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백강 그리고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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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백강 그리고 5·24

by 경향 신문 2019. 7. 4.

얼마 전에야 중요한 역사를 뒤늦게 알았다. 서기 663년 백강전투. 이는 한·일 간 해묵은 갈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도 준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단지 경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전쟁’의 연장선이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등을 설거지하다가 깨진 그릇 하나다. 정부가 다소 거칠게 다루다가 떨어뜨린 꼴이랄까.


역사상 동북아 판도 변화에 주요 영향을 미친 세력은 다름 아닌 왜(倭)다. 요즘 고교생의 국사 교과서가 궁금해 삼국시대 편을 훑어보다 놀랐다. 우리 때와 달리 백강전투가 당당히 기록됐다. 백강전투는 민족주의 관점에선 다소 꺼림칙하다. 외세를 빌려 삼국을 통일한 나당연합에 더해, 백강전투로 왜구까지 개입했기 때문이다. 왜가 망해가는 백제를 도와서 약 5만 대군에, 함선 1000척이나 동원한 사건이란다.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충돌한 첫 전쟁으로 평가된다. 백강전투는 오늘날 동북아 질서의 원형을 낳은, 약 1000년 뒤에 재연된 임진왜란(1592년)의 전초전이다.


백강전투에서 참패하고서야 백제가 끝내 멸망한 뒤 왜는 국호를 일본으로 바꿔 새출발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지도층에 백제 땅은 돌아가고픈 고향일 것이다. 백제인의 피가 섞였다고 토로한 아키히토 전 일왕이 지난 4월 서둘러 물러난 까닭도 생전 한국을 방문키 위한 수구초심 때문일 거란 풀이까지 나온다.


한·일이든, 한·중, 한·미 관계든 민족감정을 넘어 동북아 국제질서의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더욱이 북한 비핵화를 놓고 세기의 담판이 진행되는 마당이다. 이번 경향포럼에 기조연설을 한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장 등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얘기한다. 다만 동북아에선 중국과 일본이 맞부딪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중국이 일본이나 인도와 충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와중에 한반도는 어떤 구상으로 앞날을 그려가야 할까. 단지 눈앞에 북한 비핵화란 우물에만 갇혀서는, 동북아에 끓어오르는 큰 냄비를 못 느낄 위험이 있다. 장차 중국의 초강대국 부상에 대응할 경우 한반도는 일본과는 더 가까워지는 게 유리할 수 있다. 지금 현실에선 참 껄끄럽지만. 이처럼 나당전쟁, 백강전쟁은 사실상 진행형이다.


화해한 한반도가 미래에 중립국 균형자가 될 수 있을까. 국력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고래 사이에 낀 새우 꼴이 될 한반도는 또 동북아 싸움터로 전락할 것이다.


우선 단단히 끼워야 할 첫 단추는 남북관계다. “남북관계가 문제 해결의 근원이다. 한국이 버팀목 역할을 할 때다. 한국이 무너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경향포럼에 온 중국동포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의 조언은 울림이 컸다.


한국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이자 운전자다. 미국이 ‘내비게이션’을 찍어주더라도 막히는 길을 돌아갈 줄 알아야 베스트 드라이버다. 금강산관광을 막는 건 유엔 대북 제재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5·24 조치’다. 여기에 아직 벌벌 떠는 문재인 정부가 과연 운전대를 잡은 게 맞나 싶다. 미국은 오토 웜비어 사망 전까지는 북한 관광을 허용해왔다. 남한 관광객이 가는 게 문제냐고 미국에 따진 적이나 있을까. 차라리 한·미 군사훈련을 내주더라도, 5·24 조치는 풀자. 자기들 아쉬울 때만 ‘우리민족끼리’를 앞세우다가, 유리할 때는 ‘통미봉남’ 해온 북측 책임 또한 크다. 문득 1997년 어느 날 K-16에서 주말 당번근무를 설 때 들은 미군 하사놈의 비아냥거림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한국은 미국의 51번째 주 아니냐?”


지금은 남북이, 좌우파가 자존심 다툼을 할 한가한 때가 아니란 사실을 1000년 역사로 되새겨보자.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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