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의전은 유별나고 까다롭다. 그 때문에 여왕이 나들이할 때마다 의전이 화제가 된다. 1999년 4월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해외 나들이에서 처음 신발을 벗었다고 해서 외신들이 요란을 떨었다. 지난 6월 여왕이 독일을 국빈방문할 때도 주독 영국대사관이 내놓은 4장의 의전 항목이 화제가 됐다. 여왕과의 셀카 촬영은 금지되며, 말을 건넬 때는 영어로 하라는 등이 내용이었다. 지난해 프랑스 정부는 여왕이 모자를 쓴 채 탈 수 있는 의전차량을 구하기 위해 5년 전 단종된 차를 구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이런 의전은 영국의 정치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여왕을 만날 때는 무릎을 굽혀 인사한다. ‘2차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과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도 무릎을 꿇었다.

영국 노동당의 새 당수 제러미 코빈이 여왕에 대한 충성맹세 의식을 거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왕의 정치자문위원회인 추밀원 위원이 되면 여왕에게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춰야 하는데 코빈이 공화주의자로서의 신조를 지키겠다며 의식에 불참한 것이다. 더구나 선약을 이유로 불참한 그는 스코틀랜드 고원지방에서 부인과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노출됐다. 그의 의전 파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15일 2차대전 기념식 때도 그는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를 부르지 않아 영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영국 국가를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가 2차 세계대전 승리기념식 국가 제창에서 침묵하고 있다._AP연합뉴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여왕에 맞서는 것은 현실 정치인에게 불리한 선택이다. 벌써 왕실과 대중이 코빈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가식을 싫어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해온 그의 소신과 일관성만은 누구도 의심하지 못한다. 하원의원 32년 동안 그는 자전거를 타고 국회에 출퇴근했다. 당수로 선출된 뒤 지급된 관용 차량도 사용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경호상 이유 때문에 마지못해 타고 있다.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탄압도 가차없이 비판해온 그의 정치 행보를 감안하면 그의 의전 거부는 무례로 느껴지지 않는다. 전통과 고정관념을 깨는 영국 좌파 신사의 다음 표적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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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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