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우호적이고 협력하는 미·중관계를 바랐다. 원만한 미·중관계하에서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으로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중 우호관계하에서는 설사 양국 간 갈등 요인이 나타나더라도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었다.

 

실제로 미·중 사이 한국의 외교는 각 정권의 특색과 상관없이 본질적으로는 전략적 모호성이 기본 틀이었다. 어떤 정부도 안보와 경제 이익 중 하나가 훼손될 가능성의 발생을 피하려 했다. 민감한 현안을 회피하거나 시간을 끌며 미·중의 합의 또는 상황에 변화가 올 때까지 버티며 어느 한 측과도 갈등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종합국력의 격차를 줄여오고 나아가 추월까지 전망되는 중국의 부상을 앉아서 바라볼 수 없었다. 또한 관여와 포용을 강조했던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대중정책이 중국의 자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은 의회를 포함한 미국 사회 내에서 점차 힘을 얻어나갔다. 미·중 무역협상, 남중국해에서의 대립, 대만관계, 화웨이 사태 등 경제, 군사·안보, 외교,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대중 압박과 이로 인한 양국 간의 갈등은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같은 시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안착이라는 당면한 목표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미·중 모두로부터의 협력이 필요했다. 주어진 대외환경에서 전략적 모호성이 통할 공간은 구조적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었지만 이를 견지해왔다. 한국의 국익을 가능한 한 보호해 보려는 정부의 노력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은 기존의 경제와 군사·안보적 갈등에 더하여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 및 ‘체제 우위’의 논쟁을 거치더니 이제 본격적인 ‘이념’ 경쟁으로 치달으며 더욱 격화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이 지난 5월20일 발표한 중국 관련 전략 보고서에서는 중국과 ‘중국 공산당’을 분리하여 호칭하기 시작했다. 이어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5월30일 허드슨 연구소에서의 연설을 통해,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6월15일 기고문에서 중국 공산당을 비판했다. 6월30일에 중국이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킨 후에는 윌버 로스 상무장관까지 공식 성명을 통해 중국 공산당 비판에 가세했다.

 

미국이 이렇게 이념의 대립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중국과의 경쟁 구도를 ‘미국 대 중국’에서 자국에 한층 유리한 ‘자유진영 국가들 대 중국’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의회와 함께 중국과의 이념 경쟁을 제도적으로 준비해왔다.

 

미국은 대만, 홍콩,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에서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8년에 ‘타이완 여행법’이, 2019년에는 ‘타이완 보증법’과 ‘홍콩 인권과 민주주의 법’ 등이 발효되었다. 2020년 들어서도 ‘위구르족 인권 정책법’과 ‘홍콩 자치법’이 발효되었으며, ‘티베트 정책과 지지법’이 미 하원을 통과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공산당체제의 정통성이 직접적으로 연계된 주권과 통일에 관한 문제라 물러서기가 어렵다. 중국이 경제적 파장을 각오하면서도 지난 6월30일 전격적으로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키며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최근의 상황은 한국에도 ‘선택’의 압박을 더한다. 미·중 간 이념의 경쟁은 단기적으로 버티면서 상황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던 호주도, 화웨이 사건 때 중국의 손을 들어줬던 영국도 중국의 보복 조치를 각오하며 미국과 보조를 함께하고 있다.

 

한국의 더 큰 고민거리는 미·중은 물론 유사한 입장을 가진 다수의 국가들이 모호성을 유지하는 한국의 향후 행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미 입장이 분명한 러시아, 인도, 호주와 함께 G7에 초청된 것은 한국에 독이든 성배가 될 수 있다. 사실상 한국의 입장 표명 자리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미·중 어느 한쪽으로부터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에 휴스턴 주재 총영사관을 72시간 이내에 폐쇄하라고 요구한 상황에서 이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이 통하는 공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만약 선택을 피할 수 없는 현안이라면 조속히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국민들과 합의된 가치, 정체성, 국익이 정의된 ‘원칙’을 가지고 대미 및 대중 외교를 새로이 준비해야 한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Posted by 경향 신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