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락가락하고 단풍이 지기 시작해 스산한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를 방문하였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인파 속의 두 도시는 1648년 베스트팔렌(웨스트팔리아) 조약을 맺은 곳으로 한국의 국제정치학도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성지(聖地)이다. 독일 내 가톨릭과 개신교 간 종교분쟁이 급기야 온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30년 동안 지속된 전쟁은 이 조약으로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신성로마제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봉건질서로부터 복수의 국가들이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경합하는 근대 국제체제,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어느 일방의 승리가 아닌 교전국 간 협상의 산물로서 당사자들에게 그 기억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이 조약은 독일인들에게 제국의 이념을 빼앗아가버린 민족적 굴욕으로, 프랑스인들에게는 알자스 지역에 요충지를 확보하여 독일에 승리한 기념비로 기억된다. 네덜란드는 오랜 투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베스트팔렌의 평화


한국인에게 베스트팔렌 조약은 세계사 교과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일개 사건이지만 근대 한국은 베스트팔렌 체제에 대한 적응 실패로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스트팔렌은 근대 국제정치학의 출발인 동시에 고난의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강화조약의 핵심 개념은 베스트팔렌 주권(sovereignty)이다. 주권국가는 대내적 최고성과 대외적 독립성을 가지며 이에 따라 내정불간섭 권리와 국가 간 평등성을 보장받기 때문에 국제체제는 무정부상태로 간주된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개별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무력을 확보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산업생산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제는 지구상 모든 국가들의 무력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국가 간 형식적 평등성과 실질적 불평등성 간의 간극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베스트팔렌 이후 유럽에서 강대국은 최대한의 주권을 누리고 약소국은 여러 주권적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하였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정치체제 구성에 개입하여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토주권을 훼손하여 제국을 건설하려 하였고, 폴란드를 주변 3국이 분할하는 사례도 존재하였다. 강대국 간 주권적 관계가 성립하였으나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는 위계적 질서가 횡행하였던 것이다. 비유럽국가의 식민지화는 비주권국가의 차별적 열등화의 표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베스트팔렌 주권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차별적으로 부여되는 서구 국제정치 개념이라 할 것이다.

베스트팔렌의 두 도시에서 보는 동아시아의 시공간은 사실상 위계구조로 점철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예(禮)를 명분으로 하여 천하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나누는 화이(華夷)개념에 근거한 중국 중심의 위계적 국제질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19세기 유럽 근대질서로의 변환을 급속하고 압축적으로 겪은 탓에 충분한 조정의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일본을 제외하고 한국 등 대다수 국가들은 주권 불인정 상태에서 제국주의 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1945년 이후 주권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새 국가 건설의 꿈을 품었으나 이는 착시현상이었고 냉전체제의 도래와 함께 미국과 소련 중심의 위계질서에 양분, 편입되었다. 이제 탈냉전과 미국 패권의 약화 속에서 동아시아는 베스트팔렌의 신화를 뒤로하고 새로운 질서를 건축해야 할 시점이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면서 신지역질서를 건축하는 외교 지침으로 ‘친하게, 성심껏, 호혜 원칙에 따라, 넓게 포용한다’는 키워드로 “주변국이 중국의 발전 혜택을 넓게 받도록 하겠다”는 “신형주변국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한반도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 마련에 국가지(知)를 모아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대선 후유증과 세월호의 소모전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 베스트팔렌에서 바라보는 한반도는 중국판 위계질서의 구름에 서서히 가려지는 듯하다.


손열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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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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