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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주 정도에 걸쳐 우리는 미국을 대한민국의 한가운데에 놓고 상당한 충격과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2월 말에 있었던 미 국무부 차관의 연설 내용을 놓고 상당한 배신감을 느낀 사람도 있었고, 그 연설의 배신감이 발화 물질이 되어 한 과격한 사람이 주한 미국대사에게 칼질마저 하는 충격적인 일도 있었다. 또한 미국대사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고 무리로 부채춤을 추고, 발레도 하고, 개고기를 갖다 드리겠다는 사람도 나와 또 한번 정신적 혼란이 밀려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대사를 향하여 석고대죄의 단식을 하는 유명인이 있어서 우리가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정신적 착각을 주기도 하였다.

사실 이 모든 일은 한국에 미국이 너무나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미 국무부 차관의 연설에 그렇게 흥분한 것은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미국이 한국이 아닌 일본의 편을 드는 것 같아서였고, 그러한 미국에 열 받아 미국대사에게 칼부림을 한 사람도 그 중요한 미국이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이렇게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나라인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 미국이 단지 세계 최강대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시켜준 국가이고, 한국전쟁에서 공산화를 막아준 은인이고, 경제개발에 큰 힘을 보태준 은혜의 나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국가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 역시 미국은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민족의 원수이고, 군사권위주의를 인정하고 이들의 인권유린을 묵과한 악의 세력이며, 북한을 이용해 무기를 팔아먹고, 전쟁에 목마른 전쟁광이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국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국가이면 국가일수록 우리는 미국을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체험하고, 더 깊게 연구하고, 더 넓게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은 우리가 상상 속으로 만들어낸 미국이고,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미국만을 보고, 또 그 이상으로 미국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적 줄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미국을 우리와 상대하는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생활세계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권위를 가진 제국, 혹은 한국이라는 주변부에 조응하는 중심으로서 미국을 보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 배은망덕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신하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에 표하는 생각이고,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식민지로 만든 제국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겠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이고, 미국은 한국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이익을 챙긴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가 10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브리핑룸에서 퇴원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하나의 거대 선도 아니고 거대 악도 아니다. 매우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익과 다양한 세력과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는 국가이고, 그래서 다원주의 국가이다. 정권도 바뀌고 시대의 조류도 바뀌고 다른 이익과 세력이 조정 과정을 거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국가가 흘러가기도 한다. 어떤 때는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는 배가 되기도 한다. 이번 미 국무차관의 연설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지배하는 많은 사상적 조류 중 민주당을 대변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론을 반영한 연설인데 그걸 모르고 현실주의 이론으로 해석하여 미국이 한국을 무시하고 일본 편을 든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움직이는 사상적 조류가 현실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한 오류인 것이다. 자유주의 국제정치론을 알고 들으면 그 연설이 결코 일본의 편에서 한국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 국제정치론을 알고 들으면 미국이 한·미·일을 하나로 묶어서 중국에 대항하고, 또 이 지역에서 갈등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미국의 다양성과 미국의 복잡함을 알면 음모론에 빠져서 미국대사를 공격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항상 현실주의만이 지배하지 않는다. 부시 정부도 현실주의가 아니었고, 지금의 정부도 현실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현실주의 정부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한 정부 내에서 외교의 최종적 결과도 처음과 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정부 안에서도 각기 다른 세력이 경쟁하고 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가 그리는 하나의 미국만을 보면서 미국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이 지적해주어야만 알아듣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욱 우울하다.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싱크탱크 미래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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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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