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의 ‘워싱턴 발언’은 새삼스럽지 않다. 발언 내용은 상식적이고 처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곧 국가 안보가 무너질 것처럼 과도한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야당과 보수층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북한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 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교환해 북핵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문 교수의 발언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의 심각성은 북한이 얼마나 진전된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지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핵·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것이 진짜 위기이며 안보 위협이다.

 

핵·미사일 제거는 나중 문제고, 일단 더 이상 실험을 못하게 함으로써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역주행하는 열차를 제 방향으로 되돌리려면 우선 열차를 멈춰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핵·미사일 활동 동결’과 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제만 확보될 수 있다면 군사훈련 규모를 축소하는 것보다 더 큰 ‘상응조치’를 제공하더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핵화든 평화체제든 시간이 걸리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문 교수 발언은 그가 평소 강연·언론기고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4월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이 말을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의 고위 관계자 입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문 교수 발언은 이처럼 한·미 양측에서 수차례 제시됐던 내용을 한번 더 반복한 것뿐이며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보수층의 느닷없는 비난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전형적인 정치공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안보를 위협하는 친북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이 이에 분노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공갈을 퍼뜨리는 것은 이성을 잃은 행태다.

 

보수인사와 야당, 보수언론까지 합세한 대정부 공세는 뿌리 깊은 친미 사대주의와 색깔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의 대미관·안보관을 ‘약한 고리’로 본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를 반미·친북으로 몰아세워 한·미 갈등을 부각시키고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문 교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다. 하지만 청와대는 보수층의 공격에 정면 대응을 피한 채 이번 사태가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문 교수 발언은 개인적 견해’라며 거리를 두고 문 교수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는 해명까지 곁들였다. 지난 세월 문 대통령에게 씌워졌던 지긋지긋한 ‘종북·좌파·반미 프레임’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한 권력이 야당과 미국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와대는 당초 염두에 둔 인물을 국가안보실장에 기용하지 못했다. 그 자리가 돌고돌아 결국 외교안보 경험이 많지 않은 정의용 현 실장에게 간 것도 미국을 의식한 결과다. 하지만 ‘사드 보고 누락’ 사태와 이번 문 교수 발언 파동에서 청와대 안보실이 보여준 미숙한 대응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해 외교부담을 자초한 것도 대미외교 공백을 서둘러 벌충하려는 조급함에서 빚어진 실책이다.

 

문 교수를 포함해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정하고 공약을 만든 인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났다. 외교부 장관도 이 분야에 경험이 없는 인물이다. 정부가 ‘개문발차’한 탓에 외교부와 주미대사관 등 관련 부처·기관에는 여전히 전 정부 관료들이 고위직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정체성을 찾으려면 전열 재정비가 시급하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치세력과 손잡지 않은 촛불혁명의 산물이며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가진 강력한 정부다. 야당이든 미국이든 정공법으로 상대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한·미동맹은 국가 간 동맹이지 정권 동맹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졌다고 해서 흔들릴 체제가 아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정책 우선순위와 안보 환경이 다른 개별 국가 간 관계에서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 ‘빛 한줄기 샐 틈 없는’ 동맹관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건강한 동맹관계는 한 치의 이견도 없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견이 생겼을 때 신속히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한·미 간 견해는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국정과 대외정책을 펴 나가기를 바란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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