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발언이 일파만파이다. 동북아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하면서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런 도발적 행동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를 초래할 뿐이란 대목이다. 전후 문맥을 봐서 주로 중국을 지칭한 듯하지만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감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국무부는 바로 해명에 나섰고 국내에서는 한국 정부의 대미 저자세 외교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장에서 한국이 미국의 역사인식 부족이나 일본 편향적 언사를 대놓고 추궁하기는 어렵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벌써 3년째 역사 문제에 대한 한국의 강경대응이 한·일관계를 악화시켜 미국의 국익을 저해한다는 인식이 워싱턴 조야에 확산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여론을 돌려놓을 방도를 고민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 집권 이후 공공외교 예산을 대폭 증액하여 영토 문제나 역사 문제 등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차단을 위해 대대적 노력을 경주해 왔다. 2015년 외무성 예산만 해도 “전략적 대외 발신”이란 이름의 공공외교에 전년도 대비 4500억엔을 증액, 7000억원을 상회하는 자금을 투입하여 영토 보전, 역사인식과 관련한 자국의 입장 발신, 일본의 다양한 문화적 매력 발신, 친일파·지일파 육성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사사카와 재단 등 민간단체도 미국에 70억원 규모의 자금을 살포하고 있다. 요즘 워싱턴은 일본 돈이 넘쳐나고 외교정책에 영향력이 심대한 싱크탱크들이 일본의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이다.

일본의 물량공세 상당 부분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지만 한국은 곤혹스럽다. 정부는 올해 외교부 공공외교 역량 강화를 위해 41억원을 증액한 131억원을 편성하는 등 총 178억원을 투입하였지만 일본의 40분의 1 정도 규모에 불과하다.

다행히 공공외교는 상대국 대중을 대상으로 자국의 입장과 정책을 이해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에 돈의 힘만큼이나 설득적이고 매력적인 발신 능력이 중요하다. 물량 소모전으로는 일본과 경쟁이 안 되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고 공감을 일으키는 소프트파워 활용으로 대응해 가야 한다.

미국의 지역·양자 외교를 총괄하는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이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예방한 뒤 청사를 떠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셔먼 차관의 발언은 동북아 국제정치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즉, 감정의 국제정치가 작용하는 장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위안부나 독도, 야스쿠니와 센카쿠란 언어가 주는 정서적 신호와 이를 지각하는 느낌은 한·중·일 간에 차이가 커서 외교관계는 감정이 공유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상대방의 비난은 정치지도자가 값싼 지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국민의 지배적 감정을 반영하지 못할 때 초래될 값비싼 정치적 비용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은 건설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일본과 감정의 공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논리하에서 반일(反日) 민족주의를 경계하면서 일본이 조장하여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한국의 중국경사론’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 공유와 함께 경제적·안보적 이익 공유 노력이 병행 추진될 때 더 큰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은 역사를 국가로부터 해방시킬 때 국제여론과 미국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미국의 역사교과서 위안부 기술에 대해 일본 정부가 수정을 요구하자 미국역사학회 19인의 학자들이 공동성명으로 강하게 반발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 오류나 한국 입장 편들기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역사 검열(censorship)의 거부에 있었다.

민주사회의 토대가 되는 학문의 자유를 부인하는 행위로 인해 물량공세의 일본 공공외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크나큰 교훈이다.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검열을 맹비난하면서 안으로는 정부가 직접 나서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만들려는 시도는 자가당착이다. 산케이 지국장 재판을 보면 한국의 법치(法治)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안으로의 민낯과 밖으로의 화장발 차이가 크면 매력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셔먼 차관을 끌어들이는 공공외교의 최고 병기는 민낯의 아름다움임을 상기해야 한다.


손열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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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은 지난달 27일 워싱턴 카네기평화재단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동북아 문제를 주제로 연설하면서 한·중·일 간 과거사 갈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한·중 지도자가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본 때리기로 민족주의 감정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교평론가가 그걸 지적하는 것과 미국의 고위 외교 당국자가 비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더구나 한·중·일 간의 갈등 사안에 대해 한·중을 하나로 묶어 비판하며 일본 편을 드는 것은 발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하나의 외교적 사건이다.

그는 민감한 외교정책에 관한 발언을 하면서 한·중의 일본 비판을 ‘도발’이라는, 편견이 배어 있는 단어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한·일 갈등에 대해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한국의 입장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는 일본의 퇴행적인 과거사 인식을 지적하는 최소한의 균형감각도 갖추지 않고 미국 정부가 한·일 갈등을 보는 시각의 일단을 드러냈다. 게다가 그는 중국과의 대일공동보조에 신중했던 한국을 중국과 같은 편으로 밀어 넣었다. 일본이 아무리 아시아에서 미국을 대리하는 최고의 동맹이라 해도 그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의 태도는 거론하지 않은 채 한·중 양국 비판으로 미·일 대 한·중의 구도를 만드는 게 과연 미국을 위해 전략적으로 이익인지도 의문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장관실을 방문한 웬디 셔먼 전 美대북정책조정관을 접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동안 미국은 일본의 태도를 온건하게 지적했고, 아베 신조 총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미국이 이렇게 은근히 편들기까지 한다면 아베 총리가 뭐가 아쉬워서 과거사 태도를 바꾸겠는가. 미국이 미·일 동맹 때문에 과거사에 발목 잡힌 일본을 방치하는 한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동맹으로는 아시아 평화에도 기여하기 어렵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진의도 의심케 한다. 이 시점에서 미국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어떤 정책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과거사 문제는 역사적 정의에 관한 문제인 것은 물론 한·일 관계의 올바른 미래, 한·미 관계의 발전을 위한 과제이기도 하다. 미국은 셔먼 차관의 발언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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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콘퍼런스 기조연설을 통해 역사 문제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갈등 구조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 직설적으로 작심 발언을 쏟아낸 것에서는 미국의 깊은 좌절과 초조감이 묻어난다. 이 발언은 동북아 역사문제로 자신들의 아시아전략이 좌초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표출이다.

그런데 미국의 좌절은 놀랍지 않다. 이미 예견됐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른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표방했던 2012년에 이미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한·중·일 3국이 얽힌 역사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미국은 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의 국익과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시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아시아 중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하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미국은 아마도 이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던 것 같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중국의 부상과 궤를 같이한다. 미국은 초기 단계부터 아시아 각 지역의 몇개국과 손잡고 소규모의 안보협력체 블록을 만드는 작업에 치중했다. 지역마다 3~4개 국가와 정치·안보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이다. 호주·필리핀·베트남·미얀마·인도 등이 주요 거점 국가였다. 가장 중요한 지역인 동북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을 한데 묶어 한·미·일 공조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었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단순히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지 않다. 미국도 중국과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은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무분별한 굴기’를 막으면서 적당한 긴장 속에서 협력과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한·일이 미국의 생각처럼 쉽게 묶이지 않으면서 미국의 고민이 시작됐다. 특히 중·일 갈등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서 중국과 ‘긴장 속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애초 목적이 틀어지고 있다. 또 중·일 갈등이 미·중 갈등으로 번져 미국의 아시아전략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미국은 크게 당황하고 있다. 셔먼 차관의 발언은 이 같은 미국의 전략적 실패에 대한 실망과 초조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좌절은 자업자득이다.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군사적 존재감을 키워 중국을 견제하게 하는 방식은 중국을 극도로 자극할 뿐 아니라 한국의 협조도 얻기 어렵다는 충고를 무시한 대가다. 그동안 한국의 전문가, 언론이 이 같은 문제점을 수없이 지적했음에도 미국은 듣지 않았다.

미국은 동북아 역사문제의 민감성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이해하지는 못했다. 역사와 문화, 휴머니즘을 무시하고 한 국가를 장기판의 말처럼 인식하는 전략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미국은 남미와 중동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아시아에서 반복한 것이다.

시민단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한 회원이 3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발언을 규탄하는 1인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셔먼 차관은 “정치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쉽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정치 지도자는 사실 한국이 아닌 중국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게도 ‘과거의 적’이다. 미국은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과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도 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와 항일 독립군이 있었고 지금 한국의 헌법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런 발언은 나올 수 없다. 미국은 전쟁상대국이었던 일본과 이미 오래전에 화해했는데 한국과 중국은 왜 그러지 못하느냐는 인식은 전형적인 승자의 논리다.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고 항복을 받아낸 미국과 달리 한·중은 일본으로부터 과거 침략과 지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받지 못했다. 미국이 서둘러 일본에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북아 역사갈등의 국외자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미국이 태평양전쟁 승리 이후 전후 질서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은 채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서둘러 봉합한 업보다. 한·중·일 역사갈등의 책임을 논하자면 미국도 절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충고할 수 있는 제3자가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당사자다.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수순이 잘못됐다. 아무리 실망스럽고 초조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은 지금부터라도 한·중·일 역사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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