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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가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은 해당 구청의 철거와 압수, 시민들의 반발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에 놓였다. 소녀상을 그 자리에 설치하는 것이 도로법 시행령 위반임에도,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소녀상 설치를 막지 못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로점용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설치물인 소녀상을, 그것도 일본영사관 출입문에서 불과 30m 떨어진 담장 앞에 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부산 동구청이 소녀상을 강제 철거하자 전 국민이 들고일어났다. 한국 국민들의 법질서 의식이 약해서가 아니다.

 

국제 관행을 무시할 만큼 예의가 없기 때문도 아니다. 2015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정부 간 합의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굴욕적이고 일방적인 위안부 합의가 없었다면 시민단체가 일본영사관과 지근거리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산 동구청은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소녀상 설치를 허용했다. 관청이 불법 설치물을 허용하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소녀상을 공공조형물로 등록하도록 하는 고육책도 추진 중이다. 이처럼 소녀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정작 위안부 합의의 주체인 정부는 힘도 권한도 없는 일개 구청을 총알받이로 내세워놓고 비겁하게 그 뒤로 숨어버렸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옆에 꽃다발과 화분이 놓여 있다. 이준헌 기자

 

정부는 소녀상을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하는 것에 반대한다. 한·일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된다”고 말할 용기는 없다. 외교부는 지난달 30일 이 문제에 대해 “외교공관 보호에 관련된 국제 예양(禮讓) 및 관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절한 장소에 대해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정부가 말하는 ‘국제 예양 및 관행’이란 ‘영사관계에 관한 빈 협약’을 의미한다. 이 협약 22조 2항에는 “접수국(한국)은 파견국(일본) 공관의 안녕 교란, 품위 손상 방지를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갖는다”고 돼 있다. 실제로 일본 측은 이 협약을 근거로 한국에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소녀상이 일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인지, 위해를 유발할 수 있는 시설인지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또 협약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공관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에 소녀상을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없다. 일각에서는 외국공관 100m 이내에서 시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원용해 100m를 합리적인 거리로 보기도 하나 정해진 것은 아니다. 결국 협약 위반 여부는 적용하기 나름이고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정부가 국제 관행을 내세워 사실상 소녀상 설치에 반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부산 일본영사관 앞의 소녀상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 비엔나 협약 위반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일본의 소녀상 이전 요구에 대해 “민간단체의 일에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만 봐도 비엔나 협약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정부는 비엔나 협약을 걸고 넘어질 생각이 없으면서도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다른 데로 옮겨달라’고 요구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최선의 결과’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의 적나라한 실상은 일본과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정부의 곤궁한 모습이다. 정부가 소녀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일본에 추가 협상을 제의하는 것이다.

 

기존의 위안부 합의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 부분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법적 책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한국이 “일본이 지급한 10억엔은 배상금”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반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합의를 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일본 총리의 사과 서한을 피해자들에게 전달하는 추가 조치를 더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갖출 수 있다.

 

정부는 추가 협상을 일본이 거부할 경우 ‘국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존의 합의에는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결의를 가져야 한다. 추가 협상 제의나 기존 합의 무효 선언이 외교적 부담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대일외교에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업보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적 자존심과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차기 정부가 감내할 수밖에 없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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