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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에게 외국이라면 곧 미국이고, 문명의 표준이 곧 미국이던 시절이 있었다. ‘유러피언드림’이니 ‘독일모델’이니 하며 미국 아닌 세상을 진지하게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최근 미국 연방 상원의회 정보위원회 소속 다수당 의원들이 공개한 전임 정부 시절 중앙정보국(CIA) 고문 보고서를 보며 몇년 전 뉴욕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50대 외교관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미국 패권의 쇠퇴가 시작됐다고 확신한 것은 군사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과거에 하지 않던 짓, 가령 고문 같은 행동을 하고도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면서다.”

기자가 짧은 기간 미국 사회를 관찰하며 든 느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아직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며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 같다는 것이다. CIA의 고문 보고서 공개도 그런 느낌에 일조했다. 고문을 당한 사람 수가 과거 알려진 것보다 더 많고, 고문 방식이 좀 더 상세하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상당 부분 알려진 내용이었다.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를 통해 수사기관의 고문이 낯설지 않은 사람으로서 고문 실태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미국은 9·11 사태 이후 온 사회가 광기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먼지가 가라앉은 뒤 ‘과연 내 몰골이 어떤가’ 돌아보고 바로잡는다는 것이 미국의 저력이다. 무엇보다 이미 알려진 일이라도 의회가 보고서 형식으로 공개한 것은 법적 의미가 다르다. 국가기관의 행위가 ‘고문에 이른다’는 표현이 정부 문서에 명기된 것은 미국 같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책임자 처벌을 생각하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CIA와 조지 W 부시, 딕 체니 등 과거 정부의 책임자들은 ‘고문’이란 표현을 거부하거나 ‘CIA의 행동은 애국적이었다’는 논리로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얼마나 문명의 표준에서 동떨어진 존재인지 증명할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더 거세고, 마침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과거사 정당화에 이용하려 한다. 미국의 고문 문제를 자체 해결 능력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다. 유엔의 인권 관련 기구들이 나섰고, 일부 국가들도 논평을 내놓았다.

그런데 북한 인권 문제에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이유로 대통령까지 나서서 발언했던 한국 정부는 미국의 고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국제정치 현실에서 미국 인권 문제에 정부가 몸을 사리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인권 앞에 늘 붙여온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말에 일말의 진심이라도 담기를 원한다면 미국 인권 문제에 아예 입을 닫는 것은 모순이다.

CIA `고문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출처 : 경향DB)


그래도 정부의 입장은 있을 터. 경향신문이 외교부 대변인실에 미국의 고문 보고서에 대한 입장이 있는지 문의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먼저 나서서 얘기하기는 그렇고, 언론이 물어보면 대답하려고 준비해둔 입장은 있다.” 북한이 입장을 내는 방식 중에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 밝혔다”라는 것이 있다. 먼저 나서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언론이 물어보니 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약한 어조의 논평 방식이다. CIA 고문 보고서에 대해 한국 정부가 경향신문과의 문답에서 밝힌 입장은 이렇다.

“정부는 1966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및 1984년 고문방지협약의 당사국으로서 어느 누구도 고문은 물론 잔혹하고 비인도적, 굴욕적 대우와 처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또 오바마 대통령이 성명을 통해 밝힌 것처럼 이번 보고서 공개를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책임을 인정하려는 노력을 평가한다.”

사족이지만 기자가 이 글의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누구를 부당하게 가둘 수는 있을지언정, 최소한 ‘고문’은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손제민 |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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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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