 위성이 지난 8월 15~22일 촬영해 합성한 아마존 열대우림 화재 사진. 출처 : NASA 웹사이트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번엔 영국 런던 시내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웨스트민스터 다리, 트래펄가 광장, 정부 주요 관공서 주변을 점거했다. 트래펄가 광장에는 ‘우리의 미래’라고 적힌 관을 실은 영구차가 자리를 잡았다. 운전자는 스스로를 자동차에 묶었고, 시위대는 차량 주위에 드러누위 스크럼을 짰다.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환경운동단체 ‘멸종저항’ 회원들이다. 이들은 전 세계 27개국 6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하라” “2025년까지 탄소배출 ‘순 제로’를 달성하라”고 외쳤다. 경찰이 들이닥쳤지만 이들은 “감옥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시위대 한 명이 경찰에 끌려가며 눈을 흘기는 듯했다. “구경만 할 거야?”


고개를 돌리니, 서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다. 영화제작사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까지 연기가 미쳤다. 영화를 찍던 배우·감독·스태프들이 황급히 스튜디오를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로스앤젤레스 산불은 한 달째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남쪽 방향에서도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청정지역’이라는 호주의 하늘이 시커멓다. 대형산불이 호주를 덮쳤다고 한다. 어디선가 굵은 중저음의 호통이 들려온다. “다 이게 지구 온난화 때문이야. 식생이 메마르면서 산불이 잦아지는 것이라고!” 신의 경고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유서 깊은 도시가 물에 잠겨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다. 9세기 비잔틴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라는 산마르코 대성당도 잠겼다. 무릎까지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산마르코 광장을 힘겹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바닷물에 휩쓸린 가구, 건물 잔해, 쓰레기 등으로 광장은 뒤범벅이 됐다. ‘유럽의 응접실’로 불렸던 이 광장의 안온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베네치아 시장은 현장에서 취재진에게 “기후변화의 여파다. 베네치아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한탄했다.


심란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눈 뜨니, 다시 유엔총회장이다. ‘무분별한 개발허가’로 아마존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연단에 보인다. 그는 아마존 열대우림 위기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를 두고 “주권침해”라며 개발을 계속하겠다고 주장했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더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측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파리기후변화협약 공식 탈퇴를 선언하는 성명을 읽고 있다. 기후위기는 아랑곳없는 듯했다. 동맹국들에 방위비 ‘삥’이나 뜯는 트럼프와 그 측근들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낙담해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등을 도닥여준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아마존 카야포 부족의 라오니 메투크티레 족장이라고 소개한다. 아마존 열대우림 보호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말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말씀을 청했다. 족장이 말했다. “우리는 숲과 자연을 통해 숨을 쉰다. 벌목과 파괴를 지속한다면 백인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족장의 언어를 몰랐지만 또렷이 들렸다. 모골이 송연했다.


‘앗’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이불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새벽 4시. 다시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마존 할아버지의 말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뒤숭숭하다. 꿈인데, 꿈이 아닌 것 같다.


<이용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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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이 17일 태국 방콕에서 회담을 열어 이달로 예정했던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에스퍼 장관은 “이번 결정은 (북한 비핵화를 이끌어내려는) 외교적 노력과 평화를 촉진하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선의의 조치”라면서 북한을 향해 조건 없는 대화 복귀를 촉구했다.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한·미 양국의 결단을 평가한다. 지난달 5일 스톡홀름 회담 후 열리지 못하는 북·미 실무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기대한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왼쪽)이 17일 태국 방콕 아바니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왼쪽에서 두번째)과 고노 다로 일본 방위상과 맞잡은 손을 들어보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훈련 연기 결정 과정은 그 자체로 북·미 간 성공적인 협의라고 할 수 있다. 한·미는 당초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를 대체해 이달 중에 대대급 이하의 연합공중훈련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지난 13일 국무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 공화국(북한)을 과녁으로 삼고 연합공중훈련까지 강행하며 사태발전을 악화일로로 몰아넣은 미국의 분별없는 행태에 대해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에스퍼 장관이 방한길에 훈련의 조정 가능성을 내비쳤고, 북한도 14일 김영철 아·태평화위원장 등의 연쇄 담화를 발표하면서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한·미는 15일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연합공중훈련 조정 문제를 협의했고, 방콕에서 추가 협의해 훈련 연기를 최종 결정했다. 남·북·미가 나흘 동안 한·미 연합훈련을 고리로 공개적으로 ‘직간접 대화’를 하며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훈련 연기로 군사 위협은 물론 재정적 부담도 더는 이중의 이득을 얻었다. 이제 북한은 북·미 간 실무회담에 응해야 한다. 에스퍼 장관이 언급한 대로 미사일 실험도 중지해야 한다. 


양측은 대화의 불씨를 어렵사리 살려낸 만큼 실무협상에서 진전을 이끌어내야 한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처럼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정상들 간 협의뿐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내실 있는 실무협상이 필수이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북·미 회담의 시한은 이제 5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북한은 최근 금강산에 있는 남측 관광시설을 철거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북·미 회담으로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남북 간 대화를 촉진해 금강산관광 재개 해법까지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이번 한·미 연합공중훈련 중단이 북한 비핵화와 남북관계 발전의 실질적 전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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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이 “보통의 미국인들은 주한·주일미군을 보며 ‘왜 그들이 거기에 필요한가. 얼마나 드는가. 한국, 일본은 아주 부자 나라인데 왜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인의 화법’이라고 쳐도, 미군의 군령권자가 비용 문제를 들어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언급한 것은 예사로이 넘길 일이 아니다. 


밀리 의장의 발언이 “미군이 동북아에서 안정화 역할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이어진 것을 보면 동북아에서 미군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거론하면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려는 차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합참의장이라는 자리의 무게에 어울리지 않는 경솔한 발언임에는 틀림없다.  


한·미 간에 방위비 분담금,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 문제가 최대의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의 당국자들이 한국을 향해 거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밀리 의장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경고로 위협할 가능성을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주한미군 카드’를 흔드는 것으로 국내 보수세력을 자극해 방위비 분담금을 둘러싼 여론 분열을 꾀하려는 노림도 있어 보인다. 


13일 방한한 밀리 의장은 14일 한·미 군사위원회(MCM) 회의에 참석한다. 지난 8월 시행한 전작권 전환을 위한 기본운영능력(IOC) 검증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주된 의제이지만, GSOMIA 연장과 방위비 분담금 문제도 거론할 것이 확실하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14일 한국에 도착해 15일 제51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 참석한다. 미국 안보 수뇌부가 총출동해 GSOMIA 복원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정부는 중심을 단단히 잡고 대응해야 한다. 안보불안을 자극하면서까지 방위비 분담금의 턱없는 인상을 이끌어내려는 미국에 당당하고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요구액은 하등의 논리적 근거가 없다. 국방력 증강에 매년 그토록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대미의존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매년 똑같은 요구에 시달리게 된다. 이번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는 계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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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즈룽(林志龍·35)은 2011년 중국 최고 예술대학으로 꼽히는 ‘중국미술학원’을 졸업했다. 학과 성적도 우수했다. 웬만한 회사는 골라서 갈 수 있는 ‘스펙’이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대학 은사가 자신이 만든 회사로 스카우트했다. 


대우는 좋았다. 그러나 회사 업무는 상사 요구에 따라 ‘납품’하는 것일 뿐, 스스로의 생각과 능력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회사에 대한 불만과 창업욕이 정비례로 증가했다.


린즈룽을 주인공으로 한 중국 바링허우(80後·80년대생)의 평범한 창업 스토리는 항저우라는 도시와 만나면서 좀 특별해진다.


창업 의지가 커지던 시기에 중국미술학원이 위치한 항저우에 즈장(之江)문화창업단지가 들어섰다. 졸업 후 5년 내 창업하면 3년간 사무실 임대료 면제, 세금 우대 등 각종 혜택을 줬다. 무엇보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의 교류 협력으로 회사의 프로젝트를 알릴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다. 그가 세운 회사는 2016년 항저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 LED 조명쇼를 맡으면서 전환점을 맞았고, 연매출 17억원의 회사로 커졌다. 항저우에서 만난 린즈룽은 “항저우는 빼어난 자연 환경을 가진 관광도시로 중공업·제조업에 의존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며 “50개 가까운 대학에서 풍부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는 점도 창업 도시로서 최적화된 조건”이라고 했다.


지방정부의 지원 정책, 풍부한 고급인력이 바탕이 됐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창의성일 것이다.


지난 9일 찾아간 중국미술학원 샹산(象山)캠퍼스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건축 전시장 같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각인 창문들, 대나무로 만든 난간과 기왓장은 주변 산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샹산캠퍼스를 설계한 건축가 왕슈(王樹)는 철거지역의 전통가옥에서 나온 기와 200만장으로 건물의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지역성과 역사성을 품은 이 캠퍼스에서 학생들은 한계 없는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알리바바그룹은 항저우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중국 기업이다.


1년 중 알리바바가 가장 분주한 시기는 광군제(11·11) 전후다. 10일과 11일 방문한 알리바바 본사 단지는 야근과 업무에 지친 모습보다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구에는 행사 ‘승리’를 기원하는 정승고(定勝鼓)가 놓여졌다. 전날에는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당일에는 새 기록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북소리가 울렸다.


본사 단지 곳곳과 직원들의 책상에는 보리가 놓여졌다. 중국어로 보리(大麥)라는 뜻의 ‘따마이’는 많이 판다(大賣)는 단어와 발음이 같다. 또 수확을 상징하기도 한다.


붉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여기저기 모여 파이팅을 외치고, 승리 기원 체조를 하면서 ‘일폭탄’ 행사를 하나의 축제처럼 즐겼다. 화장실에는 크리스마스트리 모양 안에 자아돌파, 필승 같은 글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분명히 새로운 실적을 달성해야 하는 도전이지만,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돌파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알리바바는 연애편지 대신 써주기, 사과 대행, 애인 대행 같은 이색 서비스를 판매하면서 주목받았다. 매출도 중요한 목표지만, 재미를 추구한다.


10일 항저우에서는 ‘국제인재교류 및 프로젝트 협력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계기로 저장(浙江)성 최초의 창업실패보험이 시작됐다. 이 보험에 들면 창업에 실패한 이에게는 최대 3만위안의 생활자금 보조금을 제공한다. 전체 보장한도는 1000만위안에 달한다. 창업 지원뿐 아니라 안전장치까지 해주는 셈이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하늘 아래엔 항저우와 쑤저우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여유로움과 매력이 있는 도시로 유명한 항저우가 창업의 천당으로 자리매김할 분위기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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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북한은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미국이 연말까지 북핵 문제 계산법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북한의 압박에 미국이 굴복하는 것 말이다. 미국은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은 연말이 다가올수록 대미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단순히 협상 방법의 문제를 넘어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지난달 6일 북·미 실무협상 결렬 뒤 “역스러운 협상” 운운하며 공격적인 언사를 마다 않던 북한은 체제 안전, 대북 제재 해제를 비핵화하기도 전에 다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뜻대로 될 리 없다. “기회의 창이 매일 조금씩 닫혀가고 있다”는 지난 8일 외무성 미국국장의 자못 여유로워 보이는 경고에는 조급성이 잔뜩 묻어난다.


북한은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북한의 관점에서 실무협상은 포괄적 합의 압박을 받는 자리다. 포괄적 합의를 위해서는 비핵화의 최종상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은 이걸 싫어한다. 하지만 거부할 논리가 약하다. 북한의 ‘선 신뢰구축, 후 비핵화’보다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정은은 ‘북한의 제도 안전과 발전’을 막는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면서 그걸 위해 도널드 트럼프가 연말 정상 간 담판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상 담판을 끌어내기 위해 북한이 동원하는 명분의 하나는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다. 북한은 협상의 진전을 원할 때 주한미군 철수, 한·미훈련 중단 입장을 거둬들인다. 1992년 북·미 간 첫 고위급 회담 때 그랬다. 2000년 일련의 회담, 즉 남북정상회담, 조명록 인민군 차수 방미,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방북 때도 북한은 통일 이후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했다. 협상에 기대하는 것이 없을 때는 미군철수, 훈련 중단을 주장한다. 1990년대 후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 좋은 예다.


훈련 중단 거론 여부는 향후 협상을 전망할 수 있는, 꽤 일관성 있고 신뢰성 높은 신호다. 김정은이 지난해 4월 예년 수준의 훈련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이후 대외관계는 전례 없는 속도와 범위로 진전됐다. 반면 훈련 중단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지지부진해졌고, 대외관계는 단절되거나 정체됐다.


‘미국의 신뢰 조치 결여론’도 북한이 동원하는 주요 명분이다.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에 상응하는 미국의 신뢰 조치가 없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비핵화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말인즉 옳다. 문제는 서로 기대하는 신뢰 조치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데 있다. 북한이 미국에 불만인 것처럼 미국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북한에 불만이다. 최근 신뢰 부재의 상당 몫은 북한이 공약한 완전한 비핵화 불신에서 비롯된다. 비핵화를 믿을 수 없는데 비핵화를 전제로 먼저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이 미국에 최종상태(적대시 정책 폐기)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최종상태(비핵화 정의)는 제시하지 않겠다는 것도 자가당착이다.


그런 현실에서 비핵화를 신뢰구축 다음 단계로 미루는 것 자체가 신뢰 형성을 막고, 바로 그 때문에 비핵화는 더 어려워진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신뢰·비핵화 분리가 아니라, 신뢰·비핵화 조치 병행으로 신뢰·비핵화를 서로 촉진하는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역시 포괄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연말 중거리 혹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쏜다면 북한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미국은 이미 연말 시한을 무시했다. 시한에 구속된 존재는 김정은뿐이다. 북한으로선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 스스로 풀면 그만이다. 중장거리 미사일을 쏠 것처럼 행동하되 쏘지는 않고, 비핵화는 하지 않되 비핵화 공약을 내세우며 시한을 연장하는 것이 그로서는 현실적 대안이다.


그렇게 회색지대에 들어간 뒤 기존 핵 정책을 재점검하는 숙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상대 지도자를 눈속임하거나 상대 정권이 바뀌거나 인기를 잃거나 하는 국내 정치변수를 이용하려는 앝은수에 집착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지도자 한 사람, 임기가 정해진 특정 정권만 유혹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 전체, 집권당, 야당, 국회, 여론을 설득할 묵직하고 진지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이어야 한다.


북한은 ‘만능의 보검’이라며 핵의 힘을 과신한다. 힘은 상대를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핵의 힘은 제한적이다. 김정은도 핵을 가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북한이 가진 진짜 힘은 따로 있다. 그 힘을 믿고 죽 밀고 가야 한다. 바로 비핵화다. 그것이 있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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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출범 내각은 ‘가질리어네어(gazillionaire·초갑부) 내각’으로 불렸다. 부동산 자산가인 트럼프 대통령(3조5000억원)을 비롯해 벳시 디보스 교육장관(6조원·남편과 공동재산), 윌버 로스 상무장관(3조4000억원), 린다 맥마흔 중소기업청장(1조6000억원) 등이 천문학적인 자산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디보스 장관은 암웨이 창업자 가족이며, 로스 장관은 투자은행 로스차일드 회장을 지냈다. 각료들의 재산은 총 16조원에 달했다.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계층이 지배하는 정치를 금권정치(plutocracy)라고 한다. 금권정치는 그리스 개혁가 솔론이 부의 다과에 따라 4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던 것에서 기원한다. 이젠 돈의 힘으로 정부의 정책을 좌우하는 것을 말한다. 금권정치는 부익부 빈익빈을 악화시킬 수 있고, 자산가의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 자산가라면 더욱 위험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직이 사익 추구수단으로 유용되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트럼프는 지난 8월 2020년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 행사를 자신의 플로리다 골프리조트에서 열겠다고 했다. 그러다 ‘대통령직을 이용해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라는 비난이 커지자 번복했다. 또 지난 9월에는 아일랜드를 방문 중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자신 소유 리조트에 묵도록 했다. 이 때문에 펜스는 왕복 600㎞ 가까이 이동하며 회담을 가져야 했다. 이는 의혹 사례의 일부일 뿐이다.


최근 미국 대선 가도에 트럼프보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인물이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었다. 블룸버그 미디어그룹의 창업자이자 뉴욕시장을 지낸 마이클 블룸버그가 도전장을 낸 것이다. 그는 세계 9위의 갑부다. 최근 그의 측근은 “트럼프의 재선 저지에 얼마든지 쓰겠다”고 했다. 돈의 전쟁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당장 민주당 경선통과도 장담할 수 없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경쟁자들을 넘어야 한다. 또 트럼프가 보여준 한계 탓에 억만장자에 대한 반응도 곱지 않다. 워런 상원의원의 말처럼 선거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어선 안된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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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의 시행 여부를 결정할 시간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미군 수뇌부의 한국 및 일본 방문이 이어지면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일 간 막판 협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14일 한·미 군사위원회(MCM) 참석을 위해 방한하는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앞서 12일 일본에서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났다. 또 15일 개최되는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참석차 방한하는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청와대 방문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미군 수뇌부의 한·일 방문이 GSOMIA 문제 해결의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아베규탄시민행동 회원들이 10월23일 서울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완전 폐기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동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정부가 지난 8월22일 내린 GSOMIA 종료 결정은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제외하며 더 이상 안보상의 우방이 아니라고 선언하자 부득이하게 일본과 군사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나서 일본을 설득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조치가 한·미·일 군사 협력을 약화시킨다며 한국 정부에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전례가 없는 강도로 일방적으로 한국만 압박하고 있다. 밀리 합참의장은 미국을 떠나면서 “한국을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중국과 북한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오로지 한국을 돌려세우겠다는 생각뿐이다. 수출규제를 철회하면 GSOMIA를 되살리겠다는 한국의 제의는 미국과 일본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는 한국 정부가 GSOMIA를 복원할 명분이 없다.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GSOMIA를 종료해야 한다는 의견이 52.1%로 종료해선 안된다는 답변(37.5%)을 앞질렀다. 하지만 미국이 GSOMIA 폐기에 반대하는 양상을 보면 당초 예상보다 반발 강도가 훨씬 세다. 이 점에서 정부도 새롭게 드러난 상황을 인정하고, 새로운 해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 등지에서는 GSOMIA 종료 연기론을 제기하고 있다. GSOMIA를 연장하되 정보 교류를 제한하거나, 종료 시점을 6개월 연장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 믿을 수 없는 국가로 규정하고 수출규제를 하면서 벌어졌다. 그렇다면 원인부터 제거해나가는 게 순리다. GSOMIA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미국이 일본을 설득해야 한다. 미국이 지금처럼 한국의 이해를 무시한 채 일본을 두둔하는 한 이 문제는 풀기 어렵다. 일본도 마냥 고집만 피울 일이 아니다. 이 정도 사안으로 한·미·일 3국 군사 협력이 파국을 맞아서는 안된다. 한·미·일 3국은 막판까지 GSOMIA 문제를 해결할 공약수를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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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 서울에서 한·미 군사위원회(MC)와 안보협의회의(SCM)가 열린다. 우리 측은 정경두 국방장관, 박한기 합참의장, 최병혁 연합사 부사령관, 정석환 국방정책실장, 미국 측은 에스퍼 국방장관을 필두로 밀리 합참의장, 데이비슨 인도·태평양 사령관, 에이브럼스 연합사령관, 내퍼 국무부 한·일 담당 부차관보, 해리스 주한 미 대사가 참석한다. 이들에 앞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와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 드하트 한·미 방위비분담금협상 수석대표가 잇따라 한국을 방문했다. 


금년도 SCM은 한·미동맹의 방향을 결정지을 주요 쟁점들이 다뤄질 예정이어서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주요 의제는 방위비 분담금 책정, ‘미래 국방비전’ 채택, 전작권 전환을 위한 제1단계인 초기운용능력(IOC) 평가, 전작권 전환 뒤 한·미동맹의 범위를 한반도 유사시를 넘어 미국 유사시까지 확대하기 위한 ‘한·미동맹 위기관리 각서’ 개정, 그밖에 중거리핵전력(INF)조약 파기에 따른 중거리탄도미사일 한국 배치, 호르무즈해협에 대한 한국군 파견,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문제 등이 있다.


이번에 미국이 SCM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미국 관리들이 각자 들고온 한·미동맹의 현안들 하나하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의 목표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전략(FOIPS, 인·태전략)’에 한국의 전면 동참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미·중 무역협상이 일단 봉합되면서 미국은 다음 단계로 동맹 재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1월 미국이 인·태전략 동참을 요구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그 취지가 불분명하다면서 입장 표명을 유보한 바 있다. 금년 6월1일 미 국방부가 ‘인·태전략보고서’를 공개하자 6월3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개방·포용·투명성이라는 역내 협력 원칙에 따라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태전략을 조화롭게 추진키로 했다”고 합의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한·미·일 안보협력에는 적극 동참하되 지역동맹 전환에는 반대한다는 역대 한국 정부의 외교방침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한·미동맹 관계는 전통적인 허브·스포크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미동맹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안전을 위한 린치핀이라면,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은 동아시아 안보정세의 불안정에 대비한 안전판이다. 한국은 한·일 안보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일본의 태도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GSOMIA 종료를 취소할 수는 없다. 예정대로 GSOMIA가 종료된다면, 이후 한·미·일 군사협력은 한·미·일 정보보호약정(TISA)을 활용한다면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도 불가결한 한 축이다. 아베 총리도 작년 10월 기업인 500여명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해 일대일로 구상 참여를 발표했다. 미 국방부가 이미 일대일로 구상의 핵심인 해상실크로드 구상을 ‘진주목걸이 전략’이라고 부르며 군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 때문에 당시 야치 국가안보국장이 반대했지만 이마이 총리 정무비서관의 조언에 따라 일대일로 구상이 안보전략이 아닌 경제전략이라는 논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태도는 중국시장이라는 경제적 실리를 놓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번 SCM에서 미국은 GSOMIA 종료를 용인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조건으로 한국이 인·태전략에 조건 없이 전면 참여하는 내용을 ‘미래 국방비전’에 담길 바랄 것이다. 이렇게 포괄적 합의를 해주면 앞으로 한국은 미국의 군사전략에 계속해서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역외 군사협력 동참을 요구받았을 때 보여준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일본이 보통국가를 지향하면서 1999년과 2015년 추가로 개정돼 성격이 많이 변했지만, 1978년 미·일 방위지침을 처음 만들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 안보와 직접 관계없는 군사적 ‘연루’를 피하려 외교적 노력을 다했다. 


우리 정부는 ‘6·30 한·미 정상 합의’를 기본으로 삼으면서 인·태전략의 전면 참여 요구에 대해 포괄적 합의가 아니라 한·미 협력의 대상과 범위를 담은 세부목록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다음, 미국이 제시한 세부목록 가운데에서 대한민국 헌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저촉 여부, 군사적 연루 위험성을 고려해 한국이 받을 수 있는 것과 받기 어려운 것을 선별해낸다. 최종적으로 선별된 항목을 미국과 재협의해 인·태전략과의 협력범위를 확정해야 한다. 미국의 일방적 요구가 아닌 한국과의 조율로 안보협력이 이루어질 때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하고 건전하게 발전할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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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11일 아침 홍콩 경찰이 시위자 2명에게 실탄 사격을 가해 1명이 중태에 빠졌다. 홍콩 경찰은 이날 시위자를 검거하던 도중 다른 시위자가 다가오자 실탄을 쐈다고 한다. 경찰관이 신체적 위협을 받는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곧바로 실탄을, 그것도 시위대의 다리나 팔 등이 아닌 가슴을 직접 겨누었다. 문제의 경찰관은 곧이어 다른 시위자를 향해 두 발을 더 발사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한 홍콩 경찰과 배후의 중국 당국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홍콩 경찰은 문제의 경찰관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총격 장면은 명백한 공격 행위임을 증명한다.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이 시민을 향해 곧바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홍콩 시위자가 경찰의 실탄에 맞은 것은 세 번째다. 그러나 이날은 대낮에 총격이 이뤄진 데다 총격 장면이 페이스북으로 생중계돼 충격을 더했다. 지난 8일 시위 도중 추락해 사망한 홍콩과기대 학생 차우츠록을 추모하기 위한 시위에서 벌어졌다는 점도 분노를 샀다. 시위에 따른 사망자를 기리고자 하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홍콩 경찰의 무도함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11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앞 광장에서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 회원들이 홍콩 정부의 폭력을 규탄하고 있다(위 사진). 홍콩 민주화 요구 시위자들이 이날 사이완호 지역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쏜 것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홍콩 _ EPA연합뉴스


우려스러운 것은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이 중국 정부의 지시라는 점이다. 지난달 말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재한 19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에서 홍콩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한다고 밝힌 직후 진압의 강도가 세졌다. 더구나 홍콩 경찰은 일부러 폭력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우려된다. 오는 24일 홍콩에서는 18개 선거구에서 452명의 구의원을 선출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친중파 쪽이 패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폭력 시위를 구실 삼아 선거를 연기하려 한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번에 선출되는 구의원 중 117명은 홍콩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인단(1200명)에 포함되기 때문에 선거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홍콩 당국이 지난 5월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표결 때 이에 반대한 야당 의원 3명을 최근 체포한 것도 이런 의혹을 심화하고 있다. 친중국 성향의 홍콩 당국이 이런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이는 조작에 의한 민주주의 압살이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기 전부터 민주주의를 구가해온 곳이다. 이런 홍콩에서 중국이 시민의 정당한 권리인 집회를 억압하고, 나아가 시위자에 총격을 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중국이 표방해온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의 정신에도 명백히 위배한다. 중국은 홍콩 시위 사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지 않게 폭력 진압을 중지시키기 바란다. 유혈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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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반성한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소개했을 뿐 자신의 반성은 담지 않았다. 오히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당당히 밝혀서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케 했다. 단언컨대, 아베 담화는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내놓은 과거사 관련 문건 중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박근혜 정부는 아베 담화의 수많은 내용 중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한 문장만을 갖고 담화 전체에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일본과 외교를 못한다고 못 박았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 갈등이 깊어지고 이로 인해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차질이 생기자 미국은 화해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관계 개선에 나서야 했다. 그러자니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노선 변경’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흉물스러운 아베 담화를 긍정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개월 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다. 박근혜 정부는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합리화시키려다 ‘외교 참사’를 일으키고 국정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4일 태국 방콕 임팩트포럼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방콕 _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의 강제징용 판결 문제 처리 과정은 박근혜 정부와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강제징용 문제가 대법원의 최종확정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한 위기의식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도 없었다. 판결 이후에는 일본의 협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사법부 결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며 스스로 퇴로를 끊는 강경 자세를 취했다.


대일 외교에서 감정이 앞서면 안된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 외교는 일본 문제를 잘못 다루면 외교의 축이 흔들리게 되는 구조적 취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역사의식이 끔찍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상대가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라서 외교를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긴 숟가락을 갖고 가서라도 악마와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외교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무리수였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중단시켜 미국을 판에 끌어들이는 잘못된 대응 카드를 꺼냈다. 이 때문에 한국은 GSOMIA 중단 효력이 발생하기 전인 22일까지 원상복구를 해달라는 미국의 압박을 받게 됐다. 정부는 일왕 즉위식에 특사를 보내고 다자회의장에서 환담 기회를 만드는 등 대화를 적극 시도하고 있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앞으로 2주 내에 일본과 문제 해결에 합의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면 ‘매우 험난한 한·미관계’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시간에 쫓겨 강제징용 문제를 대충 마무리하면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같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 갈등에 미국이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바로 직전 정부에서 목도하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공자는 사람의 수준을 넷으로 분류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은 성인에 가깝고,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은 그다음이다. 곤란을 겪으면서 배우는 사람(困而學之)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이며, 최하의 부류는 곤란을 당하고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困而不學)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지금이라도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왜냐하면 한·일관계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이다. 한국 헌법은 식민지배가 불법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구조적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충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를 어찌어찌 해결한다 해도 유사한 분쟁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강제징용에 버금가는 난제가 지금 또 닥쳐오고 있다. 이번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3일부터 시작된다.


거듭된 정부의 대일외교 실패가 낳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한국이 도덕적으로 절대 우위를 가져야 마땅한 역사 문제에서 일본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초현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일 접근법이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정부의 용기가 필요하다. 외교안보라인을 전면 개편하고 심기일전하기를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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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약) 탈퇴를 끝내 강행했다. 2017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협약 탈퇴를 선언한 지 2년5개월 만에 탈퇴 공식절차에 돌입한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4일(현지시간) “미국은 파리협약에서 탈퇴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며 “미국은 공식 탈퇴 통보를 유엔에 전달했다. 탈퇴는 통보로부터 1년이 지나야 효력이 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노동자와 기업, 납세자에게 지워지는 불공정한 경제적 부담 때문에 파리협약 탈퇴 결정을 내렸다”면서 미국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시민의 에너지 접근을 보장하면서도 모든 종류의 배출을 줄여왔다고 강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술 더 떠 이날 석탄화력발전에 대한 두 가지 규제까지 풀어줬다. 환경정책의 초침을 거꾸로 돌리기로 작정한 듯하다.


파리협약은 2015년 기후변화 대응에 전 세계가 동참한 역사적 합의다. 이제는 변화를 넘어 ‘재앙’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매년 폭염과 홍수, 태풍과 한파가 지구를 휩쓸고 있다. 세계기상기구는 ‘2015~2019 기후보고서’에서 2015년부터 올해까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더웠고 이산화탄소 농도도 가장 높았다고 분석했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알프스 산맥 등 각지의 빙하가 사라져가고, 남태평양 섬나라들은 바닷물에 잠겨가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형태로 자연이 반격해올지 상상하기도 두렵다. 그레타 툰베리가 경고한 대로 인류는 이미 대멸종의 시작점에 서 있는지 모른다. 파리협약의 합의대로 온실가스를 감축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이 파리협약에서 발을 빼는 것은 지구에 대한 폭거이자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다. 미국이 탈퇴하게 되면 중국·인도의 온실가스 감축 이행 의지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파리협약체제가 형해화될 우려도 크다. 


기후변화 대응은 전 세계의 합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국경을 가리지 않고, 지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사정만 앞세워 파리협약 탈퇴를 강행한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을 규탄한다. 미국이 탈퇴절차에 들어갔지만 최종 탈퇴는 1년 뒤인 내년 11월3일에 이뤄지므로 돌이킬 시간은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라도 협약 탈퇴를 철회하고, 국제사회와 연대해 온실가스 감축노력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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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중순쯤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 참석차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머문 짧은 기간 동안 연수 참가자들이 미국 국방부·국무부 관계자 및 싱크탱크 전문가들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 특히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는 무엇인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 6개월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싱크탱크 전문가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은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봉쇄라는 정책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상태라는 설명이었다.


동아시아 정책만이 아니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노선 전체가 안갯속인 상황이었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4월8일 ‘트럼프 독트린의 부상: 독트린을 따르지 말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후보 시절 시리아 내전은 미국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했던 그가 화학무기 사용을 응징한다면서 시리아 공군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지시한 직후 나온 기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로 우리를 이끌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가치와 목표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나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라면서 “나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예측불가능성’이 그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일관성 있는 트럼프 독트린은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예측불가의 행동도 거듭되면 ‘패턴’이 드러나는 법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그의 판단은 여전히 즉흥적인 면이 있지만, 사례가 축적되면서 귀납적 추론을 통해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나타났다. 특히 지난 9월25일 트럼프 대통령의 74차 유엔 총회 일반토의 연설과 지난달 23일 시리아 철군에 관한 백악관 기자회견은 트럼프 독트린을 도드라지게 내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에서 한 연설의 핵심은 “각자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면 세계는 모든 나라에 더 좋은 곳이 된다”는 것이었다. 각국 지도자들에게 ‘국제주의’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각자의 나라, 각자의 국민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진력하라고 충고했다. 일종의 ‘자유방임주의’라고 해야 하나. 세계 각국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노력하면 이민문제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는 논리다. 74년 전 2차 대전의 참화를 딛고 탄생한 유엔에서 미국 대통령이 한 연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 철군을 강행하며 밝힌 군사개입 원칙은 더욱 직설적이다. 그는 “후보 시절 나는 미국 외교 정책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경험과 역사, 세계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이해에 의해 인도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서 해외에서 미군이 개입할 3가지 원칙을 설명했다. 첫째, 미국의 국가적 이익이 명백히 걸려 있어야 한다. 둘째, 분명한 목표와 승리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셋째, 분쟁에서 빠져나올 경로가 존재해야 한다. 만약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미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다면 그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다.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그간 세계 질서 유지라는 일종의 공공재를 제공해온 것은 사실이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퇴장하면 그 자리엔 공백이 생긴다. 공백은 채워져야 하는 게 물리법칙이다.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은 이미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마찰은 불가피하다. 역사가들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발발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심화를 꼽는다. 트럼프 독트린의 파장은 이제 시작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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