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형식(벨기에 리에쥬대학 사회적경제센터 박사과정 연구원, hseom73@hanmail.net)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의 논리가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논리는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배자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통용됩니다. 그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도래하면, 이전 세대에 진리로 믿어졌던 많은 것들이 지배세력의 기망이었음이 드러나곤 하죠.

‘시장’이라는 우상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하 시장교도라 부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분들이 시장의 논리를 이야기할 때는 절대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경외감을 가지고 있기에 교도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이 다스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한국 유명 마트체인의 젊은 경영주가 트위터를 통해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00914173103§ion=02).

그 양반이 ‘실질적 소비’와 ‘이념적 소비’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네요.
한국에서 ‘실질’과 ‘이념’이라는 표현을 쓸 때의 전제에는 최소투자로 최대효용을 추구하는 ‘실질적 소비’가 진짜이고, ‘이념적 소비’라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라는 뉘앙스가 들어있죠. 시장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태도가 이런 것이죠.
“니네가 그래봐야, 인간들은 다 자기 욕심을 추구하면서 살게 돼있어… 인간은 그런 존재거든… 다른 식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헛된 망상가들이 불어넣은 이념에 혹해서 그런거야… 별거 없어…”

저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생존본능에 충실한 동물(식물도 그렇다죠…)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스스로의 행동을 성찰할 수 있고, 이성을 통해 본능을 관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성적인 인간들이 수행하는 소비를 비롯한 경제활동 역시 성찰적일 수 있고, 다양한 가치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싼 것을 찾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생태적 결과를 고려해서 조금 부담되도 유기농 식품을 선택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노동탄압을 하는 기업의 물건은 구매를 거부할 수 있죠…
멀리 보지 않아도, 시장교도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명품들을 구입함으로서 경제적 효용보다는 스스로의 계급적 특권을 과시하려는 소비를 하고 있죠. 생각없이 이런 과시소비를 따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안경제는 경제의 개념에 대한 시장교의 도그마를 넘어서서, 다양한 가치와 원칙에 기반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저는 이들의 가치와 실천이 점점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장교도들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독재체제인 한국과 달리, 다른 경제방식이 일정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소위 주류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유럽에서의 경험들은 눈여겨볼 지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경제라고 불리는 영역의 실천들은 ‘이념적 소비’에서 시작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특히 제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의 조직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국가와 시장에 의해 해결되지 않자 민중들이 스스로 나서서 해결하려 했던 ‘전통적 사회적 경제’와는 달리, 새로운 가치에 기반하여 시작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연대금융이라고 불리는 조직들에는 70-80년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행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자신들의 예금이 투자되는 것을 반대한 ‘이념적’ 예금주들이 자신들의 예금을 빼내어 의미있는 곳에 투자하고자 시작된 조직들이 있습니다. 최근 프랑스에서 확산되고 있는 AMAP이라는 운동은 한 농민에게 적절한 보상이 되는 금액을 계산해서 20-30명의 인근 도시지역의 ‘이념적’ 주민들이 나누어 회비로 납부하고, 농민은 이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공급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로컬푸드라는 이름의 운동이 발전하고 있지요.
제3세계 주민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적절한 비용을 (‘적절한’에 대한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보상하고, 윤리적이고 환경적인 규범을 거래의 기준에 포함시킨 ‘이념적인’ 공정무역은 이미 유럽에서 주류유통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습니다.

젊은 경영자가 이런 이야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님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한다. 님이 걱정하는 만큼 재래시장은 님을 걱정할까요?”

아마도 이 분은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했듯이, 경제활동의 주체들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이것이 경제전반을 돌아가게 한다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셨던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분의 이야기는 대안경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이념적인 소비를 통해 연결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를 염려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대안경제에서의 경제활동은 신뢰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의 역할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대안경제의 활동을 통해 사회적 자본이 증가한다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협동조합 밀집지역인 스페인 북부나 이탈리아 북부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안경제가 증가시킨 사회적 자본은 그 지역 경제 일반을 활성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재래시장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과 지원이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고, 그래서 재래시장도 자신을 염려해주는 소비자들을 생각하는 새로운 관계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그분들의 싸움도 승리할 수 있겠죠)

그 젊은 경영자는 또 “(사람들의 주장이) 마트의 진화를 부정하는 듯 들린다”, “우리도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맞습니다. 저 또한 시장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서 행동하는 기업들이 경쟁에 직면하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분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기업들이 적응해야 하는 환경은 대부분 자연환경이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이고, 결국 사람들이 정치를 통해 개입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일반적인 기업들에게까지 대안경제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별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안경제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환경과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기업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좀더 인간과 자연을 고려하는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 식구가 이용하는 벨기에 유통체인인 Colruyt의 소식지를 받아보는데, 이 기업이 NGO와 함께 아프리카 베냉이라는 나라의 농민들로 하여금 양질의 쌀을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그렇게 생산된 쌀을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내용을 홍보하더군요.
Colruyt는 사회적 기업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극대화를 추구하는 일반기업이지만, 현지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과 노동자들의 만족도, 다양한 사회적 실천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기업입니다.

이 기업의 CEO가 천사와 같은 품성을 갖추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옛날에 운동권 물을 좀 먹어서?

제 생각에는 변화한 소비자들의 의식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앞서서 적응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안경제는 비록 그 양적인 규모가 주류경제를 압도하지는 못하지만, 소비자들의 가치와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서 경제활동에 관련된 새로운 환경을 이끌어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젊은 경영자는 ‘실질적’인 관점에서 ‘이념적’인 태도를 비판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의 주장 역시 ‘이념적’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의 이념이 지배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진리’인 것처럼 취급받을 뿐인 것입니다.
저는 맑스 선생처럼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이고 사회주의는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양한 가치와 논리가 서로 보완되는 다원적인 경제를 통해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경제 본연의 기능이 생태적인 한계를 고려하면서 지속가능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시장교도들의 독재체제를 민주화시키는 ‘이념적’인 생산과 소비를 조직하는 운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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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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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형식 (봄내, 벨기에 리에쥬대학 사회적경제센터 박사과정 연구원, hseom73@hanmail.net)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유럽의 사회적 기업은 어떤가요?”

이 질문은 두 가지 지점에서 저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유럽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럽, 적어도 유럽연합은 역사와 문화, 언어를 달리하는 27개국이 모여있는 ‘다양성’의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보다 본질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회적 기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요즈음 사회적 기업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라, 사람마다, 조직마다 각각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놓고 있습니다만, 제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사회적 기업은 역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이 있다가 최근에 와서 발견되었다거나, 무언가 사회 적기업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고 전제하는 접근법, 다시 말해 개념/이데올로기 자체가 실체인 것처럼 오해하는 ‘물신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이라 불리던, (제 표현을 사용하자면) 새로운 사회적 경제라 불리던 간에, 무언가 새로운 개념과 이름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현상’이 역사적으로 존재했고, 현재도 발전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공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그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일단 저는 이 현상을 ‘새로운 사회적 경제’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흔히 듣고 있는 사회적 기업도 이 현상의 일부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주류화되고 있는 공정무역이나 로컬푸드, 아직 실험적이지만 지역화폐나 지역수준의 새로운 거버넌스 등도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상에 포함됩니다.

새로운 사회적 경제가 뭐냐, 어떤 원리에 기반해서 작동하느냐,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자본주의와 다르냐 등등의 이야기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은 아닙니다.
저는 이 연재를 통해, 제가 유럽에 머무르면서 모은 자료와 만났던 사람, 그리고 방문했던 조직들을 정리해보고, 이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를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현상’을 이야기할 때는, 무엇이 무엇에 비해 새로운가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사회적 경제의 이야기는 흔히 19세기 초반의 유럽에서 등장한 ‘전통적 사회적 경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전통적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공상주의자’라고 낙인 찍었던 (왜 공상적인지 우리가 판단할 여유도 없이!!) 푸르동, 푸리에, 생시몽, 오웬 그리고 마르크스에게 덜 찍혔는지, 아니면 마르크스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비중도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공상주의자’에서 열외가 된 뷔셰, 르 쁠레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협동조합 공화국’에 대한 꿈과 20세기 자본주의의 발전과 복지국가의 형성에 따라 규모가 커지고, 덩달아 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간 협동조합, 상호공제조합, 민간단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따라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구한 역사이야기를 먼저 시작하려면, 별로 재미도 없고, 오늘의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지쳐버릴 것 같군요. 전통적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좀 마음을 잡고, 준비를 잘 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제가 살고 있는 벨기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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