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전방위적 통상 압박을 가해오면서도 매우 당당하다. 마치 맡긴 물건 내놓으라는 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제품에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내놓은 데 이어 지난 14일 “공정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16일에는 한국산 수입 철강 등에 대한 고강도 수입규제안을 발표했다.

 

한국은 트럼프의 이 같은 거침없는 압력 행사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는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기본구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북핵과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과 협력이 절실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제대로 저항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정부가 “안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안보 현안과 통상 문제 분리 접근’을 내세우며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당당하게 대응하겠다”고 공언한 것에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의원들을 만나 무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매우 나쁜 무역협정으로 미국에 손실만 낳았다며 재협상을 통해 '공정한 협정'으로 바꾸거나 폐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실 안보와 통상을 분리해 대응한다는 것은 그동안 난감한 외교적 사안을 우회하고 봉합할 명분이 필요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투트랙 접근법’을 또 한번 적용한 정치적 수사일 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특히 미국과의 경제·통상 문제를 논할 때 외교안보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당겨 추진한 것도 순수하게 경제적 효과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다른 나라보다 후순위에 있던 미국을 앞으로 끌어당겨 FTA를 추진한 것은 한·미관계와 안보협력, 경제동맹의 효과 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북한 문제 등으로 미국과 소원해진 틈을 한·미 FTA로 메우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아예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논리를 미국에 들이대면서 한·미 FTA 의회비준 절차에 소극적이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설득했다.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4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군사·경제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한·미 FTA 비준은 단순히 양국 경제 협력의 차원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안보와 통상의 분리 접근’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안보는 안보 논리로, 통상은 통상 논리로 대응한다는 취지”라며 “이 같은 투트랙 전략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과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보와 통상을 분리한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자국에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동맹국과의 관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의 인식을 이미 대선후보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취임 초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다가 중국이 북핵 문제에 미국과 공조할 뜻을 비치자 “중국이 북핵 문제를 우리와 협력하는데 왜 내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한·미 간 사안에서도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통상 압박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일이다. 트럼프처럼 ‘약탈적 거래’에 능한 장사꾼이 한·미관계의 우월적 지위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한국은 지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앞에 ‘경제동맹’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하고 가소로운 개념인지를 실감하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통상과 경제 분야에만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뤄나갈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지금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북·미대화가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막상 북·미대화가 현실화되면 트럼프가 북한과 어떤 합의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한·미관계를 호혜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미국 선의에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꿔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 시급히 착수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현 의지이며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