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이 참석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28일부터 이틀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다. 이에 앞서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은 27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는 등 정상 외교에 들어갔다. G20 정상회의는 통상 세계 경제와 무역·투자 문제가 핵심 의제이지만 이번에는 전체 정상회의보다 세계의 현안으로 대두된 미·중 정상회담이 회의를 지배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양국 간 무역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됐다. 한국으로서는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이후 지지부진한 북·미 핵협상과 악화되는 한·일관계 등이 최대 현안이다. 


이번 회의의 핵심은 과연 미국이 중국 제품에 대해 3000억달러 규모의 고율관세 부과를 강행할지 여부다. 미·중 양국이 협상에 실패해 양국의 모든 상호 수입품에 25% 추가 관세가 부과될 경우 전 세계 경제와 금융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세계 경제의 성장세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왔다. 미·중은 세계의 지도국으로 세계 경제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두 정상은 파국만은 막아야 한다는 자세로 합의 도출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 역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국가로 예측된 만큼 대비가 필요하다.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갈등이 장기화·구조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이번 회의를 통해 변화하는 정세를 파악해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 등에서도 국가 전략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번 G20 정상회의가 북·미 비핵화 협상에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지도 주목된다. 북·미 회담이 4개월 넘게 교착에 빠진 상황에서 한·미·중 정상이 연쇄 회담을 여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특히 지난주 방북한 시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함으로써 비핵화 협상 진전에 건설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시 주석이 이날 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는 변함이 없으며, 조속히 합리적 방안이 모색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전한 것은 그런 역할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 한·일 정상회담 일정이 빠져 있다. 주최국 정상으로 19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 이웃나라 정상과 만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가 “한국은 정상회담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힌 만큼 일본은 주최국으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문 대통령도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막판까지 노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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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최종 판결에 아직까지 공식 입장도 정하지 못한 채 안팎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무능해서만은 아니다. 판결이 나온 이상 이 문제는 ‘노답’이다. 정부가 대법원 판결의 취지대로 한·일관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한마디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한·일관계를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적시하지 못한 ‘역사적 과오’를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체제가 비록 지금 한계에 도달했다고는 하나, 이미 한·일관계와 근대 한국을 형성하는 뿌리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금에 와서 역사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단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대법원의 이 판결은 정부를 ‘완벽한 딜레마’에 빠뜨렸다.


이 판결은 수십만의 강제징용·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승소가 보장되는’ 소송의 문을 열어줬다. 일본 기업들이 배상해야 할 액수는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며 한·일관계는 단절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2012년 5월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가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을 때 이미 예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의 국제법적 문제나 외교적 파장 등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과 논쟁은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파기환송이 된 이상 결과가 다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종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 수년이 걸리는 동안 국내적으로 이 문제가 공론화되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됐다면 정부의 대책 마련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의 심지가 점차 타들어가고 결국 예상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기까지 6년 동안 정치인·관료·전문가·언론·시민단체 등 어디에서도 공개적이고 진지한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수습을 해야 한다. 일단 길은 두 가지다. 법대로 끝장을 보는 것과 외교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논란 종식을 위해서는 ‘법대로’가 쉽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도 그게 부합한다. 청구권협정의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대법원의 판결이 맞는지 일본의 주장이 맞는지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결판내면 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승소 가능성은 둘째 치고 한·일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ICJ가 국제분쟁 해결에 기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ICJ 제소는 결과와 무관하게 양국관계를 파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만일 한·일 모두 파탄을 원치 않는다면 외교적 타협이 순리다. 지금 가장 먼저 할 일은 한·일 모두 ‘파탄을 피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미 입장을 밝힌 것으로 봐야 한다. 지난 19일 정부가 제안한 ‘한·일 기업의 자발적 위자료 지급’은 대법원의 배상 명령과 별개여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정부의 설명과 맞지 않는다.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구조적으로 극복하려는 자세도 아니다. 하지만 파국을 피해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신호를 처음으로 보낸 것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제안대로 실행하자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 제안을 논의의 기초로 삼아 외교적 타협을 해보자는 의사타진이다. 


일본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것이 외교적 타협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일본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뜻이 있다면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외교적 해결을 시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는 한국 정부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본의 협조 없이 한국 혼자 할 수도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된다. 이 문제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한·일 간의 불행했던 과거’가 그 근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한·일관계를 법으로만 규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법으로 대치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자기기만이다. 한·일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는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사실, 일본이 처음부터 이 문제를 법적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단 한번이라도 보였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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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6일 “북·미 간에는 3차 정상회담에 관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북·미 협상 재개를 통해 다음 단계로 나가게 될 것이며 이제 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합뉴스 등 국내외 6개 통신사와의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플루토늄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 전부가 검증하에서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 과정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으면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경제협력도 탄력을 받을 것이며 국제사회도 유엔 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또는 단계적 완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언급은 그간 관측 수준에 머물던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대화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의미가 있다.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4개월 만에 북·미 ‘톱다운 외교’가 재시동을 걸기 시작했으며 이를 공개해도 좋을 정도로 여건이 무르익었다는 뜻이 된다. 이런 상황인식하에서 문 대통령이 북·미 양측을 향해 비핵화 협상 방안을 제시한 것은 주목할 가치가 크다. 문 대통령은 이전에도 ‘영변 핵시설의 완전한 폐기’를 언급하긴 했지만 이번엔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한 핵시설 전부’ 등으로 더욱 구체화했다. 이를 검증하에서 폐기한다면 비핵화가 불가역적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고 한 것은 북·미 간 눈높이를 조율한 현실적인 가이드라인으로 보인다. 영변 핵시설 폐기의 무게감을 미국이 재평가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북한에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검증하의 폐기’라는 조건을 부과한 셈이다. 이 과정이 진전을 거두면 제재 완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하노이 결렬 이후 정부는 ‘굿 이너프 딜’ 등 비핵화 중재안을 내놓긴 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번 제안은 하노이 결렬에 대한 충분한 복기와 성찰을 바탕으로 한 데다 28~29일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반도 주변국들 간의 연쇄 정상회담이 예고된 가운데 나온 만큼 시기적으로도 적절하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뜻을 내비치면서 한국의 역할 위축이 우려되는 가운데 문 대통령이 능동적 의지를 밝힌 것도 긍정적이다. 비핵화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미 양측이 문 대통령의 제안을 토대로 조속히 협상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우선은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방한을 계기로 실무협상이 성사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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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개를 대상으로 한 ‘펑츠(자해 공갈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개 물림 ‘할리우드 액션’ 사기극이랄까. 


지난달 간쑤성 란저우에서 일어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 남성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여성 견주를 따라가다가 견주가 한눈을 판 사이 개에게 달려들어 밀친다. 놀란 개가 짖으면서 날뛰는 틈을 타 개에게 물린 척하고 견주에게 치료비를 뜯어낸다. 사건 당사자이자 목격자인 개가 증언을 못하니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다. 란저우뿐 아니라 각지에서 비슷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자, 경찰은 범죄 예방을 위해 사기 수법을 자세히 알렸다.


그런데 중국 누리꾼들의 반응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되레 사기꾼 남성을 응원하고 나섰다. 대부분이 “이 ‘펑츠’는 지지한다” “악은 악으로 다스려야 한다”면서 ‘당해도 싸다’는 입장을 밝혔다. 개 목줄을 하지 않고 산책을 나온 견주가 백 번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공갈 협박범보다 무개념 견주에게 더 분노했다.


중국에서 자해 공갈 사기를 일컫는 펑츠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는 도자기를 뜻한다. 일부 골동품 업자들이 금이 간,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길가 자판에 세워놓고, 행인들이 실수로 건드리기를 기다렸다가 돈을 뜯어내는 수법에서 나왔다. 길에서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려다 오히려 가해자로 몰리거나 고의로 차에 뛰어들어 다친 척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개 목줄을 하지 않은 견주를 겨냥한 펑츠는 수년 전부터 등장했다. 그러나 무개념 견주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올라가면서 범죄를 지지하는 이상 현상까지 나오고 있다.


수년 새 눈덩이 불어나듯 애견 인구가 늘어나면서 아파트에서 개 짖음이나 층간 소음은 물론, 배변물 방치, 개 물림 등 사고도 잇따랐다. 뉴스에서 다루지 않던 작은 사고까지 소셜미디어로 노출되면서 켜켜이 쌓여온 반려견 에티켓에 대한 불만이 응집돼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에는 약 6700만마리의 반려견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개를 키우는 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의식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 사고가 많은 곳으로, 교통사고로 다치는 이들보다 개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14배 많다는 조사 결과까지 있다. 반려견 등록, 목줄 착용 등 규정은 있지만 일일이 감시하기도 힘들다.


항저우에서는 전국 최초로 지난해 11월부터 밤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 사이에만 반려견을 집 밖에 데리고 나가 산책시킬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통제에 나섰다. 그러나 일일이 단속이 어렵고 낮에 산책시킬 수 있게 해달라는 견주들의 항의가 거세지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4월부터 낮에도 반려견을 산책시킬 수 있는 시범 지역 3곳을 운영하고 있지만 완전한 문제 해결은 어렵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법적 책임을 가리기도 어렵다. 60대 여성이 산책을 하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강아지가 달려들며 짖는 것에 놀라 넘어졌고, 800만원이 넘는 입원비가 들었다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했다. 이를 두고 부주의냐 개 탓이냐를 두고 2년간 소송을 벌이다 ‘쌍방과실’로 결론이 났다.


법적으로 해결이 쉽지 않자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처단까지 나타났다. 결핵 치료에 쓰이는 약물이 개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반려견들이 산책하는 공원에 일부러 뿌려놓는 사건도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산책하던 개가 햄 속에 박혀 있던 약물을 먹고 죽는 일이 이어진다. 무개념 견주도 문제지만 유독물질을 공공장소에 뿌리는 일은 더 심각한 범죄다.


늘어나는 개 때문에 사회 분쟁이 늘어나고 있지만 법규와 감시만으론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견주들의 의식 전환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텐데, 과연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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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미국이 이기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전쟁’이자 ‘잊혀진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 뒤 극동의 조그만 반도에서 벌어진 국지전인 데다, 베트남전처럼 전쟁을 성찰할 계기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전쟁 1년 만에 전선이 고착된 뒤에는 소모전을 되풀이하다 멈춰 드라마틱한 요소도 부족했다. 보통의 미국인들이 야전병원을 무대로 한 시트콤 &lt;매시(MASH)&gt;를 통해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저술가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는 &lt;이런 전쟁&gt;(1963)에서 미국은 당시 며칠 혹은 몇달 안에 끝날 분쟁 정도로 여기고 참전했다가 수렁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준비 안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한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동맹이 됐고, 한때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됐던 한국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이 됐다. 비무장지대(DMZ)는 세계 최대의 군사력 밀집지역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연습이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자유진영의 최고지도자’인 미국 대통령이 DMZ를 방문하는 것은 성지순례 같은 ‘의식(儀式)’이었다. 로널드 레이건(1983), 빌 클린턴(1993), 조지 W 부시(2002), 버락 오바마(2012)가 차례로 방문해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북한은 그때마다 “전쟁광신자” “전쟁행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지 2주 만에 방한한 부시 대통령은 DMZ 내 도라산역 연설에서 ‘악의 축’ 발언을 반복하려다 김대중 대통령의 만류로 그만뒀다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토머스 허버드가 후일 회고했다.

 

오는 29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DMZ 방문이 초미의 관심사다. 일본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DMZ를 찾아 북한 비핵화 관련 메시지를 발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깜짝 만남을 가질 가능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두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는 분위기로 미뤄 트럼프의 DMZ 방문 양상은 적어도 이전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문이 한국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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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꼭 69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몇 차례 군사충돌이 있었고 2017년 하반기 전쟁재발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지만, 2018년 이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한반도 정세는 안정화되고 있다.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서 채택이 무산된 뒤 남북대화와 북·미 대화가 중단됐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에서 “인내심을 갖고 계속 미국과 대화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주요 20개국(G20) 오사카 정상회의를 전후해 한반도 정세가 다시 움직이고 있다. 국가주석으로는 14년 만에 시진핑이 평양을 방문해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는가 하면, 이를 전후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친서를 교환했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낸 친서를 읽고 “그의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한다”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 생각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15개월 동안 다섯 차례나 정상회담을 열고 ‘한 참모부’를 이루겠다고 언명한 북·중관계를 고려할 때, 시진핑 주석도 이미 친서 내용을 알고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에 어떤 제안이 담겼을까? 그 내용까지 알 길은 없다. 다만 그동안의 비핵화 협상 경과와 정치적·외교적 상황 등을 근거로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오는 29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헬기로 판문점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2017년 11월 그가 서울에 왔을 때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판문점을 방문하려다 짙은 안개로 헬기 운항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주한미군기지 방문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한·미 정상이 함께 판문점을 방문할 때 이에 맞춰 김 위원장이 내려와 판문점 북측지역인 통일각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나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상상해 보자.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핵심의제는 한국전쟁을 상징적으로 끝내기 위한 ‘3자 평화선언’(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아울러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의 가동중단과 미군유해의 추가송환을 약속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경협에 대한 제재를 일부 면제한다고 밝히고, 문 대통령은 금강산·개성 관광의 재개를 천명할 수 있다. 종전선언을 계기로 비건·최선희 간에 비핵화 고위실무회담이 시작되고 남북 간 대화와 교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종전선언인가? 2006년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핵화를 위해 “남·북·미 3자 정상이 종전을 공식선언하고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당시 부시는 원론적으로 말했으나, 노무현 정부가 이를 종전-평화조약의 2단계 구상으로 발전시켰다. 북한이 요구하는 안전보장(평화협정, 북·미 수교)은 핵폐기가 완료됐을 때나 제공할 수 있는 것이어서 핵폐기 시작에서 완료까지 과도기 동안에 대북 안전보장에 공백이 생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한·미 정상이 북한의 과도기 안전을 정치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2007년 10월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종전선언 구상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묻혀있다가 4·27 판문점 남북정상선언에서 부활했다.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작년 1차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싱가포르에서 3자 종전선언이 재추진됐다. 지난 2월 말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실무회담에서도 종전선언 채택에 잠정 합의한 바 있다. 종전선언 채택은 하노이 회담의 결렬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4·20 시정연설에서 밝힌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근본방도’에 부합하는 것으로 일종의 ‘새로운 셈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국으로서도 가역적인 종전선언을 내놓는 대신 대북 제재 카드를 계속 쥐고 있어 손해볼 게 없다. 종전선언이 채택되고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는 것은 중국에도 한반도정책 3원칙에 부합되고 평화체제 협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돼 나쁘지 않다.

 

하노이 회담 때 드러난 북·미 이견이 아직 해소되지 않아 빠른 시일 내에 3차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 이후 침체된 비핵화 협상에 동력을 불어넣을 필요성에는 한·미 양국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남·북·미 3자 종전선언이 성사된다면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나의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조성렬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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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통신은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어본 뒤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친서를 받은 시점과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지난 2월 말 하노이 정상회담 후 4개월 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북·미 대화에 반전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 정상의 친서 교환과 긍정 평가를 적극 환영하며 북·미 양측 간 조속한 대화 재개를 기대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집무실로 보이는 공간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친서를 읽고 있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하노이 협상 실패 후 최근까지 북·미 양측 간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셈법을 바꿔야 대화할 수 있다며 올해 말까지만 기다리겠다고 압박하고, 단거리 미사일까지 발사했다. 미국 역시 북한 화물선을 압류하는 등 대북 제재를 강화했다. 그러던 중 김 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1일과 17일 ‘매우 따뜻하고 멋진 친서’ ‘아름다운 친서’라고 연속으로 칭찬했다. 김 위원장도 이번 트럼프의 답신에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능력과 용기에 남다른 사의를 표한다”면서 “흥미로운 내용에 심중히 생각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매체는 친서를 읽는 김 위원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단순히 외교적 수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례적인 찬사이자 강력한 대화 의지 표현이다. 특히 김 위원장이 친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협상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보낸 김 위원장의 친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 것을 감안하면, 두 정상은 이미 협상의 큰 틀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셈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0~21일 방북해 김 위원장과 만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밝혔다. 또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미·중 정상이 연쇄 회담을 한다. 정상회의가 끝나면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한다. 시 주석이 김 위원장의 뜻을 미국에 전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에 화답한다면 북·미 대화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을 것이다. 북·미는 주변국의 노력과 친서 교환을 통해 확인한 정상 간 상호 신뢰와 대화 의지를 바탕으로 북·미 협상 재개를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북·미는 이번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방한을 계기로 3차 정상회담 실무협상을 재개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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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스티브 배넌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배넌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다. 이 질문이 떠오른 건 두 계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난 18일(현지시간) 있었던 트럼프의 재선 출정식이다. 더 직접적인 건 일주일 전 영국 신문 가디언 보도다. 가디언은 트럼프가 배넌을 재선 캠프에 기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보도는 야후뉴스 기자인 알렉산더 나자리언이 트럼프 재선 출정식 날에 맞춰 낸 <최고의 사람들: 트럼프 내각과 워싱턴 포위>의 내용을 미리 입수한 것에 바탕을 뒀다. 나자리언은 지난 2월 트럼프를 인터뷰했다. 트럼프는 그 자리에서 “지난 6개월 동안 배넌을 4~5차례 봤다”면서 “지금 배넌만큼 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4개월 전 이야기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배넌과 다시 한번 손을 맞잡을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월22일 백악관에서 당시 수석전략가인 스티브 배넌과 이야기하고 있다. 워싱턴 _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의문이 들 법하다. 배넌이 트럼프 재선에 중요한 인물인가.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지만 백악관을 떠난 지 2년이 다 돼 간다. 지난 5월 말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전후 그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2020년 대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 그였다. 트럼프 상황도 지난 대선 때와는 딴판이다. 현직 프리미엄에다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 이러니 그가 트럼프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 법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트럼프와 배넌의 결합이 낳은 결과를 생각하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배넌이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에 합류한 때는 그해 8월17일이었다. 대선을 3개월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배넌은 대안 우파를 내세운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자였다. 2007년 공동으로 만든 브라이트바트 뉴스라는 매체를 통해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반유대주의 등을 부추겼다. 트럼프와 통하는 바가 많았다. 캠프 합류 후에는 강경 이민정책과 무역정책을 앞세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를 이뤄냈다. 대선 승리 후 배넌은 승승장구했다. 인수팀에 곧바로 합류한 그는 2017년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땐 수석 전략가라는 직함을 받았다. 백악관에 한번도 없던 자리다. 권한은 비서실장에 비견됐다. 시사주간 타임이 당시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우고 ‘위대한 조종자’라고 뽑은 제목처럼 2인자 아닌 2인자였다. 그러나 백악관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주인은 엄연히 트럼프였다. 트럼프의 딸과 사위 등 경쟁자도 즐비했다. 생존을 위한 권력게임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사태 등 악재 끝에 대선 캠프에 합류한 지 꼭 1년 만에 백악관을 떠났다. 다시 브라이트바트 뉴스로 돌아갔다. 백악관 밖에서 트럼프를 지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2018년 1월, ‘트럼프 사단’과 결별해야 하는 결정적인 일이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울프의 책 <화염과 분노>가 문제였다. 배넌이 트럼프의 큰딸 이방카를 ‘멍청이’라 부르고, 큰아들 트럼프 주니어에게 ‘반역적’이라고 한 사실이 드러났다. 트럼프로서도 두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하지만 세계는 넓고, 배넌으로서는 할 일이 많았다. 주 활동무대를 유럽으로 옮겼다.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을 극우 포퓰리즘 확산의 교두보로 삼았다. 그 결과가 지난 5월 말 유럽의회 선거에서의 극우파의 선전이었다. 배넌으로서는 2020년 미 대선을 다음 목표로 삼을 만했다. 트럼프 사단에서는 쫓겨났지만 트럼프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트럼프를 향한 구애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미국을 엄청 사랑한다. 그는 의무감으로 이끌어왔다. 트럼프가 나라를 구했다.” 


트럼프와 배넌의 첫 번째 만남이 낳은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극우 포퓰리즘의 확산으로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은 확산됐고, 이민장벽은 높아졌다. 미 국내 정치도 마찬가지다. ‘오물 청소’를 강조하며 워싱턴 정가의 부패를 뿌리 뽑겠다고 했지만 나아진 것은 없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트럼프와 배넌의 결합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트럼프와 배넌의 재결합 여부는 선거 전략가로서의 배넌의 효용가치에 달려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통했지만 지금은 어떨까. 재선 캠프는 지난 대선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조직이나 선거자금이 탄탄하다. 배넌이 설 자리가 좁아진 것이다. 더욱이 민주당 유력주자들과의 맞대결에서는 불리하지만 결코 승산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신감의 발로일까. 트럼프는 재선 출정식에서 특유의 분열을 조장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리고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 지키겠다”고 했다. 이는 현상유지를 강조한 말이다. 트럼프와 배넌이 재결합해 재선에 성공한다면 세계는 다시 한번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잘못된 만남은 한번으로 족하다.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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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 특히 노인들은 정부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노년을 보장한다는 약속이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발단은 지난 3일 일본 금융청이 채택한 ‘고령사회의 자산 형성·관리’라는 보고서다. 보고서는 65세 남성과 60세 여성 부부가 30년간 무직으로 살아간다면 공적연금 없이 2000만엔(약 2억1700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19일 아사히신문은 “아베 신조 총리가 그런 보고서를 쓴 금융청은 바보라면서 화를 냈다”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2004년 집권 자민당이 ‘100년 안심’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연금개혁을 추진할 당시 간사장이었으니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 이는 야당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연금개혁의 실패를 개인에게 떠넘긴다’ ‘말을 바꿔 공적인 책임을 포기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베 총리가 격노한 다음날 아소 다로 부총리는 금융청의 보고서를 “정식 보고서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없던 일’로 하겠다며 여론 무마에 나선 것이다.


노후 문제는 한국이 더욱 심각하다. 국내 연금 전문가는 일본 방식대로 산정할 때 한국의 노후자금은 3억3000만원이라고 했다. 국민연금연구원의 노후준비 실태조사에서 나온 월 적정생활비(243만원)에서 각종 연금과 기타소득, 평균 저축액을 감안한 수입액(130만원)을 뺀 추정액이다. 한·일 간의 차이는 연금액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공적연금액은 약 210만원이지만, 한국은 85만원에 그친다. 일본의 국민연금 보험료율이 18.3%인 반면 한국은 9%에 불과한 탓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연금개혁은 휴면상태다. 다음 세대가 더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다.


일본 보고서는 노후 대비를 위해 세 가지를 제안했다. ‘현역 시절’에는 매월 일정액을 장기간 분산투자할 것, ‘퇴직 전후 시기’에는 퇴직금과 연금수급액을 파악해 돈이 부족하면 집을 팔고 물가가 싼 지역으로 이사갈 것을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고령기’에는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만큼 금융자산을 정리하고 자산정보를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공유하라고 했다. 한국의 노인들도 참고할 만하다. 노후생활도 각자 도생하는 길밖에 없는가.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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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에서 평화는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무력갈등이나 분쟁을 벌이지 않고,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 정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국가나 정치체제 사이의 협력과 제도적 보장이 필수다. 흔히 이런 경우를 ‘평화협정’이라고 말한다.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은 지리적 의미에서 출발한 분단이 정치체제의 주요 관점으로 변해온 역사를 안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으로 보면 분단은 서로 다른 체제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은 두 개의 독자적 사회로 형성되어 왔다. 때에 따라 남한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과 북한이 남한에 미치는 영향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사회구조는 전혀 다른 체제를 향하는 것이었다. 근대국가의 정치제도를 근간으로 하지만 남북한은 한 번도 동질적인 현대사회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해방 이전 과거의 것이지, 분단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남북한 사회의 독자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분단’을 재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회’의 고유성과 내적 중심성을 강조하고, 항구적인 평화로 이끄는 접근 방식이다. 영구 평화를 분단의 고착으로 폄하할 이유는 없다. 통합을 이룬다면 평화적인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일부 정치세력은 남북관계를 한·미관계의 종속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정부의 취약성 중 하나가 미국과의 관계라는 의미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외교정책과 대북정책의 자율성을 확대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이것은 북한의 협력과 정부의 대미 외교에 달려 있다. 북한을 껴안은 채 미국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평화를 위한 자율성은 계속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을 설득하는 것은 북한의 안전보장과 미국의 이해관계를 맞바꾸는 것이다. 


2018년 4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이어 남북한이 각 분야별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평화선언’이나 ‘평화협정’은 남북한과 북·미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는 데 시대적 사명이 있다. 상대방의 체제를 보장하면서 극한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방안, 우호적이고 안정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이 평화이다. 평화의 좌표를 설정했다면 이제 그 나침반을 따라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때로 지남철이 심하게 떨리기도 하겠지만, 그 끝이 가리키는 평화의 좌표는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가진 힘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주변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치열한 외교 노력을 해야 할 때다. 한반도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유일한 길은 평화공존이다.   


분단의 특징이기도 한 제도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장기적인 평화가 유일하다. 통일은 일종의 정치 현상이다. 어설픈 통일 방안에 대한 모색이 아니라 충분한 평화를 위한 공존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랜 평화의 전진이야말로 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흡수통일을 정강정책으로 삼지 않는 이상 어느 정치세력이 정부를 장악하더라도 한반도 평화는 우리의 삶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의 비전대로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평화 없이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한성훈 | 연세대 국학연구원·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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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1일 북한을 국빈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다. 시진핑 주석의 이번 방북은 2005년 후진타오 전 주석 방북 이후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14년 만에 처음인 데다 북·중 수교 70년을 계기로 이뤄지는 것이어서 의미가 작지 않다. 또한 김 위원장이 지난해 3월부터 지난 1월까지 4차례 방중하면서 시작된 북·중관계 복원 작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는 셈이다.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 18일 서우두공항에서 평양행 고려항공 수속을 밟고 있다. 연합뉴스


주목되는 것은 방북 시점이다. 미·중 갈등이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이달 말로 예정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벌어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 간 담판에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편으론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1년을 맞아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친서외교’가 재개되면서 장기 교착 중이던 북·미 협상에 모종의 변화가 감지되던 참이다. 그런 만큼 시 주석의 방북에는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다.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 앞서 북·중 결속을 과시해 미국을 압박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 시 주석의 방북이 북·미 협상 재개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트럼프 행정부의 시선에도 복잡함이 감지된다. G20에서 시 주석을 압박해 미국에 유리한 무역합의를 이끌려는 구상에 ‘방북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이 17일(현지시간) 시 주석의 방북에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 달성”이라는 원론적인 논평을 하는 데 그친 것도 이런 속사정 탓일 것이다. 정부는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청와대는 17일 방북 발표가 나온 뒤 “시 주석의 방북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협상의 조기 재개와 이를 통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시 주석의 방북이 문재인 정부와 긴밀한 협의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언급도 나온다.


18일 북한 평양의 한 상점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기념우표가 진열돼 있다. 평양 _ AFP연합뉴스


시 주석의 방북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코 미·중 패권 경쟁을 위한 지렛대로 이용돼서는 안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미·중 갈등에 휩쓸려 좌초하거나 부정적 영향을 받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문제만큼은 미·중이 갈등을 멈추고 협력할 것을 당부한다.


시 주석의 방북을 시작으로 28~29일 일본 오사카 G20까지 열흘간 북·중, 미·중, 한·중, 한·미가 연쇄 정상회담을 여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정상외교가 숨가쁘게 전개된다. 그 결과에 따라 북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의 향방이 가려질 것이다. 한동안 작동을 멈췄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재가동하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정부도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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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예 ‘손타쿠’를 넘어서네요.”


최근 ‘노후자금 2000만엔’ 문제에 대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대응을 두고 도쿄의 외교 소식통이 혀를 내두르며 한 말이다.


‘손타쿠’는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촌탁(忖度)’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 말은 아베 정권 들어선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긴다’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정부 관료나 공무원들이 알아서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점을 비꼰 것이다. 이런 ‘손타쿠’를 넘어선다고 평가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발단은 지난 3일 금융청이 발표한 ‘고령사회의 자산 형성·관리’ 보고서다. “연금 생활을 하는 고령부부는 30년간 약 2000만엔(약 2억1900만원)의 여분 저축이 필요하다”는 내용에 ‘정부가 연금정책의 실패를 개인에게 떠넘긴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금융담당상은 11일 “정부의 입장과 다르다”면서 “공식 보고서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한술 더 떠 “(재무성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아) 보고서 자체가 없어졌다”며 야당이 요구하는 예산위원회 개최를 거부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금융청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 있는 보고서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보고서를 작성한 워킹그룹은 대학교수, 변호사, 민간싱크탱크 대표 등으로 구성됐다. 재무성과 후생노동성 등 관계부처도 옵서버로 참가하고 있다. 이 워킹그룹은 아소 부총리의 자문을 받아 설치됐다.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면서 정작 답은 듣지 않겠다고 하는 셈이다. “전대미문의 부조리극”(마이니치신문)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아베 정권은 그간 ‘은폐 본질’을 누누이 비판받아 왔다. 남수단 평화유지활동(PKO) 육상자위대의 일일보고 은폐, 모리토모(森友)학원 국유지 헐값 매입 의혹과 관련한 재무성 문서조작 등 불리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숨기거나 발뺌해 왔다.


‘아베 1강’ 체제의 장기화로 정권 내 ‘손타쿠’ 구조가 확산된 데 따른 것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노후자금 2000만엔’ 논란도 아베 정권의 ‘은폐 본질’이나 ‘손타쿠’ 구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정권의 중추들이 아예 대놓고 은폐나 손타쿠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사실 이번 보고서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게 아니다. ‘30년간 2000만엔이 필요하다’는 추계의 근거자료는 후생노동성이 제공했다. 금융청이 독자적으로 ‘30년간 1500만~3000만엔 필요’라는 추계를 내 워킹그룹에 제시한 것도 드러났다. 정부로선 보고서의 문제 제기를 냉정하게 짚어보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다음달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에 불리한 사실이 나오면 곤란하니까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정권 눈치를 보는 보고서만 내라는 격이다.


이런 아베 정권의 막무가내식 태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 국민이다. 문제가 생겨도 발뺌을 하거나 거짓말로 강변하면 넘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아베 정권에 심어준 것이다. 정치평론가 이토 아쓰오(伊藤惇夫)는 최근 도쿄신문에 “관료의 손타쿠나 불상사, 정치가의 폭언·실언이 빈발해도 내각 지지율은 잠깐 내려갈 뿐 곧 회복된다. 국민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고, 지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게 됐다”고 밝혔다. 


흔히들 아베 정권의 장기화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느끼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7월 참의원 선거가 그 잣대가 될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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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만든 노래의 힘은 공감대역이 넓다는 데 있다. 시대를 담은 가사와, 단순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멜로디의 확장성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나라의 국가(國歌)가 되고, 세계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국가인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탄생도 그러했다. 이 노래는 1789년 시작된 혁명의 열기 속에 프랑스 북부에서 만들어진 군가였다. “가자 조국의 아이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 우리에 맞서 압제가/ 피의 깃발을 들었다/ …/ 무리지어라/ 전진하자, 전진하자.” 그런데 남부 지중해 연안 마르세유 지원병이 힘차게 이 노래를 부르며 파리로 행진해 오면서 곡명이 ‘라마르세예즈’로 바뀌었다. 이어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1879년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는 여러 나라에 잘 알려진 노래다. 원래 스페인 민요였는데 멕시코로 건너오면서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혁명군의 군가로 애창됐다. 라 쿠카라차는 바퀴벌레라는 뜻이다. 다양한 노랫말 속에 라 쿠카라차는 ‘가난한 농민’이 되기도 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혁명운동가’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 민중가요 ‘스텐카 라진’(Stenka Razin)도 제법 많이 불린다. 스텐카 라진은 본명이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으로, 러시아 남동 국경지방에 거주했던 카자크인이다. 17세기 중반 러시아 차르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했으나 체포돼 붉은광장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차르 치하에서 신음하던 민중에게 영웅이었던 그는 노래 속에 살아 있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홍콩 시민들이 16일 도심에서 ‘마음은 이미 갈가리 찢어졌다. 악법을 철회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범죄인 인도 조례’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홍콩 _ AP연합뉴스


홍콩 시민들이 지난 14일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집회에서 한국의 민중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절반은 한국어로, 나머지는 광둥어로 불렸다. 시민들은 후반부를 합창했다. 이 노래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윤상원과 앞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홍콩 시민들은 이 노래를 광둥어로 ‘우산행진곡’으로 개사해 불렀다. 2014년 홍콩 민주화 시위를 상징했던 ‘우산혁명’을 기리는 노래라는 의미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뿐 아니라 일본, 대만, 필리핀에서도 불린다. 이 노래의 중국어 가사를 붙였다는 홍콩 시민의 말처럼 ‘좋은 노래는 오래 전해져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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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어서 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제재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북핵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것으로 비치는 우리 정부의 행동도 적절치 않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은 그간의 북핵 해결 노력이 성공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잘못된 결과는 잘못된 과정의 축적이다. 미국은 전략적인 문제를 작전적으로 접근했고, 우리 정부는 전략적인 문제를 정략적으로 왜곡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전쟁과 직접 비교하기 어렵지만 얼마간의 시사점은 있다. 전쟁에는 다양한 수준의 사고와 행동들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전략의 영역, 작전의 영역, 전술과 전투의 영역이다. 아무리 전술과 전투를 잘하더라도 작전적 오판을 극복할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작전적 성과도 전략적 실수를 만회하기 어렵다. 전략은 장군들의 고유영역이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군관계가 자리를 잡으면서 전략은 점차 민간 정치지도자들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과거 장군들은 거의가 정치지도자였고 전략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클레망소 프랑스 대통령이 “전쟁이란 너무 중요해서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했을 때의 그 전쟁이란 바로 전략의 영역을 의미한다. 과거 장군들의 영역이었던 전략과 작전의 영역 사이에는 심연과 같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전투를 잘한다고 훌륭한 작전가가 될 수 없다. 훌륭한 작전가가 뛰어난 전략가가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까지의 북핵 해결 노력은 통찰력과 인내가 필요한 전략적 접근이 아니라, 정확성과 신속성을 요구하는 작전적 접근방식에 가까웠다.


전략적 사고의 핵심은 방법과 수단이 아니라 문제 해결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굳이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략적 사고의 원칙이다. 요구되는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자유자재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목적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선 안된다. 지금 미국은 제재를 북핵 해결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병법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손자병법>과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가 가치 있는 것은 기묘한 작전과 전술이 아니라 전략적 수준의 통찰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 과정을 보면, 우리는 상대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가를 살펴보라는 <손자병법>의 기초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북한은 한·미동맹보다 중국의 위협을 더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북한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이를 상당한 수준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이 처한 입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전략적 사고능력의 결여를 의미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상황도 상정해야 한다. 북핵 폐기를 위한 노력은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안보우려와 경제발전이라는 요구를 전면적으로 배제하고 무작정 핵만 포기하라는 주장은, 북핵 해결 노력에 관심이 없거나 전략적 사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북핵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미가 강력한 동맹이지만 입장과 이해를 달리하는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미 간 전략적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강력한 단결이 필요하다. 합리적인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정파적 논란의 대상이 됨으로써, 우리의 안보이익을 식별하고 추구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입장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은 매우 제한된 스펙트럼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을 배제하고 강압하는 것보다 포용하고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내용이다. 한편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통일전선전술로 인해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패배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북핵 문제의 성과를 현정부 지지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정파적 유혹의 반대급부인지도 모른다. 정상적이라면 걱정은 북한이 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과정에서 우리는 전략적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미국은 북한을 친미국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몇번이나 놓쳤다. 우리 정부는 정략적으로 북핵 문제에 접근하여 오히려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전략적이란 말은 통찰력과 인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본격적인 북·미 협상 전에 당국자들이 <손자병법>과 <군사학 논고>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좋겠다.


<한설 |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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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6일로 북유럽 3개국 국빈방문을 마무리했다. 이 기간 중 문 대통령은 오슬로포럼, 한·노르웨이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스웨덴 의회 연설 등을 통해 사흘 연속으로 대북 메시지를 발신했다. ‘하노이’ 이후 교착된 북·미 협상과 남북대화의 복원을 위해 담아둔 생각들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며 북한의 화답을 촉구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국빈방문 중인 지난 15일(현지시간) 스톡홀름 뮤지칼리스카 콘서트홀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과 함께 문화행사 공연을 본 뒤 한국 태권도 공연단을 격려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문 대통령이 지난 12일 노르웨이 오슬로포럼 기조연설에서 ‘국민을 위한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간 추진해온 대북 정책의 본뜻을 되새기자는 취지로 보인다. “평화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고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추상적인 평화가 아니라 당장 실행 가능한 실천적·적극적 평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남북대화, 북·미 협상이 결국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성찰해 보자는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이나 선언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깊게 하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대화 교착을 타개하기 위해 상호 이해와 신뢰라는 기본 태도를 강조한 것은 북·미 양측 모두 귀담아야 할 내용이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4일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대화”라면서 “북한이 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발 더 나아가 “북한은 완전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도 했다. 북한이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연일 강한 톤으로 대북 메시지를 발신한 것은 미국의 대선국면이 임박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 플로리다에서 2020년 대선 출정식을 열고 재선 도전을 공식화한다. 이달 말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계기를 살리지 못할 경우 북·미 협상 교착이 상당 기간 이어질 우려가 있다. 대선기간 중 협상이 재개된다고 해도 득표전략과 연계되는 만큼 북한의 운신 폭이 좁아질 가능성도 크다. 


문 대통령은 할 말을 다 했고, 공을 북한으로 넘겼다. 문 대통령은 “시기·장소·형식을 묻지 않고 언제든지 대화에 응할 준비가 돼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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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 인도 법안 개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시위사태가 심각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9일 역대 최대 규모인 103만명(주최 측 추산)이 시위를 벌인 데 이어 12일에도 수만명이 거리로 나서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를 외쳤다. 홍콩 경찰이 물대포와 최루탄에 고무탄까지 동원하며 강경진압에 나서면서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민들을 넘어뜨린 뒤 경찰봉을 마구 휘두르는 폭력 진압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도 커지고 있다. 경찰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강조했지만, 대체로 평화적이던 시위를 경찰이 과잉 진압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타당해 보인다.   


‘범죄인 인도 조례’에 반대하며 홍콩 입법회 건물 외곽에서 시위를 벌이던 홍콩 시위대가 12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 가스에 휩싸여 있다. 홍콩 _ AP연합뉴스


홍콩 당국이 추진 중인 범죄인 인도 법안은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시민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다. 2016년 중국 당국을 비판하는 책을 출판하고 판매했다는 이유로 홍콩 출판인 5명이 납치돼 중국 감옥에 감금된 일이 있었다. 이런 사태가 앞으로 합법적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시민들의 우려에 수긍이 간다. 


1997년 홍콩 반환 시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을 내세워 홍콩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일국양제’ 원칙은 그간 무난히 지켜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홍콩 통제가 강화되면서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시민 불만이 커졌다. 


12일 범죄인 인도 조례를 반대하는 홍콩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에 대해 시민들이 격분하고 있다. 홍콩_AP연합뉴스


국제사회는 우려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홍콩 당국에 “집회의 자유를 존중하라”며 “모든 당사자에 폭력 없는 대화를 당부한다”고 강조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도 범죄인 인도 법안에 우려를 나타냈다. 


중국 언론들은 이번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하며 외부세력의 선동이 있다고 보도하면서 강경대응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홍콩 전체 인구의 7분의 1이 거리로 나설 정도라면 힘으로 눌러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중국과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 법안의 처리를 중단하고 시민들과의 대화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일국양제 원칙이 침해되고 있다는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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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다시 친서를 보냈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밝혔다. 지난 2월 말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이후 두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친서 내용이 “아름답고 따뜻하다”며 “아주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정상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한 것이다. 마침 노르웨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을 향해 남북 주민들의 피부에 닿는 교류협력을 강화하자는 ‘오슬로 구상’을 밝혔다. 싱가포르 회담 1주년을 맞아 남·북·미 간 협상 분위기를 돋우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아이오와주로 떠나기 전 백악관 사우스론(남쪽 뜰)에서 기자들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전날 아름다운 친서를 받았다고 밝히며 편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김 위원장의 친서는 북·미 협상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말부터 지지부진하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도 지난 1월 김 위원장이 보낸 친서를 계기로 급물살을 탔다. 이번 친서도 하노이 회담 이후 협상이 장기 교착되는 상황에서 나와 주목된다. 문 대통령이 오슬로에서 밝힌 대북 제의 역시 남북 간 대화와 교류를 폭넓게 확대·촉진할 수 있는 방안이어서 기대를 갖게 한다. 과거 동·서독이 접경지역에서 화재, 홍수, 산사태나 전염병, 병충해, 수자원 오염 문제에 공동 대응한 것처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류협력을 하자는 것이다. 대북 국제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각도로 협력을 모색하자는 제안은 시의적절하다. 북한이 판문점을 통해 조화와 조전을 보냄으로써 최근 별세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조의를 표한 것도 긍정적이다. 직접 조문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 위원장의 최측근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만났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북·미 양측은 그동안 제재 강화와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으로 기싸움을 하면서도 대화의 문은 닫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시기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3차 정상회담을 원한다고 말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3차 북·미 정상회담은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김 위원장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해 명분을 주는 모양새다. 이에 따른 북·미 간 실무접촉도 기대할 만하다. 남측은 이달 말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4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뜻을 사전에 파악한 뒤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다면 북·미 간 협상에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북한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북·미 간 실무접촉과 남북 간 대화가 재개돼 북·미 협상의 돌파구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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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방문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헬싱키는 바로 유럽에서 냉전종식의 단초를 제공했던 ‘헬싱키프로세스’가 시작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헬싱키프로세스는 1975년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 35개 국가가 참가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서 채택된 ‘헬싱키 최종협약’에 의해 시작됐다. 이 협약이 채택된 이후 이행 여부를 검토하는 회의가 유럽 도시에서 개최됐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마침내 1989년 동구권의 붕괴와 1990년 독일통일의 초석이 됐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한반도통일과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번영을 위한 제도적 틀을 구축하고자 하는 문 대통령은 헬싱키프로세스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핀란드는 강대국인 러시아 및 독일과 인접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생존을 위한 줄타기 외교정책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운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핀란드가 약소국이었음에도 초기 헬싱키 최종협약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핀란드의 중립적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한 소련은 격앙된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범유럽안보협력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소련은 이를 위해 친러시아 중립국가인 핀란드에 실무협상을 위한 준비과정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고 서방 측이 동의함으로써 핀란드가 유럽안보협력의 중심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핀란드가 타 유럽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특히 당시 유럽안보의 핵심 이슈였던 동서독 분단 문제에 중립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와 헬싱키프로세스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많은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헬싱키프로세스의 교훈이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함의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헬싱키프로세스는 1972년 동서 양 진영 간 긴장완화가 최고조에 달한 데탕트라는 국제환경이 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했고 인접국가들과의 국경선 문제도 해결됐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에 긴장이 완화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남북 간, 북·미 간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반면 헬싱키프로세스는 헬싱키 최종협약이라는 합의안을 도출함으로써 동서냉전의 종식을 가져왔으나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북핵 문제라는 걸림돌로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다.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 진행되는 현시점에서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운전자 역할을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핀란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외교노선이다.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은 강대국들의 동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핀란드가 유럽안보협력의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국들의 자발적 요청과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 더 나아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구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이 한국의 역할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냉엄한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한국이 역할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운전자’보다는 ‘촉진자’ 역할이 더 현실에 부합한다고 판단된다.


<홍기준 |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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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트럼프였기에 회담이 가능했고 트럼프이기에 뜻밖의 성과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북핵 협상 역시 트럼프식 협상 전략의 한계에 묶여있다는 지적이 다수다. 


뉴욕타임스는 협박을 기반으로 하는 트럼프의 협상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가혹한 조치로 상대방을 위협하고, 마감 시한을 설정하고, 양보를 압박하다가, 불완전한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파국을 피하고, 자체적으로 승리를 선언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트럼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_AP연합뉴스


북·미 비핵화 협상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북한은 2017년 11월까지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 발사를 이어갔고, 트럼프는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 ‘완전한 파괴’라는 말로 위협했다.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특사외교로 국면이 급변했고 친서외교를 통해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양측은 회담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송환 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합의 이행을 위한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고, 그럼에도 트럼프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을 성과로 내세우며 성공론을 펴고 있다. 


트럼프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본다면 북핵 협상은 아직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북·미는 한반도 비핵화의 최종 상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비핵화 달성을 위한 로드맵도 그리지 못했다. 트럼프는 선 비핵화 대 선 제재완화로 맞붙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빈손으로 걸어나오면서 북한 비핵화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대북 관여 정책이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다. 일각에서는 비핵화 협상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서 전략적 인내 전략을 택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집권 후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핵 문제가 곪아 터지게 만들었다”며 폐기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병행하는 정책 기조를 제시했다. 하지만 1년 간의 관여 정책이 한계에 봉착하자 결국 한층 강화된 대북 제재에 기반한 수정된 전략적 인내로 기울고 있다. 2020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입장에서 미국민을 향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막았다는 선전만으로 정치적 효과는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트럼프의 대북 정책이 기존 정부의 실패한 정책들과 차별점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지금이다. 버락 오바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이란 원론적 합의를 구체적 실행으로 옮기는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이 돼야 한다. 트럼프가 진정한 협상의 기술을 보여줄 때다. 때문에 트럼프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1년만에 대북 제재만 믿고 전략적 인내로 돌아설 것이 아니라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여에 나서야 한다. 협박에 기반한 트럼프식 협상 공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협박이 아닌 상호 존중에 기반한 협상이 필요하다. 지지층만 보는 정치적 과시가 아닌 실질적 성과가 중요하다. 


북한은 올해 연말을 협상 시한으로 제시한 상태다. 트럼프가 전략적 인내로 돌아서고 북·미 대화가 결국 단절된다면 내년부터 다시 2017년 때와 같은 위기 국면이 조성될 수 있다. 대선에 가까이 갈 수록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은 더 큰 정치적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북한 역시 비핵화 로드맵 조차 내놓지 않으면서 제재 해제만 요구할 때가 아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항공모함과 같다는 말이 있다. 방향을 선회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돌면 다시 방향을 틀기 어렵다는 의미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후에도 대북 관여 정책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워싱턴|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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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세기의 만남’을 가진 지 12일로 1년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적대관계인 북한과 미국의 최고지도자들은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 미군 유해송환 등을 담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70년 적대관계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의지를 담은 합의가 채택되자 국제사회는 열렬히 환영했다. 한반도 냉전체제가 해체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열린 것에 가슴 뛰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의 악수는 세계 분쟁 역사에 길이 남을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싱가포르 회담 1년이 지난 현재 한반도 정세는 기대만큼 빠르게 변화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담긴 합의 중 실제로 진전된 것은 미군 유해송환뿐이었다. 북·미는 후속 협상에서 비핵화를 놓고 옥신각신하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불신은 미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북·미관계 수립, 평화체제 구축 합의는 제쳐 둔 채 비핵화에만 집착했고, 금방 이뤄질 것 같던 종전선언도 무산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비핵화가 20% 정도 진행된다면 제재완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가 ‘완전한 비핵화 없이 대북 제재 해제는 없다’고 태도가 돌변했다. 부실한 준비 끝에 모호한 합의문을 작성했다가 국내 보수세력들이 반발하자 태도를 바꾼 것이다. 북한도 비핵화의 정의와 전체 그림을 만들지 않는 등 치밀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노딜’은 예고된 참사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현 상황을 싱가포르 합의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는 없다. 두 정상이 서로 신뢰하고 있고, 공히 정세관리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의 모멘텀을 살려내기도 쉽지 않다. 북한은 ‘새로운 계산법’을 내놓으라고 하지만 미국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완전한 비핵화’만을 되뇌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를 따라하는 건 아닌지 의문스럽다. 북한의 핵 실험·미사일 발사 동결이 유지된다면 외교업적으로 충분하다는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런 식의 태도가 지난 30년간 북·미 협상을 실패로 이끌어왔음을 잊어선 안된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는 서로 속내를 파악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는 안된다는 점도 공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 시일 내에 다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한다. 6월 중 남북 정상이 만나 3차 북·미 정상회담의 디딤돌을 놓을 필요가 있다. 6월 하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이전에 4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협상 모멘텀을 살려낼 수 있다. 정부가 양측이 귀 기울일 만한 정교한 중재안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