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21 경향신문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가장 궁극적인 철학적 혹은 종교적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어쩌면 모든 문제들이 여기로 귀착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나다”라는 대답이 가장 간단명료한 대답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대답하는 사람이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대답을 듣는 사람도 자기를 “나”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무나 쓸 수 있는 말이고 아무나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정체성을 묻는 물음이다. 나의 정체성을 알려면 그 “나” 속에 채워진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드러낸 나와, 아직은 내가 드러내지 않은 나 모두를 포함한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을 중심으로 나의 정체성을 묻는 실마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유명한 <고백록>을 통해서 했던 작업이다.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항상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준다. 과거는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기억은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기억이나 세상에 남아있는 기록은 모두 현재에 영향을 주는 기억의 형식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만 나인 것은 아니다. 내가 장차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 또한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것은 기대나 계획, 혹은 희망의 형식으로 지금의 나의 삶을 쉴 새 없이 이끌고 간다. 내가 서 있는 시간상의 위치는 과거와 미래 사이다.

행복은 움직이는 과정속에 존재

시간을 선으로 비유해 보면 지금의 나는 한갓 점에 불과하다. 시간의 연속선 속에서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길이도 주어져 있지 않다. 다만 지금이라는 순간, 단지 찰나의 순간만이 나라는 존재의 자리가 된다. 하지만 그 자리는 쉼 없이 움직이며 달라지고 변화하고 있다.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처럼 삶은 항상 움직이는 과정 자체이다.



개인의 경우이건, 사회의 경우이건 행복이란 그 과정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제대로 방향이 잡혀 있을 때를 일컫는 말이다. 과거의 토대 위에 미래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고, 현실이 그 사이에서 삐걱거릴 때 불행하다. 하지만 힘든 순간이라도 애쓰고 노력하는 가운데 미래의 초점이 점점 선명해진다면 그것은 행복이 된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자기의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한다. 잠시 노력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면 그때야 ‘아, 나는 행복하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행복은 과정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온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20대와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화성과 춘천 두 곳에서 같은 날 집단자살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죽은 7명 모두가 20대와 30대였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면제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20대와 30대의 자살률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입증한다. 이 또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의 노력과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른 ‘어제와 내일 사이에는’(Between Yesterday and Tomorrow)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 노랫말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는 하루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과거 때문에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회한도 있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이 나의 존재 자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는 또한 우리가 용기 내 세울 계획이 있고, 우리가 감히 꾸려 하는 꿈이 있으며, 우리가 내뱉고 싶어하는 말도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 것, 마땅히 있어야 할 그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있게 해야 할 그 모든 것도 있다. 바로 오늘 속에, 어제와 내일 사이에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존재 자체다. 이 순간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내게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순간에 할 일이 참 많다. 이 안에 나와 우리 사회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다 들어 있으니까.
Posted by KHross