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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2015년 1월1일 ‘신년소감’에서 내놓은 이 말은 일본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이 과거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 지역 국가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향후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과거 역사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선명하게 드러내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 풀이되면서 한국·중국 등 주변 국가로부터도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은 일왕이 일본의 패전 70주년이 되는 시점을 앞두고 만주사변을 언급한 것에 특히 주목했다.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할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류탸오후(柳條湖)에서 일본 군대가 철도를 폭파해 놓은 것을 일본은 중국의 짓이라 뒤집어씌우면서 전쟁을 벌였다. 일본은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아시아 국가들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일본은 패전 이후 미국과 벌인 태평양전쟁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아시아 지역에 끼친 피해는 소홀히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출처: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의 이런 발언을 접한 일본의 한 대학 교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만주사변’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일왕이 직접 거명하면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 것은 처음”이라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을 무시한 채 전쟁의 길로 가려고 하는 아베 총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일왕의 의도가 느껴진다고까지 평가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그해 8월15일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된 전몰자 추도식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직접 밝혀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았다. 일왕은 이날 “과거의 대전(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향후 전쟁의 참화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아베담화)’에서 과거 총리들이 언급한 반성과 사죄로 자신의 뜻을 대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즉위 이듬해인 1990년부터 매년 신년소감을 발표하던 아키히토 일왕이 올해는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83세인 일왕은 지난 2일 황거(皇居)를 찾은 일반인 방문객들에게 “우리나라와 세계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신년인사를 했지만, 별도의 신년소감은 발표하지 않았다. 궁내청은 앞서 일왕의 업무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올해부터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왕이 “점차 신체가 쇠약해져서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라면서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일본은 ‘아베 1강’ 체제로 완전히 굳어지고 있다. 아베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제1야당인 민진당이 10% 이하의 지지율 속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을 정도로 야당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언론도 ‘아베의 얼굴색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약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일본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일왕의 한마디 말은 아베 총리도 함부로 여길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왕이 ‘평화’의 메시지를 가득 담아 발표해온 신년소감을 내지 않기로 함에 따라 아베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견제자’는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국민의 고령화 문제가 사회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왕실의 고령화가 일본 사회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쿄 | 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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