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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말 필자는 한 학술 포럼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변혁을 대표하는 멕시코와 쿠바의 혁명이 남긴 성과와 의미를 서양 세계에서 발생한 혁명과 비교하면서 두 혁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논의했다. 8월 말 이 학술 포럼을 기획할 때 한국 사회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무척 낯설어 보이거나 다양한 각도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기회가 크게 줄었다는 느낌뿐이었다. 물론 현실 이면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그런데 지난주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이렇게 선언했다. “구체제를 넘어설 강력한 정치혁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100만 촛불, 시민혁명의 뜻입니다.” 시국선언이 일상화되고, 드라마보다 뉴스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시민혁명 선언까지 나왔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혁명 운운하며 법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로 지적된 사실을 떠올린다면 상전벽해라 할까.

 

무능, 불통, 속임수로 국민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준 박근혜 정권 4년의 마각(馬脚)이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경제 침체, 청년 실업, 세월호 참사 은폐와 조사 방해, 위안부 문제 졸속 협상,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폭정으로 나라를 결딴내면서도 대북 강경책과 반대자들에 대한 종북 낙인찍기로 기득권층과 정권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박근혜 정권은 비선 실세의 국정 유린과 더불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대변되는 공작·사찰 정치를 드러냈다. 1970년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로 정신이상증세에 시달려온 김승효씨가 영화 <자백>에서 “난 무죄야”를 외치며 항변한 대로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은 박정희, 청와대, 중앙정보부 정치”의 욕된 유산이다.

 

내전 중에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 참가한 시리아 축구팀이 보여준 ‘늪 축구’에 비견할 만한 엉망진창의 ‘늪 정치’가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노골적인 버티기와 시간 끌기 작전 속에 상대방의 실책에 편승한 요행수 한 방으로 국면이 전환되면 더 좋다는 식의 치졸한 속내가 엿보인다. 비선의 존재와 국정 유린을 눈감아온 불의하고 기만적인 고위 공직자, 친박 집단 등 ‘부역자’들은 일벌백계해야 할 법적·역사적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1944년 8월 말 파리가 해방된 이후 비시(Vichy)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에게 줄줄이 중형을 내리는 등 대독 협력자 10만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프랑스의 과거사 정리 사례를 상기한다면 과격한 발상일까. 그 엄격하고 단호한 성격에 공감하는 이들의 정서를 이해하고도 남는다.

 

바야흐로 역사의 신은 한국인을 중요한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이 참여자와 책임자로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의 방향이 어떠해야 할지 고민하고 더 강력하게 의사를 표출해야 할 상황이다. 후진적이기 짝이 없는 구태로 결코 후퇴하지 못하도록 임계점을 넘어야 한다. 각자의 상상력을 익숙한 틀, 이른바 합법의 틀에 가둘 필요는 없다. 구체제를 무너뜨린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나 독재체제에 저항한 20세기의 멕시코·쿠바 혁명은 모두 제한과 합법의 틀을 뛰어넘었기에 획기적인 역사를 만들어냈다.

 

2016년 11월 한국의 상황은 아직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항쟁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대규모 촛불 집회에서 국민의 성숙한 의식이 돋보이고 평화적인 시위가 정착되었다는 데 안도할 수만 없다. 이 순간 우리에겐 정말 시민혁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체제의 타도만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혁명이란 제대로 된 통합적 국가를 만들고 정비해가는 험난하고 장기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향을 향해 발길을 옮겨야 한다. 이번 국정 유린 사태가 한국의 지배 집단이 활개 치던 모든 영역을 철저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요란한 경고음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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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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