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대남전단(삐라) 살포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재차 예고한 21일 경기 파주시 북한군 초소가 보이는 접경지역에 적막감이 흐르고 있다. 권도현 기자


말과 행동이 너무 험하다. 어제와 오늘 말이 다른 행태를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북한의 태도 변화는 너무 극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6·15 메시지는 “철면피한 감언이설”이 됐고, 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포옹에 박수를 보냈던 남쪽 사람들은 “남조선 것들”이 됐다. 급기야 북한은 “쓰레기들과 이를 묵인한 자들의 죗값”이라며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단둘이 대화하고, 그해 9월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함께 손을 들어올렸던 게 엊그제 일이다. 대북 제재가 여전하고, 남북협력 사업은 진척이 없고, 북·미관계가 교착되는 등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게 섭섭했을 수 있다. 하지만 70년 쌓인 불신과 냉전의 잔재를 몇 차례 정상회담으로 모두 거둬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북한은 너무 조급했다.


북한 의도를 둘러싼 해석은 갈린다. 다수 전문가들은 미국을 겨냥했다고 한다. 남측을 때려 긴장을 조성하고, 대북 외교를 치적으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해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대북전단을 꼬투리 삼아 남북관계 속도를 내지 못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에선 북한이 불안한 국내 상황을 덮고 후계구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긴장을 연출한다고 관측한다. 어느 분석이 맞을지 알 수 없다. 여러 이유가 겹쳐졌을 수도 있고, 다른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이유가 어떻든 북한은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미국을 움직이려 한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코가 석 자다. 미국은 코로나19 사망자와 감염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고, 트럼프 대통령은 대응 실패 비판에 허덕이고 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에 연방군을 투입한다고 했다가 군부 반발에도 부딪혔다.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지지율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볼 여력이 있겠는가.


만에 하나, 대화가 이뤄지더라도 북한이 바라는 수준, 예컨대 핵동결과 제재완화 등을 맞바꾸는 식의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홍보용 이벤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을 통해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론이 악화되고 불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북한을 감싸기 어렵다. 정부는 대화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악화된 국내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의 제동에도 남북관계에 속도를 낸다는 생각을 지난해 말 이전부터 했었던 것 같다. 지난 4월 총선 압승 후엔 그런 구상이 더 굳어졌다. 북한이 대북전단을 문제 삼았을 때 법적 근거 논란이 일었음에도 단속의지를 천명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 그 증거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를 믿고 기다렸어야 한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금강산관광 재개 등을 모색해 국제사회 제재로 막힌 경제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우는 방안을 모색했어야 한다. 하지만 연락사무소 폭파는 당분간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한때나마 김 위원장을 동생처럼 여겼을 문 대통령은 “어이구, 이 친구야” 하며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북한이 국내 문제를 덮기 위해 도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 위원장 신변에 문제가 발생해 후계구도를 굳히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면에서 남쪽을 때리는 상황을 보면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북한은 손해보는 장사를 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 2년간 만들려 노력했던 정상국가 이미지는 연락사무소 폭파의 굉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정상국가라면 내부 문제를 덮기 위해 이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다.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밤 김 위원장은 싱가포르 외교부장관과 관광지를 산책하며 악의 없는 듯한 표정으로 셀카에 찍혔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은둔의 왕국에서 성장한 젊은 지도자는 과거 관행들과 결별을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김 위원장은 ‘불량국가의 믿을 수 없는 독재자’로 되돌아갔다. 북한은 무엇을 바라는가.


<이용욱 국제부장>

Posted by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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