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지난 1일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지만 주요 외교·안보 사안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에 따른 파문이 외교·안보 분야까지 확대되면서 한국의 대외정책 기조에 대한 불신이 커질 것을 의식한 발언이다. 외교부는 또 윤병세 장관 명의로 ‘우리의 외교·안보 태세와 경제상황에 대해 국제사회에 불필요한 우려가 확산되지 않도록 정부 주요 정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적극 설명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재외공관에 발송했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외교부의 다짐은 역설적으로 지금 흔들리고 있거나,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정 기능이 마비되고 정치가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국내 정치와 표리의 관계인 외교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그동안 외국과 현안을 협의할 때 정부로부터 받았던 훈령은 도대체 누구의 훈령이었는지 혼란스럽다”는 외교부 관계자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순실 사태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어났던, 상식과 잘 부합하지 않는 모든 일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골격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가 정권 출범도 하기 전에 대통령직인수위원을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인사’가 줄을 이었다. 외국 사절 접견, 정상회담, 각종 대외 연설에서 대통령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례적 언급이 계속됐지만 누가 이 같은 발언요령을 청와대에 제공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턱없이 강경한 대일 자세를 고수하다가 하루아침에 대일 유화책으로 선회하더니, 결국 국민 정서를 완전히 배반하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가져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우다가 뜬금없이 ‘통일 대박’을 외치고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통일”이라는 말로 모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중국 전승절 기념일에 톈안먼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참관하는 깜짝 이벤트를 벌이고 곧이어 미국 펜타곤을 방문해 공고한 한·미동맹을 과시하는 오락가락 외교를 선보였다.

 

지난 3년8개월 동안 지인들로부터 ‘지금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나 자신도 이게 가장 궁금했던 터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로 확인해봤지만 지금까지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사안에 최씨가 개입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지금 최씨는 그동안 명쾌히 설명되지 않은 모든 의문의 배후인 것처럼 인식된다.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국방부 무기 도입 등에도 최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청와대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평소 행실이 나빴던 자가 의심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가장 큰 국가적 피해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발언은 존중을 받기 힘든 상태가 됐다. 기독교와 무속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주술적 종교가 최고 통치자의 눈을 가리고 정치권의 어두운 세력과 결탁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닥치는 대로 욕망을 채운 전근대적 사건이 벌어지는 ‘신정체제’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을 나라는 없다. 한국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인지도 확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외교 상대국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한국과의 외교를 의심할 것이고 앞으로 벌어질 외교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논의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은 이 협정을 연내에 마무리짓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의 결정을 반기면서도 “진짜 할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나타낸다.

 

지금 한국의 외교적 환경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1인 지배체제를 선언하면서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고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했다. 북한은 핵능력을 비약적으로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다음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1년을 함께하게 된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북한 문제를 포함한 아시아정책의 틀을 만들어 나갈 내년 1년은 동북아시아에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시기다. 한국에도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다. 한국은 이 결정적 순간을 ‘식물정부’와 함께 맞아야 한다. 운명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