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칼럼]북한이 모르는 북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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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이대근 칼럼]북한이 모르는 북한의 힘

by 경향 신문 2019. 11. 13.

연말, 북한은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미국이 연말까지 북핵 문제 계산법을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북한의 압박에 미국이 굴복하는 것 말이다. 미국은 결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은 연말이 다가올수록 대미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단순히 협상 방법의 문제를 넘어 근본적 전환을 요구한다. 지난달 6일 북·미 실무협상 결렬 뒤 “역스러운 협상” 운운하며 공격적인 언사를 마다 않던 북한은 체제 안전, 대북 제재 해제를 비핵화하기도 전에 다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그게 뜻대로 될 리 없다. “기회의 창이 매일 조금씩 닫혀가고 있다”는 지난 8일 외무성 미국국장의 자못 여유로워 보이는 경고에는 조급성이 잔뜩 묻어난다.


북한은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북한의 관점에서 실무협상은 포괄적 합의 압박을 받는 자리다. 포괄적 합의를 위해서는 비핵화의 최종상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은 이걸 싫어한다. 하지만 거부할 논리가 약하다. 북한의 ‘선 신뢰구축, 후 비핵화’보다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정은은 ‘북한의 제도 안전과 발전’을 막는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면서 그걸 위해 도널드 트럼프가 연말 정상 간 담판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상 담판을 끌어내기 위해 북한이 동원하는 명분의 하나는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다. 북한은 협상의 진전을 원할 때 주한미군 철수, 한·미훈련 중단 입장을 거둬들인다. 1992년 북·미 간 첫 고위급 회담 때 그랬다. 2000년 일련의 회담, 즉 남북정상회담, 조명록 인민군 차수 방미,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방북 때도 북한은 통일 이후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했다. 협상에 기대하는 것이 없을 때는 미군철수, 훈련 중단을 주장한다. 1990년대 후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 좋은 예다.


훈련 중단 거론 여부는 향후 협상을 전망할 수 있는, 꽤 일관성 있고 신뢰성 높은 신호다. 김정은이 지난해 4월 예년 수준의 훈련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이후 대외관계는 전례 없는 속도와 범위로 진전됐다. 반면 훈련 중단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지지부진해졌고, 대외관계는 단절되거나 정체됐다.


‘미국의 신뢰 조치 결여론’도 북한이 동원하는 주요 명분이다.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에 상응하는 미국의 신뢰 조치가 없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비핵화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말인즉 옳다. 문제는 서로 기대하는 신뢰 조치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데 있다. 북한이 미국에 불만인 것처럼 미국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북한에 불만이다. 최근 신뢰 부재의 상당 몫은 북한이 공약한 완전한 비핵화 불신에서 비롯된다. 비핵화를 믿을 수 없는데 비핵화를 전제로 먼저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이 미국에 최종상태(적대시 정책 폐기)를 요구하면서 자신의 최종상태(비핵화 정의)는 제시하지 않겠다는 것도 자가당착이다.


그런 현실에서 비핵화를 신뢰구축 다음 단계로 미루는 것 자체가 신뢰 형성을 막고, 바로 그 때문에 비핵화는 더 어려워진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신뢰·비핵화 분리가 아니라, 신뢰·비핵화 조치 병행으로 신뢰·비핵화를 서로 촉진하는 선순환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역시 포괄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연말 중거리 혹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쏜다면 북한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미국은 이미 연말 시한을 무시했다. 시한에 구속된 존재는 김정은뿐이다. 북한으로선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 스스로 풀면 그만이다. 중장거리 미사일을 쏠 것처럼 행동하되 쏘지는 않고, 비핵화는 하지 않되 비핵화 공약을 내세우며 시한을 연장하는 것이 그로서는 현실적 대안이다.


그렇게 회색지대에 들어간 뒤 기존 핵 정책을 재점검하는 숙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상대 지도자를 눈속임하거나 상대 정권이 바뀌거나 인기를 잃거나 하는 국내 정치변수를 이용하려는 앝은수에 집착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지도자 한 사람, 임기가 정해진 특정 정권만 유혹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 전체, 집권당, 야당, 국회, 여론을 설득할 묵직하고 진지한 대안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이어야 한다.


북한은 ‘만능의 보검’이라며 핵의 힘을 과신한다. 힘은 상대를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핵의 힘은 제한적이다. 김정은도 핵을 가졌음에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북한이 가진 진짜 힘은 따로 있다. 그 힘을 믿고 죽 밀고 가야 한다. 바로 비핵화다. 그것이 있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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